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 토끼를 만나다

“안 가세요?”

곱상하다고 하기에는 깊은 눈매가 주는 인상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비현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인기 배우 류비현, 그는 데뷔 10년 만에 명실상부한 스타가 된 회사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소쿠리 엔터테인먼트 대표 우진은 차가운 비현의 표정을 보는 게 개운치만은 않았다.

“가, 가긴 갈 건데…….”

“왜요? 그 영화 하자고 1년을 조른 것도 모자라서, 이제 촬영까지 들어갔다가 엎어진 영화 땜빵이라도 뛰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아니, 조성진이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킨 건 제작사 탓도 아니고, 감독 탓도 아니지. 나는 그냥 그 영화가 너무 아까워서, 그러니까 원작도 너무 아깝고! 야. 네가 그 영화가 감독 입봉작이라서 마음에 걸리나 본데, 야. 입봉만 아직 안 한 거지. 그 바닥에서는 진짜 유명한 신예 감독이야.”

커피 광고 모델이 아니랄까 봐, 비현은 우아한 포즈로 잔을 들고 있다가 쾅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놨다. 우진은 깜짝 놀라 혹시 그의 손이 미끄러진 것은 아닌지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비현의 긴 손가락은 안정감 있게 찻잔 손잡이를 잡은 상태였다.

“대표님.”

우진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본능이 남 보기에는 흠잡을 곳이 없는 비현에게서 얼른 도망치라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어? 왜 그렇게 무섭게 불러?”

‘류비현이 진짜 보물은 보물 아닙니까? 내 친구 놈 하나가 디스 넷에 있는데 일주일 내내 류 배우 뒤를 쫓아다녔는데도 진짜 아무것도 못 건졌다고 하더라고요. 데뷔 10년인데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치길 하나, 여자 문제를 일으키길 하나, 작년에 학폭 문제로 배우들이고, 아이돌들이고 줄줄이 굴비처럼 엮어 들어가는 데도 류 배우는 무탈했잖아요? 그때 류 배우 초중고 안 뒤진 기자들 없을걸요. 솔직히 류비현 배우한테 촌스러운 본명 빼고 걸리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 흔한 성형설 하나 없는 모태 미남 배우 아닙니까?’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송 기자와 오전에 나눈 잡담이 우진의 머리를 스쳤다.

‘보물, 보물은 보물이지! 얼음장보다 차가운 내 보물.’

“제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관심 없습니다. 연기 변신도 마찬가지고요.”

“아니, 알지. 아는데.”

비현은 송 기자의 말대로 지난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다니며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 여자를 만나 입방아에 오르지도 않았다. 서른두 살의 젊은 배우 류비현은 말 그대로 일과 집을 오가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연기력 논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깟 사이코패스 역으로 제가 연기력을 입증해야 합니까? 그동안 제가 맡은 캐릭터들이 로맨스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캐릭터였고, 다른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왜 연기 변신이 필요한 겁니까?”

현대물 로맨스, 사극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 비현이 그간 이룩한 배우의 삶은 삭막한 현실과는 달리 모두 달콤한 로맨스로 일관되어 있었다.

‘신물이 올라온다고! 지긋지긋한 로맨스!’

우진은 비현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티스트 운영 팀에서도 비현의 연기 변신은 지금이 적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모험을 원치 않는 비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알지. 다 달랐지.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은…….”

전작 ‘핏빛 궁궐’에서 비현은 말에서 떨어져 발목이 돌아가는 사고를 입었다. 생각보다 빨리 건강을 되찾긴 했지만, 우진과 운영 팀은 비현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는 동의했고, 이제 대중에게 확 달라진 배우 류비현의 비상을 선보여야 할 때였다.

애가 타는 우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대본 확인하고 있습니다. 작품 선택하면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비현은 가차 없이 우진의 입을 막았다. 더는 듣고 싶지도 않다는 의미였다. 울컥한 우진이 소리쳤다.

“야, 오광순!”

그의 입에서는 비현의 실명이 터져 나왔다. 순간 안 그래도 깊은 비현의 눈동자의 푸른 불꽃이 일었다. 흠칫한 우진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가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비현의 턱에서 우드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진은 얼른 며칠 전에 산 비싼 명품 카디건을 집었다. 오늘 아침 카디건을 입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던 우진이 비현의 눈을 피하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회. 회의가 있었네. 류 배우 나 바빠서 얼른 가봐야겠다.”

분명 비현은 한 줌의 자산도 없던 소쿠리 엔터테인먼트를 훌륭한 회사로 성장시킨 보물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그와의 의견 차이는 우진을 매번 지랄발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우라질 놈! 벽창호 같은 놈! 그러니 저렇게 생겼는데도 옆에 여자가 하나가 없지!’

***

“아직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환자분 상태를 일단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덩치가 제법 큰 의사 선생님은 커다란 테디베어를 닮은 남자였다. 분명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하지만 유리의 차가운 손은 계속 벌벌 떨리기만 했다.

“네, 감사합니다.”

유리는 이른 새벽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올라왔다. 할아버지 필수가 입원 중이던 요양 병원에서는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허울뿐이던 아빠가 타국에서 죽은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유리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빠의 죽음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고필수는 그러지 못했다.

“괜찮아, 유리야. 할아버지는 금방 일어나실 거야.”

그때 유리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친구 지선이 유리의 손을 붙잡았다. 지선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유리가 고개를 들어 지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안 그래도 작고 연약해 보였던 유리는 저번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있었다.

아픈 할아버지 곁을 지키느라 고생하는 유리의 손을 지선이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면 자기의 마음이 유리에게 조금이라도 전달될 것 같아서였다.

“고마워. 지선아.”

금세 친구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리가 자기보다 큰 지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지선은 친구 유리가 이렇게나 작았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고맙긴 친구끼리.”

“그렇지? 좀 닭살 돋긴 했지.”

중환자실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맥없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웃지 않고는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디 네 할아버지가 보통 분이시니? 저러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유리야. 얼른 물이나 한잔 가져와라.’ 이러실걸.”

사실 유리의 할아버지 필수는 주변에서 안하무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노인이었다.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무례한 사람’ 그것이 필수를 향한 사람들의 평가였다.

“맞아, 그러실 거야.”

유리에게 언제나 버겁고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던 필수는 3년 전 치매를 진단받았다. 그리고 그는 이후 급격하게 변해 갔다. 점점 초라하고 작아졌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에는 그는 더 약해졌다.

유리는 그가 다시는 원래의 고필수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지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자.”

지선 역시 필수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친구 유리를 위해 화사하게 웃으며 희망찬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럼 우리 근처에서 커피라도 마실까?”

지선이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계속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를 긴 싸움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 유리가 지선의 손을 꼭 쥐었다. 지선이 내려다보자 유난히 큰 유리의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나, 잠깐 가봐야 할 데가 있는데 병원에 있어 줄 수 있어? 오늘은 누구라도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까 올라오면서 고모한테 연락하긴 했는데…….”

지난 3년간 필수가 지방에 있다는 핑계로 찾아오지 않은 고모 세진이 언제 병원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아, 내가 있을게. 어차피 나 오늘 너랑 여기 있으려고 했는데 뭐가 문제야.”

유리가 혼자라는 걸 잘 아는 지선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일 출근하는 애가 무슨, 나 금방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있어 줘. 나 금방 다녀올게.”

“너랑 여기 있을 거거든! 그런데 너 오늘 무슨 약속이 있는 거야?”

매번 난동을 부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필수 때문에 유리는 지방 병원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온 유리에게 그것도 이런 날 약속이 잡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선을 쳐다봤다.

“나, 파혼 좀 하고 오려고.”

지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유리는 벌써 커다란 갈색 가방을 손에 쥐고 중환자실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지선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계속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는 배우 류비현이 헌혈을 권장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는 것을, 물론 지선은 친구 유리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선이 류비현의 헌혈 포스터 문구를 천천히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오늘 당신의 선택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

“대표님.”

마중을 나올 것 같지 않았던 비현은 넓은 거실을 가로지르며 우진을 불러 세웠다.

“어? 왜?”

혹시라도 비현이 마음을 바꿨나 싶어 우진은 해맑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하지만 비현은 예상과 달리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김 팀장님은 지금 회사에 있습니까?”

그러더니 대뜸 매니저 진서의 위치를 파악했다.

‘뭐야? 생전 묻지 않던 김 팀장은 왜? 영화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어?’

우진이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촉감조차 감미로운 비싼 명품 카디건에 팔을 끼워 넣었다. 비현의 용건이 무엇이든 자기가 권한 영화를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큰 의미는 없었다.

“김 팀장님 좀 불러 주십시오. 약속이 생겼습니다.”

비현의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니컬한 분위가 흐르는 그의 외모가 더욱 출중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휴대전화 속 메시지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래, 저 자식은 성질부릴 때 더 매력적이라니까! 그런데 왜 화가 잔뜩 났지? 평소답지 않게?’

“약속? 무슨 약속? 가는 길이면 내가 태워 줄게, 나는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임우진이야. 기탄없이 나한테 말해.”

우진은 일부러 물색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순간 비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진을 쳐다보는 비현의 눈빛이 왠지 위협적이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김 팀장님 좀 불러 주시죠. 바쁘시면 제가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우진의 호의를 무시한 비현의 말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어우, 저 싸가지 없는 자식! 사람들이 저놈 진짜 성격을 알아야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지……가 아니지. 알면 내가 제일 먼저 망하겠지. 그렇지, 그건 아니지. 그래. 우리 비현이가 욕을 하길 했어? 누굴 비하하길 했어? 쟤는 그냥 재수가 좀 없는 거야. 그래도 다행이잖아? 남들한테 안 그러니까.’

욱하는 마음이 들었던 우진이 급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고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할게, 김 팀장한테 우리 류 배우님이 오늘 약속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

머리가 조금 복잡했다. 3년 만의 만남이었다.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카페에 앉아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불안한 눈길로 쳐다봤다.

조심성이 많으니까 혼자 오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리에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서둘렀던 것뿐인데 유리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뜨거운 핫초코가 담긴 잔을 당기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유리의 하얀 손가락을 허공에서 허둥거릴 뿐 쉽게 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약속을 깨자고 해야겠어. 아무리 그래도 핼러윈데이는 너무하잖아?”

유리는 오늘이 핼러윈 축제를 하는 날인지도 몰랐다. 지하철에서 만난 기괴한 분장을 한 인파를 보고서야 알았다. 유리의 손이 급하게 커다란 갈색 가방 안을 더듬었다.

“하필 이런 날 약속을 잡다니.”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유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때 젊은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야, 너 뭐야?”

휴대전화를 찾던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인산인해를 이룬 큰길과는 달리 오래된 분위기의 작은 커피숍에는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유리는 그래서 이 커피숍을 약속 장소로 골랐다. 좁은 골목 안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작은 커피숍은 종업원이 음료를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유리가 지켜보니 음료를 서빙하던 직원이 실수로 여자의 바지에 음료수를 조금 흘린 것 같았다.

“야, 미안하면 다야? 미안하면 다냐고?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세탁비는 드릴게요. 정말…….”

어쩔 줄 몰라 하는 직원 옆으로 수건을 든 사장이 뛰어나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실수로 음료수를 쏟았나 봐요. 제가 세탁비 드릴 테니까 진정하시고…….”

낡은 소파의 촉감, 오래된 장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아늑함, 유리는 이런 분위기의 오래된 커피숍을 좋아했다. 하지만 저런 상황은 예외였다.

“야, 너 사장이야? 얘들이 진짜 세트로 웃기고 있네? 너희는 내가 세탁비가 없어서 이러는 것 같아? 어디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네 앞에서 세탁비, 세탁비야?”

10월 말인데도 얼굴이 긴 여자는 구릿빛 허리가 드러난 톱과 다 떨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리의 눈에는 돈도 별로 없어 보이는 데다가 추워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였다.

휴대전화를 찾던 유리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손님…….”

“죄송해요.”

몸집이 조금 작은 남자 사장과 볼이 통통한 종업원이 젊은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진정해? 진정해? 너는 지금 내가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아? 얘가 지금 내 바지에 음료수를 쏟았는데? 야. 너 말해 봐. 일부러 그랬지? 일부러 그런 거 맞지? 너 아까 저기 카운터에 있을 때 나랑 눈 마주쳤잖아? 그때 너희 사장한테 뭐라고 그랬어? 욕했냐? 내 욕했냐고?”

때마침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가 다리가 없이 둥둥 떠다니는 유령처럼 그들 곁으로 느릿하게 다가갔다.

“그래도 찔리기는 하셨나 보네요? 금연이라는데 굳이 실내에서 담배 피우고, 이 커피숍 혼자 전세 낸 거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당신도 속으로 찔리긴 했군요. 다짜고짜 직원분한테 욕했냐고 따지는 거 보니까?”

그러고는 여자의 구릿빛 팔을 잡으며 용감하게 말했다.

“뭐? 뭐야? 이건 또!”

태닝한 오이를 닮은 여자가 유리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평소 겁이 많은 유리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사과해요, 음료수를 흘린 건 직원분 실수가 맞지만! 당신은 지금 잘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이를 닮은 여자가 날뛰는 내내 앞에서 낄낄거리고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뭐냐?”

어이없어하며 유리를 노려보던 여자도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넌 뭐니?”

여자의 까만 손이 유리의 긴 머리채를 슬쩍 잡은 것도 마침 그때였다. 유리의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

하필 이런 날, 이태원으로 날 불러내?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비현은 뒷좌석에 앉아 점점 많아지는 기괴한 복장의 인파를 조용히 노려봤다. 하지만 원망할 대상은 없었다. 오늘 핼러윈 축제가 있다는 사실을 비현은 물론 매니저 진서 역시 몰랐다.

“와, 진짜 어마어마하네요.”

약속 장소가 있는 골목까지 용케 들어오긴 했지만,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지금 다시 이 동네를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진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게요.”

비현과 진서는 서른두 살 동갑내기였다. 벌써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놓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진서는 일 처리가 깔끔하고 공과 사가 분명한 비현을 좋아했고, 비현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 진서의 올곧은 일 중독을 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