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녀는 천사야. 난 그녀를 보자마자 이렇게 생각했지. 하느님이 실수로 지상에 떨어뜨린 천사구나. 하늘에서 잘못을 저질러 날개를 꺾이고 내려온 타락천사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순수한 천사라고 말이야.”

왁자지껄한 학생 식당 한켠에서 식판은 가지고 온 그대로 식탁 위에 놓아둔 채 한사람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 테이블의 중심에는 갖은 오바를 섞어가며 말하는 한 남자. 강승휘가 있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계속했다.

“하느님은 그녀를 잃어버리고 나서 아마 저 위에서 질질 짜댔을 거야. 지금도 물론 그렇겠지. 그만큼 그녀는 최상의 아름다움과 순수함과 깨끗함을 모조리 갖춘 보석이랄까.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정도로…. 그것은 단지 외양만이 아니라. 이 마음. 이 마음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런…. 오라?… 여튼 저 근저부터 빛이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리고 난 순간적으로 직감했지. 그녀가 바로 나의 신부라는 것을 말이야. 우리들은 약속했어. 아직 사회에서 우리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랑의 결실을 이루자고…. 게다가 크흑…. 그녀는 부모님들의 사정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고야 말았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나기로 한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 꼭…. 결혼을 하자고 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세게 맹세했지.”

마치 홀로 싸이코 드라마를 하듯, 가극의 연사라도 된 듯 말을 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온통 집중을 하는 이유는 그가 하도 오바를 해 가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다름 아닌 이 한국대학교의 최고 킹카. 최고의 바람둥이로써 강풍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강승휘이기 때문이었다. 단정하고 미려한,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여자로도 곧잘 오해를 받기도 했던 아름다운 얼굴생김과 185에 육박하는 훤칠한 키. 게다가 수재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이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의 수석이 바로 그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학생들은 그가 지금 열렬히 설명하고 있는 그 천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 강승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하나 부족한 것 없이 완벽한 그야말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저 하늘의 것인 것만 같은 완벽한 피조물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야기를 멈춘 채 옛 추억에 빠져 눈을 감고 있는 승휘에게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여자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니 이 아니 궁금할 소냐. 순식간에 테이블위에 긴장감이 흐르고 승휘는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쳤다. 깜짝 놀라는 주변인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흥분에 못 이겨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오늘이! 바로! 그녀가 돌아오는 날이라 이거지! 우하하하하핫!”

그의 발표에 주위의 여자들은 충격을 받은 듯 미간을 좁히고 암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남자들은 궁금증에 몸이 다는 듯 했다.

“그렇게 예쁘냐? 어?”

“너 지금까지 뭐 들었냐? 내가 말했잖아.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그녀는 천사라니까! 천사!”

“우오오오옷! 우리 언제 소개 시켜 줄 거냐?”

“기다려봐 쫘식들아. 하지만 너희들이 보게 되는 건 내 결혼식 때나 돼야 할 거다!”

“왜? 왜? 오늘 당장 보여줘!”

“안 돼! 닳아!”

“이런… 치사한 새끼!”

“나같이 멋진 남자를 앞에 두고 너희 같은 찌질이들에게 관심 갖을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에 나 외의 남자를 만나는 건 용서 못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쁜지 승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그에게 한 남학생이 물었다.

“야! 사진 없냐? 사진?”

“후후훗.”

승휘가 알지 못할 묘한 웃음을 보였다.

“오오옷! 있구나! 있어!”

“보여줘! 제바알!!!”

도대체 여기가 식당이고 지금이 밥을 먹어야할 점심시간이라는 걸 알고나 있는 건지 손을 모으고 그에게 애원하는 남자들을 보면 기도시간인 것도 같아 보였다.

“그럼 천사 내한 기념으로 특별히 보여줘 볼까?”

승휘의 그 말 한마디에 남자들이 우르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단 2명의 남학생이 있었으니 그들은 승휘의 절친들로써 이미 그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천사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사진도 보았던 한정우와 김원석이었다. 그들은 다음에 이어질 시츄에이션을 예상하며 묵묵히 밥을 먹을 뿐이었다.

승휘는 보물이라도 꺼내 놓듯 천천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 빼내고 그 뒤에 감춰두고 있던 사진 공개했다. 그러자 마자 누군가 사진을 날쌔게 나꿔 채갔다.

“이런! 어떤 호로 새끼야! 당장 못 갖고 와!”

승휘는 단 한 장밖에 없는 그녀의 사진을 빼앗기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사진을 주위로 몰린 남자들의 입에서 실망의 한숨소리가 나왔다.

“뭐야. 이게….”

“강승휘. 사진이 이게 다냐?”

“그런데?”

“그럼 너 혹시 그 천사고 천상의 아름다움이고 뭐고…. 그거 다 이 유치원 꼬맹이 때 모습을 보고….”

승휘가 냉큼 자신의 천사 사진을 다시 빼앗아 가슴에 품었다.

“그래. 7살 때 헤어져서 이번에 다시 만나는 거다.”

“뭐어?”

남자들은 실망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조소를 띄우고 뭔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승휘는 정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이리저리 보여주었다.

“야, 늬들 이 사진만 봐도 모르겠냐? 이 윤기 나는 갈색 헤어. 이 크고 맑은 마치 유리구슬 같은 브라운 아이즈. 이 희다 못해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피부! 얘가 지금 자랐으면 얼마나 예쁘겠냐? 어?”

그의 말에 또 귀가 솔깃해진 남자들이 사진 속의 여자애를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꽤 미인이 됐을 것도 같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휘는 사진을 지갑에 챙겨 가방 속에 집어넣고 말했다.

“여튼 너희들이 보는 건 내 결혼식에서야. 그 전까지는 꿈도 꾸지 마.”

승휘는 자신의 천사를 만날 생각에 몸서리를 치며 좋아했다.

“근데 오늘 몇 시에 오길래. 아직도 학교에 있는 거냐?”

“그게 나도 당장 나가고 싶다만…. 더 이상 강의 빼먹었다가는 권총 차게 생겨서….”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학기 초에는 어떻게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 그가 이 한국대학 그 세다는 경영학과에 붙을 수 있었는지 신기했었다. 하지만 딱히 수업을 듣지 않아도 언제나 수석자리를 놓치지 않는걸 보면 비상히도 머리가 좋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단 한 가지 난코스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출석. 멋모르던 1학년 시절 실컷 놀다가 F를 맞았던 이후 그는 출석일수를 간당간당하게 맞춰가며 놀았다. 그런데도 얄밉지 않은 건 저 사람 녹이는 미소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번 웃어주면 그게 여자이건 남자이건 그에게 화를 낸다는 게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걸 가장 잘 알고 요긴하게 써먹는 건 그 자신일지도 몰랐다.

“오빠.”

한참 열심히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그의 옆에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기로 유명한 뭐 대기업 영양이 와 섰다. 옷은 언제나 명품이 아니면 입질 않고 차는 6개월에 한 번씩 비싼 외제차로만 바꾸는 돈이 차고 넘치는 여자였다. 그리고 하늘 찌를 듯 높은 코와 깊이 파진 쌍꺼풀이 딱히 얘기하지 않아도 ‘나 얼굴에 칼 좀 댔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뭐 티는 좀 나지만 어쨌든 딱 벌어지게 예쁜 얼굴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승휘가 밥 먹는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상대를 확인한 후 언제나처럼 웃음을 지었다.

“어, 유진아. 안녕.”

“나 이번 주말에 스키장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오빠랑 나랑 단둘이….”

주위의 친구들이 야유를 보냈다. 여자들은 매서운 눈길로 유진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어쩌지. 이제 우리 만나면 안 되는데.”

그의 말에 유진이 놀라며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아니, 어째서?”

“나 결혼하거든.”

“뭐어?!”

승휘의 이야기에 유진은 그 자리에서 석고상이 된 듯 굳어버렸다. 2년이나 강아지처럼 그의 뒤만 졸졸 쫓아다닌 그녀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승휘는 여전히 웃으며 다 먹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미안. 이제 그녀 이외에는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을 거야. 오늘부로 난 유부남과 다름없거든. 그러니까 학교에서 이렇게 친한 척 말거는 것도 전화하는 것도 전부 그만둬 줄래? 뭐 사귄 것도 아니니 헤어지자 이런 말은 안 해도 되겠지? 그럼 이만.”

그리고는 그녀를 살짝 비켜 자리를 빠져나갔다.

***

그날의 마지막 강의가 교수님의 책상을 탕 치는 소리와 함께 끝이 나자마자 승휘는 가장 먼저 강의실 문을 열고 달렸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 강의 내내 배배 몸을 꼬고 있던 터였다. 곧 있으면 그녀를…. 자신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오늘은 학교 앞에서 냉큼 택시를 잡아타고 빨리 성북동으로 가자며 기사를 닦달했다. 그리고 가는 동안 지갑에서 그녀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오래되고 하도 가지고 다녀서 가장자리가 다 헤진. 하지만 노오란 원복을 입고 꽃밭에서 꽃보다도 더 예쁘게 웃고 있는 천사가 사진에는 선명히 보였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유혜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그냥 확 껴안아 버릴까? 아냐. 곧바로 프로포즈?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유치원 때 했던 결혼 약속 같은 것을 아직까지도 믿고 있는 그가 우스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그는 서로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였다.

사실 어렸을 적 승휘는 몸집이 작고 병약한 아이였다. 미숙아로 태어나서인지 유달리 병치레가 잦았고 코피를 잘 흘렸었다. 툭하면 코피를 흘리는 그를 아이들은 무서워하기도 했고 또 더러워하기도 하며 급기야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단 한명. 친구가 되어준 아이가 바로 그녀, 유혜림이었다. 그 천사 같은 외모로 유치원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던 그녀는 그에게 항상 잘 대해주었다. 간식을 먹을 때도 체조를 할 때도 그리고 등하원을 할 때도 짝이 되어주었다. 항상 유치원에서 주눅이 들어있던 승휘는 그녀로 인해서 점점 밝아지고 나중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부모님들도 친해졌고 급기야는 부모님들이 더 친해져서 혜림이네가 이민을 갈 때 두 엄마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더랬다. 오히려 결혼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 승휘와 혜림이 엄마들보다 훨씬 이별을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웃으면서 헤어졌다.

이민을 가기 전날 둘은 동네 놀이터의 흔들 그네에 나란히 앉아 그 조그만 손가락을 걸고 결혼을 약속했고 생애 첫 키스를 나눴다. 오래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때를 생각하자 승휘는 그녀의 부드러웠던 입술 감촉이 생각나 온몸이 찌릿해왔다. 그 이후로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고 많은 여자들과 수없이 많은 키스를 해보았지만 그때만큼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정말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15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따윈 불가능할 테니까….

혹시 시간이 흐르면서 혜림이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지 걱정했지만 부모님께 전해 듣기로는 혜림이도 그와 만날 날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비록 부끄러워서 서로 직접 통화를 해본적은 없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직도 승휘랑 결혼하겠다네요. 혜림이랑 결혼하겠다네요.”란 이야기를 부모님들은 주고받았었다. 그리고 다음부터 그는 마음속에 혜림이는 자신의 신부라고 정해놓고 살아왔다. 혜림이도 그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머나만 바다건너 멀리 있지만 서로의 마음은 항상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동안 숱한 여자를 만나오고 갖가지 육체관계를 가졌었지만 그것마저도 다 혜림이를 위해서였다고 승휘는 자신하며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실은 양심에 쪼금 찔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풍처럼 문란한 생활을 한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서로의 합의하에 원나잇 스탠드였을 뿐. 깊은 관계의 여자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옆에 있을 여자는 유혜림 뿐이므로.

어느덧 택시는 자신의 집 앞까지 다다랐다. 그는 서둘러 택시비를 내고 내렸다. 그리고 집 앞 대문에서 마치 다른 집의 벨을 누르듯 잔뜩 긴장하고 버튼을 눌렀다. 곧 흥분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휘니? 어서 오렴. 혜림이 벌써 왔다.”

그는 정원을 미친 듯이 달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거실엔 아버지와 어머니뿐 혜림이는 보이지 않았다.

“혜… 혜림이는요?”

“네 방 구경하고 싶다고 지금 2층에 올라갔어.”

그는 순간 자신이 방을 정리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손님도 오는데 엄마가 해줬겠지 뭐. 라고 대충 생각하고 2층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의 모습을 보며 부모님이 껄껄대고 웃었다.

승휘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이 안에 그녀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서 심장에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았다. 손잡이를 잡고 심호흡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순간 자신의 방에서 뭔가 꽃내음 같으면서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향기에 이끌리듯 방으로 들어섰다. 그때 책상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혜림을 부르려다가 입을 닫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의 방에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에게 물었다.

“아줌마는 누구세요?”

***

“아줌마는 누구세요?”

자신을 보면 당장에 포옹이라도 해올 것으로 예상했던 그에게서 의외의 말을 들은 혜림은 당황했다. 그를 하루 빨리 만나고 싶어서 대학까지 조기졸업하고 홀홀단신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1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놓여있었고 그가 자신을 못 알아 본다고 해도 (무진장 섭섭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야. 혜림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첫사랑은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혜림이 얼른 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하지만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다가는 뱀이라도 만난 것처럼 사사삭 뒤로 물러났다. 혜림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승휘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휘야! 혜림아! 저녁 다 됐다. 내려오렴.”

“네에!”

대답을 하고 혜림은 다시 승휘를 보며 괜찮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 너 먼저 내려가. 나 옷 갈아입고 금방 내려 갈 테니까.”

“그래….”

혜림은 15년간의 기다렸던 만남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어차피 앞으로는 질릴 만큼 계속 그와 지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

혜림이가 나가며 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승휘는 다시 절망했다. 저 씰룩대는 살찐 엉덩이. 코끼리도 울고 갈 우람한 다리. 몸이 무슨 엠보싱 화장지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 없어도 될 곳에 잔뜩 있는 굴곡들. 얼굴은 어떻고 여백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승휘는 정말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침대로 기어가 그야말로 발광을 했다. 아무리 온몸을 미친 듯이 흔들고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지금의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둘러 지갑을 꺼내 천사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 커다란 갈색 눈,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 희디 흰 피부. 어떻게 이 작고 귀여운 생물이 저런 뒤룩뒤룩 살찐 저팔계 아줌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외계인의 음모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저팔계 같은 아줌마가 나의 천사일 수가 있어? 우아아악!’

그러고도 몇 분간을 그는 침대에서 소리 없는 난동을 부렸다.

그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생각해보자. 엄마는 혜림이가 내 방으로 올라갔다고 했고 내방에서 그 아줌마는 자신을 혜림이라고 말했다.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그렇다는 건 그 아줌마와 혜림이가 동일인물이라는 말이다. 격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이즈가 너무 불어서 그렇지 이목구비나 흰 피부는 사진속의 천사와 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15년…. 장장 15년이나 그녀만을 기다려왔는데! 15년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천사…. 나의 첫사랑…. 나의 마지막사랑…. 나의 신부! 저팔계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와 팔짱을 끼고 있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교회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다급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오. 하느님. 아버지.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이게 꿈이면 깨게 해주시옵고 꿈이 아니라면…. 우어어어어! 저를 타임머신에 태워 유혜림과 아예 만나기 전….”

그는 차마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눈을 떴다. 유치원 시절의 혜림이는 정말 천사였다. 그때의 혜림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고 또 그때의 추억이 너무 행복해서 그는 차마 마지막 말을 하지 못했다.

“승휘야! 빨리 안내려오니? 국 다 식는다!”

내려가서 그녀의 얼굴을 또 볼 용기가 없었지만 그녀가 온 첫날 식사를 안 하겠다고 내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

식탁에 가 앉으며 그는 다시금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웬만한 남자는 울고갈만한 저 등빨. 게다가 얼굴은 하얀데 피둥피둥한 볼살이 마치 호빵…. 찹쌀떡 등을 연상케 했다.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천사와 저팔계는 갭이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이제는 어렸을 적 모습을 완전히 없애버린 그녀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얼마나 관리를 안했으면 이런 모습이 되었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녀가 이런 저팔계 아줌마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지도 않은지 예전처럼 천사를 보는 얼굴로 웃으며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자신의 부모는 천재 배우일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밥맛이 똑 떨어지고 말았다.

“혜림아. 많이 먹어. 너 온다고 이것저것 차리기는 했는데 입에 맞을까 모르겠다.”

‘엄마, 쟤 피둥피둥하게 살찐 게 눈에 안보인단 말이야? 어떻게 많이 먹으란 말을 할 수 있어!’

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엄마를 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그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림은 웃으면서 승휘 엄마에게 말했다.

“다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요.”

‘그럼 그렇지, 너한테 안 맛있는 게 있겠냐?’

“그럼. 먹을까?”

‘아부지! 쟤 얼굴을 보면서 밥 먹을 생각이 들어요?’

승휘는 잔뜩 꼬인 마음으로 사사건건 속으로 꼬투리를 달았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 혜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갑자기 먹는다는 것 자체에 질려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애써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물을 마셨다.

“승휘야. 밥 안 먹니?”

“아, 오늘 낮에 친구들이랑 피자를 먹었더니 속이 안 좋네.”

대충 적당히 핑계를 대는데 밥을 먹던 혜림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우와. 나 피자 진짜 좋아하는데.”

‘아무렴!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뚱뚱하지!’

그는 뭐 씹은 표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씹어 삼키며 다시 물을 마셨다.

“뭐 너도 알고 있겠지만 혜림이는 이제 우리 집에서 살게 될 거야.”

엄마의 이 말은 그에게 있어서 완전히 확인 사살이었다. 그랬다. 듣기로는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그녀는 미국의 유명대학을 조기졸업하고 홀홀단신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미 아버지 아시는 분의 소개로 다음 주부터는 영어학원의 강사로 그의 집에서 출퇴근을 하며 지내게 되어 있었다. 매일…. 그녀를 봐야만했다. 그것도 자신의 방 옆이 그녀의 방이었다!

사색이 되어가는 아들의 안색은 안중에도 없는지 어머니 김 여사의 말은 계속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