#1. 헤어진 그날 밤. 그리고 그날 밤?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낯설었다. 구름 위에 누운 듯 폭신폭신한 침대 역시 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눈을 떠서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꽃향기가 자꾸만 그녀를 이불 속에서 헤어나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만 같았다. 다현은 더욱더 비비적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단단하고 매끈한 팔뚝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팔뚝!?’

순간 다현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최선을 다해 눈꺼풀을 끝까지 밀어붙였으나 팅팅 부은 눈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너무 푹 자서 그런지 그녀의 시야는 초점을 잡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지 컴컴한 어둠이 방 안에 맴돌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컴컴한 어둠 속으로 웬 남자의 오뚝한 콧날과 도드라진 목적이 드러나 보였다. 남자는 한쪽 팔뚝을 그녀에게 내어준 채 맨몸으로 곤히 잠들어있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보려 했지만, 아직 동이 터 오르기 전인 데다 암막 커튼까지 꼭꼭 쳐진 상태라 쉽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나 도대체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지…?’

심박수가 슬그머니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던 그녀가 흠칫 놀라며 머뭇거렸다.

‘오…, 옷이 어디 갔지?’

맨살을 스치는 구스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감촉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르는 남자의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사실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속옷만 걸치고 있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다현은 침착하게 몸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그녀의 베개 바로 옆엔 핸드폰이 놓여있었다. 남자가 깨지 않도록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침대에서 내려오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그녀의 원피스가 보였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옷을 주워입은 후 가지런히 놓여있던 가방을 집어 들고 살금살금 방에서 나왔다.

‘와…, 여기 뭐야? 무슨 집이 이렇게 커?’

컴컴한 어둠 속을 핸드폰의 라이트로 비춰보던 다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방문을 열자 양옆으로 이어진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복도를 따라 몇 개의 문이 보였고 오른쪽으론 주방과 거실로 향하는 복도가 보였다. 까치발을 들고 복도를 지나자 통유리 너머로 어스름한 어둠이 스며든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그 와중에 곱게도 벗어놨구나.’

웬만한 드레스룸보다도 커 보이는 현관에는 정갈하게 정리된 그녀의 구두가 보였다. 다현은 얼른 구두를 신고 문을 연 다음 문밖으로 내달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제 분명 혜민이랑 술을 마시다가… 아, 머리야! 나도 모르겠다. 일단 집에 가고 보자.’

낯선 동네였지만 한 방향으로 일단 계속 내달리다 보니 큰 도로가 나타났다. 마침 앞을 지나는 택시가 보이기에 냉큼 잡아 세운 후 집으로 향했다.

다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미쳤어, 미쳤어!”

어제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보려 해도 자꾸만 단단하고 매끄럽던 남자의 팔뚝만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이다현!”

다현은 부스스할 대로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마구 붙잡아 흔들다 벌떡 일어나 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혜민! 나 어제 어떻게 된 거야?”

혜민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날 저와 함께 술을 마시다 낯선 남자와 사라져버린 다현이 걱정되긴 했던 터라 새벽녘에 걸려온 전화에도 바로 일어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 어떻게 된 건진 내가 물어볼 말이고! 너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나 기억이 하나도 안 나…….”

- 뭐? 기억이 안 나?

“어제 클럽에서 나온 후에 너랑 나랑 둘이 술 마시다 3차로 바에 갔던 것까진 기억나….”

- 그다음은 기억 안 나? 아니, 어제 같이 나간 그 남자랑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

“눈 떠보니 어떤…, 남자랑 같이 있긴 했는데 자는 사이에 몰래 도망 나왔어…. 근데 그 남자 누구야?”

-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어제 그 바에서 처음 봤는데! 너 지금쯤 뮤튜브 어딘가에 만취 진상녀라는 제목으로 동영상 떠돌고 있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 원나잇 한번 해보고 싶다고 소리를 얼마나 지르던지 와, 진심 어제부로 너랑 친구 끊을 뻔.

그때였다. 수화기를 타고 건너온 혜민의 말은 다현의 달팽이관을 거쳐 뇌로 직진했다. 그리고 그녀의 뇌 속에 잠들어있던 어젯밤의 기억을 툭 건드려 깨워주었다.

“저기요!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봐요?”

다현은 취한 와중에 제게로 와닿는 시선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앉은 한 남자에게로 다가갔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한 슈트가 마치 제 몸인 듯 잘 어울리던 남자였다.

“아까부터 이쪽에 앉아서 힐끔힐끔 나 쳐다봤잖아요.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요?”

“야! 이다현! 미쳤나 봐!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취해서….”

옆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혜민이 다급하게 다현의 팔을 잡아끌며 사과를 건넸다.

“아닙니다. 귀엽네요. 이다현 씨.”

남자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얼른 데리고 갈게요.”

“쳐다본 것 맞습니다. 관심 있는 것도 맞고.”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실소를 흘려보냈지만, 그 이상이 기억나지 않았다. 정갈해 보이는 턱선과 강직한 입술. 그리고 어떻게 생겼더라….

- 이다현! 내 말 듣고 있어?

불안함과 초조함에 손톱 끝만 물어뜯느라 혜민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혜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

- 그래서, 잤냐고!

“어…? 아….”

잤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상대와 다음을 약속하지 않고 보내는 하룻밤, 원나잇.

그걸 내가 했다…, 어젯밤에….

근데 진짜 했나? 안 했나?

“…기억 안 나.”

일단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뗐다

- 암요. 기억이 안 나야겠죠. 기억이 날 정도로 마시고 어제 그 진상을 떨었을 리가 없죠.

“아, 모르겠다 일단 좀 더 자. 나도 정신 좀 더 차려볼게.”

다현은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침대 위로 툭 떨어뜨렸다.

미쳤구나. 원나잇이라니. 아니, 원나잇을 했다고 쳐. 근데 내 생에 첫 원나잇이 무슨 블라인드 테스도 아니고 이렇게 까맣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수가 있냐고!

그나저나 어제 술을 마셨던 동네가 어디였더라…? 당분간 그 동네에선 술을 안 마셔야 겟…, 아니지. 술을 안 마셔야지…, 술을.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후회와 참회로 가득 찬 헛발질을 하던 때 핸드폰에 메시지가 울렸다.

- 자?

남자친구, 아니 이젠 전 남자친구인 석훈이었다. 이미 연락처에서 이름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이름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3년을 보아왔던 번호였기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김석훈. 3년이란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현을 구속해왔던 남자.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놀아도 안 된다. 짧은 치마도 안된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을 세뇌당하며 지내왔었다.

그리고 어제는 바로 그 지옥에서 해방된 날이었다. 바로 그 망할 자식이 조신과는 담을 쌓은 듯해 보이는 여자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람을 피워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덕분에!

“내가 어딘지 알아서 뭐 하게?”

라고 쓰려다 상종하기조차 싫다는 생각에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내가 지금 너 따위를 신경 쓸 새가 없단 말이다…, 라고 생각하며 침대 위로 털썩 드러눕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메시지를 읽씹했더니 바로 전화를 거네? 하긴 단 한 번도 내가 네 메시지에 답을 안 한 적이 없었지.’

다현은 3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파쇄기에 갈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잘못 누른 거로 생각하는지 바로 또 전화를 걸어왔다.

아, 이참에 아예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릴까?

다현은 아직 숙취도 다 깨지 않아 지끈거리는 이마 위로, 한 손을 얹으며 다른 한 손으로 다시 거절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이 근성 있는 자식이 또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쌍욕이나 진하게 좀 퍼부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질척거려? 끌 떨어지게.”

- …이다현 씨?

“이다현 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 너 말고도 만나는 남자 엄청 많거든? 내가 원나잇으로 갈아치운 남자들 줄 세우면 지구 반 바퀴를 돈단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구질구질하게 연락하지 말고 너는 네 길을 좀 가주겠니?”

그리곤 재빨리 종료 버튼을 눌렀다.

“목소리는 왜 또 깔고 지랄이래. 밥맛 떨어지게.”

다현은 통쾌한 기분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통화기록에 남은 익숙하지 않은 핸드폰 번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 자식 핸드폰 번호 바꿨어? 왜 번호가……”

분명 석훈의 핸드폰 번호는 0819로 끝나는데 지금 내가 통화하고 끊은 번호는 0210이다? 뭐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다현은 통화기록을 하나씩 훑어보다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통화한 사람 김석훈이 아니다! 그럼 누구지? 남자였는데? 분명 내 이름을 불렀는데?

순간 오늘 아침 그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비벼댔던 매끈하고 단단했던 그 남자의 팔뚝이 뇌리를 스쳤다.

“맙소사…….”

다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금 전 미친 소리를 지껄여대며 끊어버린 전화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김석훈뿐 아니라 0210로 끝나는 번호에서 더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

오랜만이었다. 사방에 불빛 하나 없이, 암막 커튼까지 이용해 방안을 컴컴하게 만들어도 깊게 잠들지 못하던 그가 기절한 듯 단잠에 빠져들었던 건. 그래서 제품에서 잠들었던 그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잠에서 깬 후 어렴풋한 향기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그녀의 빈 자리를 허탈하게 바라보던 현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도망이 전문인가.”

문득 어젯밤 다현에게서 연락처를 받아놓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현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집에 잘 간 건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최근 통화목록에 남아있던 그녀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몇 번 울리지 않은 신호음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으로 바뀌었다. 현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짧게 울린 통화연결음이 멈추며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왔다.

- 왜 이렇게 질척거려? 끌 떨어지게.

“…이다현 씨?”

- 이다현 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 너 말고도 만나는 남자 엄청 많거든? 내가 원나잇으로 갈아치운 남자들 줄 세우면 지구 반 바퀴를 돈단다. 그러니까 이제 구질구질하게 연락하지 말고 다른 여자 찾아봐!

그리고 전화는 뚝, 끊겼다. 아마도 제 전화를 전 남자친구의 전화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현준은 멍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다현, 그녀는 여러모로 그를 웃게 하는 여자였다.

***

“김석훈 때문에 3년 동안 술도 마음껏 못 먹다가 오랜만에 달렸더니 일요일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네. 아, 그나저나 내 눈은 왜 이렇게 안 가라앉는 거야….”

다현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늘 그녀의 매력 포인트라 말해주던 도톰한 쌍꺼풀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에 밀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바에서 만났다는, 아니 원나잇을 하겠다고 행패를 부렸다던 남자와의 에피소드보다 다현에겐 3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의 배신이 더욱더 충격적이었으니.

원나잇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였을지에 대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점점 어둠이 깔리고 저녁이 다가올수록 이별의 통증은 더 커졌다. 한번 터진 눈물샘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도 3년이나 만났는데 눈물 한 방울 안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결국 다현은 퉁퉁 부어오른 두 눈 위에 아이스팩을 열심히 대어가며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 이 대리! 눈이 왜 그래?”

옆자리에 앉은 강수아 대리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쓱, 내밀다가 거울 속 퉁퉁 부어오른 두 눈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 어제 라면 먹고 잤거든요.”

다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차마 3년 사귄 남친이 엄청 날라리 같은 여자와 모텔에서 나오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라면을 얼마나 먹고 잔 거야? 아, 새로 오신다던 팀장님 출근하셨겠지?”

“네, 맞아요. 그래서 오늘 새 팀장님 오늘 바로 제작 3팀 회의에도 참석한다고 하셨어요.”

“아주 이번에 최동국 본부장 처리하는 김에 위에 대대적으로 윗 라인, 싹 한번 갈아내서 너무 속 시원하네.”

“그러게요. 으, 최동국 본부장님은 왜 그렇게 여사원들을 건들고 다녀서는….”

“그러게 말이야. 처음 성추행 사건 터졌을 때 그냥 이렇게 정직이랑 감봉으로 끝나는구나, 했는데 여기저기서 미투 신고가 속출하는 바람에 해촉까지 가게 되어서 얼마나 통쾌하던지.”

“음주운전 걸린 게 결정타였죠, 뭐. 이 와중에 또 음주운전이라니….”

다현의 말에 강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찼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광고회사 중 하나인 제이미디어의 영상사업본부에서 일하는 다현은 주로 기업이나 기관을 홍보하거나, 혹은 각종 행사에 쓰일 영상을 제작하는 일을 담당한다. 최근 영상사업본부의 본부장이 사내 성희롱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해임하게 되었다. 이에 제이미디어 영상사업본부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다현이 속한 제작 3팀엔 새로운 팀장이 오기로 한 것이다.

“근데 이번에 오는 팀장님은 좀 어리다며?”

강 대리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유정아 주임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젊기만 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잘생겼대요!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고 인사과에선 이미 한바탕 난리였대요!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는데 영어는 기본이고 일어에 중국어, 프랑스어까지 완벽하다고!”

“아유, 유 주임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다 들어?”

“인사과에 제 친구 있잖아요! 아무튼 새로 오시는 팀장님 외모 하나만 있어도 제이미디어 복지는 다 필요 없다고 제 친구가 말했어요.”

다현은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유 주임을 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 회사 최대 복지혜택 받으러 얼른 가요. 회의 시간에 늦겠어요.”

***

“안녕하십니까. 제이미디어 영상 제작본부의 팀장에 역임하게 된 장현준이라고 합니다.”

다현은 아직도 퉁퉁 부어있는 눈꺼풀 때문인지, 회의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서인지, 멀리 앉은 현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듯했다.

‘눈이 왜 이렇게 침침하지? 앞이 잘 안 보여!’

더군다나 퉁퉁 부은 눈이 자꾸만 무겁게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시야도 조금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현은 현준을 최대한 잘 보기 위해 눈을 마사지한 후 손가락으로 살짝 눈꺼풀을 잡아 끌어올렸다. 그리고 조금 더 넓어진 시야로 선명하게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끽해야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팀장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이어진 두꺼운 목선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닌 운동선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건강미를 내뿜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그의 얼굴은 어느 한군데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서양인 부럽지 않은 높은 콧대는 웬만한 영화배우도 울고 갈 정도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후 강직하게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이 매끈한 턱과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은 영상 제작본부의 전반적인 업무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제작 3팀의 회의는 참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회의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진 현준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회의실 안을 울렸다. 깔끔한 블랙 슈트 위로 드러난 다부진 체격과 선명한 이목구비까지 갖춘 그는 신이 만든 완벽한 조형물 그 자체였다.

“와! 진짜 잘생겼다! 그렇지, 이 대리?”

옆에 앉은 강 대리 역시 다현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다현에게 속삭여주었다.

“그러게요. 저는 순간 CF 제작팀으로 가야 하는 연예인이 길을 잘못 들어서 우리 회의실에 잘못 들어온 건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다현 역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며 강 대리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다시 앞에 앉은 현준에게로 시선을 돌린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현과 시선이 마주친 현준이 뚫어질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또렷하게 초점이 잡힌 다현의 시야에 아주 희미하게 살짝 올라간 그의 입꼬리도 보였다.

‘깜짝이야…. 왜 저렇게 쳐다보지? 근데 저 입꼬리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다현은 후다닥 손을 내려 두 눈을 살살 문지르는 척했다.

“자, 그럼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앞에 놓인 한국 대학교 홍보 동영상 제작 기획안 건입니다.”

한국 대학교 홍보영상의 제작, 연출을 맡은 강 대리의 진행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강 대리의 말에 다현도 다른 직원들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 앞에 놓인 회의자료로 향했다. 다현은 혹시나 자료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려다 다시 현준과 눈이 마주쳤다.

‘헐, 뭐야…? 왜 아직도 쳐다봐?’

아무리 봐도 현준의 시선이 여전히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현은 혹시나 제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을 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마침 다른 직원들은 모두 테이블 위에 놓인 프린트 된 자료를 보느라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뭐지? 나 보는 게 맞는 건가…?’

다현은 얼떨떨한 미소로 답하며 얼른 고개를 숙여 앞에 놓인 자료로 시선을 옮겼다.

“…해서 오늘은 촬영팀이랑 한국 대학교에 방문할 예정입니다. 총장님 인터뷰부터 따고, 간 김에 학교 내부 1차 촬영해서 오겠습니다.”

강 대리의 말에 김 부장은 입술을 쭉, 늘어뜨리며 그럭저럭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로 하고. 아, 누가 장 팀장한테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전 건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 이전 팀장이 제대로 인수인계할 시간도 없이 옮겨가는 바람에.”

김 부장이 말을 마치며 회의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남 과장은 출장, 박 팀장은 외부 미팅, 강 대리랑 유 주임은 외근이고….”

김 부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다현을 향했다. 하필 오늘은 그녀가 속한 영상사업부의 제작 3팀 대부분 인력이 외근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일반 사원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김 부장은 다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