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1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유죄인 세상.

함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출산하면 돌연변이 인간을 낳게 되는 스펠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

끊임없이 변이되고 새롭게 발생되는 바이러스들로 인한 위험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류는 유전자 컨트롤이라는 극단적인 통제 시스템을 가동하게 되었다.

태어나는 아이 들의 몸에 최적의 유전자 조합을 인식할 수 있는 칩을 내장하였고, 사람의 몸에는 두 가지 인식시스템이 부착되어 자신과 맞는 상대를 만나면 센서가 활성화되어 표시되었다,

심장에는 상대와의 신체, 감정, 유전자 적합 지수가 수치화 되어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 숫자로 나타나고. 손목에는 심장까지 가기전의 간단한 감정 반응을 볼 수 있는 전자도트가 내장되었다,

긴 바이러스와의 전쟁으로 인간들은 종족 보존이라는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였다. 언제 지구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들을 견디며 몸에서는 면역력을 높기기 위한 긍정호르몬들의 분비가 줄어들었고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의욕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몇 차례의 바이러스와 전쟁으로 사람들의 DNA에는 본능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후손에게 고통을 반복시키고 싶지 않다는 유전자가 각인되었고. 내일 보다는 오늘이. 미래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것만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종족 보존을 위해 국가는 2인 1출산을 의무로 지정하였고, 결혼은 의무가 아니었으나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출산을 하지 않은 하위 2개의 취약등급 남녀는 15개월 동안 공동출산시스템을 위한 인구 복구 동원 시스템이라는 군에 징집되어야 했다.

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출산율을 높여 인류의 멸종으로부터 종족을 지키기 위한 군대였다.

엄청 비장한 세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삶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맞지 않은 상대와 함부로 관계를 맺다가 돌연변이들을 출산 하게 되는 것을 금하고, 최적의 상대를 만나기 위한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뿐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지구가 생긴 이례로 늘 반복되었던 평범한 일상 일뿐이었다.

‘무슨 이런 알바가 다 있어? 책읽어주는 알바?’

이서는 무슨 이런 고리타분하고 쓸모없는 아르바이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 세상에 참 돈이 썩어 넘치는 사람들이 많구나 생각하다가 시급을 확인하고는 숨을 참았다.

이서의 손목에 박힌 회색 전자도트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나 지금 흥분한 거야? 이깟 돈 땜에?’

이서는 아르바이트 모집자 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암. 이깟 돈이 최고지… 책이 아니라 더한 것도 해야지. 그럼. 이 비현실적인 알바 비라면.’

“여보세요? 책 읽어 주는 알바 공고 보고 연락드렸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윤이서입니다.”

[도트 색깔은?]

상대는 대뜸 도트 색깔을 물어왔다.

“회… 색인데요.”

면접도 보기 전 도트 색깔부터 물어보는 것이 이서는 주눅이 들었다.

최적의 유전자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도트의 색깔은 계급이었다.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 능력을 나타내는 중화항체 생성이 잘되지 않는 그룹인 회색을 시작으로 노랑. 초록. 파랑으로 이어지는 도트의 색상은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수치이기도 했다. 좋은 유전자와 면역체계를 타고난 가장 안전한 계층인 파란색 도트를 가진 사람들은 출산에 대한 아무 제한이 없는 그룹이었고 회색은 바이러스에 피폭된 아이들을 낳을 확률이 높아 결혼과 출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도트의 색상을 진하게 해서 상위 색상으로 올라 갈 수 있는 방법은 2가지뿐이었다.

인위적으로 수치 유지를 도와주는 약물인 포톨을 먹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족스런 관계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작용으로 사람의 신체에서 직접 포톨의 성분을 생성해내는 것.

포톨을 살 수 없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기회가 바로 인구 복구 동원 시스템인 군대였다. 출산을 위해 강제적으로 투여해서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고의 아이들을 낳기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었다.

인류는 열등한 유전자로 유지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상의 유전자들 일뿐. 그리고 그 최상의 유전자들이 살아 갈 수 있도록 필요한 노동의 범위 안에서 하위 등급들이 존재했다.

돈으로 꾸준히 호르몬을 주입해서 바이러스로부터 방어율을 높일 수 있는 초록까지는 계급상승이 가능했지만, 가난한 이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녹음을 시작 할 테니 본인의 목소리로 말씀을 해주세요.]

“녹음이요?”

[네. 면접을 대신해서 윤이서 씨의 목소리를 녹음할 예정이니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시면 됩니다.]

“전자 도트 색상도 말해야 하나요? 회… 색이라고.”

전화기 너머 하준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윤이서 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니 아무 말씀이나 해주시면 됩니다.]

이서가 마른침을 삼키고 전화기를 두 손으로 잡았다.

‘시간당 10만원. 20시간이면 포톨 한 병을 살 수 있는 돈.’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이서입니다. 스물 네 살이고 꿈은 헤어 디자이너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청담동의 수헤어에서 보조로 일하고 있습니다. 퇴근 후에는 시간이 많아서 원하시는 책 읽기 녹음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주말에 몰아서 해도 되고요. 이런 일은 처음이지만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아 무슨 일이든 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같이 자란 위탁 동생을 위해 동화책을 읽어 준 경험도 많습니다. 아. 위탁 동생이라는 말을 해버렸네요. 제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는 말씀 안하셔도 된다고 하셨는데.”

[괜찮습니다. 이런 단기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다 비슷한 처지이니까요.]

“어려운 책인가요? 지식을 요하는….”

[상관없습니다. 한글만 읽을 줄 안다면.]

“아… 그럼 녹음 다시 해도 될까요? 아깐 떨려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더 잘 할 수 있어요.”

[녹음 끝났습니다. 결과는 추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이서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네… 꼭 연락 주셔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보려고 공고들을 뒤지는데 엄마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야… 주말인데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서 뭐해? 나와서 애 목욕이라도 좀 시켜. 코딱지만 한 월급 벌어 온다고 생색내지 말고.”

이서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지아까지 위탁받았다.

군대에서 출산만 한 아이를 키우지 않은 부모들이 많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의무 때문에 낳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가정에는 매달 위탁비용이 지급되었고 이서와 지아는 태어나자마자 지금의 엄마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이서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아가 벌써 욕조 안에 들어가 있었다. 10살 지아는 또래에 비해 몸집이 작아 아기 같았다. 군대에서 포톨로 호르몬 수치를 조절해서 태어난 아이이지만 백만분의 1 확률로, 들을 수는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뮤트 키즈로 태어난 아이였다.

[언니. 나 혼자 씻을 수 있어.]

지아가 수화로 이서에게 말했다.

“등 밀어줄게. 일주일에 한번은 깨끗하게 씻어야지.”

[그럼. 나도 언니 등 밀어 줄게.]

지아가 이서에게도 옷을 벗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럴까 그럼? 오늘 언니도 우리 지아 찬스 좀 쓸까?”

이서가 옷을 벗고 욕조 안에 같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가니 욕조물이 흘러서 바닥으로 넘쳤다. 지아가 거품을 만들어서 이서의 머리위에 올려주며 까르르 웃었다.

[언니 아이스크림 같아.]

“지아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우리 목욕 끝나고 아이스크림 먹을까?”

둘이서 장난을 치고 있는데 엄마가 욕실 문을 열더니 소리를 질렀다.

“애 좀 밀어주고 나오랬더니 열 살도 더 먹은 년이 하는 짓이 초등학생이랑 똑같네. 나올 때 욕실청소까지 싹 다 하고 나와. 나와서 애 공부도 좀 봐주고.”

일상 같은 엄마의 잔소리가 한차례 욕실을 휘젓고 나자 지아가 이서에게 말했다.

[언니. 나 혼자 공부 할 수 있어. 언니는 일요일 저녁인데 쉬어. 일하느라고 힘든데. 내가 숙제 다 하고 다리 주물러 줄게. 하루 종일 서 있느라고 힘들지?]

이서가 지아의 볼을 잡아당겨 뽀뽀를 하며 말했다.

“우리 지아 왜 이렇게 이뻐? 천사 아니야?”

핏줄이 섞이지 않은 동생이지만 지아는 이서에게 혈육보다 더 진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다.

이서는 지아를 먼저 내보내고 욕실 청소까지 싹 다 한 후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사랑이 금지된 나라] 라는 커뮤니티를 로그인을 했다.

지아처럼 태어날 때부터 선척적인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나 이서처럼 회색 전자 도트를 가진 사람들이 정부의 바이러스 대체 정책에 불만을 품고 만든 인터넷 공간이었다.

이서는 딱히 자신의 삶에 불평이 있지는 않았다.

그냥 이런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고 성인이 되어서 본인이 바이러스에 취약한 회색도트 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슬프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이서가 원해서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서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서에게 구박을 일삼는 엄마였지만 버리지 않고 성인이 되도록 키워주었고, 지아처럼 예쁜 동생도 있고 열심히 일하면 돈도 벌 수 있는 자신의 생활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원망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아에 대한 걱정 때문에 가끔은 이런 커뮤니티에 들어 와 정보를 찾아보곤 했다.

-뮤트 키즈 아이들의 위탁가정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 상향을 위한 청원에 동의 해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상대가 회색도트라 걱정이 되어요 란 글이 눈에 띄자 클릭해서 댓글들을 읽어보았다.

-도트의 색깔은 말 그대로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 지수가 낮다는 것일 뿐. 상대에게 더 많은 바이러스를 감염시킨다는 뜻이 아니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사랑에 빠지면 면역체계가 활성화 되어 도트의 색깔이 노란색 이상으로 올라 갈수도 있어요. 녹색까지 올라가는 커플도 본적이 있어요.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커플이신가 봐요. 그분들 혹시 결혼도 하셨나요?

-네… 그분들은 정식으로 결혼도 하셨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지금도 잘 살고 계셔요. 포톨 같은 건 전혀 먹지 않고 사랑의 결실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셨어요.

지아가 어른이 되어서 세상에 나갔을 때는 편견 없는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끔 들어와 보는 커뮤니티이지만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들을 보는 것은 이서에게는 남의 나라 일 같아보였다.

월요일 아침 숍 오픈 전 정리를 하는 이서에게 친구이자 동료인 지수가 다가왔다.

“일요일인데 집에만 있었어? 어제 되게 바빴는데. 웨딩도 많았고. 지지배 운도 좋아. 일요일에 오프고.”

“바꿔줄까? 내가 수요일에 쉴까?”

“됐어. 안 그래도 수영 쌤 스텝들 갈구느라 군기 빡 들어가 있는데. 무슨 욕을 먹으려고. 어제 하이준 왔었거든. 수영 쌤 공중 부양하는 줄 알았잖아.”

지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이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화배우 하이준? 근데 왜 수영 쌤이 공중부양을 해?”

“그래. 영화배우 하이준. 수영 쌤 도트가 무슨 고장 난 신호등 인줄. 흥분해서 깜박거리는데 보는 사람 완전 부담스러운 거 있지. 하이준 케어 해준다고 발이 바닥에 닿질 않았어. 이렇게 공중부양해서 빛의 속도로 다니는 것 같았어.”

“밴드 안차고 계셨어? 샴푸 할 때 말고는 계속 차고 있어야 되잖아.”

심박수에 따라 변동이 오는 전자도트를 가리기 위해 숍에서 밴드를 차고 있는 것은 의무였다. 고객들에게 사적인 감정들을 들키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몰라. 어디다 빼 놓고 잊어버리신 건지. 나도 다른 디자이너 쌤 보조 봐주느라 미처 정신이 없었어. 암튼 되게 웃겼어.”

지수가 수영 쌤 흉내 내는 꼴이 우스워 이서가 소리 낮춰 웃으며 말렸다.

“야. 누가 들음 어쩌려고 그래. 그만해.”

“원장님 계셨음 한소리 들었을 텐데 일요일은 뭐 수영 쌤이 짱 먹는 날이니. 그건 그렇고 너 하이준 본적 없지?”

“아마… 없을 걸?”

연예인들이 워낙 많이 다니기도 하고 특별히 관심도 없어서 이서는 하이준을 본 기억이 없었다. 스텝들 뒤에 서서 보조하거나 뒷정리를 하다보면 다리가 퉁퉁 부어 휴게실에 들어가 잠시라도 앉고 싶은 생각뿐 본다고 해도 딱히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저번에 다니던 숍에서 까다롭게 굴어서 문제 있었다더니. 이번에 우리 쪽으로 바꿨나봐. 진짜 잘생기긴 했더라. 얼굴이 요만한데. 턱이 완전 깎아지른 그 뭐냐 미술수업에 쓰는 그 연필처럼 끝은 동그란데 뾰족해.”

지수의 표현이 웃겨서 이서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키득거렸다.

“그게 잘생긴 거야? 연필 같은 게?”

“니가 실물을 못 봐서 그래. 얼굴 보면 딱 무슨 말인지 알거야. 아… 어제 누가 너 찾아왔었어.”

“나를?”

“찾아 왔다기보다는 손님 중에 어떤 남자분이 여기 윤이서 씨 일하는 곳 맞냐고 물었어. 너 예전 숍에서 알던 손님 아니야?”

“내가 무슨 고객이 있어. 그럴 사람 없는데. 나 따라서 숍까지 바꿀.”

“쉬는 날이라고 했더니 좀 아쉬워하는 것 같던데…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좀 물어볼걸 그랬다. 어제 너무 바빠서 그 생각까지 못했음.”

“나도 없는데 열심히 일하느라 수고 했쪄.”

이서가 지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혀 짧은 애교를 부렸다.

“너 핸폰 메시지 들어오는 소리 아니야?”

지수의 말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짧은 문자가 와있었다.

[업무 내용은 전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지수야… 나 합격했나봐.”

이서는 휴게실 밖으로 소리가 나갈까봐 입을 틀어막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합격?”

“시간당 10만 원짜리 알바.”

“뭐… 그런 게 다 있어? 무슨 알바인데 그래. 그럼 너 이제 여기 관두는 거야? 나는 어떡하라고. 나도 데리고 가야지.”

이서보다 지수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점심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도 모르게 후딱 먹어치우고 이서는 지수와 숍 근처 공원 벤치에 나와 앉았다.

“이제 마음의 준비는 됐고. 전화 걸면 되는 거지?”

이서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한명 더 필요 없냐고도 꼭 물어보고.”

신호가 가자 바로 상대가 받았다. 면접 봤을 때 통화했던 그 남자였다.

[하하준 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제 녹음으로 면접 봤었는데 보내신 문자보고 전화 드려요.”

[윤이서 씨? 축하드립니다. 최종 면접에 합격하셨어요. 자택 주소 남겨주시면 며칠 내로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집주소요?”

책이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집으로 받으면 엄마 몰래 아르바이트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야. 이거 이상해. 알바를 가장한 책 판매 아니야? 니가 가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왜 책을 보내준다는 거야?”

핸드폰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듣고 있던 지수가 손으로 커트 하라는 시늉을 했다.

[저희가 선정해서 보내드리는 책을 낭독하셔서 녹음 파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시급은 10만원이지만 책이 대부분 1시간 낭독 분량이 되지 않을 거라서 1시간미만 시에도 기본으로 책정해드립니다.]

하준의 설명에 지수가 다른 질문을 해보라고 옆에서 쿡쿡 찔렀다.

“무슨 책이냐고 물어봐. 이상한 책인지.”

지수의 말대로 이서는 어떤 종류의 책이냐고 물었지만 하준의 대답이 모호했다.

[받아보시면 압니다. 그럼 집 주소 남겨주시면 오늘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녹음방법에 대한 안내문도 같이 동봉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지수가 의심에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야한 책이다. 이거.”

“야한 책?”

“그래… 여자들 목소리로 녹음해야 되는 책. 미쳤다고 시급을 그렇게 세게 주고 이런 녹음 알바를 시키겠어. 아니 동영상으로 즐길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참 취향 이상한 사람들 많은가봐. 굳이 막 상상해야지 더 느낌이 와서 그런 걸까?”

지수는 이미 어떤 아르바이트인지 확인이 끝난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 뭐 직접 만나서 하는 것도 아니고 녹음만 해서 보내는 거면 위험할 것도 없고. 시급도 좋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할 거야?”

“할거냐고?”

당연히 하고 싶어서 신청한 일자리였지만 지수의 말에 이서는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어 망설였다.

“할 거면 주소 보내라잖아. 책 보내준다고.”

“돈이 필요하긴 한데… 근데 그런 거면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도 지금 그게 딱 걱정이었어. 남자도 한번 못 만나 본 게. 섹시하게 간드러지는 거… 이런 거 가능하겠음?”

지수의 폰에 호출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잠깐 편의점 간다더니 어디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수영 쌤 촉수 움직이기 시작한다. 야. 그냥 그 알바 해. 코딱지만 한 월급에 보조 일 다 시키면서 점심시간도 제대로 보장 안 되는 이런 직장보다는 백배는 낫다. 최소한 거기는 시급은 양심적이잖아. 녹음이면 근무시간이랑도 상관없고."

지수가 이서의 폰을 빼앗아 하준에게 수 헤어숍 주소를 보냈다.

“미용실로 받아. 니네 엄마 아시면 돈 다 빼앗아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