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인연

“꺄악! 아버지! 여, 여기 사, 사람이……!”

까무러치며 질러댄 수우의 비명에 놀란 백봉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내리던 눈이 겨우 그쳐 마당을 쓸겠다며 나섰던 수우였다. 마당을 뒤덮은 눈을 연신 싸리비로 쓸어가던 수우는 집 옆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점점이 이어진 낯선 붉은 자국을 보았다. 흩뿌려진 그 자국을 따라 옮긴 시선 끝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형상이 있었다. 눈이 시린 하얀 세상 위로 붉은 피를 적셔내고 있는 한 남자 앞에 수우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주, 죽은 걸까요?”

뛰쳐나온 백봉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과도하게 피를 쏟아 창백해 보이는 사내는 얼핏 보기에 죽은 자와 다름없어 보였다. 백봉은 사내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대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지 손끝으로 미약하게 숨이 닿아 왔다. 하지만 추운 날씨 속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놀랄 것이 없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구나.”

백봉은 엎어진 남자의 등에 박힌 화살을 보다, 고개를 들어 나무 뒤로 우뚝 솟아 있는 까마득한 높이의 바위 절벽을 바라보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병사는 아닌 듯 보였으나, 이 활은 분명 태소국 병사들이 쓰는 활이었다. 활을 맞은 채로 절벽 위에서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늘의 구름을 그대로 데리고 내려온 듯 아름드리나무 위로 얹힌 눈은 유난히 희었다. 하지만 무성한 가지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은 한쪽만 온전한 모양이었다. 떨어진 남자와 부딪힌 충격인지 나머지 반쪽의 눈은 방향 없이 땅으로 떨어져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 있었고, 그 가지는 볼품없이 군데군데 부러지고 꺾여 있었다. 저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목숨줄이 붙어 있다면 필시 하늘의 도움을 받는 자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휴우, 다행이네요.”

온몸에 피범벅이 된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 참혹하였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백봉의 말에 수우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위 절벽에서 떨어진 것 같구나. 이 눈 쌓인 나무가 아니었다면 이미 황천길을 걸었겠어.”

30년간 지속되고 있는 아헌국과 태소국 간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태소국의 위세가 점점 더 거세지면서 아헌국의 많은 수령이 백기를 드는 실정이었다. 수우와 백봉이 사는 이 낡은 움막은 사람의 발길이 쉬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만도 없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늙은 내가 혼자 업기엔 힘에 부치겠구나. 한쪽 어깨를 좀 잡아다오.”

“네, 아버지.”

수우는 대답과 동시에 눈을 쓸던 싸리 빗자루를 겨드랑이에 끼어들며 남자의 왼쪽 팔을 어깨에 둘렀다.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 둘의 힘을 합쳐도 의식이 없는 건장한 남자 하나를 옮기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있는 힘껏 들어 올려도 바닥에 끌리는 두 발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죽은 쥐꼬리처럼 늘어진 남자의 두 발은 눈길 위로 끌려가며 선이 굵은 두 줄을 그어내었고, 세 사람이 지나는 길에 흔적을 남겼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등 뒤로 길게 뻗어 나온 화살이 움직일 때마다 아파 오는지 남자는 간간이 움찔거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그들의 움막에 도착할 즈음엔 수우와 백봉은 힘이 다 빠져있었다. 둘은 힘겹게 남자를 그들의 집 안으로 부축해 침상으로 옮겼다.

“화로에 불을 좀 더 지피고, 술과 지혈에 쓰는 약초를 빻아 오거라.”

수우는 재빠르게 화로에 장작 몇 개를 더 얹고 솥을 올려 물을 끓였다.

그리고 지난 봄날, 산 바위틈에서 뽑아 왔던 지혈에 쓰는 비단초를 담은 나무 상자를 찾아내었다. 바싹 말려 썰어 놓았던 비단초를 미지근한 물에 불려 짠 뒤 절구에 넣었다. 수우는 색을 찾아오는 비단초를 빻으면서 그의 등에 꽂힌 화살을 보았다. 화살이라는 낯선 물건이 인간의 몸에 박혀 하나가 되어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눈앞에 있는 저 거대한 남자의 모든 것이 커다란 충격과 공포를 주었음에도 호기심은 떨치지 않아졌다. 절구 방망이를 쥔 손이 자꾸만 떨리고 땀이 차올라 치마에 연신 손을 문질러 대며 방망이를 고쳐 잡았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건져낸 약초가 덜 불었는지 절구 안의 마른 잎들이 서걱거렸다. 방망이질이 더해갈수록 짙은 풀물이 배어나오며 으깨지더니 점차 질척한 한 덩어리를 이루어갔다. 수우는 바삐 손을 움직이는 내내 사내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듯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아무래도 화살이 깊게 박힌 모양인데, 뽑으면 피가 제법 나오겠어.”

긴장한 눈으로 한숨을 깊게 쉰 백봉 옆으로 수우는 조심스레 긴 나무 의자 하나를 옮겨 놓았다. 그 위에 빻은 약초와 술, 데운 물이 담긴 대야를 가지런히 올렸다.

백봉이 술을 붓고 화살을 뽑아내자, 막힌 샘물 터지듯 피가 솟구쳐 나왔다.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피의 색 때문인지 그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떨어질 때 머리도 다친 모양인지 이마에 둘린 무명건 위로도 검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백봉이 남자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석상처럼 다부진 몸이 드러났다. 잘 짜 맞춰진 듯 자리를 잡은 근육의 골 사이로 상처 부위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산줄기 계곡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흐르는 핏물에 범벅된 그의 몸에는 이미 오래전 아문 상처 자국들도 여럿 보였다.

수우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의 물기를 두 손으로 비틀어 짰다. 백봉이 남자의 몸을 닦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름내 그가 등목을 한다고 웃통을 벗고 있어도 아무 생각 따위 없던 그녀였다. 분명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일 텐데, 그녀는 머리끝이 이상하게 따끔거리고 두 볼이 홧홧해 오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드러난 낯선 남자의 몸에 아비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자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민망함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을 찾다가 여름내 사용하다 빨아 넣어두었던 이불 하나를 생각해 냈다. 장 속 깊은 곳에서 꺼낸 낡은 홑청 이불은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수우는 미련 없이 해진 결을 양손에 단단히 맞잡아 주욱 찢어낸 뒤 백봉에게 건네주었다.

“살 수 있겠지요?”

백봉이 사내의 옷을 벗기고 수우가 건네준 낡은 홑청을 붕대 삼아 감는 사이,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몸이 쓰러지지 않게 머리와 어깨를 잡아 지탱해 주었다. 아직 체온이 돌아오지 않아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머리를 잡았던 수우의 손에 끈적이고 뜨끈한 피가 흥건히 묻어 나왔다. 수우는 남자의 틀어진 상투를 풀어 머릿속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백봉이 찢긴 머리 위로도 약초를 올리고 낡은 천을 감아 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나머지는 하늘님께 맡겨 보자꾸나.”

백봉이 사내를 가지런히 눕히자 수우는 목 끝까지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대야 한가득 찰랑이던 핏물을 창밖으로 내뿌리더니 새 물을 받아 핏물에 범벅이 된 손을 닦았다.

의원을 찾을 형편이 못 되었기에 살아도 죽어도 더는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그러다 백봉은 갑작스레 생각난 듯 수우를 향해 갑작스레 고개를 돌렸다.

“삼칠근을 가져와 끓여 먹여야겠다.”

백봉은 눈짓으로 낡은 서랍장 위를 가리켰다. 눈이 오기 전, 우연히 발견한 야생 삼칠근을 곱게 씻어 말려 두고 있던 곳이었다. 삼칠근은 매우 귀한 약재이기 때문에 이 한 덩이로도 수우와 백봉이 한 달 먹을 보리는 너끈히 구할 수 있었다. 눈이 그치고 저자에 나갈 수 있게 되면 약방에 팔아 돈으로 바꿀 생각에 수우는 며칠을 들떠 있었다. 그러니 백봉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고도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그 귀한 것을요?”

삼칠근을 내어주면 잘못하다가는 겨우내 풀뿌리와 말린 과일로 연명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을 모를 리 없는 백봉의 말에 놀란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사람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니.”

약초야 없으면 또 구하면 되지만, 사람의 목숨은 없어졌다고 다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우는 백봉의 말을 듣고 무안함에 얼굴을 붉혔다. 끼니를 생사를 오가는 사람의 목숨과 놓고 비교했다니, 자신이 욕심스러운 나쁜 사람이 된 듯한 생각에 고개가 숙여졌다.

***

수우는 삼칠근을 넣고 달인 물을 매일 미음과 번갈아 가며 조금씩 정성스럽게 남자에게 먹였다. 닷새간을 의식 없이 꼬박 누워 있던 남자는 서서히 낯빛이 돌아왔고, 엿새째 되는 날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뜨인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눈동자는 심연을 알 수 없는 호수처럼 짙은 검은빛이 돌았고 꽉 찬 눈동자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듯 멍하니 한곳을 응시했다.

“아버지! 눈을 떴어요! 드디어 이 남자, 눈을 떴어요!”

기쁨에 들떠 새처럼 재잘거리는 수우의 목소리에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윤곽을 잡아 가는지 남자의 커져 있던 동공이 조금씩 작아져 갔다. 세상에 처음 태어난 갓난아이처럼 모든 것이 새롭다는 듯 그는 낯선 움막의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물에 놀랐는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댔다.

“정신이 드시오?”

그녀의 말에 어느새 사내가 누운 침상 옆으로 바짝 다가온 백봉이 먼저 말을 걸었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어디지요?”

한동안 쓴 적 없는 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남자의 굵은 목소리는 묵직한 공기를 쓸어 담은 듯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버거웠는지 작은 육체적인 과정 하나에도 한숨을 몰아 내쉬었다. 손을 짚으며 백봉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침상에 몸을 기대어 앉은 남자는 힘에 부친 듯 미간을 구겼다. 움직이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던 수우는 자신도 모르게 돕기 위해 올라간 두 손을 급히 내리고 백봉의 뒤로 숨었다.

“좀 괜찮은가? 나는 백봉이라고 하고, 이쪽은 수우, 내 딸이라네.”

수우는 자신을 소개하는 백봉의 뒤에서 눈만 빼꼼히 내밀어 보다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며 그의 뒤로 다시 숨었다. 눈을 뜬 남자의 모습은 눈을 감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있을 때 닳도록 보아 얼굴의 선이 고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을 뜬 그의 미려한 외모는 너무나 조화로워 인간 세상에 속한 사내가 아닌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우는 자신도 모르게 가는 눈길에 슬쩍슬쩍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여기는 우리 집일세. 절벽 나무 아래 활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데리고 왔다네. 꼬박 닷새간이나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어.”

“활이요?”

몸을 더듬어 보던 남자는 한쪽 어깨에 매인 붕대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들어 올리다 끄응 하는 신음을 낮게 뱉어내었다.

“그렇다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꼭 죽을 뻔하였네. 눈을 떴으니 되었어. 천만다행일세.”

백봉은 그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다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인가? 자네 이름은 어찌 되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통성명이나 하고자 하였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으니 백봉도 특별히 생각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이름이요?”

하지만 사내는 어렵지 않은 질문이 어렵게 느껴지는 듯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자네 이름 말일세.”

계속 눈을 굴리며 답을 찾는 듯한 사내의 모습에 외려 더 당황한 것은 백봉이었다.

“제 이름이 무엇이지요?”

모든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한 사내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 위로 손을 짚다 머리에 동여매져 있는 붕대를 더듬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리를 다친 것에 문제가 있는 듯하구나. 이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백봉은 과거에 이런 비슷한 일을 들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말에서 떨어진 어떤 이가 기억을 잃었으나 수일 내로 다시 기억이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머리가 아프다면 무리해서 생각하려 하지 말게. 통증만 더해지는 것 같으니.”

하지만 정확한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고 그렇다고 치료를 하고자 의원을 찾아가기엔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올 동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나. 어차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를 텐데.”

이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임을 백봉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며칠 머리가 더 아물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

“그럼 이름이 없는 거예요?”

저녁상을 차리며 수우가 백봉에게 물었다. 어쩐지 저 남자에게는 직접 말을 걸기는커녕 의식을 찾은 그 순간부터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을 못 하니 없는 것이 아니라 잊은 것이지.”

수우는 아직 회복하지 못한 남자에게 거친 보리밥 대신 버섯을 넣고 끓인 부드러운 죽을 내어주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회복이 빠르게 되겠지만, 오늘 몸을 추스른 그에겐 아직은 일러 보였다.

“그럼 불러야 할 때 뭐라고 불러요? 아무개님?”

수우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던져 놓고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들어 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남자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다.

“하긴, 같이 살면서 부를 이름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자네 생각은 어떻나.”

“뜻대로 하십시오.”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나긋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자신을 얻은 수우는 좀 더 당차게 말해도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나무 밑에서 주워 왔으니까 나무라고 해요. 어때요. 아버지?”

먼저 말을 꺼내기에 괜찮은 구안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어이없이 단순한 발상이었다. 수우의 엉뚱함에 백봉은 자기도 모르게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세차진 밤의 바람이 닫아 놓은 나무 창문 사이를 거세게 흔들며 마치 수우가 지은 이름을 깔깔 비웃듯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걸 왜 내게 묻는 것이냐. 본인에게 물어보거라.”

당당하게 그의 이름을 제안하던 수우는 직접 말을 거는 게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듯 쭈뼛거렸다. 순식간에 처마 밑 고드름처럼 굳은 그녀는 눈도 돌리지 못한 채 백봉에게 되물었다.

“네? 제가요?”

차마 되묻지 못하고 밥알만 입에 세어 넣고 있는 수우를 보며 남자는 말했다.

“나무……. 듣기 좋은 이름입니다.”

남자는 나무란 이름을 웅얼거려 보았다. 여인의 입에서 나오던 나무란 단어를 들은 순간 식탁 옆에 놓인 따뜻한 화롯불이, 자신의 앞에 놓인 김이 나는 죽 한 그릇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뜬 여인이, 그녀와 조곤조곤히 대화하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부를 이름이 아닌 들을 이름이기에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듣기 편한 이름이면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남자는 마음에 든다는 듯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 그것으로 하겠다고 하였다.

***

백봉의 예상과는 다르게 계절이 지나는 동안에도 나무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몸이 회복된 나무는 나이 든 백봉을 대신하여 힘쓰는 일을 도왔다. 눈이 오지 않는 날이면 땔감을 마련하거나, 서툴지만 고장이 난 지붕을 수리하는 등 어느새 나무도 백봉과 수우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무슨 장작을 이리 많이 해왔어요? 산속 나무 죄다 베어 온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나무는 고개를 돌렸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야. 같은 나무에게 어찌 이리 매정해요?”

힘들게 땔감을 구해 온 나무를 위해 물 한 사발을 내어주며 수우는 말도 안 되는 농으로 고된 하루를 달래 주었다. 나무는 그런 억지스러움이 싫지 않은지 대답 없이 웃어 보였다.

***

“아버지, 장작 구해 올게요.”

가끔 수우는 나무가 장작을 구하러 나갈 때 함께 산으로 갔다. 불쏘시개로 쓰일 마른 가지와 솔방울을 줍던 수우는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자 산나물과 버섯, 약초를 캐어 왔다. 언제나 별말이 없는 나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든든했고, 처음부터 함께였던 듯 편안했다.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요.”

계속되는 오르막에 지친 수우는 볕이 좋은 바위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자 했다. 그녀의 가쁜 숨을 진작에 눈치채고 느려진 속도에 걸음을 맞춰 주던 나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 멈춰 섰다. 어깨에 메고 있던 지게를 바위 옆에 조심스럽게 세워 둔 채, 나무는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바위 위에 깔아 주었다. 땀에 젖은 수건이 민망해 보였던지 바위 위에서 이리저리 뒤집어 접으며 마른 부분을 찾아 주었다.

“바닥이 아직 차다. 너도 여인이니…….”

여인. 생각지 못한 나무의 말과 행동에 수우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 마치 자신이 귀족 집안의 영애라도 된 듯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여인이 찬 곳에 앉으면 안 된다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요?”

새침하게 쏘아붙이는 수우의 말에 민망해졌는지 나무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멀쩡히 세워진 지게의 위치를 바꿔 다시 세웠다.

“그냥, 주워들었어.”

수우는 괜한 헛기침을 뱉어내는 나무에게 옆에 앉으라며 바위 위에 고사리 같은 손을 탁탁 내리쳤다. 이리하지 않으면 끝끝내 서 있을 나무란 걸 수우는 잘 알았다. 미리 삶아 온 감자를 건네주며 수우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시장하죠? 아까 오기 전에 챙겨 왔어요.”

“괜찮아.”

괜찮다는 그의 손에 감자를 쥐여 준 수우는 자신도 하나를 꺼내어 한입 베어 물었다. 소금간이 적당히 되어 있던 감자의 짭조름한 첫맛 뒤에 담백한 단맛이 입 안으로 퍼져 나갔다. 나무는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 감자 하나를 금세 먹어 치웠다. 수우는 베어 문 감자의 반을 쪼개어 나무에게 더 주었다. 나무는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쏜살같이 감자를 먹어 치운 그는 그녀가 건네준 수통의 물을 받아 마시며 볼 한가득 다람쥐처럼 먹고 있는 수우를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봄바람이 흩뜨려 놓는 머리카락이 오물거리는 입 주변을 간질이는지 수우는 조그만 손가락으로 연신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대었다. 그 조그마한 입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나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잔잔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멈추고 꽃내음이 산천을 감싸 안았다. 살랑이던 봄바람이 멎자 할 일 잃은 손이 아래로 향하며 바위 위로 떨어졌다. 바닥을 짚으려던 수우의 손이 나무의 손끝에 걸쳐졌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을 뒤덮고 있던 새싹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향기도 사라지고, 감자의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녀에게 시간이 늘어지는 엿가락처럼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수우의 모든 감각은 손끝 말고는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나무는 닿아 있는 손을 빼지 못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조금만 움직여도 수우의 손이 놀라 도망갈 것 같았다. 그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손가락 위 작은 솜털들이 쭈뼛 서고 예민하게 공기 중에 부딪히며 주는 낯선 느낌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처음 느끼는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허읍. 컥, 컥, 콜록…….”

수우는 놀란 숨을 크게 들이쉬다 먹던 감자가 목에 걸려 기침이 몰아쳐 나왔다. 순식간에 들린 사레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수통을 돌려주던 나무와 눈이 마주친 수우는 물을 두세 모금 넘기고야 진정이 되었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이 다시 말간 낯빛을 찾아 돌아오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