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 탄도(呑刀), 칼을 삼키다
정온(正溫) 공주가 물었다.
“네가 환술사(幻術師, 마술사)냐?”
방금까지도 무대에서 좌중을 휘어잡았던 복면의 환술사는 답이 없었다.
“공주께서 하문하지 않으시는가?”
궁녀 산의 재촉을 듣고서야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예, 소인이 환술사 ‘흑뢰(黑蠝)’입니다.”
“네 재주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우연히 본 적도 있느니라. 아주 놀랍더구나. 어찌하여 그런 재주를 가지게 되었느냐?”
또 묵묵부답.
“말문이 막힌 게냐? 어서 답을 하라.”
“조용히 하거라.”
꾸지람을 듣고 궁녀 산이 물러났다. 정온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청이 있어 널 여기까지 불렀다.”
“뉘시온지 신분부터 밝히시지요.”
“……뭐?”
“낭자가 공주라는 것을 제가 어찌 믿습니까?”
환술사의 오만한 말투에 산이 또 부르르 달려들었다.
“무엄하구나! 감히 공주 자가께 이 무슨 패역한 언사더냐!”
“여긴 궁도 아니고, 발에 가려 낭자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소. 그런데 공주? 눈을 가리고 데려와 말로만 공주라 하면 다 믿어야 하오?”
정온 공주의 시선이 발을 뚫을 듯 꽂혔다.
“어찌하면 믿어 주겠느냐?”
“발을 걷어 얼굴을 보여 주시오. 그러면 믿겠소.”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무엇을 믿고 이리 방자한 것인가!”
“산아.”
“공주님, 아니 되옵니다. 일단 이자를 물러가게 하시고 다음에…….”
“안 된다는 거 알잖아.”
궁 밖을 나와 환술사를 만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 정온 공주였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만들기 힘들었다.
“나가 있어. 이자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겠다.”
“아니 되옵니다.”
“괜찮을 거야. 밖에 있다 내가 부르면 들어와. 어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며 산이 환술사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산이 나간 후 정온이 물었다.
“정말 내 얼굴만 보면 되겠느냐?”
“예.”
“……그리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환술사가 발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차르륵 발이 떨어지고 연두색 당의, 금박무늬가 찍힌 스란치마를 입은 공주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이제 날 믿어 주겠느냐?”
환술사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믿어 드리지요.”
“그러면 내 청을 들어주려느냐? 내겐 정말로 절실한 일이다.”
“하명하소서.”
“내 다릴 고쳐 다오.”
“……다리라니요?”
“아까 그 아이처럼 내 다리도 고쳐 달란 말이다.”
갑작스레 등장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환술사 ‘흑뢰’의 가장 신묘한 재주는 사람의 신체를 칼로 절단했다가 다시 멀쩡하게 만드는 환술이었다.
“뭐든 다 할 것이다. 상자에 들어가라면 들어갈 것이고, 칼로 내 다릴 자른다 해도 상관없다. 날 고쳐 다오. 다시 똑바로 걷게 해다오.”
“하지만…….”
“안 된다는 말은 말라! 재물이든, 벼슬이든 바라는 대로 주겠다.”
6년 전 사고로 다리 불구가 된 정온이 간절히 매달렸다.
“왜 다리를 고치려 하십니까?”
“어째서 이유가 필요한가? 아픈 곳을 고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인 것을.”
“공주 자가는 그것 때문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이 사내, 환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점도 보았던가.
마음을 꿰뚫을 듯한 강렬한 눈빛에 정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마 간택을 위해 가례청을 설치할 것이라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그 때문입니까?”
“그건 네 알 바가 아니니라. 고칠 수 있는지나 답하라.”
환술사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환술이란 눈을 속이는 것일 뿐 진짜가 아니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인은 아이의 다리를 잘랐다가 다시 붙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정온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넌 청나라 도술과 서양의 요술에 도통하여 남녀의 성별도 맘대로 바꾸고…….”
“그리 말해야 사람들이 속지요.”
“속아? 속이는 거였다고?”
“예, 눈속임입니다.”
정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보았다. 아이의 몸에 칼을 꽂는 것을 직접…….”
“공주 자가는 자신의 눈을 믿으십니까?”
“……뭐?”
“전 제 눈을 못 믿겠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내가 사람의 몸을 고칠 수 있다면…… 정말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너부터 고쳐 주었겠지.”
환술사가 복면을 내렸다.
머리 모양도, 옷차림도 판이했으나 너무나 익숙한 얼굴.
“……선비님? 선비님이 어찌 여길……?”
“네가 환술사를 불러들이지 않았느냐.”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정온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서, 설마……?”
“맞다. 내가 바로 환술사 ‘흑뢰’다. 그리고 넌 기생 정온이 아니라 공주 정온이었고.”
환술사 정기후가 창백해진 정온에게 쓰디쓴 조소를 날렸다.
“우린 둘 다 서로를 속이고 있었군요, 공주 자가.”
#1. 선비 마술사와 병신 공주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8년(1828년) 12월, 북경
딱!
경쾌한 손가락 소리와 함께 암흑 속에서 촛불 하나가 일렁이며 타올랐다.
촛대 앞에 선 훤칠한 그림자는 갓을 쓴 도포 차림의 사내, 기후(基厚)였다.
기후의 손이 심지를 감싸자 손안에 불덩이가 맺혀 올랐다. 유려한 손짓에 따라 불덩이는 타올랐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길고 야성적인 눈매가, 매끈한 콧날이, 붓끝처럼 단정해서 오히려 요염한 입술이 드러났다 사라지며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마침내 기후가 불덩이를 얼굴로 가져갔다. 불꽃이 기후의 눈동자에서 맺혀 붉게 이글대자 오금이 저린 듯 강삼이 목을 움츠렸다.
기후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 천주(天主)의 종으로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루이스 신부는 딱히 다른 표현이 생각나질 않았다. 주여, 용서하소서! - 손을 마주 잡자 불꽃이 꺼지며 방안엔 매혹적인 보랏빛 어둠만이 남았다.
“브라보!”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삼이 두꺼운 휘장을 걷었다. 음울한 겨울 볕이 먼지 앉은 성구들 위로 쏟아졌다.
“기후! 정말 이걸 내가 마카오에 간 동안 혼자 터득한 건가?”
루이스 신부가 청국말로 물었다. 기후가 말간 웃음으로 답했다.
햇살 아래 기후는 방금까지 요기를 뿜어내던 그 사내가 아니었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스승의 칭찬이 기쁜 스물넷 청년일 뿐.
“불을 다루는 법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한 건가?”
“제가 그걸 맨입으로 알려 드릴 것 같습니까?”
루이스 신부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20여 년 전 손을 떼긴 했지만, 한때 마술사 ‘루이스 데 발리 투도(Luis de vali tudo, 뭐든지 가능한 루이스)’로 불렸던 그였다.
“그 넓은 소맷자락 말이야. 안엔 얇은 가죽 장갑이 있겠지? 진짜 손과 구분하기 힘든, 아마도 돼지가죽?”
기후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소매를 흘깃 보았다.
“술에 적신 솜도 있을 테고. 아! 겨드랑이에 낀 작은 풀무는 갈대 대롱을 연결해서 손목에 붙였나?”
“후, 됐습니다. 김빠지게…….”
루이스 신부가 껄껄 웃었다. 그러자 강삼이 기후의 손을 잡아 불쑥 내밀었다.
“왜 이래?”
“도련님이 이걸 해보겠다고 얼마나 애를 쓰셨는데 이 코쟁이가 비웃잖습니까요!”
과연 기후의 손엔 얼룩덜룩한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이게 어디 귀한 양반집 도령의 손입니까요? 쇤네는 도대체 모르겠소. 무슨 영달을 보겠다고 천한 재주에 온통 맘이 뺏겨서는.”
“어허, 너답지 않게 말이 길다.”
“쓸데도 없는 걸 죽어라 익혀서 뭘 하실 건지 참으로 궁금해서 올리는 말씀입니다요.”
기후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우자 루이스 신부가 말했다.
“기후, 난 포르투갈로 돌아갈 생각이네.”
“신부님의 고향 말입니까? 하지만…….”
루이스 신부가 눈발이 휘날리는 황량한 북당 성당 마당을 내다보았다.
“이곳이 폐쇄된 지 벌써 2년째야.”
100여 년 전 시작된 박해는 지난 1811년 가경제가 일체 선교 활동을 금지시키며 점점 버티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마카오를 다녀온 것도 본국의 소환 명령을 어떻게든 늦춰 보려 한 것이었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조선 청년이었다.
“언제쯤 떠날 예정이십니까?”
“곧. 리스본으로 돌아가서 신변을 정리한 후 다시 마술사로 활동할 생각이네.”
“정말이십니까?”
기후의 긴 눈이 편도(扁桃, 아몬드)처럼 커졌다.
“다 자네 덕분이지.”
루이스 신부는 청나라에서 기후를 만난 것이 우연 같지가 않았다.
탈출 마술을 공연하다 어린 조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책감에 모든 것을 버렸던 그에게 비춰 주신 신의 용서요, 섭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은 무엇일까?
“기후, 나와 함께 포르투갈로 가지 않겠나?”
멍하게 루이스 신부를 바라보던 기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 상상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말이야, 세상엔 마술과 같은 일도 있는 법 아닌가?”
루이스 신부가 아들뻘 되는 기후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저명한 조선의 학자가 마술을 보고 환희(幻戱)라고 했다지. 신기한 놀이, 꿈같은 장난.”
루이스 신부가 연암 선생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세상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도 있어. 상상해 보게. 동방에서 온 신비한 환희술사(幻戱術師)가 되어 온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자네의 모습을 말일세.”
“환희술사요?”
번뜩거리던 기후의 눈빛이 이내 흐려졌다.
“하지만 구라파(歐羅巴, 유럽)라니…….”
“쉽진 않겠지. 하지만 기억하게.”
루이스 신부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기후를 향해 반짝였다.
“천주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소원을 심어 주셨지. 그 소원을 이뤄 가는 길만이 진정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라네.”
* * *
“에라이! 미친 코쟁이 새끼!”
강삼이 콧방울을 훑어 걸쭉한 콧물을 킁 하고 풀었다.
“뭘 믿고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인지 구라파인지를 가자는 거여! 안 그렇습니까요, 도련님?”
기후는 말 등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뿐 대답이 없었다.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요? 설마 진짜 가시려는 건 아니시죠?”
“너 같으면 어쩌겠느냐?”
“어쩌고저쩌고할 게 뭐 있습니까요! 조선 사람한테 멸시받는 것도 서러운데 코쟁이 양놈들한테 손가락질받으러 그 먼 길을 갑니까요? 천금을 준대도 싫습니다요.”
“돈 때문에 왈짜패에도 들어갔다는 놈이 재물을 마다하다니 별일이구나.”
웃긴 했으나 기후의 머릿속은 온통 ‘마술, 포르투갈, 구라파’로 터져 나갈 듯했다.
2년 전,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사를 따라 북경에 도착한 기후는 제일 먼저 유리창(琉璃廠) 구경부터 나섰다.
유리 기와를 올린 상점들도 흥미로웠고, 자명금(自鳴琴, 오르골)도 신기했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단연 연희 판이었다.
호랑이, 원숭이를 수족처럼 부리는 동물놀음, 사람의 몸이 어찌 저리될 수 있나 탄복했던 기예, 신기한 분장과 표정 연기만으로 심금을 울리는 연극.
거기에 비하면 조선에서 탐독했던 열하일기 ‘환희기’에도 나온 환술사의 재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충격적일 정도의 신기함이 가시면서 환술사의 수가 빤히 보였던 것이다.
과장된 몸짓과 언변으로 구경꾼의 시선을 훔치는 사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손.
눈에 띄지 않게 다음을 준비하는 조수들.
다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것은 감추는 옷자락과 부채.
그게 기후의 심정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루이스 신부를 만난 것이 그즈음이었다.
환술사가 판을 걷은 자리에 홀로 남아 그들의 손동작을 무의식적으로 흉내 내던 기후에게 머리카락이 부들 돗자리처럼 누런, 검은 옷의 양인이 나타나 동전을 없애는 환술을 보여준 것이다.
청나라 말을 거의 모르던 때였지만 기후는 두렵지 않았다.
심장을 간질이는 그 재주를 익히기 위해 성당을 드나들며 필담과 손발을 동원해 여태까지 본 것과는 좀 다른 서양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루이스 신부가 포르투갈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기후도 북경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에 돌아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강삼의 말대로 양반이 조선에서 천한 환술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이라니, 그건 더욱 막막했다. 일단 살아서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보십시오. 밀양에서 또 서찰이 왔습니다요.”
숙소로 들어간 기후에게 강삼이 편지를 갖다주었다. 기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보나 마나 당장 돌아오라는 내용일 것이다.
“거기 두어라.”
“안 보십니까요?”
편지를 탁자에 갖다 놓으려던 강삼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런데 늘 보던 진사 나리 글씨체가 아닙니다요.”
과연 겉봉에 적힌 것은 아버지의 글씨가 아니라 성품처럼 반듯한 형님의 글씨체였다.
기후는 혹여 아버지께 변고라도 생겼나 싶어 편지를 뜯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부친이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요?”
“형님이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긴 했지만 금세 털고 일어나곤 했던 형님이었는데 시름시름 앓다 자리보전한 지 벌써 반년도 넘었다니.
강삼이 쯔쯔, 혀를 찼다.
“그래서 그리 돌아오시라고 편지를 보냈구먼요.”
기후가 서찰을 꽉 움켜쥐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두 개의 팔이 동시에 그를 잡아당긴다.
포르투갈로.
조선으로.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