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위를 싫어하는 남자

“작년 추웠을 때 거기 온도가 몇 도까지 내려갔었다고 했지?”

서울을 출발한 지 20분쯤 지났을 때 옆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거나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가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남자가 눈치채지 않게 그를 관찰하던 지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남자는 자신의 그런 행동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휴.

지윤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하 25도, 체감 온도는 더 떨어졌을걸?”

룸미러를 통해 주원을 살피며 승혁이 말했다.

“아, 미치겠네. 추운 거 정말 싫은데. 거기 1년 중 거의 반이 겨울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원은 미간을 좁혔다.

저음의 목소리가 톤을 높이니 색다르게 들렸다.

‘인터뷰 안 합니다.’

‘인터뷰 안 한다고 했죠?’

‘인터뷰 안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지?’

남영 그룹 홍보실에 입사하고 처음 맡게 된 그룹 사보지에 실릴 인터뷰,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기획안을 작성하고 호기롭게 지금 자신의 옆에 앉은 강주원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었다.

‘너 미쳤어?’

‘너 선배들이 시도 안 해봤는 줄 알아? 시도하고 또 해도 오르지 못할 단 하나의 산이 강주원 상무야.’

‘포기해라, 상처만 남는다.’

‘강주원 상무, 인터뷰 얼마나 싫어하는데……. 100% 거절한다에, 내 전 재산 건다.’

‘신입의 패기가 무섭긴 무섭군. 홍보실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들도 못 해낸 일을 하려고 하는 걸 보면…….’

‘놔두세요, 좋은 경험하는 거죠.’

‘깨닫게 되겠죠. 선배 말이 진리라는 걸.’

홍보실 내에서는 물론이고 친한 동기들마저 다 뜯어말렸다. 처음의 자신감은 점점 사라지고 움츠러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오기도 생겼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선배들이 오르지 못한 ‘강주원’이란 산, 내가 넘어 보련다.

‘인터뷰 안 합니다.’

수화기를 통해 첫 번째 거절을 들었을 때, 처음부터 될 거라곤 생각 안 했다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또한 세상사 모든 것이 삼세번 아니겠냐며 유비가 제갈공명을 불러내기 위해 세 번이나 그를 찾아간 ‘삼고초려(三顧草廬)’를 가슴에 새겼다.

‘인터뷰 안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지?’

지극히 차갑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25년 인생 내공의 말발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애썼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마음의 상처는 더 컸다.

‘포기해라, 상처만 남는다.’

‘깨닫게 되겠죠. 선배 말이 진리라는 걸.’

맞다, 상처만 남았다.

맞다, 선배 말은 곧 진리인 것이다.

패잔병처럼 축 늘어져 입사 동기인 태영과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인 탓에 술병까지 얻어 이틀을 고생해야 했다.

그뿐인가? 차선책은 생각하지 않아 또 다른 인터뷰 대상자를 찾기 위해, 기획안 작성을 위해 며칠 밤을 또 꼬박 지새워야 했다.

6개월 전.

“내가 뭐랬어? 이지윤. 100% 안 된다고 했지? 세상에는 넘지 못하는 산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우리 ‘싸도미’ 강주원 상무님을 뭐로 보고.”

술을 쭉 마신 태영이 빈 술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는 말했다. 빈 술잔을 손에 쥔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윤이 고개를 들었다.

“싸도미?”

한심하다는 투로 태영이 길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지윤의 귀에 박힌 말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싸도미’란 단어였다.

“너 몰라?”

동그란 눈이 더 커진 지윤을 보며 넌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태영이 물었다.

“뭘?”

“회사 내에서 강주원 상무님을 ‘싸도미’로 부르는 거.”

지윤의 눈동자에는 의문 부호로 가득했다. 딱 봐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다. 태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도 모르면서 강주원 상무에게 인터뷰 요청이라니.

“얘 봐, 얘 봐.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었니? 너 자신감 내가 무모하다고 했었지?”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지윤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싸도미’ 뜻이 뭔데?”

자존심 상하면서도 알고 싶긴 한가 보군.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태영은 눈가를 길게 늘어뜨렸다.

“좋은 머리로 유추해 봐.”

평소라면 태영의 말에 장단 맞춰 주며 대화를 이어 나가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선배들이나 다른 동기들에게 결과는 뻔한데 왜 그랬느냐는 말을 많이 들은 터였고, 강주원 상무의 지극히 차갑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체증처럼 마음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도 회사 내 그의 별칭을 알고 싶은 마음은 뭔지 모르겠다.

“나 머리 안 좋거든.”

샐쭉한 표정으로 지윤이 말하자 태영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우리 ‘싸도미’ 상무님께 인터뷰 거절당했다고 자폭하는 거야?”

“자폭은 무슨…….”

“힘내, 이지윤. 남영 그룹에 입사했지, 그것도 홍보실로 발령받은 것 보면 너, 머리 좋은 거니까.”

머리 좋다는 말에 지윤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남영 그룹에 입사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작게 말했다.

“미스터리하다.”

“응?”

“나, 남영 그룹에 입사한 거 말이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설마 되겠어?’ 미친 척하고 원서를 넣었는데 덜컥 합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화려한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닌데, 1차 서류 전형에서 합격했을 때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최종 면접까지 붙고 나자 합격의 기쁨보다 멍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오죽하면 착오 난 것 아니냐며 인사팀에 전화할 생각까지 했을까?

정말 착오라고 할까 봐 그만두었지만.

지윤은 면접에서 강주원을 처음 만났다.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면접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봤어요?”

“어머, 어쩜 저래요?”

“저 미모 실환가요?”

“면접관인 걸 보면 꽤 높은 위치의 사람인 것 같은데 말이죠.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면접관 중에서 유독 튀었죠?”

“기획조정실 상무님이시래요.”

“상무? 정말 다 가진 사람이네요.”

“그 사람 얼굴 보느라 면접 망친 것 같아요. 어떡하죠?”

면접실에서 나오면 면접을 본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할 텐데 하나 같이 한 사람에 대한 얘기로 가득했다.

‘기획조정실 상무? 잘생긴 사람인가 보네. 대체, 어느 정도기에?’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면접실에 들어선 순간 남다른 아우라를 가진, 눈을 내리깐 채 서류를 넘기는 한 사람의 모습에 바로 수긍하고 말았지만.

‘구태의연한 대답이군요.’

처음 본 자신에게 콕 집어서 그렇게 말했었다.

구. 태. 의. 연.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었다.

화살촉이 가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다.

조금 가라앉았던 상처가 다시 ‘화르르’ 붙었다.

‘네?’

‘좀 더 참신한 대답을 기대했는데 말이죠.’

그렇게 말한 그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었다.

‘뭐지? 저 표정은. 대학도 그저 그렇고, 화려한 스펙도 없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도 변변찮아서 지금 나 무시하는 건가?’

지나친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분명 최저점 줄 거야. 뭐, 줄 테면 주라지.’

“뭐, 미스터리할 것까지야. 남영 그룹에서 널 합격시킬 만하니까 뽑았겠지.”

태영의 말에 지윤은 지난 생각을 떨치고 태영의 눈과 마주했다.

“그런가?”

“그렇다니까.”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싫지만 강주원 상무의 인터뷰 요청 건을 겪으며 선배들과 친한 동기들에게조차 이해하기 어렵다는 투로 많은 말을 들어야 했던 지윤은 예전의 기억과 함께 많이 의기소침해졌던 터라 태영의 지금 말은 작은 위로가 되어 지윤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건 그렇고 안 알려 줄 거야?”

“뭘?”

“싸도미.”

“아…….”

술잔을 탁 내려놓은 태영은 두 손을 맞대며 손뼉을 쳤다.

“유추하기는 싫은가 보군.”

“응, 싫어.”

“기집애, 단호박처럼 단호하기는. 그래 이 언니가 바로 알려 준다.”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다.

“왜 말 안 해?”

“띄워 줘야지.”

“뭘?”

“대답하게 운을 띄워 줘야지.”

“뭐?”

“삼행시처럼 읊어 볼 테니까 운 띄워 달라고.”

술버릇 나오는 거 보니 많이 취하긴 한 모양이다.

할 수 없다. 술에 강한 자신이 맞춰 줄 수밖에.

“싸.”

옆 테이블에서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가?

그래도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굳이 강주원 상무의 별칭을 알고 싶어 ‘싸’라고 외치는 자신이 싫었다.

“싸가지를 장착한.”

뭐, 예상했던 바다.

“도.”

운을 띄우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지만 태영의 목소리가 큰 탓에 자신의 테이블로 쏟아지는 시선이 늘어났다.

“도도한.”

이것 역시.

“미.”

“미남자.”

퍼펙트, 부정할 수 없다.

“지윤아, 우리 상무님 별명 정말 딱이지 않냐.”

휘휘, 공중에서 술잔을 휘저으며 태영이 외쳤다. 어찌나 크게 외치는지 가게에 있는 손님 모두의 시선이 자신의 테이블로 향했다.

태영은 술에 취해 지금 행동을 인지하지 못할 테니, 또다시 부끄러움은 마주 앉은 자신의 몫이었다.

“한태영, 목소리가 너무 커. 조용조용.”

지윤은 태영에게 바짝 다가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작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많이 취한 태영은 입가와 눈가를 동시에 쭉 늘어뜨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야, 뭐 어때?”

“뭐 어떠냐니. 어휴,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니까.”

지윤은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많이 취해서요. 죄송합니다.”

방향을 바꿔 가며 손님들에게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인사를 전한 지윤은 의자에 앉아 오른 검지를 입가로 가져갔다. 제발 목소리 낮추라는 듯이.

그런 지윤을 보며 태영은 입가를 길게 늘어뜨리며 씩,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너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자.”

“알았어, 이것 하나만 물어보고.”

“물어보다니, 뭘?”

지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우리 ‘싸도미’, 아니 강주원 상무님에게 왜 인터뷰 요청한 거야?”

뜻밖의 물음에 지윤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뭐, 그냥…….”

지윤은 두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왜 대답이 바로 툭, 튀어나오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냥?”

불투명한 대답에 태영이 되물었다.

“하고 싶었으니까.”

조금의 시간 차를 두고 내놓은 지윤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그러니까 왜, 하고 싶었냐니까.”

그냥 넘어가지 않고 태영이 집요하게 물었다. 잊고 있었다. 태영의 또 다른 술버릇, 술에 취하면 집요해진다는 것.

지윤은 또 생각해야 했다. 머릿속에 반짝, 하고 한 단어가 스쳤다.

“핫한…….”

“뭐?”

지윤의 목소리가 작았기에 태영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조금 크게 대답하라는 듯, 또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라는 듯.

“우리 그룹 내에서 제일 핫한 인물이잖아.”

맞는 말이다. 어느 누가 들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뭐, 그건 그렇지만…….”

그것 보라는 듯이 지윤은 씩, 웃었다.

“너, 수상해.”

입을 앙다문 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상하다니, 뭐가?”

태영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애써 피하며 지윤은 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너, 관심 있지?”

별안간 튀어나온 그 단어에 지윤은 방금 마신 물을 태영의 얼굴에 내뿜고 말았다.

“아, 더럽게.”

지윤이 내뿜은 물이 자신의 얼굴에 묻자 눈을 질끈 감으며 태영이 말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지윤은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휴지를 꺼내 태영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미안, 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니까 그렇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얼굴에 묻은 물을 마저 닦아내며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태영이 물었다.

“당연하지.”

“맹세해?”

뭘, 맹세까지.

한태영, 정말 못 말리겠다.

“이지윤 왜 대답 못 해, 맹세하느냐고.”

“그래 맹세해.”

“정말 관심 없단 말이지?”

집요하다, 정말.

자신의 대답에도 태영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정말 관심 없어, 절대 Never.”

“Never.”

너무 생각에 몰입을 한 탓인지 저도 모르게 지윤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목소리도 큰 것 같다.

조용하고 조용한 이 차 안 공간에서.

지윤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두 주먹은 왜 불끈 쥐었단 말인가. 지윤은 주먹을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미치겠다, 확실한 이불킥 각이다.

옆에 앉은 주원의 시선이 지윤에게 향했다.

망했다.

어쩌지?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하지?

짧은 순간 지윤의 머릿속은 오만 가지 단어가 스쳐 갔다. 하지만 딱히 단어의 조합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위기에 강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위기에 강한 자신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구태의연한 대답이군요.’

지윤은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았다. 자신의 옆에 앉은 강주원 때문이라는 걸. 이 상황을 수습하려다 또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위기에 강한 자신의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 버렸다는 걸.

에잇, 모르겠다.

무조건 아니라고 발뺌하고 보는 거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발뺌이 최고지.

지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니라는 듯 두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그냥 넘어가 달라는 듯이.

“Never라뇨? 지윤 씨, 무슨 일 있어요?”

역시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부드러운 저음의 승혁 목소리. 차갑게만 느껴지는 주원의 목소리와는 다른 느낌이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지려는 순간, 차가운 표정의 주원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입을 길게 늘어뜨리며 또다시 지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느껴진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이상할지.

아니나 다를까 주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웃지 마.”

뭐, 뭣.

지윤은 알지 못했다. 잠시 뒤 나올 말이 더 충격적이라는 걸.

“못. 생. 겼. 어.”

확실한 2연타다.

‘뭐, 이런 싸가지…….’

상사만 아니라면 이 말을 포함해 지금 머릿속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온갖 거친 말들을 거침없이 날려 주련만.

적어도 25년 인생 동안 못생겼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뭐, 아주 예쁘다까지는 물론 아니지만 예쁘다는 말은, 들었었다.

뭐, 싸가지라는 아이템을 기본적으로 장착한 사람이니까.

워낙 잘생겨서 다른 사람들은 다 못생기게 보이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사람을 옆에 앉혀 두고 못생겼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니.

역시 선배들 말은 진리다. 그들이 강주원 상무를 겪으며 지은 ‘싸도미’라는 별칭은 정확했다. 지금 이 순간 ‘미’ 자는 확실히, 정말 확실히 빼고 싶지만.

잘 적응하고 있었는데.

좋은 사수 만나 업무도 빠르게 익히고 까칠한 선배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까칠함도 모두 지워 버릴 만큼 홍보실이 그리웠다. 가슴에 깊숙이 각인될 만큼 얼굴 하나하나가 선명히 그려지고 그리웠다.

자신이 강주원 기획조정실 상무, 김승혁 기획조정실장과 함께 인터라켄 호텔에 발령을 받자 반응은 두 가지로 확연히 갈렸다.

고생길 훤히 열렸다.

또 하나는 남영 그룹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인터라켄 호텔에서 그것도 강주원, 김승혁 두 미남자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것.

자신은 전자에 훨씬 무게를 실었지만, 역시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지윤의 머릿속은 자신의 인사 발령을 보고 갖가지 반응을 쏟아냈던 선배들, 동기들의 말들로 둥둥, 떠다녔다.

‘와, 남영 그룹에 입사하고 가장 센세이션한 인사 발령이네.’

그러니까 그게, 왜 하필 나에게.

‘왜, 왜, 도대체 왜?’

그러니까요, 선배.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라니까요.

‘너, 고생길 훤히 열렸네.’

역시 선배 말은 진리예요.

‘부럽다. 강주원, 김승혁 두 미남자와 일할 수 있어서.’

한태영, 지금 내가 들은 말을 직접 들어 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누가 인사 발령을 낸 거지? 이상한 조합이네. 강주원 상무님과 김승혁 기획조정실장, 그리고 너, 이지윤이라니. 도대체 누구지? 이 인사 발령 낸 사람.’

그러니까요, 선배. 누굴까요? 이 이상한 조합으로 인사 발령을 낸 사람이.

지금이라도 이 이상한 조합으로 인사 발령 낸 사람을 찾아가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이 인사 발령 없던 거로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는 개뿔.

금수저 해신에게 비싼 술까지 사줬다.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이 될지도 모르는 호텔에서의 직장 생활을 조금 더 잘 견뎌 내기 위해 강주원, 김승혁 두 사람에 대한 정보를 해신에게서 얻어냈다.

해신의 말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리, 를 외치며.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목적지도 같은데, 차도 넓고 괜한 에너지 낭비하며 따로 갈 필요 있나요? 같이 가죠.’

김승혁 기획조정실장의 그 달콤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해야 했다. 몇 번을 제안해도 단호히 거절해야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