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저주받은 눈

낌새도 없었다.

밤사이 땅을 덮는 공기가 차가워지는가 하더니 결국 하얀 눈발이 아침부터 날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안뜰에 소리도 없이 내려앉는 눈은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는, 그저 눈일 뿐이었다. 예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다른 곳보다 조금 일찍 겨울이 찾아든 율(律)의 수도 왕도성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주 마마. 눈이에요. 첫눈이에요.”

하늘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떠는 소녀가 자그마한 몸을 콩콩 튕기듯 뛰어오르며 말했다. 몸종 차림의 이 소녀는 한때는 다른 이름이 있었겠지만, 궁에 들어와 일하면서부터 청랑이라 불리며 지내왔고, 올해로 꼬박 오 년째 공주를 모시고 있다.

청랑이 소리를 높여 부른 공주는 그녀의 뒤를 이어 느린 걸음으로 조심스레 나왔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사뿐한 발걸음은 마치 다른 세상을 걷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전각의 지붕이 덮어주는 부분을 막 나서자 공주는 뺨에 떨어진 차가운 기운에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아, 정말 눈이구나. 청랑아, 떨어지는 모습이 어떠하니? 우리 안뜰을 하얀 비단처럼 덮었느냐?”

“음, 포실포실하게 생긴 솜뭉치를 선녀가 흘리며 지나가는 것 같아요. 이제 겨울의 시작이니 이 정도 눈으로 쌓일 것 같지는 않아요.”

청랑의 설명을 듣는 공주의 입술이 아름다운 호를 그린다.

“그 선녀는 손이 참으로 시리겠구나.”

“선녀님은 이 정도에 손이 시리지 않아요. 자, 마마. 손을 뻗어 보세요. 닿자마자 녹아 버리죠?”

청랑이 잡아끄는 대로 손을 뻗쳐 떨어지는 눈송이를 손바닥에 받는다.

차가움 뒤에 느껴지는 축축함. 공주는 머릿속으로 손바닥 위에 떨어진 솜뭉치가 물로 변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참으로 재미있는 세상이다.

두꺼운 비단 천으로 가려진 눈 위로 초승달 모양의 눈썹이 살짝 들썩거린다. 무언가 흥미가 있는 것을 접할 때 보이는 반응이란 것을 아는 청랑은 저가 도로 신이나 공주를 안뜰 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마마, 여기서 눈 구경 조금만 하다 들어가요. 아직 식사거리를 가져오려면 조금 남았으니까요.”

열흘에 한 번, 본궁에서 두 사람이 먹을 만큼의 재료를 보내온다. 그 재료로 식사를 만드는 것은 청랑의 몫이었다. 기가 막히게 양을 계산해서 보내는 통에 그 열흘 간 조금이라도 더 먹어서는 마지막 하루 이틀은 굶고 지나기 예사이기에, 청랑은 늘 일정량씩 만들어 내는데 이제 도사가 다 되어 있었다.

그 열흘째가 오늘이다.

음식을 넣어주는 궁인이 대문을 여는 그 순간, 공주가 안뜰에 나와 있는 것을 보이면 청랑이 매를 맞곤 하여 겁이 난 공주는 그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공주가 오늘따라 아침부터 안뜰에 발을 내디딘 것은, 저 눈에 대한 호기심이 이겨 버렸기 때문이다.

공주는 보지는 못해도 제 얼굴로, 손 위로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어찌 떨어지는 소리도 없는데 내 얼굴에 와 닿을까. 어찌 하늘에서 이리도 차가운 얼음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청랑은 그렇게라도 세상을 느끼는 공주가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하여 말없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공주가 고개를 홱 돌려 문 쪽을 향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주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마마,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청랑아. 누가 오고 있다.”

“네? 아직 궁에서 올 시간이 아닌데.”

청랑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공주는 귀에 집중해 담벼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구분해 내려 애썼다.

“갑옷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구나. 음식을 가져다주는 궁인이 아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곳에 무인이 오기라도 한단 말씀이세요?”

공주의 어여쁜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부황께서 더는 나를 참아줄 수가 없었나 보다.”

공주는 허탈한 마음에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는 그 바위에 앉은 채 중얼거렸다.

이게 어둠 속에 살아온 일생의 마지막이란 것인가.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솜뭉치를 닮은 눈송이 한 번 못 보고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공주는 치솟는 분노와 서글픔에 손이 떨려왔다.

‘이럴 바에는 진작에 죽이지 그러셨습니까.’

빠득거리는 소리가 이 사이에서 들려왔다.

모비(母妃)와 유모. 공주가 아끼던 이들은 얼굴 한 번 못 보고 이 세상을 먼저 떠나갔다.

그 모든 것이 저 때문이라 생각한 공주는 이런 삶조차 자신의 죗값을 치르듯 참고 살았다. 어느 때에는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삶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무엇보다 단 하나 남은 혈육, 아직 어린 황자를 생각하면…….

살아야만 했다. 그 어린 동생을 보고 싶어 참고 참았다.

그런 제 목숨이 부황의 변덕에 이리 끝맺게 될 것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오늘일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드디어 철커덩거리는 금속성과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청랑에게도 확실히 들려왔다. 두 여인은 손을 맞잡고 떨었다. 청랑은 두려움에, 공주는 분노에.

하지만 별궁에 다다른 철갑은 이내 입구를 지키던 황궁 시위들과 칼을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둘이 갇혀 살아온 별궁의 앞에는 황궁 시위들이 지키고 있다. 물론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닌, 공주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시위들이었다.

공주는 볼 수가 없는 탓에 두 귀를 쫑긋 세워 도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 노력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부황이 보낸 자들이 어째서 시위들과 싸우는 것이지? 어지러이 섞인 소리에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힘들어졌다.

향 하나 탈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밖이 잠잠해지자 들리는 것이라곤 공포에 질린 청랑의 떨리는 숨소리만이 간혹 있을 뿐이다.

끼이이익.

자주 사용하지 않는 대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담벼락이 막아주던 바람이 그 문으로 치고 들어왔다. 힘없이 떨어지던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공주의 얼굴을 때렸다.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랑을 제 뒤에 가리고는 침입자를 향해 섰다.

“누구냐?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이리도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맞은편에서 몇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싸움에서 격하게 몸을 움직인, 아직은 가라앉지 않은 거친 숨.

그 사이로 철갑이 철커덩거리며 귀를 아프게 하는 사이,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세월을 머금은 노장의 걸음이다.

“누,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공주는 제 마지막 존엄을 내세우며 말하지만 그래봤자 무인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가녀린 여인이다. 거기다 앞도 볼 수 없는 여인.

말끝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하하, 버려진 공주가 자존심은 있군.”

예상했던 대로 꽤 나이가 든, 하지만 힘 있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공주가 생각지 못한 것은 그 말에 남쪽 지방 말씨가 강하게 묻어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백(大伯)의 대장군, 유청묵이다. 지금부터 율의 마지막 남은 황족 휘안(諱顔) 공주를 현성으로 압송한다.”

율의 저주받은 공주, 왕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왕도성이 함락되고도 닷새 뒤의 일이었다.

* * *

백의 황궁은 그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이 대륙의 어느 제국도 따라 하기 힘든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화려함이 황금을 있는 대로 가져다 바른 율의 화려함과는 달랐다. 화려함 속에 기품이 있고 고아한 미가 어려 있으니, 부(富)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 황궁의 북쪽 끝에 위치한 건양궁은 이 황궁의 주인인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다. 사시사철 각각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각에서, 백의 젊은 황제는 수려한 얼굴을 손으로 괸 채 유청묵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휘안 공주?”

황제는 유청묵의 말을 끊고 그의 이야기 중에 나온 봉호를 따라 말했다.

대장군 유청묵은 한 달 전, 왕도성을 함락하고 진즉에 율제와 태자를 포함한 황족을 모두 현성으로 보냈다.

그 후에 도호부 신설을 위한 처리를 하다 왕도성 외곽에 위치한 별궁을 발견한 것이다. 설마 그런 곳에 황족이 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 별궁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황궁에서 일하던 궁인들도 그 별궁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그곳에 음식을 가져다 나르는 궁인도 누가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다 겨우 지위가 높은 태감 하나가 털어놓기를, 율제의 유일한 여식이자 별궁에 갇혀 지내는 휘안 공주에 대해 털어놓은 것이다.

백의 십오 대 황제 진인광은 그런 뒷이야기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이미 율 황족의 대부분을 처형했고, 아마도 그 공주도 그리될 것이니. 다만 그 봉호가 너무나 괴이해 다시 물어본 것이다.

“예, 폐하. 율제가 어찌나 숨겨 놓았는지, 얼핏 보아서는 일반 관리의 집 정도로 보였습니다.”

숨겨놓았다. 그러기에는 봉호가 더 이상하지 않은가.

휘안. 얼굴을 가리라니…….

“흠. 얼마나 딸을 미워해야 그딴 호를 붙여 줄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별궁 앞을 지키던 시위들이 버려진 공주니 뭐니 하는 말을 하긴 하더군요.”

진인광은 필시 율제가 그 공주를 아끼기는커녕 그저 미워서 숨긴 것 또한 아님을 확신하였다.

버렸으나 죽이지도 못했다. 잔혹하기로 유명한 율제 왕희가 제 딸이라고 한들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죽이는 것은 누구보다 쉬었을 터.

그럼에도 죽이지 못해 눈을 가리고 별궁에 버려두었다는 것은…….

“왕희가 그 딸을 두려워했군.”

황제의 혼잣말에 유청묵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전노장의 대장군은 그 외에도 뭔가 찜찜하다는 듯이 말을 꺼낼까 말까 머뭇거렸다.

“대장군은 무엇이 께름칙해 그런 표정을 짓는가?”

진인광이 그의 얼굴을 살피다 떠오른 표정에 의아해 하문하였다. 장군은 공주를 현성으로 데려오던 당시를 떠올렸다가 다시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폐하. 께름칙한 것이 아니라, 그 공주는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율제가 두려워하였다는 폐하의 말씀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흠.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대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호송 마차가 막 성문을 들어설 때였습니다. 입성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 줄 끝에 기다리고 있을 때, 공주의 몸종이 효수된 율제와 태자의 수급을 보고 비명을 질렀지요.”

진인광은 ‘그런가’ 하고 별 감흥 없이 대꾸했다. 생각해보니 왕희와 태자 왕한은 현성에 보내진 직후에 형이 거행되고 효수하라 명했었다.

유청묵이 말을 이었다.

“그러자 눈을 가린 공주가 왜 그러냐 물었고 몸종이 덜덜 떨면서도 그 광경을 설명해 주더군요. 아마 그리 눈에 보이는 대로 일러주는 것이 두 사람의 일상이었나 봅니다.”

“그래. 아비와 오라비의 수급이 걸려있다 하니 공주가 슬퍼했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황제는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하나, 라는 표정을 다시 등받이에 깊게 몸은 파묻었다. 유청묵은 고개를 잠시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반대?”

유청묵은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공주가, 웃었습니다.”

음. 그것은 기대하던 그림이 아닌데. 진인광이 허리를 세워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자그마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웃더군요. 미친 여자처럼. 얼마나 시원하게 웃던지. 아마 성벽 위에 걸린 왕희의 머리도 그 웃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영문을 모르던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돌아보며 의아해했었지.

호송마차 주위를 지키던 병사들이 시끄럽다며 함거의 창살을 두드려 댔다. 그러면서도 병사들도 모골이 송연해 다들 허옇게 질린 얼굴이었다.

유청묵은 그 광경을 떠올리자 공주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가족의 수급을 마주한, 미쳐버린 공주의 웃음소리가.

* * *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린 두 손이 하얗다 못해 투명하였다.

이미 관직에서 물러난 노장군 이태서는 제 앞에 앉은 어린 여인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수십 년을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며 나름 사람 보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은 소녀의 생각은 좀처럼 읽기가 힘들다.

아마도 눈을 가려서 그런 것이려나.

“휘안 공주라 하였지요?”

“그렇습니다.”

얼마 전 가족을 잃었다는 소녀에게서 나오기 힘든 담담한 말투였다. 버려져 갇혀 지내왔어도 공주는 공주란 말인가.

“공주는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아십니까?”

“……내 아우가 아직 살아있다 들었습니다.”

이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눈을 가린 두꺼운 비단 천을 보고는 자그마하게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끄덕여 보았자 볼 수가 없는데.

이렇게 정확히 그를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앞을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주었다.

“맞습니다. 율의 7황자 왕부가 살아있습니다. 왜인지는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왕언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날, 별궁에서 나오면서부터 혼란의 나날이었다. 율이 패망했다는 것도, 부황과 태자의 머리가 성문 위에 걸려있다는 것도.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망국의 황족인 왕부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놓았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휘안 공주.”

노장군이 입을 열자 왕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장군. 이미 율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들었습니다. 부디 그 이름으로는 부르지 말아 주세요.”

끔찍하게도 싫었던 부황이 내린 끔찍한 봉호였다.

율이, 황궁이 사라져 버리기를 얼마나 바래왔던가. 비록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연유는 모르겠지만, 며칠을 더 살게 되더라도 율의 휘안 공주가 아닌 왕언으로 살고 싶었다.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 요청할 권리가 주어질 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노장군의 태도는 적대적이지 않고 상냥하니 어쩌면 들어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노장군은 가볍게 웃고는 천천히 그녀를 불렀다.

“왕 소저의 동생은 북안도호부사(北岸都護府使)로 임명되었습니다.”

“북안…… 도호부사라니요?”

처음 들어보는 지명에 어리둥절한 왕언이 그 말을 몇 차례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과거 율이었던 땅의 절반은 이 전쟁에 협조한 티무르에, 그리고 절반은 대백에 편입되었습니다.”

티무르라면 이 대륙의 동쪽을 지배하던 야만인들이었다. 그들이 어째서 백국과 손을 잡고 율을 공격했던 것인지, 그 작은 별궁이 세상의 전부였던 왕언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율이란 이름조차 이 땅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백은 그곳에 북안 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스리려 합니다만, 율의 백성들은 백의 체제를 따를 생각이 없더군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언도 그 말에 동의한다.

북쪽의 광활한 땅을 누비며 살던 율의 백성들이 백국의 섬세한, 어떻게 보면 쩨쩨해 보이기까지 하는 통치방식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황제의 목을 베어버린 백인데, 당연하지 않겠나.

“그 상황에 딱 필요한 인물이 소저의 아우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직은 어리지만, 그래도 율의 황자. 그가 도호부사로 온다 하니 그제야 민심이 조금 잠잠해졌지요.”

그리고 어리고 유순한 왕부는 백의 말을 잘 따르고 충실히 수행하겠지. 더군다나 하나뿐인 누이가 이곳에 잡혀 있으니.

“저는…….”

왕언이 입을 열었다.

“볼모군요. 8제(八弟)를 쥐고 흔들기 위한…….”

왕언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깜빡한 노장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청력이 극도로 발달한 공주가 그 작은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듣고 그의 행동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장군.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왕부에게 무조건 그들의 뜻을 따르라는 서신이라도 써야 하나, 어느 감옥에 감금이라도 되는 것인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치욕이 어떤 것이 되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자신이 버티지 못하면 그녀의 아우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왕부가 어떤 동생인가.

비록 얼굴 한 번 못 보았어도, 어린 시절 그 작은 몸으로 별궁의 문을 두드려 대며 누님을 찾다 잡혀가기를 수십 번. 모비가 명을 달리한 후로 오로지 서로의 존재만으로 버티게 해 주었던 그런 동생이 아닌가.

살아야 언젠가 그를 볼 날도 올 것이다. 언젠가는 서로를 안아주며 그간 고생했다 해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그러려면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이 볼모라면, 누구보다 더 잘 해내 주겠다.

혹자는 제 나라를 집어삼킨 원수에게 그리 목을 내어 줄 수 있냐 하겠지만, 그녀에게 율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을 하면 되는지 말해 주시지요.”

노장군은 그녀가 보여주는 언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무슨 연유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평생 작은 별궁에 갇혀 살아오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 나라가 패망하고 볼모로 타국에 잡혀 왔다. 이 암담한 상황에도 시종일관 왕언은 놀라운 평정심을 보였다.

과연 보통의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녀처럼 차분할 수 있을까.

놀라우면서, 안쓰럽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드디어 노장군이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것도 하실 게 없습니다.”

“제가…… 볼모로서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요?”

지금 왕언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그 쓸모가 없으니 살려둘 필요도 없다는 말로 들렸다. 어떠한 것도 감내하겠다는 각오를 다잡을 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더 불안해진다.

노장군은 처음으로 동요를 보이는 그녀가 더욱 안되어 보였다.

“아닙니다. 소저의 동생은 큰 불평 없이 북안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니 소저는 이곳에서 지내기만 하면 됩니다.”

“네? 하지만 이곳은…….”

“예. 소박하지만 일생을 무관으로 살아온 탓에 크진 않지만 살만한 집을 지었지요. 그래도 사람 한 명 정도는 더 들어와 살 만합니다.”

그런 것을 물었던 게 아니었던 왕언은 어리둥절하였다.

더구나 대문을 통과해 지금 두 사람이 앉은 이 방까지 걸어온 거리만 생각해보아도 결코 그저 ‘살만한’ 집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못해도 방이 수십 칸이 있을 텐데 그녀 하나 더 수용하지 못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