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장 - 인연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비치는 깊은 산을 희끗한 물체가 헤매고 있었다. 사람인가? 몸짓이 이상했다. 하지만 짐승인가 하고 보면 또 아닌 듯했다. 짙은 어둠 속 달그림자에 숨었다 다시 나왔다 하는 것이 길을 헤매고 있음이 분명했다. 달님이 자세히 빛을 비춰 보니, 비틀거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한 발 한 발 가는 모습이 여인이 아닌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머리의 낭자마저 풀어진 모습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발을 헛디뎠는지 주르륵 미끄러지다가는 다시 일어서서 아니 반쯤 기다시피 하면서 방향도 없이 산속으로만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무들 사이 짙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리자 산에는 간간이 동물들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산지기 겸 사냥꾼인 한동은 깊은 산중에 자리한 사냥꾼 움막에서 짐승들의 심상치 않은 울음소리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짙은 어둠 속, 사냥을 나서기 어려운 시각이라 움막에 화톳불을 피운 채로 가만히 누워 귀를 기울였지만 별다를 것은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선잠이 들었다가도 무언가가 잡아챈 듯 깜짝 놀라 눈을 뜨기를 반복하였다. 갑자기 사냥개들마저 짖는 소리가 요란해지자 체념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새벽 별이 떠 있는 동트기 직전이었다. 10월 중순이지만, 산속에서 찬 서리만 겨우 피한 쌀쌀한 움막 안의 잠자리는 오늘따라 불편하기 이를 데 없기에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움막을 나와 몸을 쭉쭉 펴면서 짖고 있는 사냥개들 탓을 했다.
“이놈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요렇게 시끄럽게 구는 게야!”
동이는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 세 마리가 모두 한곳을 향해 짖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뒤늦게 직감했다. 이제껏 이런 일은 없었다. 부옇게 변해 가는 하늘을 보던 동이는 서둘러 활과 칼을 챙겨 들고 개들을 풀었다.
“가라!”
오늘은 과연 어떤 사냥감을 잡을 수 있을까. 산주인 석천군 대감댁 겨울용품으로 노루를 잡아 육포용 고기와 가죽을 가져가려 사냥을 나왔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것을 잡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다친 표범이라도 근처에 나타났나?’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죽 욕심이 났다. 그러다 혹시 부상 입은 짐승의 공격이 있을까 싶어 아직 밝아지지 않은 사방을 주의 깊게 살피며 기대에 찬 동이는 부지런히 개들을 쫓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서 사냥개들은 요란하게 짖으며 나아가지 않기에 다친 짐승이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부리나케 쫓아갔다.
“뭣이여? 어라? 여인네 아녀?”
동이가 본 작은 계곡 너머 움푹 팬 곳에 펼쳐진 광경은 놀람 그 자체였다. 치마가 온통 검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피로 범벅된 탓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피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복 차림의 여인은 다 죽어 가는 형체로 바위에 눕듯이 기대어 있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무슨 일인 게요!”
동이는 이런 깊은 산중에 여인이 웬일이냐, 귀신인가? 아니면 범에게 공격을 받았을까 생각하면서 서둘러 쫓아 내려가 큰 바위 밑 움푹 파인 곳에 누운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동이의 눈에 여인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갓난아이가 보였다. 다가서는 사람의 기척을 들은 여인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올려다보더니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이 아이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먼 곳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무슨 말이오. 이 산속에는 짐승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란 말이요. 피 냄새가 온 천지사방에 퍼졌으니 짐승들이 몰려오는 것은 순간이요.”
“저는 어차피 살 수 없습니다. 살아도 산목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발 아이만은 꼭 살려주세요. 어서요. 제발 멀리 데려가 주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지금.”
여인이 죽어 가는 소리로 하는 말에 동이는 기겁을 했다. 이제 곧 짐승들이 몰려올 것이다. 아니 이미 주변에 쫘악 퍼져 있을 것이다. 자신과 사냥개들이 자리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달려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제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각오를 하고 이 산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부디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잘 키워 주세요.”
“아이, 이 아이. 이 아이는 누구의 아입니까?”
비록 험한 꼴의 모습이라 하나 여인의 기색이 주변에 흔히 보는 이들과는 달리 말하는 것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어둑한 새벽빛에도 시골 아낙들의 흔한 얼굴이 아니라 고생 모르고 자란 태가 났다. 그러기에 아마도 동이 입에서 그 말이 튀어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게만 키워 주십시오. 어서 자리를 피해 주세요. 어서요.”
“내가 자리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짐승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한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차라리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면 추적대가 이 아이를 찾지 못할 것 아닙니까. 어서 자리를 피해 주세요. 부디 아이만은 꼭, 꼭 부탁드립니다. 어서. 어서 가세요. 제발.”
여인의 간절한 얼굴을 본 동이는 도리 없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 한없이 작은 아이는 동이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어미와 떨어지기 싫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어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동이가 보기에도 온통 피범벅이 된 여인을 옮길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곁에 둔 작은 보퉁이마저 내밀더니 한사코 동이를 밀어내고 있었다. 동이는 보퉁이와 아이를 안고 내키지 않지만 한 걸음 두 걸음 미련을 가지고 물러섰다. 다른 수가 없었다. 지게를 가져온다 해도 그사이, 이 여인의 생사를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여인은 동이에게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더니 아예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려 외면해 버렸다. 동이는 품에 안긴 아이를 보다가 결심한 듯 뒤돌아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의 감은 눈 아래로 물이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이제 되었다. 내 딸. 정원아. 잘 살아.’
주마등처럼 지난 수개월의 일들이 여인의 머리를 스쳤다. 세상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집안의 외며느리였다. 혼인한 지 5년 가까이 될 때까지 아이는 없었지만, 다정하신 서방님과 시어른은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다 잉태를 하였다. 서방님은 하늘을 날 듯 기뻐해 주었고,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고대하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 부인. 며칠간 아버님을 모시고 한양에 다녀오리다. 염려 마시오. 별일 없을 것이니 그동안 몸조리 잘하고 계시오.
그리고 수일 후, 갑자기 역신의 자손으로 돌변하였다. 아버님과 서방님은 즉결 처분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여인은 관아에 끌려가 옥사에 갇혔다. 잉태한 여인을 어찌할 수 없으니 옥에 가둬 두고 낳은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어미와 함께 관비가 될 거라 했다. 절망에 빠진 나날들이었다. 도무지 역모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만삭이 되어 오늘내일 아이를 출산할 기미가 보이자, 관아 근처 한 민가에서 몸을 풀게 허락되었다. 시어른을 알던 사또의 배려였다.
여인은 아들을 죽게 버려둘 수도, 딸을 관비로 만들 수도 없었다. 자신이야 이미 진창에 빠진 삶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라고 생활해 온 여인은 자식 앞에 펼쳐질 삶을 생각하면 차라리 목을 매고 싶었지만,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태동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를 악물고 결심을 했고, 진통이 시작되려 하자 목숨을 걸고 도망을 쳤다.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 하늘의 뜻에 맡기자 결심했다. 비록 그들의 삶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 알면서도 그런 삶에 아이를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직 아이의 앞날만을 위해 지난 몇 달 동안 수천 번 되풀이 생각했던 일을 실행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깊은 산중에서 손끝과 무릎은 온통 피범벅이 된 채, 기듯 구르듯 헤매다 천우신조로 움푹 파인 곳을 발견했다. 더 이상 갈 수 있는 기력도 없었다. 서둘러 치마를 벗어 바닥에 깔고 출산을 하였다. 달빛 속에서 본 아이는 딸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드러난 딸의 울음소리는 우렁찼다. 삶을 갈구하는 듯 느껴져 눈물이 났다. 이제 이 아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피 냄새를 맡은 짐승들의 우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서방님. 우리의 딸입니다. 아이를 지켜 주세요.
하늘이 점차 부연 푸른빛으로 변해 갈 즈음, 천행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사냥꾼 차림의 사내였다. 이제 되었다. 내 아이는 살겠구나. 놀라서 커진 눈을 한 순박한 얼굴의 사내는 아이를 받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뒷걸음치다 뛰어서 멀어졌다.
-서방님. 이제 되었습니다.
넓게 퍼진 피 냄새는 산짐승들의 회를 동하게 하는지 사방에서 울부짖었다. 그때 꿈에서도 그리던 서방님이 다가오더니 여인의 손을 강하게 이끌었다. 여인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고통도 없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서방님의 손짓이라 좋기만 했다.
*
동이는 어젯밤 서리를 피하던 움막으로 돌아와 불을 피우고는 무명 포대기를 들쳤다. 아이는 새근새근 자고 있다가 찬바람을 맞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우렁찬 울음소리와는 달리 계집아이였다. 서둘러 물병의 물로 무명을 적셔 피가 묻은 아이를 꼼꼼히 닦았다. 자신도 얼마 전 아들을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아이는 애통하게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며칠 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동이는 여인이 건네준 보퉁이를 펼쳐 마른 무명으로 다시 아이를 잘 감싸고, 자신의 냄새나는 옷으로 다시 쌌다. 그리고 피 묻은 무명 포대기는 태워 버렸다. 서둘러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담긴 지게에 아이를 눕히고 무명을 덮고는 사냥개들을 몰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봐! 누구냐! 거기 서라!”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동이는 심장이 후들거렸다.
“나리. 무슨 일이시오?”
“아. 자네였는가?”
“예. 노루 사냥을 나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중입니다.”
“혹시 여인을 보지 못했는가?”
“여인이요?”
“산중에서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보았는가?”
“지금 말씀이십니까? 여인이 어찌 이런 산중을 헤매겠습니까. 나리. 허허허.”
“도망가는 여인이 이것저것 따지고 가는가. 누구라도 보게 되거든 바로 관아로 알리게.”
“예. 나리.”
동이가 넉살 좋게 웃음으로 넘기고, 돌아서서 조급한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왔다. 혹시라도 지게에 실린 아이가 울음소리를 낼까 두려웠다. 상당한 수의 군졸들이 깊어가는 가을, 무성한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사방에서 몰렸다, 흩어졌다 하면서 산을 수색해 나가는 모습들이 계속 보이고 있었다.
산 초입의 작은 초가에 들어선 동이는 지게를 내려놓자마자 아이를 품에 안고 부리나케 작은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개들마저 마당에 그대로 풀어 둔 채였다.
“이보게. 큰일이 났구먼.”
“서방님, 벌써 노루?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것 보게. 아이일세.”
“서방님!”
옥선은 서방님이 며칠 전 잃어버린 아이를 애통해하더니 급기야 아이를 훔쳐 왔나 싶어 하늘이 노랬다.
“쉿! 저 산중 깊은 곳에서 여인이 해산을 했다네. 제발 아이만 살려 달라 애원하기에 얼떨결에 받아 왔네. 산에는 군졸들이 흩어져 여인을 찾고 있는데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구먼.”
동이의 안사람 옥선은 가만히 서방님을 쳐다봤다. 순한 얼굴에 떠오른 두려운 기색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때마침 옥선의 품에 안긴 아이는 기운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아기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 모습을 보던 옥선은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계집아이였다.
자신의 아이는 사내아이였지만 기운차게 울지도 못했다. 시름시름 앓다가 제대로 젖도 먹지 못하고 며칠 전 품에서 떠나보냈다. 옥선은 얼떨결에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갓난아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힘차게 젖을 빨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던 동이는 비로소 한시름을 놓았다. 안사람 옥선이 아이를 받아들였다는 생각이었다. 또 아이도 어미를 찾은 듯 보였다.
“서방님. 나가서 사람들 말을 좀 들어 보셔요. 이 아이의 사연이 어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나도, 나도 그러고 싶네. 하지만 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가야겠구먼. 지금은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구먼. 새벽부터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 같아 정신이 없네.”
이후 사냥꾼 동이가 읍내에서 들은 이야기는 기함할 일이었다. 아이는 역적 수괴의 자손이 분명해 보였다. 역적 수괴는 임금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위를 임금에 앉히고자 역모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단다. 그리하여 그의 며느리가 잉태한 아이는 출산 후 사내면 죽임을 당하고, 계집이면 관비로 보낼 예정이었단다. 한데 그 역적의 며느리가 아량을 베풀어 준 사또에게 배은망덕하게도 진통이 오는 와중에 그만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과연 역적의 피는 모질다고 어찌 진통이 오는 와중에 산으로 도망을 가느냐고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후 군졸들이 여인을 깊은 산중에서 찾았을 때에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짐승들의 배 속에 다 들어가고 겨우 얼굴 형체와 흩어진 뼛조각들과 피 묻은 옷감 조각들만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한동안 산을 둘러싼 동네들에 흉흉한 소문만 떠돌았다.
아이는 며칠 사이 몰라볼 정도로 잘 자라고 있었다. 가만 보아하니 신생아임에도 오뚝한 코며 까만 눈동자, 앙증맞게 옴팍한 귀를 보면 자라면 인물이 대단할 것 같았다. 동이는 안사람 옥선의 품에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뿌듯함 반, 두려움 반으로 지켜봤다.
“이보게. 아이 이름을 뭐라 부를까?”
“서방님은 어찌 생각하시오.”
“나는 보름에 데려왔으니 그냥 보름이라면 어떨까 싶은데.”
“갑자기 우리가 다른 이름으로 아이를 부른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솔이… 그러니까 우리 아들 솔이라고 생각하고 키우지요.”
“하지만 이 아이는 계집이 아닌가. 딸이란 말일세.”
“우리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다들 아들을 낳은 것으로 아는데 갑자기 딸을 키우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아랫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 아이를 언제까지 그렇게 키울 수는 없지.”
“지금은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그냥 지낼 수밖에요.”
동이는 안사람 말에 수긍하면서도 아이의 앞날에 벌써 먹구름이 낀 것이 아닐까 싶어 안사람과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옥선의 단단한 입매를 보고는 말문을 닫았다. 동이와 눈을 맞춘 아이는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마치 ‘아버지, 괜찮소.’라고 말하는 듯 느껴진 동이도 마주 보고 빙그레 웃어 주었다.
역적의 며느리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던 수령은 귀양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병오(丙午)년의 일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한겨울을 넘겼다.
사냥꾼 동이는 가끔 관아에 사냥한 고기와 가죽을 바치러 가곤 했다. 오늘도 지게에 노루 가죽 하나, 담비 가죽 하나, 꿩 꼬리 20여 개와 약간의 노루고기를 지고 관아를 찾았다.
마침, 그곳 옥사에는 며칠 전 술 마시고 싸움이 나서 나란히 갇힌 동무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이는 그들보다는 다른 곳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옥에서 나온 오물들을 모아 둔 동장군들이 있는 곳 한편에 예전에 오줌통으로 쓰이던 이제는 회색으로 변해 버린 작은 항아리가 그것이었다.
그 항아리는 자신이 만났던 산속 여인의 흩어진 유골을 모아 둔 항아리였다. 하지만 역적의 며느리를 놓친 전임 수령이 유배를 가고 관아에 난리가 난 탓에 한쪽에 치워 두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항아리였다. 은근슬쩍 눈치를 보던 동이는 일부러 냄새나는 으슥한 그곳에 빈 지게를 내려 두고 옥사 안으로 들어가 동무들을 만났다.
“이놈들아. 이제 정신이 좀 들었냐. 어찌 집에서 걱정하는 마누라와 새끼들은 생각지 못하고 이 지랄들인 게냐. 쯧쯧. 내가 덕팔네에게 말해서 국밥 좀 넣어달랬으니 그거라도 먹고 정신 좀 차려. 이놈들아.”
동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옥사에서나마 화해를 하고 멍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동이를 반기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돌아선 동이의 빈 지게에는 칙칙한 무명이 덮여 있었다. 그 무명은 짐승들의 냄새가 진동을 했기에 사람들은 서둘러 코를 쥐고 얼굴을 돌렸다.
동이는 지게를 지고 천천히 관아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산 초입의 집에서 곡괭이와 작은 항아리를 지게에 얹고, 예전에 여인을 만났던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만삭의 여인이 어찌 이런 깊은 곳을 찾아올 수 있었을지, 사람들 말처럼 귀신이라도 씌었던 것인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인이 해산했던 움푹 패어 있던 그곳은 한때 짐승이 월동을 했던 곳이 분명했다. 동이는 그 자리의 낙엽을 곡괭이로 쓱쓱 밀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와 집고 보니 옥가락지였다. 그것은 분명 그 여인의 가락지였을 것이다. 아니라면 이 깊은 산중에서 여인들의 귀한 가락지를 어찌 볼 수 있으랴.
동이는 구덩이를 파서 가져온 작은 항아리에 무명 보자기를 펴고 관아의 오줌통 항아리에서 몰래 가져온 뼈들을 쏟았다. 여인이 남긴 뼈는 결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동이 자신이 겨울 동안 여기저기에서 수습했던 뼈 몇 조각과 방금 찾은 옥가락지도 함께 넣었다. 그리고 잘 갈무리하고 항아리 뚜껑을 덮고는, 암기와를 그 위에 얹어 눌러 두고는 흙을 덮었다. 그 위로 작은 돌들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아마도 더 이상 사람이나 짐승에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 동이는 매년 시월 중순 즈음이면 지게에 아이와 함께 술 한 병을 들고 산에 올라와 그곳에 돌을 하나씩 더 얹었다. 그리고 아이가 작은 돌탑에 돌을 얹고, 곁에서 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2. 만남
12년 후.
“솔아. 솔아! 어디 있어?”
“연이야? 여기 뒤에.”
작은 뒷마당에서 장작을 모으고 있던 사내아이를 근처에 사는 미연이 찾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
“응. 그냥저냥.”
“쯧쯧. 보나 마나지. 그러니 이렇게 삐쩍 골아서.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엄마가 또 굶었을 거라고 고구마하고 옥수수 줬어.”
“야. 나도 이젠 혼자 먹는 것 연습도 해야지. 언제까지 너의 어머니께 신세만 질 수 없지.”
“됐어. 일단 이것 먹고. 마님께서 너 좀 데려오라고 엄마한테 그러셨어.”
“나를? 왜?”
“나야 모르지. 암튼 이것 먹고. 같이 내려가자.”
솔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미연이 내미는 따뜻한 옥수수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야! 솔이 너. 혼자 이 집에서 살 거야? 무섭지도 않냐?”
“무섭긴 뭐가 무서워. 내가 나고 자란 집인데.”
“그래도 산속에 외따로 있으니까. 키는 쪼그만 게 배짱을 부리네. 히히. 암튼 엄마가 같이 내려오라고 그랬어. 아버지도 감자 가마니 지고 대감님 댁에 가야 되니까. 같이 가자고.”
솔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고마우신 아저씨 내외의 마음은 알지만 얼마 전 엄마마저 갑자기 돌아가신 후부터 자신이 짐 덩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깊어져 갔다. 미연이네도 아이들이 여럿이고 겨우 먹고사는 중인데, 매번 이렇게 소소하게나마 음식을 보내주곤 하셨다.
“알았어.”
솔은 미연을 따라 마을로 내려와서, 감자 가마니를 지고 대감마님 댁으로 가는 미연이 아버지 뒤를 따랐다.
“너는 요즘도 매일 부모님 산소에 가는 거냐?”
“네. 아저씨.”
“이제 그만두어라. 매일 그렇게 찾아가는 것은 망자에게도 좋지 않아. 죽은 이들은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네가 그렇게 매달리면 귀신으로 떠돌다 산 사람에게 해가 될 수가 있단 말이지.”
“시묘살이도 하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쯧쯧. 장성한 아들이 하는 시묘살이하고, 어린 아들이 부모 정이 그리워 매일 찾아오는 것하고는 다르지. 누구보다 너의 부모님을 잘 아는 내가 보기에도 너 같은 아이가 매일 무덤에 찾아오면 눈에 밟혀 저승길을 어찌 가겠느냐. 알겠지. 부모님께 드리는 마지막 효도다 생각하고 당분간은 발길을 끊어야지. 가끔 찾아뵙는 것이야. 자식 된 당연한 도리지만 말이다. 알겠냐?”
“네. 아저씨.”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