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벽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확인해야 할 번호를 찾지 못해, 처음부터 훑어 내려오는 일을 하고 또 하고 있었지만 진영의 번호는 없었다. ''없다…….'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실패, 인생에 있어서 남들에게 뒤처지는 낙오자가 되어 자괴감을 이겨내야 하는 수렁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 자괴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또 한번 실패를 맛볼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실패라는 것에 더 이상 가슴아파하지도, 힘겨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빈 깡통에 던져주는 동전에 만족해하는 족속이 될지도 모르지.'가슴속에서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 심장에서 불기 시작해 몸을 휘감고 이내 머리를 감싸더니 전신을 얼려 버리고 달랑달랑 손끝에 붙어 있던 수험번호마저 날려 버렸다.''“너도 없냐?”''마루 사이 불쑥 튀어나온 못처럼, 예기치 않게 진영의 상념을 파고드는 목소리엔 지나치게 경쾌함이 묻어 있었다. 간섭하기 좋아하는 낯선 사람의 괜한 호기심에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야, 너 내 앞자리에서 시험 봤잖아. 면접 때도 같이 들어갔는데, 기억 안 나?”''진영의 눈이 얼른 다시 합격자 명단이 빼곡히 적힌 벽보로 향했다.''“내 것도 없어. 비꼬는 거 아니니까 아는 척이나 좀 하자.”''‘넌 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대학에 떨어졌다는 건 내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거야.’''“내년에 또 시험 보면 되지 뭘 그렇게 죽을상을 하냐?”''보조가방이 진영의 생각보다 먼저 그 애의 얼굴을 향해 날아 간 것은 정말로 보호본능에서였을 것이다. 무조건 반사였고, 종알대는 입이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간절한 의지였을 것이다. ''“입 다물어. 그래, 나 떨어졌어. 지금 내 기분이 어떤 줄 알아?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야. 네가 뭘 알아? 넌 괜찮을지 모르지만 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단 말이야.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서 관심 끊어줘.”''뇌성마비 수준의 눈풀림과 사고를 보이는 남자애를 밀치고 진영은 밀려드는 사람들 물결 속으로 달려갔다.''모두가 지겨운 것들뿐이다. 한쪽은 지나치게 무겁고, 한쪽은 또 날아갈 듯이 가볍고. 세상엔 왜 중도란 것이 없는 것일까? 왜 적절히 섞이지 못하고 천칭은 널뛰기 판자처럼 기울어져 버리는 걸까. 진영은 실패했다는 것에 숨도 못 쉴 만큼 짓눌리고 답답하기만 한데, 누군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식으로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걸까. 그 중간쯤, 모두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아파트 옥상에 섰다. 집에 가야겠다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는데, 엄마와 맞닥뜨려야 하는 공포의 순간을 조금이나마 늦춰 보려고 걷기 시작한 걸음은 어느새 옥상까지 와버렸다. 난간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발밑의 아찔함에 주저앉고 말았다. 난간 위로 올라선 순간 불어대는 바람이 진영의 용기를 함께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지금 당장 뛰어내려 버리면 모든 게 끝인데, 일류대를 향한 목을 조르는 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자유로움에 대한 갈구 이전에 내 몸이 저 바닥에 닿으면 얼마나 아플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 뛰어내리는 순간 심장마비로 거의 100% 죽어 버린다고 하는데, 백에서 거의를 뺀 나머지의 희박한 확률에 자신이 끼어 땅바닥에 부딪치는 순간까지 의식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는 아픔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학생, 딴 맘 먹지 말고 어여 내려와!”''뛰어내리지 못하고 갈등하는 사이 경비가 발견하고 올라왔는지 진영만큼이나 두려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아파트 아래 주차장에도 개미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처음부터 뛰어내릴 의도는 없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주변 상황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진영을 더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자살미수로 끝나 버릴 이 시간 이후의 일들 또한 진영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마다 부딪치는 이웃들은 진영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거릴 것이다.''‘저애가 지난번에 자살하려고 옥상에 올라갔던 애지?’''‘왜 죽으려고 했을까?’''‘요즘 애들은 의지가 약해서 문제야. 조금만 힘들면 죽어 버리려고 하잖아. 죽을 용기가 있으면 조금 더 노력을 해보든지.’''‘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쯧쯧, 부모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평생 불효지. 부모 가슴에 못 박는 짓 아니야.’''시끄러웠다. 오디오라면 볼륨을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만큼 시끄럽게 재잘대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 진영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점입가경이라더니, 몇 분 후엔 경찰차와 119차까지 왔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은 재난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긴장한 얼굴로 옥상에까지 올라왔다. ''이판사판이다. 여기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죽지도 않을 거면서 폼만 잡았다는 빈정거림을 들어야 할 테고, 자살미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할 것이다. 진영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아파트 아래에서 일제히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경찰과 구급대원들의 얼굴에서도 일제히 긴장감이 서렸다.''“학생,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지.”''“부모님 생각하니까 이러는 거예요.”''진영은 두 팔을 벌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이런 모습이었던가?''“난 말이에요, 한 번쯤 하늘을 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어요. 번지점프처럼 안전장치 속에서 느끼는 알량한 자유 말고요.”''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발 하나를 허공으로 조금 옮겨 놓으면 되는 것뿐이니까.''진영이 날아가는 동안 또 하나의 사람 모양의 새가 날았다. 감기는 눈 사이로 검은 새는 진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고 그 새는 진영을 데리러 온 사자처럼 그녀의 온몸을 휘감아 안았다.''새가 긴 숨을 내쉰다.'새에게서도 숨소리가 느껴지나? 새도 이렇게 큰 숨을 몰아쉬는 걸까……. 새의 심장 소리도 사람의 심장 소리와 같구나.''두근…….'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