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Prologue

커다란 상자를 품에 한가득 안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짐 좀 빼놓을걸.

이걸 들고 어떻게 버스를 타나 싶어 후우 한숨을 내뱉자 그녀, 영지의 눈앞에 허연 입김이 짙게 피어올랐다.

입김을 보니 손도 괜히 더 시려운 것 같았다.

“영지 님, 진짜 퇴사하는 거야?”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던, 이제는 전 직장동료가 된 건우가 여전히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네, 뭐 그렇게 됐어요.”

“계획은 있어?”

계획이라.

늘 계획적으로 살아왔기에, 사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영지는 떠나려는 사람에게 굳이 진부한 단어를 들먹이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냥 어깨만 들썩여 보였다.

“그래, 그럼 잘 가고. 고생했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괜히 시간만 더 뺏겼다.

제 몸 만한 상자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등은 이제 빨갛게 변할 지경이었다.

“춥다, 추워.”

오랜 시간 일했던 회사를 미련 없이 등진 영지는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을 향해 길을 건넜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버스가 오질 않았다.

엄청난 부피의 짐을 들고 있는 탓에 휴대폰을 만질 수 없다 보니 지루함에 더 이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영지의 시선이 상자 속을 향했다.

뭐가 이렇게 많은 건지.

슬슬 짐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던 터라, 영지는 상자를 내려놓은 후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미련하게도 전 남자 친구가 사줬던 물건들이 참 많이도 나왔다.

왜 그걸 아직 두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쏟아 내자 그녀의 상자도 마음도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기분.

오늘 제가 예정에 없던 퇴사를 한 일도 어찌 보면 기분 때문이었겠다 싶었다.

더러운 기분, 배신감, 한심함 따위의 결이긴 했지만 말이다.

***

“영지 님.”

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지는 한 달음에 그녀의 자리 앞에 섰다.

오늘쯤이면 처리 결과가 나올 거라고 했던지라, 영지도 언제쯤 팀장이 저를 부르려나 싶어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영지 님이 요청한 건, 얘기가 잘되지 않았어.”

“….”

“아무래도 흔히 있는 일은 아니고, 윗선에서도 덮고 모른 척하고 싶은 사안이라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아, 네….”

“마음고생 심했는데, 일이 잘되지 않아 미안하네.”

“어쩔 수 없죠 뭐.”

“그래도, 유선 상으로 발생하는 건에 대한 건 안내 멘트 삽입하는 거 말고도 더 진행시킬 수 있을 거 같아. 심리 치료 지원이라든가, 해당 고객 영구 밴이라든가 하는 방향으로.”

“네에.”

“…속상하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다. 간단한 목례 후 돌아선 영지는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잘근 물었다. 왜 당하고 살아야만 하는가 싶은 억울함에 힘 조절에 실패하자 입안 쪽으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서둘러 사무실을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영지는 중심에 서 있었으니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직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을 향할 거란 걸 알았기에 한 선택이었다.

제가 속한 팀이 사용하는 층이 아닌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을 찾았다. 마음 놓고 울 수야 없겠지만, 그냥 이렇게 하는 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아서였다.

제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편한 시선과 수군거림을 감내해야 했던 한 달이 떠올랐다. 왜 쪽팔림이 피해자인 제 몫이 되어야 하는 건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영지는 이겨내 보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물론 처음엔 그 사람에게 직접 사과 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아무래도 그건 욕심인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제가 당한 일을 공론화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도 이 회사에서 일한 짬밥이 있으니, 제게 힘을 실어줄 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거라 믿은 사람은 저의 팀장이었고, 함께 일한 시간이 오래된 영지의 사수였다.

‘그래, 그래도 팀장님이랑 소라님이 도와주셔서 이만큼이라도 한 거야.’

아직 고인 눈물들이 떨어질 때마다 그것들을 슥슥 닦아내며 영지가 마음을 다시 잡아보려 할 때쯤, 화장실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제 포기하지 않을까?”

“그래도 말도 안 해보고 안 됐다고 말하는 건 좀….”

여러 명이었다.

영지는 저도 몰래 숨을 들이쉬었다.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들이 속삭이듯 작게 얘기하는 탓에 목소리로 누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날더러 상무님한테 가서 전무님 흠집을 다 얘기해 버리란 소리야? 부하직원 하나 지키자고?”

“….”

“소라야, 나 팀장 12년차야. 아무리 직급 없는 회사고 너희들이 날 철밥통으로 보고 있는 건 알지만. 본부장님 이제 기력도 딸리시는데 나도 기회를 좀 노려야지.”

“그래도….”

“내가 팀장 자리 비워줘야 너도 기회가 생길 거고.”

“…네에.”

“영지 님 건은, 묻는 게 좋아. 좀 미안하긴 한데, 흠…. 아 모르겠다. 이따 술이나 사주지 뭐.”

“그걸로 될까요?”

“아니면 뭐라도 해 줘야지. 암튼 상쾌한 공기나 쐬러 가자.”

화장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영지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의 팀장과 사수가 그 자리를 떠난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이게 뭔가 싶은데,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다며 부정하는 게 더 병신 같아서 영지는 그냥 상황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 이래서 회사엔 정 주지 말고, 사람은 믿지 말라는 건가.’

아까 사무실에선, 미안해하던 팀장의 표정과 저를 염려하는 듯한 목소리에 눈물이 차올랐었는데, 지금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 쏟아버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9시 45분. 복귀해서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간이겠지만 그럴 마음이 1도 생기지 않는 영지는 멍하니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흐음….”

어떻게 해야 하나,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언젠가 친구와 갔던 카페 벽에 걸려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Non-doing]

그래. 하긴 뭘 하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4년을 다닌 회사에서 제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더러운 일을 겪고, 저를 도와주는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동료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스스로가 한심해 죽겠는데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영지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없었을 것이다.

한참을 자괴감에 빠져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 보니 벌써 11시다.

‘오전 업무는 날려 버렸네.’

참나, 지금 일 생각 하고 있을 땐가.

갑작스럽게 영지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 회사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분명히 이런 기분 이런 상태로는 오늘뿐만 아니라 며칠 몇 달이 지나도 일 하고 싶지 않을 것이 확실하니까.

“하자, 퇴사.”

두 시간을 넘게 닫혀 있던 화장실 끝 칸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들어갈 때와 다른 영지의 표정은 결연했다.

망설임 없이 자리로 복귀한 그녀는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전자결재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직서 작성인데, 거침이 없었다.

대무자도, 퇴사희망날짜도, 다 영지 마음대로였다.

4년을 일한 곳을 떠나는 순간이 이렇게 갑작스러울지는 몰랐지만, 영지에겐 일말의 후회도 걱정도 없었다.

‘어차피 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케 세라 세라.’

케 세라 세라. 계획대로 살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영지가 가끔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계획에 없던 일을 할 때마다 자기 합리화를 하듯이 주문처럼 외는 말이었다.

될 대로 되라. 난 모르겠다.

순식간에 일을 완료한 뒤 영지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짐을 쌀 상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순간,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팀장과 소라를 마주했다.

“영지 님! 어디 가?”

“저 뭣 좀 필요한 게 있어서요.”

“그래~ 금방 들어오고.”

화장실에서의 저였다면 웃어 보이기 힘들었겠지만, 영지는 웃으며 팀장을 대했다.

어차피 이제 안 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팀장님. 저 전결 하나 올렸는데 확인해주세요.”

아까 제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영지가 싹 바뀐 표정으로 웃으며 제게 말을 걸자 팀장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 알겠어.”

“네 감사합니다.”

도대체 무슨 전결을 올렸다는 건가, 아까 분명히 불가능하단 뜻을 내비쳤는데 그래도 포기를 하지 않은 건가 싶은 마음에 팀장은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받은 메일함을 여니, 영지의 말대로 전자결재요청이 도착해 있었다.

“하하… 하.”

“팀장님 뭔데 그래요?”

소라의 참견에 팀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침에 저와 이야기한 후 오전 내내 자리를 비웠던 영지가, 갑자기 나타나 사직서를 올렸다는 건.

“흐음.”

자신이 아침에 얘기한 것에 대한 반박임은 확실한데,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몰랐다.

늘 제 말을 잘 따르고, 멍청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 오래한 것 치곤 순한 영지였으니까.

자기 팀에서 소라 다음으로 함께 오래 일했고,

똘똘하고 일 잘하고, 성실하고, 주 업무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아 요긴하게 부려 먹을 수 있는 직원이긴 한데.

만약 이 사직서를 반려해서, 그녀를 붙잡는다고 하면 자신을 곤란하게 하며 계속 제가 겪었던 사건을 책임져달라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그건 곤란하지.”

영지의 자리를 채울 사람은 많았다. 사람이야 구하면 되니까.

좀 아쉽긴 했지만, 팀장은 승인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 와 앉는 영지가 보였다.

“영지 님. 이리로.”

“네!”

확실히 아침과는 다른 분위기, 다른 얼굴의 영지에게 팀장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괜찮다더니, 힘들었구나.”

“아 네.”

“도움이 못 되어주어서 미안해.”

“아닙니다. 팀장님 일도 많으신데요.”

“그동안 일 너무 많이 시킨 것도 미안하고.”

“아니에요~ 어차피 일 하러 오는 곳인데요 뭐.”

“그래. 맞지.”

영지는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팀장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제 퇴사가 결정되었음을 확신했다.

“마음도 싱숭생숭할 텐데, 시간 채우지 말고 정리해서 들어가.”

“네.”

“고생 많았어, 영지 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는 영지를, 팀장은 한동안이나 지켜보았다.

***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는 버스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확실히 출퇴근시간과는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휴대폰을 꺼낸 영지는 습관처럼 이용 중인 OTT서비스 앱에 접속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에 탄 사람들 대부분이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이동 중에 영상을 보기 위해선, 휴대폰에서 안테나를 빼들고 DMB를 틀었어야 했는데, 어느새 두 번째 퇴사를 하고 있는 지금은 그런 건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를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드라마를 트니, 볼 때마다 가슴을 둥둥 울리게 하는 멋스러운 인트로와 적당히 웅장한 사운드가 영지의 눈과 귀를 자극해 왔다.

“헤에. 런던.”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늘 시간이 없었다.

계획적으로 살길 좋아하는 영지에게 여행은 그녀의 계획안에 포함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아무래도 일상을 벗어나야 하는 큰일이고, 낯선 여행지에서의 일정은 아무리 계획을 짠다한들 계획대로 돌아갈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지의 외형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왔었다.

오늘 같은 일은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로.

휴대폰의 화면을 들여다보던 영지는 문득 자신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많으니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 영지는, 보고 있던 영상의 스트리밍을 멈추고 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에 접속했다.

“어딜 가지?”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오늘은 정말 그런 날인 모양이다. 기분대로 하는 날.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싶은 영지의 손놀림엔 망설임이 없었다.

넘치도록 부유하게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망설여야 할 정도로 돈이 부족해 본 적도 없었다.

퇴사를 한 뒤,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느끼는 이 기분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어 눈에 띄는 여행지들 중 그리 멀지 않은 날짜의 비행기 표를 구매했다.

여행을 가리라 생각한 뒤, 처음 한 고민은 어딜 가지였지만, 어딜 가든 다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이내 따라왔던지라, 최대한 빨리 가자는 결론에 한 행동이었다.

그러다보니 출발날짜는 내일 모레이다. 그래도 처음 방문하는 곳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가겠네.”

창밖 너머를 보는 영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하늘이 꾸물꾸물한 것이, 곧 눈이 올 것만 같았다.

“한국도 이렇게 추운데.”

잘못 결정했나 싶으면서도 뭐 딱히 취소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틀 뒤에 제가 얼마나 추울지에 대한 걱정보다, 곧 내릴 눈발 사이로 이 짐들을 들고 어떻게 집까지 갈지가 더 걱정이었으니까.

지극히 평범할 수 있었던 날,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저질러버린 영지의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

“토토야. 형 왔어.”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켜진 불이 넓은 거실을 비췄다.

고개를 숙여 시선을 아래로 향하니 새하얀 꼬통 드 툴레아 한마리가 어느새 발 앞에 서서 안아달라며 꼬리를 치고 있었다.

“누나가 재밌게 놀아주고 갔어?”

피로감이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를 들은 건지, 토토라 불린 꼬통 드 툴레아는 소리를 내기 대신 저를 어느새 품에 안고 있는, 자신을 형이라 칭한 남자의 손등을 열심히 핥았다.

“형도 보고 싶었어.”

품에 안고 있는 작은 생명체로부터 안정감을 찾은 남자, 우영은 식탁 위에 놓인 메모를 확인했다.

그가 일을 하는 동안, 토토와 함께 있어주는 펫시터가 남기고 간, 일종의 일지 같은 것이었다.

우영의 데뷔 년 수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토토는 그보다는 펫시터와 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영을 가장 잘 따르고 좋아했다.

아마 우영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인 자신을 구해 준 장본인이라는 것을 토토는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아지들은 모르는 게 없으니까!

유기견 보호소에서, 토토를 더 이상수용하고 있을 수가 없다며 올려놓았던 마지막 공고문을 마침 보게 된 우영이 그를 데리고 왔다. 토토에게 우영은 견생을 살아볼 수 있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었고, 결은 조금 달랐지만 우영에게 토토 또한 그러했다. 자신만 바라보는 이 애교 넘치는 작은 강아지가 제 인생에 없었다면, 우영은 자신이 진작 무너지고도 남았을 거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토토는 그의 유일하다 할 수 있는 활력소이자 사는 이유였으니까.

토토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주지 못하는 우영은 토토가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인물이 저라는 사실에 행복과 괴로움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오늘같이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돌아온 날이면 더욱 그것을 심하게 경험하는 우영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긴 소파에 풀썩 주저앉으며 우영이 입을 뗐다.

‘이 순간이 제일 좋아.’

뒷말은 속으로 삼켜냈지만, 토토는 우영이 어떤 마음인지 아는 듯 여느 때와 같이 동그랗고 부드러운 몸을 그에게 딱 붙인 채 떨어질 줄 몰랐다.

피곤했다. 활동을 할 때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감에 지치고, 활동을 쉴 때엔 세상 그 누구보다 무기력했으니. 그리고 근 10년간 반복되고 있는 이 패턴에서 느끼는 감정을 우영은 뭐라 정의 내려야할지 알기 어려웠다. 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던가?

***

“우영 씨, 준비하세요.”

“네!”

오늘의 4번째 스케줄. 유난히 버거운 하루이지만 진행 스텝이 제 이름을 부르자 우영은 이내 사람들이 좋아하는 웃음을 얼굴에 내걸었다.

벌써 9년 전, 자신이 선택한 이 일을 그는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하다보면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좋았지만, 어딜 가든 관심 받는 인생을 사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우영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 얘기하며 화려한 그의 삶을 부러워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영은 남들이 부러워마지않는 인생 중 하루를 살아가는 중에도 몇 번씩이나 이유 모를 갈증을 느꼈다. 힘에 겹다는 말이었다.

가까운 지인들은 우영이 힘들어 할 때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로 돈을 벌며 살 수 있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라 말해주곤 했다. 아마도 위로였을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날, 우영은 그게 바로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일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되다보니, 스트레스를 받거나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날에는 눈 돌리며 쉴 곳이 없었다. 잘 한다고 여기는 일에서 좌절감을 맛볼 때면 쉽사리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쳐내고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기타를 치는 게 좋았던 것뿐인데, 어느새 그는 작곡, 연주, 춤, 노래, 진행, 연기가 가능한, 싱어송라이터를 넘어 선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연예인이 되어 있다는 소리이다. 흔히들 말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성공한 삶이 아니진 않았다. 하지만 우영에겐 수시로 의문이 들었다. 저의 속은 점점 비어져 가는데 이게 성공한 게 맞는 것인지. 날 보면서 환호하는 저 사람들은 내 속내에 관심이 있긴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