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또는 서문. 영혼을 끌어모은 암행

자줏빛 로브를 입은 여자는 두 손에 들고 있던 황금 가면을 썼다. 헐렁한 로브는 여자의 몸매의 굴곡을 드러나지 않게 했으며 가면을 쓰게 되어 얼굴 또한 노출되지 않았다. 여자치고는 매우 큰 키로 인해서 이러한 복장을 하게 될 경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와 가면 안에 감추어지게 되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또한 가면은 표면에 어떠한 표시도 없고 조각도 새겨져 있지 않은 민무늬 가면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차림새를 한 번 더 매만지면서 점검할 때였다.

끼익, 하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뚜벅뚜벅하는 규칙적인 보폭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건, 오늘이 약속한 암행의 첫날이군.”

“예, 전하. 허락해 주셔서 저는 매우 감사하고 있어요.”

눈 부분만이 보기 위한 목적으로 뚫려 있는 가면이었기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자국 소리를 듣고 돌아선 그녀의 눈은 순간 벌집이 아닐까라고 의심이 될 정도로 진하고 양이 많은 꿀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부디 조심하기를…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할 정도로 힘든 암행이니까… 그리고 신호를 하면 이를 바로 받을 수 있는 심복들과 병력들을 근처에 따르게 할 테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신호를 해주겠나? 로건.”

“물론이에요 전하. 제 암행은 전하의 근심거리를 덜기 위함이지, 새로운 근심거리를 만들어 드리기 위함이 아니에요.”

로건이라 불린 자줏빛 로브의 여인이 성큼성큼 황태자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황태자는 일반 여자치고는 장신인 그녀보다도 눈에 띌 정도로 더 큰 장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살이 없고 호리호리하면서도 근육이 잘 붙어 있는 체형이었다.

황태자의 얼굴 역시 굵지 않으나 남성적인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고, 깊고 큰 두 눈과 당당하게 자리 잡은 빈틈 없는 반원 모양의 두 귀, 충분히 높지만 과하게 크거나 하지 않고 딱 좋은 크기의 코, 붉은 입술 등이 돋보이는 빼어난 미남이라 할 만한 얼굴이었다.

황태자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부드럽게 그리고 가볍게 로건의 황금 가면을 이마 부분에서부터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면서….

“로건! 사람들은 그대의 가면이 빛나는 것을 보면서 그 휘황찬란함만 부러워할 뿐, 그대가 이 가면을 쓰기까지 흘린 그 많은 눈물은 보지 못할 테지.”

“실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제게 있어서 황금 가면보다 더 빛나는 것은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All that glitters is you.(빛나는 모든 것은 당신.)”

로건이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비록 황태자비의 후보들 중에 한 명이긴 하지만, 내 마음속에 원픽은 오로지 그대뿐이었소. 오래전부터….”

“전하, 오늘의 립 서비스는 특별하군요. 입술에 꿀을 바르셨나 봅니다. 전하로 인해서 저의 귀가 달달해졌습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 후보는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황태자 전하를 처음 만났었지?’

첫 암행을 앞두고 여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면 아래의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쓰디쓴 시간도 있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도 있었기에 그것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 같았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어지러운 제국의 현 상황에서 그녀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도 녹록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여기까지라도 왔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그녀의 손 안에 그의 손이 잡힐지도 몰랐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제까지처럼 운명의 손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손을 홱 하고 밀어내려 한다면,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 운명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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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계형 여자 귀족

“챔피언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헤헤.”

직업들마다 그에 따른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지금 지체 높은 가문의 자식들이나 입을 만한 귀한, 그리고 솜씨 있는 장인이 만들어 낸 갑옷을 입은 젊은이에게 아첨을 하고 있는 상인 또한 자신의 직업에 딱 맞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아첨과 눈치였다.

“그래.”

귀한 집안의 아들로 추정되는 젊은이가 시원스럽게 답변했다.

“저쪽에 보라색의 로브를 입은 붉은 머리 아가씨 보이십니까?”

“젊어 보이는데, 저 아가씨가 챔피언이란 말인가?”

“도련님이 거주하신다는 황태자 전하의 직속령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이곳 지방에서는 꽤 알아주는 마법사입죠. 최고의 실력자입니다요.”

“그래?”

젊은이의 눈이 마치 진귀한 보석을 바라보는 여인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이름이 로건이라고 하죠.”

“로건이라….”

“곧 시합이 시작됩니다. 다들 마법의 팔찌를 착용하고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떠한 종류든 부정행위나 범죄 행위를 저지를 경우 법원에서 사법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우스터 공작님의 영지이고 사법권 또한 우스터 공작님께 귀속됩니다.”

상인은 아까의 아첨하던 기색과 달리 참가자들에게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상인의 뒤로는 시합을 주재하는 우스터 공작의 부하들과 병사들이 서 있었다. 우스터 공작의 부하들은 명단을 들고 참가자들을 확인하며, 상인이 말한 마법의 팔찌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있었다.

팔찌를 착용한 참가자들은 주저 없이 사냥터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군집 지역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매년 열리는 오크 사냥 대회장이었다.

지능은 사람보다 낮지만 그 몸집은 7피트 정도의 인간으로 치면 세상에 드물 정도의 거인이라고 불리기 충분한 몸집을 가진 오크들은 전신이 파란색인 피부색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만의 언어가 없고 동물들 정도의 몇 가지의 소리로 가장 원시적인 욕구의 의사소통 정도만이 가능한 지능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포악한 성격에 사람을 좋은 먹이의 하나로 삼는 탓에 우스터 공작 등 오크의 군집 지역과 경계선에 위치한 영지를 가진 귀족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때문에 우스터 공작의 주재하에, 자발적인 참가자들을 불러 모아 상금을 걸고 매년 오크 사냥대회를 열고 있는 것이었고, 최근 몇 년 동안의 우승자는 빨간 머리에 뛰어난 여성 마법사인 로건이었다.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준 마법의 팔찌는 인간 참가자들과 대결을 하게 되는 오크의 몸에 마법등으로 빛의 표시를 하는 기능과 이러한 표시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교전 중인 오크를 공격하는 자를 불빛의 신호로써 주최 측에 알려 주는 기능을 했다.

처음 참가하는 신입의 참가자들은 이러한 마법팔찌에 대한 안내 교육을 받았고, 이 중에는 아까 챔피언이 누구인지를 묻는 젊은 청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작님 나오셨습니까?”

상인과 부하들, 병사들은 사냥 대회를 관람하러 온 공작을 보고 인사를 했다.

무술 실력은 뛰어나지 않으나 호화로운 갑옷 차림을 한 우스터 공작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영지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용맹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관람석에 앉았다.

“이봐!”

우스터 공작이 손가락을 까딱해서 상인을 불렀다. 상인은 주저 없이 그쪽으로 재빠르게 튀어갔다.

“예, 공작님 부르셨습니까?”

“경험이 많은 자네의 생각으로, 누가 우승 후보야?”

우스터 공작이 물었다. 오크를 소탕은 해야겠고, 자신들의 사병의 손실은 입고 싶지 않은 우스터 공작이었다. 그놈들을 소탕하느라 자신들의 사병이 손실을 입는다면, 누가 좋은 일이 되겠는가?

바로 자신을 노리고 눈을 벌겋게 뜨고 항상 바라보고 있는 라이벌들이 아니겠는가? 용병부대를 쓰자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우승자에게 상금을 부여하는 이 사냥 대회였다.

드는 비용은 용병을 고용할 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주머니는 가볍고 실력은 뛰어난 가난한 인재들은 앞뒤를 다투어 참가 신청을 했다.

또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려는 개인 용병이나, 명예를 드높이려는 기사들도 참여했다.

“최근 몇 해 동안 연달아 챔피언을 차지한 저 붉은 머리의 마법사 아가씨와 저기 저 귀한 집안 자제로 보이는 젊은 기사입죠. 이변이 없다면 둘 중 하나가 우승할 겁니다.”

상인이 친절하게 우스터 공작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중년의 나이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기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작은 점포로 시작해서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힘든 세월을 보내다가 영지에서 오크로 골머리를 앓는 우스터 공작의 영지의 사람들을 보고, 이문에 밝은 장사꾼의 마인드로 상금을 건 대회를 제안한 것이 우스터 공작에게 채택되어서 주최 대행을 하면서 매해 상당한 돈을 챙기고 있는 그였다.

돈도 돈이지만, 상인으로서의 그의 명성 또한 올라갔다.

귀족만이 이름값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장사의 세계에서는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큰 장사판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더 큰 이름값이 필요했다.

상인은 자신에게 더 큰 이름값을 준 우스터 공작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마법사 아가씨는 몇 년간 검증이 되었다고 하니까 이해가 가는데, 귀한 집안 자제로 보이는 친구가 과연 그 정도의 인재인가?”

“뒤에서 조용히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서 몸을 푸는 것을 기사님들과 같이 보았는데, 기사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오랜 훈련을 쌓은 것은 물론 실전을 많이 겪은 몸놀림이랍니다.”

“그렇구만.”

뛰어난 무예는 아니었으나 우스터 공작 또한 젊은 시절에 무예 수업을 거쳤다. 갑옷에 적응하고 전투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사들의 맨몸 운동 소양은 당연시되는 부분이었다.

기사들은 기본적인 레슬링과 갑옷에 적응하는 움직임을 훈련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몸을 유연하게 해주는 곡예와 같은 아크로바틱한 동작과 심지어 주먹 기술도 연마했다.

상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선두에 선 로건은 벌써 세 마리째의 오크를 쓰러뜨려서, 합계 판에 마법팔찌로부터 신호를 받은 진행자들이 표시를 하는 중이었으며, 귀한 집안의 젊은이로 보이는 젊은 청년 역시 네 마리째의 오크를 수월하게 잡아서 진행자들이 놀라움을 표시하며 합계 판에 표기를 하는 중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째의 오크를 겨우겨우 잡기 위해 몰아가는 중이었다.

초반에도 이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매년 진행된 결과들을 통해 보면 중후반으로 갈수록, 상위권이 아닌 참가자들은 체력과 마나가 더 빨리 고갈되기에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매년 사람들의 사냥의 표적이 되는 오크들은 사람들보다 지능이 낮아 고등전술을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거구에 괴력을 바탕으로 돌이나 나뭇가지 등을 도구로 사용하여 저항했다.

때문에 대회 도중에 참가자들이 부상당하거나 죽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이렇듯이 오크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면 분명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하는 위험한 대회이기도 했다.

“과연 자네 말이 맞구만, 속도도 속도이지만, 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위력은 최상위 등급의 마검사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군.”

“특이 사항은 저 젊은 귀족으로 보이는 마검사는 에이전트가 없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접수를 받는 랜돌프 경이 말하기를 급히 참가하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고 합니다. 또한 에이전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합니다.”

“그래? 흐흐흐 잘 되었군.”

청년을 바라보는 우스턴 공작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랜돌프야 빠꿈이니까 알아서 잘했겠지. 내가 괜히 랜돌프의 횡령과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었던 게 아니지.’

랜돌프는 우스턴의 부정과 탐욕을 채워 주기 위한 더없이 좋은 살아있는 도구였다….

***

비록 무예가 뛰어나지 않았지만, 자신도 젊은 시절 정식 수련 기간을 거쳐 오며 많은 기사와 마검사를 겪어 본 공작이었다. 보는 안목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스터 공작의 말대로 젊은이의 검에서 뿜어져서 망치처럼 강력한 힘으로 적을 공격해서 쓰러트리는 푸른색의 마나는 하급의 마검사는 물론 중급의 마검사들조차도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신기한데, 현재 실존한다 실존하지 않는다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그리고 그 기원이 베일에 가려진 심장 끄기 마법을 구사하는 건가?”

거구의 오크가 로건의 공격에 ‘크아아아’ 하는 괴성만을 남기고 가슴을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쓰러지자 귀한 집안의 젊은이로 보이는 기사 갑옷을 걸친 청년이 붉은 머리의 여자 마법사, 로건에게로 바짝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거대한 오크의 무게와 넘어지는 가속도가 합쳐져서 ‘쿵’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땅이 순간적으로 진동으로 떨릴 정도였다.

“논란의 대상이 될 것도 없어. 이미 이 지방, 우스터 공작님의 영지에서는 내가 구사해서 실존한다로 결론이 난 마법인데. 먼 지방에야 소식도 머니까 알려지지가 않은 것이고.”

“상당한 패기인데, 성격이 마음에 들어.”

“근데 넌 누군데 아까부터 자꾸 반말이야?”

사실 로건은 어이가 없기는 했다. 로건도 나이가 젊기는 했지만, 처음 보는 이 젊은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로건보다 몇 살 정도 아래로 보였다. 나이에 비해서 엄청난 마스터급의 마검사이기는 했지만….

“응, 너한테 반말할 정도의 신분은 되는 사람.”

청년 또한 로건 못지않은 패기에 가득 찬 답변을 돌려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마이웨이일까?

“내가 궁금하면, 최선을 다해 사냥을 하고 나를 따라와 봐. 그러면 알려 줄 테니.”

청년은 로건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와 겨루는 중에도 여유까지 보이며 부드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이 남자… 대체 어떤 사람일까?’

로건은 궁금해졌다.

#2. 겉달속쓰(겉은 달고 속은 쓴) 인생

“넌 일이 더 많겠네.”

“응. 1차로 눌어붙은 오크의 피와 살점을 닦아낸 뒤, 기름칠도 해야 하니까. 네 옷은 빨아야겠다.”

“매년 습관이 되어서 출장 세탁부를 부르고 있지.”

로건의 말대로 그녀의 옷은 기사들이 입는 갑옷과 달리 활동하기 편한 마법사들의 일반 의복에 가까웠기 때문에, 여기저기 묻은 오크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의 피보다 양도 많고 냄새도 진한 오크들의 피에 역겨웠었다. 첫 시합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그 역겨움을 참는 것이 더 힘들었었다.

그러나 이 예민한 젊은 아가씨를 적응하게 만든 것은 여기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왕립 의대의 교수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이모부의 집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해에 우승을 하고 옷을 빨러 갔었던 세탁소에서 로건이 우승자임을 알고 매해 대회마다 대회가 끝나면 대회장으로 출장을 오겠다고 한 것이 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저런 옷이 엉망이군요. 오늘도 우승하셨습니까? 아가씨?”

“오늘은 2등이에요. 이 인간 때문에.”

로건이 옆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보다도 젊어 보이시는데 대단한 실력자시군요.”

세탁부가 혀를 내둘렀다.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거 좀 먹게나.”

“이건 거위고기 아닙니까? 실력도 좋으신 도련님이 관대하기까지 하십니다.”

청년이 세탁부에게 내민 것은 평민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귀족들이나 먹는 거위고기였다.

“힘을 많이 썼을 텐데 배고프지 않아?”

“넉넉히 가지고 왔어. 걱정하지 마.”

“귀한 거위고기를 넉넉히 먹을 정도라면 지체 높은 신분의 도련님일 테지. 큰소리칠 만한데.”

로건이 내뱉었다.

“도련님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청년보다 조금 높은 연배로 보이지만, 아직 충분히 젊다고 볼 수 있는 젊은 기사가 다가와서 청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기사의 뒤로는 병사로 보이는 무장한 이들도 대여섯 명이 서 있었다.

“저기… 기사님.”

“네, 아가씨.”

“이 도련님의 신분은 대체 뭐죠? 나이는 어린데 실력은 기가 막히게 출중하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로건은 기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나 꼼꼼하게 기사를 조심스럽게 스캔했다. 큰 키에 균형이 잡힌 체격의 그는 허점 없이 주변을 항시 경계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실력자라는 것이 확실한 타입의 기사였다. 전형적인 고위직들의 경호 기사 또는 전쟁에서 이름을 날리는 일류 기사 타입이었다.

고위직들은 혼탁한 현재 시국에서 이런 이들을 곁에 두고 있으면,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에 많은 연봉을 주고서라도 이런 이들을 주저 없이 채용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그보다 부상자들이 있는 듯하니까 좀 돌봐주지.”

오크 사냥은 힘든 일이었다. 오크들은 인간으로 치면 거인이라 할 정도의 키와 체격에 그에 걸맞은 괴력까지 갖추었다. 만약 그들이 인간과 같은 고등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지능이 있었다면, 제국에는 정말 생지옥이 펼쳐졌을 것이었다.

“예, 도련님. 사용인들 부탁하네.”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련님을 경호하는 동안 사용인들은 부상자들을 찾아 간단한 치료를 해주거나 음식을 주거나 했다.

도련님이라 불리는 정체 모를 청년은 무례하거나 강압적이지 않지만, 카리스마 있게 아랫사람들을 지휘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매년 이런 위험한 대회에 참가한다는 게 놀라운데?”

“달리 기댈 곳이 없거든….”

“신분은 낮아 보이지 않는데…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인가?”

“겉달속쓰 인생이야.”

“겉달속쓰 그게 뭔데?”

“겉은 단데 속은 쓴 인생. 내가 만든 말이야.”

“재미있는 아가씨인데….”

청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사냥 대회가 끝나서 쓸 필요가 없어진 투구를 겨드랑이에 끼고 쓴 탓에 드러난 얼굴의 선은 너무 굵지 않으면서도 강인해 보였다.

깊이 들어갔으면서도 큰 두 눈, 그 위로 자리 잡은 진하면서도 너무 굵지 않게 보기 좋게 호를 그리며 뻗은 눈썹이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듯한 빼어난 미남이었다.

‘인생 살맛 나겠는데. 저렇게 생기고 저 실력에… 귀한 신분이기까지 하면….”

로건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시합에 처음 참가라 잘 모르는데, 마을에 내려가면 쉴 곳이 있나?”

청년이 로건에게 물어 왔다.

로건은 행여 속마음을 들킨 것은 아닐까 움찔할 뻔했으나, 특유의 패기로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역시 첫 참가라 모르는 게 많군. 이동식 마차숙소가 우리를 태우러 올 거야. 마차 안에 침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타자마자 바로 자면 돼. 따라서 숙소는 걱정 안 해도 되지. 마차가 지정된 장소에서 아침까지 멈추니까. 그리고 식사와 필요한 물건들도 주문할 수 있어. 다만 문제는 다른 거지. 우승자 씨.”

“우승자 씨?”

“우승한 것은 사실이잖아. 그리고 딱히 널 부를 말이 없잖아. 넌 신원을 밝히기는 죽어도 싫다고 하고, 아랫사람들한테도 단단히 함구시킨 모양이고.”

“알았어. 근데 다른 문제란 게 뭐야?”

“그 이동식 마차숙소라는 게 지금 지치고 힘든 참석자들한테는 귀중한 자원이고, 보통 수요가 공급보다 많기에, 그거 잡는 게 전쟁이거든.

“이동식 마차숙소를 가지고 장사하는 상인들도 상황에 따른 변수가 너무 많다고 사전 예약을 안 받아 줘. 따라서 이동식 마차숙소가 오면 참가자들끼리 줄을 서고, 새치기를 하고 하면서 먼저 타려고 하는 바람에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거든 우승자 씨.”

“그렇구만.”

로건의 설명을 들은 우승자 씨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