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젊은 건물주

“다희야, 아침에는….”

“어제 일은 우리 둘 다 술 때문에 그런 거니까 잊어주세요.”

“어…?”

“그 말 하려고 했잖아요.”

지훈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어제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불려 나가 이리저리 뛰어다녔더니 너무 피곤해 의자에서 자고 있었는데 다희가 들어온 것이다. 다희의 얼굴에는 어제의 따뜻함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도 있으니 듣고 있었는데 잊어달라는 말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단정 지어 이야기하는 것도 기분 나빴다.

“그리고 어제 사주신 술값도 조금 있다가 입금해 드릴게요.”

“그건 괜찮아. 그리고 어제 일은 술 때문만은 아니야.”

“네?”

“술에 취해서 그런 거 아니라고.”

“…….”

*

“안녕하세요.”

“네. 오늘도 일찍 나왔네요?”

“네. 정리할 게 많아서요.”

“아, 그럼 저는 올라가겠습니다.”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항상 만나면 웃으면서 밝게 인사하는 다희 덕분에 지훈은 매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할 때 일부러 다희의 가게를 지나는 일도 많았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 같은 앳된 얼굴로 방긋 웃고, 기분 좋아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니 정말로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다희가 1층 가게에 온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 가게는 소위 말하는 역세권에 위치해 있어 ‘임대’란 말이 나오면 바로 나갈 만한 곳이었다. 다희가 있는 건물은 몇 년 동안 임대가 나오지 않았는데 다희가 있는 곳이 사정상 나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은 지훈의 소유였다.

“사장님, 보증금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헤.”

“아니에요. 대신 월세는 밀리지 마세요.”

“네. 그럼요.”

다희의 가게가 있던 자리는 작은 분식집이 있었다. 지훈이 건물을 인수하기 전부터 운영하던 분식집이었는데 장사가 잘되어 옆 건물로 확장 이전 했다. 사실 옆 가게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확장을 하려고 했지만 옆 가게는 이전을 할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옆 건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임대’ 안내문을 붙이자마자 다희가 찾아온 것이다.

“실례지만 몇 살이에요?”

“네? 저요? 26살입니다.”

“아…, 그런데 무슨 가게를 하신다고요?”

“옷가게를 하려고요.”

지훈은 다희를 처음 보고 ‘미성년자가 아닐까’란 생각에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물었다. 26살이란 말에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1층에는 가게가 4개 있었다. 가운데 출입구를 기준으로 양쪽에 두 개씩 있었는데 다희가 들어올 가게는 건물 오른쪽 끝 가게였다. 그리고 바로 옆은 꽃가게가 있었다. 옷가게가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지훈은 다음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런데, 사장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보증금이 조금 부족한데…, 대신 월세를 조금 더 내는 것으로 해도 될까요?”

“음….”

‘보증금’ 이야기에 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내놓은 가격은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지금 있는 모든 가게는 지훈이 건물을 인수하고 한 번도 월세를 올린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올리라고 난리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지훈의 건물에 있는 세입자들은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제가 가진 돈으로 살 집도 구해야 해서요.”

“…또 실례되는 질문인데, 가족이 없어요?”

“아, 그게….”

“미안해요. 살 집도 구해야 한다는 말에 내가 실수했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요, 큰 언니는 서울에 있고, 작은언니는 해외에 있어요. 그래서….”

“내가 쓸데없는 걸 물었어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당황한 것은 지훈이었다. 자신의 동생보다 어린 다희가 살 집까지 구해야 한다고 했을 때 어쩌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질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희의 답을 들으니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께서 안 계시지만 저, 언니들한테 사랑받고 살았어요, 헤헤.”

“…네. 그럼 분식집 나가면 정리하고 연락드릴게요.”

“어? 그럼 계약하시는 건가요?”

“네. 우선 다음 달에 나가신다니까 그때 연락드릴게요.”

“와, 감사합니다. 제 연락처는….”

신이 나서 나가는 다희를 보며 지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계약금 이야기는 묻지도 않네.’

*

“그래서, 그냥 왔다고?”

“응, 다행히 보증금도 조절해 주신대.”

“계약금은? 계약서는?”

“어?”

오늘 있었던 ‘좋은 일’을 알리기 위해 다희는 제일 친한 친구인 민주를 불렀다. 다희는 얼마 전부터 가게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좋아하는 옷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에서 시작하다 그곳이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져 가게를 이전해야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지훈의 건물 1층에 ‘임대’란 안내를 보고 바로 들어간 것이다.

“계약서 같은 거 써야지.”

“아….”

“거기가 어딘데?”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 앞 건물.”

“에? 거기에 가게가 나왔다고?”

민주가 놀랄 만도 했다. 어릴 때부터 놀러 다니며 본 곳이고 대부분 가게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자리가 나왔다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사실 다희도 놀랐으니까.

“응. 지나가다가 봤는데 ‘임대’라고 붙어 있어서 바로 들어갔지.”

“부동산에 갔었어?”

“아니, 연락처가 있어서 연락했더니 그 건물 4층으로 오라고 해서 갔지.”

“누군지도 모르는 데 너 혼자 갔다고?”

“건물 주인이라고 하시던데?”

“야, 그래도 그렇지. 부동산도 아니고 그런 곳에 혼자 갔어?”

다희는 흥분하면서 이야기하는 민주를 보며 ‘뭐가 문제지?’란 표정으로 보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민주의 말에 이해가 되었다.

“요즘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너처럼 예쁜 애들한테 이상한 짓 하는 사람도 많고….”

“아….”

“다음에 갈 때는 나랑 같이 가던가, 준이랑 같이 가.”

“준이 요즘 바빠.”

“그럼 나랑 같이 가.”

민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민주의 말을 들으며 떠올린 지훈의 모습은 나쁜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은 신사 같았어.”

“신사?”

“응. 실수했다고 바로 사과하고 이야기하는 내내 존중해 주고, 그랬어.”

지훈이 어떤 말은 했는지, 어떻게 사과했는지 다희는 하나하나 설명했다. 민주가 말한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려는 듯 다희는 이야기했다.

“음…. 꼰대는 아니었나 보네?”

“꼰대? 그렇게 젊은 꼰대가 있을까?”

“젊다고?”

“응, 한 20대 후반 정도?”

“에? 건물 주인이 20대라고?”

통화하면서 자신이 건물 주인이라고 해 의심도 하지 않고 찾아간 다희였다. 그리고 마주한 지훈을 보고 민주가 놀란 것처럼 놀랐었다. 건물주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지훈의 외모도 한몫했다.

“그렇게 보였어. 그리고….”

“그리고?”

“진짜… 잘 생겼어.”

“그래? 준이보다?”

다희가 지금까지 살면서 여자 중에서 예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작은언니였고, 남자 중에서 잘생긴 사람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윤준이었다. 그런데 준이보다 오늘, 더 잘생긴 사람을 본 것이다.

“…응. 내가 보기엔 준이보다 잘생긴 것 같아.”

“와…. 세상에서 준이가 제일 잘생겼다고 한 애가 바로 다른 사람이 잘생겼다고 하다니….”

“야, 바로는 아니다.”

“그게 그거지. 후후. 너 계약할 때 따라가야겠다.”

“그래. 그런데… 준이한테는 비밀이다.”

*

‘왜 연락이 없지?’

다희는 매일 지훈의 연락을 기다렸다. 한 달 후에 가게가 정리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기다리게 되었다. 하루에 몇 번씩 핸드폰을 보며 ‘사장님’에게 온 부재중 전화나 문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민주 말처럼 사기꾼인가?’

‘에이, 그렇게 잘생긴 사기꾼이 있겠어?’

‘아니지, 민주가 사기꾼은 기본적으로 외모가 된다고 했지.’

다희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금의 가게를 정리 중이었다. 지난 옷들을 정리하며 몇 년 동안 장사한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요즘은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옷을 사고 백화점이나 아울렛을 많이 이용하지만 동네에 있는 옷가게 치곤 다희의 가게는 생각보다 잘 되었다. 매달 생활비를 하고도 꾸준히 적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니 만족했다. 그런데 재개발이 확정되고 사는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가게를 정리해야 하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어? 사장님이다!”

*

“죄송해요.”

“아닙니다. 빨리 준비하셔야 장사도 빨리 시작하시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한 달 후에 나가겠다던 분식집이 이전할 가게가 일찍 나가 계약을 해야 하니 지훈에게 보증금을 빼달라고 했다. 새로운 가게로 빨리 이전해 장사하고 싶은 마음을 알기에 지훈은 보증금을 바로 입금해주었다. 분식집 사장님은 지금까지 월세도 올리지 않고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청소까지 하셨네.”

지훈은 가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1층으로 향했다. 가게의 이전이라 쓰던 것을 다 가져간다고 했다. 주방과 홀을 구분하기 위해 세워둔 가벽만 있을 뿐 가게는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분식집 이전을 지훈은 본 적 없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입자들이 지훈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만큼 지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도 깔끔하게 사용해 주고 월세도 밀리지 않고 제날짜에 꼬박꼬박 들어왔다.

‘건물주가 자식들 때문에 돈이 필요한 것만 아니면 팔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지훈이 이 건물을 사려고 할 때 공인중개사가 비싸지만, 제값을 한다고 했었다. 위치가 좋으니 월세도 꾸준히 올려도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지훈은 가게의 상태를 보며 옷가게가 들어오면 어떨지 상상을 했다.

‘연락해 볼까?’

넉넉잡아 한 달은 예상했다. 그래서 다희와 이야기할 때 한 달 후에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그보다 2주나 빨라졌으니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다희가 인테리어를 할지도 모르니 빨리 연락해도 될 것 같아 핸드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아, 네.”

‘사장님’이란 말에 지훈은 순간 당황했다. ‘사장님’이란 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듣지만 다희가 그렇게 부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 분식집이 오늘 나갔어요. 우선 가게부터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나갔네요. 그럼 내일쯤 가면 될까요?

“네. 편하실 때, 언제든 오세요.”

-그럼 내일 찾아뵐게요.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사장님!

끊어진 핸드폰을 보며 지훈은 헛웃음을 지었다. 다희가 끝에 ‘사장님’이라고 힘을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런 것 같은 느낌은 지훈만의 착각일까.

지훈은 가게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지훈이 일을 하는 사무실은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일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은 있었지만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 말로 1인 사무실이었다.

“오빠!”

항상 조용했던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로 지훈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그 소리의 주인은 발까지 동동거리며 시선을 끌려고 했지만 지훈의 시선은 책상 위의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짜, 이러기야?”

“…….”

“하! 이젠 말도 씹냐?”

“…….”

“아, 진짜 짜증 나.”

혼자서 열심히 떠들더니 지쳤는지 사무실 안에 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곤 지훈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지훈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미리 말은 안 한 건 미안해. 그런데….”

“‘그런데’는 빼고. 그 일은 더 이상 말하지 마.”

‘미안해’란 말에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을 보며 지은은 지금까지 지훈이 자신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지훈에게는 무슨 일이든 순서가 있었다. 일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랬다. 지금처럼 지은이 흥분해 이야기할 때는 더 그랬다.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말을 받아주고 대꾸해주었다.

“…나는 오빠가 혼자 있는 게 그래서….”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나 걱정해.”

“나? 나는 아무 걱정 없거든?”

“그럼 다행이고.”

“하, 말에 뼈가 있는 것 같다?”

지은은 친오빠인 지훈의 말에 괜한 짜증을 냈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상대가 지훈과 절친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모른 척해 주길 바랐다.

“그럼 이제부터 네 남친한테 싸우고 나 찾아오지 말라고 해.”

“흠, 우리 안 싸워.”

“어쨌든, 너희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지훈의 뜻을 지은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지난 주말, 지은은 자신의 남자 친구이자 지훈의 절친인 영준과 짜고 지훈을 불러내 소개팅 자리를 만들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보니 모태솔로나 다름없는 오빠가 걱정되기 시작했던 지은은 식사 자리를 핑계로 지훈을 불러냈고 넷이 식사한 후 자연스럽게 두 사람만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런데 저녁에 상대에게 연락이 왔고 지훈이 죄송하다고 했단 말을 들었다. 지은은 화가 나 지훈에게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고 결국 오늘 찾아온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도 걱정하셔.”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게.”

*

‘빨리 정리하자.’

지훈의 전화를 받고 다희는 마음이 급했다. 한 달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2주 만에 연락이 왔으니 정리하는 속도를 높여야 했다. 정리하면서 가게 곳곳을 살폈다. 첫 직장이자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니 추억도 많고 기억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다희가 옷가게를 한다고 했을 때 언니들이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해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못 갈 것 같아 미리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 대학이야 나중에도 갈 수 있으니까. 지금은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봐.”

고등학교에 들어가 친구들이 대학을 고민할 때 대학은 일찍이 접었기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이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부모님이 원단 공장을 하셔 어릴 때부터 옷감을 접해왔고 그것으로 이것저것 만들 때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옷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옷가게?”

“응, 내가 옷 좋아하잖아.”

초등학교 5학년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언니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지만 부모님이 보고 싶은 것을 빼면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 큰 언니와 10살, 작은언니와 8살 차이가 나니 언니들이 부모님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다희가 대학을 안 간다고 했을 때도 몇 번 ‘대학은 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긴 했지만 나중에는 이해해주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다.

“옷가게 할 생각이면 언니가 있는 서울로 와.”

“서울? 나는 서울은 싫어. 그냥 여기서 할래.”

“거기서 옷가게가 되겠어?”

“온라인으로도 판매할 생각이니까 괜찮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도서관을 다니며 보고 싶은 책을 봤다. 대부분 옷과 관련된 책이었다. 고등학교 때 기본적인 것은 배웠지만 전문적인 것은 몰랐으니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쇼핑몰 운영에 관한 것도 공부했다. 다희 자매가 살던 곳은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운영하신 공장이 있는 곳이었다. 서울처럼 도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골도 아니었다. 근처에 지하철이 들어서면서 많은 아파트가 생겨나 지금은 서울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래도 언니가 있는 데서….”

“괜찮아, 언니. 나 여기서 혼자 살았는데 뭘.”

“…그래도.”

미안해하는 큰 언니의 말에 다희는 순간 당황했다.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꺼낸 말인데 언니가 미안해하니 다희가 더 미안해졌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희는 초등학생이었다. 큰 언니는 서울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었고, 작은언니도 큰 언니와 같은 대학에 들어가 둘이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당연히 다희는 부모님과 살았는데 보호자가 없으니 다희도 언니들이 사는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언니들은 학교에 다니느라 바빴고 다희는 전과 다름없이 지내다 중학교부터 다시 부모님이 사시는 집으로 내려왔다. 집 주변에는 친척분들도 계시고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셨던 분들이 계셔 다희는 혼자 지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큰 집에서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웠지만 점점 익숙해졌고 서울에 있을 때보다 편안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언니들은 항상 미안해했다.

“돈은 통장에 있는 거 써.”

“…응. 필요하면 쓸게.”

통장에는 많은 돈이 있었다. 다 부모님께서 남겨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언니들이 취직한 후에는 매달 돈을 보내주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언니들은 같이 있어 주지 못하니 그렇게라도 하는 것 같아 나중에는 고맙다며 받았다. 어릴 때는 쓸 데가 없었고 지금은 자신도 돈을 벌기에 그 돈도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언니들한테 받은 돈까지 해서 좋은 곳으로 구하지….”

민주가 이번에 가게를 구할 때 보증금 때문에 고민하자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의 가게를 구할 때는 자본금이 없었기에 통장에 있는 돈을 쓰긴 했지만 이번에 옮길 때는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구했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기에 보증금은 다시 통장에 넣을 생각이었다.

“대충 정리는 다 했고…. 어, 오셨어요?”

“다희 씨, 가게는 구했어?”

다희는 가게를 들어서는 옆 가게 사장님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다희가 가게를 시작할 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도와주었던 카페 사장님이었다. 큰 언니와 비슷한 나이라 언니처럼 느꼈었고 카페 사장도 다희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

“네, 내일 보러 가요. 어쩌면 계약도 할 것 같고요.”

“다행이네. 우리 이제 자주 못 보겠다.”

“자주 올게요. 사장님은 언제 나가세요?”

다희가 가게를 옮겨야 하는 것처럼 카페도 가게를 이전해야 했다. 하지만 카페 사장은 다희와는 다르게 옮길 곳이 정해져 있었다.

“나야 아무 때나 나가면 되는데, 다희 씨가 가면 나도 바로 나가야지. 건물이 텅 비었는데 남아 있으면 뭐 하겠어….”

작은 건물이긴 하지만 작은 가게가 많았었다. 나가야 할 날짜가 정해지고 가게가 하나씩 빠져나가니 허전함도 있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손님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매일 이사차가 들어오고 나가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사장님 집 근처로 이사 가니까 자주 들를게요.”

“그래. 진짜 자주 와.”

“네. 어, 카페 손님 들어갔어요.”

“그래. 정리 잘하고….”

급하게 옷 정리를 마무리한 다희는 가게 안쪽에 있는 작은 금고를 열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여러 개의 통장 중 가게를 시작하며 만든 통장을 한 장씩 넘기며 그동안의 입출 내용을 확인했다.

“은다희, 그동안 열심히 일했네. 이사 가서도 열심히 하자.”

*

“사장님, 저 건물 앞인데 올라가도 될까요?”

-아, 우선 가게부터 보시죠.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네, 기다릴게요.”

건물 위를 올려다보다 다희는 자신의 가게가 될 곳 앞으로 걸어갔다. 간판도 정리되어 있었고 유리도 깨끗했다. 보증금을 빼고 나면 남는 돈이 많지 않기에 인테리어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겠지만 어떻게 꾸밀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찍 오셨네요.”

“아, 네. 가게 정리가 빨리 되었네요?”

“네. 저기 보이세요? 저 건물로 이사 가셨어요.”

“아….”

지훈이 가리킨 건물을 보며 다희는 빠르게 이해했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이었다. 다희라도 입주가 결정되면 빨리 들어가고 싶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