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리스마스 그날

어두운 호텔 방 안. 은은한 조명만이 서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하아….”

성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남자의 뜨거운 숨이 깊숙이 들어왔다.

잔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몸매.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자.

성은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곧이어, 살짝 벌어진 성은의 셔츠 사이로 남자의 손이 파고들어 왔다.

하얀 셔츠가 벗겨지고 성은의 굴곡진 몸매가 드러나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호텔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창문 밖 거리. 은은하게 감싸는 방 안의 조명. 성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몽글몽글한 이불의 감촉까지.

조금씩 가까워지는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성은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

성은이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틀 때였다.

“네? 뭐라고 하….”

성은이 뻥긋거리는 남자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때.

빠아아아앙.

성은이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소리에 놀라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이었다.

화아악.

환한 햇살에 성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끔뻑끔뻑. 성은은 잠에서 덜 깬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고 있었다.

푹신한 화이트 침대와 금장 장식이 된 커다란 거울.

꿈에서 본 그대로 모든 것이 똑같은 호텔 방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가고, 환한 햇살이 가득한 아침이 왔다는 것뿐.

빠아아아아앙.

꿈에서 돌아오라는 듯, 환한 창 너머에는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미쳤어. 하성은.”

성은은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어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알록달록한 조명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날.

하지만, 성은을 들뜨게 하는 건 크리스마스 종소리 너머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한 비트 소리였다.

비트의 근원지,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한 클럽이었다.

“와, 죽이네. 어디서 오셨어요?”

초록색, 붉은색 빛이 왔다 갔다 하다 이내, 클럽 중앙을 비췄다.

클럽 한가운데 위치한 기다란 봉.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추고 결국 그 봉에 매달린 성은이었다.

174cm 정도의 늘씬한 키, 나올 때는 나오고 들어갈 때는 들어간 입체적인 몸매.

하얀 얼굴에 살짝 헝클어진 긴 웨이브 머리. 그리고 음악에 심취한 듯 보이는 풀린 눈.

도회적인 마스크와 살짝 붉어진 뺨에 시선이 머물 때였다.

“손님, 저기 룸에 계신 분들이 부킹을 부탁하셔서. 여기 완전 VIP인 분들인데, 그분들 취향이 완전 손님이에요. 힙이 아주 봉긋하….”

어느새 성은에게 다가온 앳된 얼굴의 웨이터는 씨익 웃으며 성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술에 취해 눈을 감고 봉에 기대고 있던 성은은 살짝 눈을 뜨고서는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힙?”

“가시죠. 제가 물은 확실하게 보장….”

성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웨이터의 손을 쳐냈다.

“힙? 웃기는 사람들이네. 뭔데 사람을 부위별로 따져, 사람이 고기야?”

술기운이 오른 성은은 풀린 눈으로 웨이터를 응시했다.

“여자 힙만 보는 그 VIP 놈들 얼굴이나 보자.”

“아니, 그쪽 아니에요. 손님!”

성은은 다혈질인 성격을 못 참고 건너편에 있는 VIP룸을 향하고 있었다.

딸꾹딸꾹.

연신 딸꾹질을 하던 성은은 VIP라고 적힌 한 룸 앞에 섰다.

벌컥 열어젖힌 룸 안에는 벨벳으로 된 의자들이 붉은 조명에 반짝이고 있었다.

“아씨… 이 룸 아닌데.”

초보 티를 내며 연신 눈치를 살피던 웨이터는 그만 성은만 덩그러니 남기고 방을 떠났다.

커다란 룸 안에는 밖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만 맴돌 뿐이었다.

“뭐야.”

벨벳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었다.

짙은 회갈색 정장에 반듯하게 닦인 구두를 신고 있는 남자였다.

길게 뻗은 다리를 보아 185c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키에, 잔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몸매.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자였다.

“떽! 지현우, 처음 보는 레이디에게 그러는 거 너 아니다.”

현우라 불리는 그 날카로운 남자의 옆, 구수하게 생긴 남자가 헤벌쭉 웃고 있다.

“우리 레이디도 왔으니 술도 더 시켜야겠다. 그치.”

작은 눈과 닭똥집 같은 입술로 구수함을 풍기는 윤수가 메뉴판에 손을 올렸다.

“안 돼, 강윤수. 오늘 2480kcal 넘겼어. 형에게 더는 불필요한 섭취야.”

익숙한 듯 윤수의 손목을 내리치는 현우였다.

문고리에 기대서 있는 성은에게는 관심이 없는 건지, 현우와 윤수는 메뉴판을 잡고 곧 술을 시키네 마네 싸우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여자들 힙에 환장하는 그놈이야?”

방 안에 들어오자 취기가 더 오른 성은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올렸다.

그때였다.

성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누군가 성은의 티셔츠를 잡아끌고 있었다.

“놔봐. 내가 이놈들 아주 정신교육을….”

정신교육은커녕….

성은은 문고리에 티셔츠가 걸린 채 홀로 허우적댈 뿐이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결국 메뉴판을 쟁취하고 현우의 눈치를 보던 윤수가 드디어 성은을 바라볼 때였다.

철퍼덕.

커다란 마찰음이 방을 채웠다.

“어흣, 깜짝이야. 저 선생님…? 일어나 보세요.”

윤수의 외침이었다.

성은은 길고 긴 문고리와의 싸움 끝에 결국 땅바닥에 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을 너무 뺀 것일까. 취할 대로 취한 성은은 문 앞 대리석 바닥에 대자로 쓰러지고 말았다.

드르렁.

코를 골며, 얼굴에는 세상 행복한 웃음을 띤 채였다.

***

다음 날 아침.

“…그래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성은은 대자로 넘어졌던 딱딱한 대리석의 촉감을 떠올렸다.

어느새 출근 시간이 되어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들으며 성은은 호텔 방을 살폈다.

분명 기억은 클럽에서 끊겼지만, 왠지 모르게 이 호텔 방은 익숙했다.

야릇했던 한밤의 꿈 때문일까.

푹신한 침대와 맞은편 위치한 금장 거울. 그리고 옆에 위치한 대형 TV와 호텔 로고가 박힌 어메니티까지. 아래 바닥에는 역시나 어젯밤에 본 듯한 양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 옆 샤워실에는 하얗게 수증기가 껴 있고, 그 옆에는 갓 샤워를 하고 나와 가운을 입은…. 가운?

“누구세요…?”

성은은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안았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러게. 당신, 누구야?”

현우는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와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뱉었다.

“아니, 어제 클럽에서….”

분명 어제 클럽에서 본 놈이다.

VIP 배지를 달 정도로 클럽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니는 놈.

여자들 힙이나 보고 골라 사귀는 클럽 죽돌이.

그리고 무엇보다… 어젯밤 나의 야릇한 꿈에 나온 남자 주인공.

현우를 바라보는 성은의 눈은 자연스럽게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샤워 가운으로 가릴 수 없는 단단한 가슴을 거쳐, 민망한 맨다리까지.

이성을 차리자. 성은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쥐고 흔들었다.

클럽에서 본 놈이랑 왜 같은 방에….

그 생각까지 갈 때쯤, 창문 틈 사이 불어오는 바람이 이불 아래를 훑었다.

습한 방 안, 시원한 느낌. 시원한 이불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날것의 촉감.

“…?”

성은은 벙찐 얼굴로 이불 안을 훑어봤다.

실오라기 하나 거치치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몸이었다.

“…우리 잤어요?”

성은은 어느새 머리를 말리고, 정장으로 갈아입은 현우를 바라봤다.

성은은 당연히 꿈이라고 여긴 어젯밤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물론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흐릿한 조각만이 남아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 어제 많이 들뜨기는 했다. 외롭기도 했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래도!

봉은 잡을지언정, 이런 놈과 가벼운 만남을 할 정도로 쿨한 여자는 아니었다.

꿈이 아니었다고?

성은은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현우를 바라봤다.

미치겠네. 나 진짜로 클럽에서 본 남자랑 잔 거야?

“아니, 나 원래 그런 타입은 아니긴 한데… 아니, 그러니까, 내가 막 어디에서 벗고 있는 스타일은 아닌데. 저기 제 옷은 어디에 있….”

“6분 30초 뒤에는 나갈 겁니다.”

6분이면 6분이지, 저 김밥 꽁다리 같은 30초는 뭘까.

현우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성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냈다.

금장 테두리로 꾸며진 작고 고급스러운 회중시계였다.

평범한 시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초 단위의 작은 숫자가 적혀 있는 맞춤 제작 시계라는 점이었다.

“아…아니 어제 어떻게 된 건지만…. 어제 제….”

끼익. 탁.

머뭇거리는 성은의 말을 자른 채, 현우는 정확히 6분 30초 뒤 방을 나갔다.

참나….

하룻밤 지낸 것으로 잡고 따지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찬 바람 쌩쌩 부는 현우의 태도에 성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원나잇을 얼마나 많이 하면 저런 기계적인 태도가 나오는 건지.

현우가 나간 호텔 방은 성은이 앉아 있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각 티슈 옆에 있는 TV 리모컨, 열 맞춰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는 어메니티까지.

처음 호텔 모습 그대로였다.

‘호텔을 얼마나 뻔질나게 드나들면….’

침대 아래에는 성은의 옷마저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셔츠 단추까지 빼곡히 잠긴 채였다.

“셔츠야… 너 참 참해 보인다.”

성은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이불 아래 자신의 벗겨진 몸을 떠올렸다.

“…지금 몇 시지?”

현우가 나간 자리, 안드로메다로 보내 놓았던 현실감각이 저릿하게 돌아왔다.

오늘은 12월 26일 화요일.

그녀의 첫 출근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주간과 겹친 게 화근이었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가는 고속버스표가 계속 매진된 터에 출근 하루 전인 25일이 되어서야 갑자기 환불된 표 한 장을 가까스로 얻을 수 있었다.

원래 계획은 간단했지.

25일 서울에 도착하면 미리 장기 투숙으로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풀고, 첫 출근을 기다리며 이른 저녁 잠에 드는 것.

쿵쾅쿵쾅.

그녀의 발걸음을 멈춘 건 크리스마스 종소리를 비집고 들려오는 클럽 비트 소리였다.

잠깐 목만 축이려 했다. 뭐, 봉도 조금은 잡으려 했지만….

현재 시각 7시 10분.

출근 시간까지 50분. 유니폼 갈아입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40분 남았다.

띠리리.

“여보세요? …기사님… 콜…콜택시요! 따따따따따불!”

첫 출근날 해고당할 순 없었다.

***

오전 7시 53분. 서울 프리미엄 제임스 S 호텔 안.

“헉…헉… 유…유니폼 갈아입는 곳… 호…호텔리어…인데요.”

대리석으로 장식된 넓은 호텔 로비 안, 몸짓만 한 캐리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여성이 들이닥쳤다.

마치 테러리스트의 폭탄이 연상되는 기세였으니… 호텔 가드들이 성은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 수…숨부터 쉬세요, 손님. 어떤 도움을 원하십니까?”

“제가… 헉…헉… 오늘 출근한 호텔리어입니다. 객실부 호텔 메이드요. 유니폼 어디서 갈아입어요?”

성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비를 지나가던 한 남성 직원을 재촉했다.

다행히 아침에 있던 호텔과 근무할 제임스 S 호텔 거리는 가까웠다.

8시 7분 전, 캐리어를 잠시 넣어 놓을 장소를 찾고, 처음 입는 유니폼까지 입어야 했다.

7분은 너무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더 이상 추운 겨울, 포장마차에서 다른 이의 안주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술. 그놈의 술이 늘 문제인 게지.

“지하 2층으로 내려가세요.”

“가…감…감사합니다.”

성은은 감사 인사를 건네며 만약 자신이 잘리지 않는다면 생명의 은인이 될 그 직원을 바라봤다.

‘송건하.’

반듯한 유니폼 위에 매달린 명찰 속 이름이었다.

‘나중에 인사라도 해야지… 안 잘린다면.’

눈썹이 휘날리게 지하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성은의 머릿속에는 지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29살? 호텔 쪽 경력이 전무한데….”

“저는 29년간 콜센터, 음식점 서빙, 붕어빵 장사까지! 이 세상 모든 서비스업을 경험했습니다!”

3주 전 이루어진 면접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호텔 메이드 경력은 전무하지만, 싹싹하고 언뜻 봐도 눈치 빠른 그녀의 태도가 면접관들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급했다. 갑자기 객실부 호텔 메이드 여럿이 은퇴를 하는 바람에 급히 사람을 뽑아야 했다.

그렇게, 성은은 호텔리어, 정확히 말해 객실부 호텔 메이드가 되었다.

“세…세이브!”

2분 정도 넘은 시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간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다.

2분 정도면 훌륭하다.

장하다. 하성은. 그녀가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