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까칠하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한 중년부부가 급하게 택시에 올라탔다. 그들은 어딘가 쫓기는 듯 초조해보였다. 그들을 보고서 덩달아 긴장할 법도 한데 택시 기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부부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남자는 상당히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부지검으로 가주시오.”

행선지가 정해진 택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차를 출발했다. 소싯적에 굉장한 미인이었을 것 같은 남자의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여보. 정말 우리가 잘하는 걸까요?”

“걱정 마. 다 우리 수현이를 위한 일이니깐.”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부인은 수긍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불안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그저 부인의 손을 꼭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뒤로 지나가는 가로수 위에 서슬 퍼런 하늘이 그들을 태운 택시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부부는 그렇게 서로를 의지한 채 결연한 모습으로 혹은 애써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부단히 애쓰는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택시 기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상황을 모르고 있던 부부는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좌석에 부딪혔다.

“무슨 일이오…!”

남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본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부부를 태운 택시를 향해 한 차가 빠르게 달려왔다. 쾅! 차창이 깨지고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부인의 공포에 질린 절규하는 목소리가 택시 안에는 뒤섞였다. 푸른 하늘 아래로 피로 처참하게 물든 차들이 뒤얽혔고 그 사이로 트럭만이 유유자적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현장을 빠져 나갔다. 남자는 온 몸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미 부인은 늦어버린 것 같았다.

“여…보! 여보!”

애타게 부인의 생사를 되돌려보고자 하지만 부인은 끝내 눈을 뜨지 못했고, 남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다. 오로지 남자의 재킷 속에 펜을 꼭 부여잡았다. 이 펜만은 꼭 지켜야 했다.

***

이제 막 잠에서 깬 해봄은 차안에서 분주했다. 하품을 연신하면서 거울을 보면서 얼굴 치장하기 바빴다.

“아가씨 비행기 시간이 조금 촉박하겠는데요?”

“진짜요? 이번 비행기 놓치면 입학식에 늦을 것 같은데…어쩌지?”

하필이면 그 날 밤 영화를 본다고 늦잠을 자버렸다. 평소의 해봄 답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그녀가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운전기사는 해봄을 슬쩍 바라보았다. 입학식에 늦을까봐 초조해하는 해봄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기사는 속도를 내었다. 이 길은 차가 그리 많은 도로가 아니었다. 그래서 자만했을까. 기사는 눈앞에 똑같은 속도로 달려오는 택시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박아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복된 차안에서 운전기사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해봄의 시야에 들어왔다.

“…!”

해봄은 왼쪽 어깨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에 살아 있음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부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누, 누가… 좀 사, 살려줘요. 살려… 주세요!”

처참하게 찌그려진 차체 사이로 해봄의 절박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리를 다친 건지 해봄의 새하얀 이마에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눈 사이로 흘러들어 붉어진 시야 사이로 반대편 차가 보였다. 여자를 애타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봄은 그 목소리가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박하게 살려달라고 외쳤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랬다. 저 멀리서 구조하러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봄은 그 소리를 뒤로 하고서 정신을 잃었다.

***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버린 한 소년이 영정 앞에 섰다. 감색깔 교복의 노란색 이름표에는 정갈하게 ‘박수현’이라고 적혀있었다. 소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홀로 남은 소년을 가엾게 생각하는 어른들이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건네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꺼번에 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소녀의 뻥 뚫려버린 가슴을 메울 수가 없었다. 소년은 마치 감정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기계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 소년에게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서 다가왔다.

“네가 수현이니?”

“…?”

“부모님 일은 유감이야. 이건 보험사에서 건넨 부모님 유품이야.”

사내는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며 수현에게 유품이 담긴 종이가방을 건넸다. 감정에 메말라 버린 수현은 사내가 건네는 종이가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 아버지는 존경했고, 마음의 안식처 같았던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런 두 사람이 남긴 물건 기껏 보잘 것 없는 종이가방이라는 사실을 수현은 믿기지 않았다. 수현은 그제야 참고 있었던 눈물이 새하얀 얼굴에 흘러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빈소에는 수현의 울음이 구슬프게 울렸다.

***

10년 후,

-우리나라 최연소 여성 대표이사! 차해봄, 마레그룹의 후계자가 되다.

그녀는 명문사립고 해인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 한 뒤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명문대인 H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동일 대학에 석사과정을 빠르게 마치고 돌아왔다.

우수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녀! 마레 본사 데뷔보다 개척지나 다름없는 미국지사를 선택하여 놀라게 했다. 그녀는 금수저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이들 보란 듯이 미국에서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은 마레 그룹이 세계적인 그룹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의 발판이 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녀의 화려한 행보는 예견 되지 않았을까.

기사 사진 속의 해봄은 매우 당찬 여성 수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의 새하얀 피부는 태생적으로 고귀함을 잘 드러내 주었고, 붉은 입술과 뺨은 잘 익은 사과마냥 해봄을 화사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동그란 눈매 속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호박의 그것처럼 영롱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고 날카로워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해봄의 비서인 혜은은 마치 기사 속 그녀가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해했다. 해봄은 혜은이 건네준 태블릿의 기사를 흘끔 보더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모니터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해봄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뜻이었다. 오랜 기간 해봄을 바왔던 그녀는 대충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기사내용을 먼저 보고 해야 했기에 혜은은 해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대표님께서 굳이 확인 안하셔도 될 만큼 기사는 아주 훌륭합니다.”

“그건 이비서가 어련히 알아서 잘 했겠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건 도대체 뭘까요?”

해봄은 눈앞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혜은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혜은은 애써 모르는 척 해보지만 별 수 없었다. 혜은은 해봄이 가리킨 곳을 한숨을 집어삼키면서 바라보았다. 역시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해봄의 고종사촌인 김석민 이사가 추진한 사업의 결과를 보여주는 차트였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회사 내부에서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수치화 하니 그 손실이 어마무시 했다.

혜은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해봄의 눈치부터 살폈다. 해봄은 그녀에 관한 좋은 기사보다 회사 실적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기에 석민과는 그렇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해봄의 예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화를 내면서 역정 냈다.

“지금 회사가 무슨 놀이터야 뭐야? 그렇게 입만 번지르르하게 하더니 결국 마이너스 70억? 이걸 어떻게 하지? 이비서는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안 되죠. 이걸로 대표님께서 이사님보다 한 발…아니 한 참 앞섰다고 생각하시면 되실 것 같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이 실적을 누가 메꿀 거냐고!”

해봄은 데스크를 손으로 탁 하고 내리친 것만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예쁘게 세팅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이참에 그냥 확 내쳐버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경영권 싸움으로,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대표님과 라이벌 관계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데 이대로 이사님을 좌천을 해버리면 정말 라이벌로 생각하게 되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깐 이 비서의 말은 그냥 놔둬도?”

“침몰하는 배죠.”

혜은은 해봄의 눈치를 살피며 손으로 아래로 추락하는 모양새를 그려보았다. 해봄이 수많은 사촌들을 제치고 마레 백화점의 대표가 된 건 운이 아닌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쌓은 탁월한 업무능력과 실패를 위기로 삼는 대범한 성격 덕분이었다. 해봄이 백화점 대표가 된 후에 마레 백화점은 전국 매출 1위 자리를 그 어느 업체에 내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레 백화점의 재정으로 다른 그룹을 먹여 살린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 해봄을 시기 질투하는 사촌들은 그녀를 어떻게든 끌어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끌어내려진 쪽은 그녀가 아닌 오히려 그들 쪽이었다. 그나마 그들의 수장이었던 석민 역시 사업의 실패로 끌어내려질 위기였다. 혜은은 그냥 있어도 침몰한 배인 석민을 굳이 그녀의 손으로 더럽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해봄 역시 혜은의 말에 동감하는 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이 마이너스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벌써 이사회 소집했습니다.”

혜은의 빠른 일처리에 잠시 안 좋았던 해봄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해봄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 일어났다. 혜은은 그녀에게 재킷을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은 그래도 적당히 하시는 편이….”

“일에 적당히가 어딨어요? 오늘 아주 그냥 아작을 내 주겠어.”

오늘 임원회의에서 석민의 운명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혜은은 해봄의 뒤를 따라가면서 걱정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수많은 서류가 책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서류는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너덜너덜했다. 그것들 사이로 유일하게 티클 하나 묻지 않은 정갈한 모습은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케케묵은 서류를 보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전 페이지로 돌아갔다. 방금 수사관이 가지고 온 마레 백화점의 재물 손괴건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조서를 되짚어보았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수사관님. 이 건 피의자는 지금 어딨습니까?”

“아. 그 건이라면.”

검사실 밖에 있던 수사관은 화들짝 놀랐다. 나른한 오후 시간대라서 그런지 두 눈이 끔뻑끔뻑하던 수사관의 눈이 번쩍 뜨고 황급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남자가 보고 있던 조서는 마레 백화점에서 있었던 사고 건이었다. 피의자가 의류를 구매하고 제품의 하자를 발견하여 반품하는 과정에서 직원과 실랑이가 생겨 백화점에 전시되어 있던 고가의 장식품을 망가뜨린 사건이었다. 피의자는 70대 노인으로 재물 손괴 죄로 기소되었다. 고가의 장식품은 1억 가까이 하는 고가였기 때문에 백화점 측에서 피의자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신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랑이가 있었다고 조서에 적혀 있지만, 정작 가해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고 피의자만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

“왜요? 조서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까?”

수현은 이번에 부임한 신입검사였지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선배를 제치고 서부지검의 프로로 인정받았다. 수현과 함께 일한지 지금 일 년 남짓 된 수사관은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지라 살짝 걱정이 되었다. 수현이 조서를 보고서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일찍 퇴근 하긴 글렀다는 것이었다.

“네. 지금 이 조서 내용대로라면 피의자가 직원의 멱살을 먼저 잡았다고 되어 있지만,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본 목격자들이 많아서….”

수사관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서 머리를 긁적이며 수현의 데스크로 다가왔다. 수현의 데스크는 깔끔한 그의 마스크만큼이나 군더더기가 하나 없었다. 빨간색 연필을 들고 있는 수현이 동그라미를 치고 있던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던 수사관이 그제야 알겠다며 아! 단발의 비명을 저질렀다.

“매대에서 있었던 사건이군요.”

“네. 조서에서는 분명 직원과 피의자가 마주보고 있었다고 했고. 직원의 뒤에 해당 조각상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들은 이 매대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겠죠. 그렇다면 과연 피의자가 직원의 멱살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아…. 매대의 크기에 따라서 다르겠네요.”

수사관은 날카롭게 빛나는 수현의 눈을 보고서 오늘 야근은 확정이라고 느꼈다.

“…나가실 거죠?”

“네. 확인해봐야죠. 지금부터.”

수사관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수현은 자리에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수사관의 입에서는 그저 ‘아이고, 아이고’라는 신음소리만 새어나왔다. 수현에게 조서를 올리기 전에 확인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제 자신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수현은 슬림하면서도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는 와이셔츠를 검은 재킷 속에 재빠르게 숨기고는 검사실을 나섰다. 그의 이름은 박수현으로 S대 로스쿨을 최연소로 졸업한 수재였다. 공부머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석한 두뇌를 어떻게 써야하는 건지 잘 아는 듯 업무능력도 귀신같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185cm의 장신과 탄탄한 몸은 그가 평소에 얼마나 관리를 잘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수현의 뒤를 수사관이 종종거리며 따라갔다.

“검사님 같이 가요!”

***

언뜻 보면 심플하게 보이지만 자재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몇 억씩 쏟아 부은 고급 자재들로 지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레 백화점에 다 온 것이었다. 수현은 눈앞의 값비싼 건물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고풍스러운 미술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애써 만들고자 인위적으로 노력한 티가 느껴졌다.

“이쪽입니다. 검사님.”

수사관이 수현을 사건 현장이 있었던 8층으로 안내했다. 주로 1층은 명품관이었고, 행사상품이나 저렴한 제품을 판매하는 이벤트는 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8층 구석에 위치했다. 수사관과 함께 8층에 도착하자마자 수현은 매서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피고인이 망가뜨린 조각상은 이미 치워진지 오래였고, 할인 행사 이벤트가 있었던 장소에는 미술 전시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깐 다른 걸로 바꿨지 않을까요?”

“그 직원은 어딨습니까?”

“지, 직원을 만나보시게요?”

“네. 사건현장이 없으니 사건 관련자인 그 직원을 만나야 사건에 대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으니깐요.”

확고한 수현의 말에 수사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알아보겠다며 황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현은 조서에 있는 사진을 토대로 사건이 있었던 장소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수현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다. 조서의 진술로는 피의자는 70대 노인으로 이제 갓 취업한 손자에게 선물로 몇 만 원짜리 바지를 사주었고, 자택에 돌아가 구매한 바지에 이염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교환 요청했다. 하지만 그 바지는 생산중단이 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교환자체가 불가하다는 답을 받았다. 그렇다면 환불을 해줘야 되는데, 그깟 판매실적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피의자에게 1억짜리 손해배상소송을 낸 것이었다. 수현은 이런 대기업의 횡포를 참을 수 없었다. 수현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장식장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백화점 내의 직원이 어수선하게 굴었다.

“대표님 지금 내려오신대.”

“오늘 기분 진짜 안 좋으시다고 하던데? 이사님 유통 쪽에 손 댄 것 때문에 손실이 이만 저만이 아니래.”

“어휴. 말도 마. 진짜 손에 총만 안 들었지. 완전 총잡이였다니깐. 이사님 말 한 마디도 못하시고 얼굴 죽상이었대.”

“으으. 생각만 해도 싫다.”

여직원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질색을 했다. 대표? 수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차해봄.’ 그에게는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도 수사관과 계장이 신이 나서 해봄의 얘기를 떠들어 댔다. 수사관의 말로는 ‘영앤리치프리티’의 정석이라고 했다. 순간 프리지아의 고급스러운 향이 퍼졌다. 자연스럽게 그 향이 풍기는 쪽으로 시선이 났다. 그 곳에는 ‘영앤리치프리티’의 정석이라는 해봄의 모습이 드러냈다. 도자기로 빚어놓은 것 같은 그녀의 새하얀 얼굴 속 연갈색 동공이 그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에게서 프리지아의 향이 진하게 났다. 수현의 무심한 눈길이 그녀를 향했을 때 수사관이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헉헉.”

숨이 찬 모양인지 수사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이 그녀는 스쳐 지나갔다. 해봄에게 나는 프리지아의 향이 희미해질 무렵 수사관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 직원은 오늘 휴무랍니다.”

“그래요? 그럼….”

“아이고. 내가 그럴까봐 다른 목격자를 확인해봤죠.”

직원이 휴무라면 그 직원의 집까지 찾아갈 기세였다. 수현의 성격을 잘 아는 지라 수사관은 선수를 쳤다. 다행히 그 사고가 있었던 무렵에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백화점 직원이라면 가재는 게 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옳은 증언을 얻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아르바이트생은 달랐다. 수사관은 그에게 아르바이트생의 이력서를 보여주었다.

***

“뭐라고요?”

해봄의 한층 예민해진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혜은은 꽤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해봄에게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조각상 손해배상 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법무팀의 보고가 해봄에게 들어갔다.

“제 선에서 신속하게 해결하겠습니다.”

혜은은 이런 간단한 건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대표인 해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한 것이 기가 막혔다.

“해결? 어떻게요? 지금 이 보고 내용으로는 우린 70대 노인을 진상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손해배상청구를 한 완전 쓰레기 기업이 되었는데요?”

“법무팀에 연락해서….”

“쟤네들이 해결 못했으니깐 서부지검에서 이렇게 내용증명 보낸 거 아닌가요? 아니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죠?”

“죄송합니다. 대표님 신경 쓰지 않도록 조치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치? 나는 이렇게 뒷북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조치 취하기 전에 해결을 했어야지. 도대체 처음부터 사건 조사를 어떻게 진행한 건가요?”

“그게….”

혜은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처음 그 사건을 보고 받았을 때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건이라고 생각했다. 안일하게 대처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설마 검사가 직접 사건을 확인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르바이트생을 찾아냈을까. 그 아르바이트생의 생생한 증언으로 고객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 화를 이기지 못한 직원이 먼저 나이 지긋한 고객을 밀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고객이 넘어지면서 매대가 밀쳐지는 바람에 직원이 조각상을 덮쳤고, 그 바람에 조각상이 박살이 난 것이었다. 해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그녀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해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CCTV는 확인 해봤어요?”

“사각지대라서 CCTV에 자세한 내막은 찍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이 건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있나요?”

“아르바이트생이 영상을 찍어 놓아서….”

혜은의 대답에 해봄은 화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고심했다. 해봄의 인생에 이런 기가 찬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 건을 해결해야만 했다. 해봄은 깍지 낀 두 손에 이마를 얹히고는 생각에 잠겼다. 혜은은 초조하게 그런 해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해봄은 여전히 자세를 유지한 채 말했다.

“우선 해당 고객에게 사죄의 뜻으로….”

“손자를 위해서 옷을 샀다고 하는데 정장이라도 보낼까요?”

“그래. 그게 좋겠어요. 그리고 이 건은 어차피 우리를 뜯어먹을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어요.”

이대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정보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해봄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해결책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