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저주의 시작

“아이씨, 도움도 안 되는 이딴 꼬마를 왜 데리고 가라는 거야 진짜!”

복면을 쓴 무리 중 한 명이 잔뜩 인상을 쓴 채로 투덜거렸다. 언뜻 봐도 덩치가 예사 사람 같지 않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그가 걸을 때마다 그의 칼자루에 새겨 있는 용 무늬 문장이 달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그의 곁에는 네댓 명의 한 무리가 그와 같이 용 무늬 문장을 반짝이며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잖아, 속도가!”

남자는 불편한 티를 감추지 않으며 뒤에서 겨우 쫓아오고 있는 한 사내아이를 노려보았다. 눈초리를 받은 남자아이는 몸을 움츠렸다. 잔뜩 눈치를 보며 험한 산을 뛰듯 오르고 있는 그는 누가 보더라도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였다. 갓 열 살이 된 듯 보이는 어린 소년이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커다란 복면으로 얼굴을 뒤덮고 있던 것이다. 복면 위로 간신히 드러난 소년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손에 쥔 조그만 단검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시끄러워. 우리는 그저 명령에 따르는 자들일 뿐이다. 그게 싫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결하도록 해.”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사내가 싸늘한 눈으로 말하자 덩치 큰 사내는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불만스러워 당장에라도 꼬마 아이를 내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지금은 토를 달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줄곧 불만스럽게 꿍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이내 사라지고 운현산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흘렀다.

저벅저벅-

달빛이 비치는 운현산에 그들의 발소리가 가득했다. 한참을 지났을까, 앞서가던 우두머리 사내가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저 집이다.”

사내가 작게 속삭이며 자세를 낮추자 무리도 그를 따라 자세를 낮추며 눈빛을 번뜩였다.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살기를 내뿜는 사내들 속에서 오로지 그들을 따르던 꼬마 아이만이 경직된 채로 꼿꼿이 서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두려움이 가득했던 눈이 더욱 커져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야, 꼬마! 정신 차려!”

덩치가 아이의 손을 홱 잡아 채 끌어당기더니 험상궂은 눈으로 아이를 노려보았다.

“도망갈 생각일랑 하지 마라. 그분께서 오늘 너를 제대로 교육하라고 하셨으니.”

자신보다 몇 배는 몸이 큰 사내에게 꼼짝없이 붙들린 소년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사이 우두머리가 고갯짓을 하며 눈앞의 한 집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덩치 큰 사내도 아이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집 쪽으로 향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 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을 것 같이 황량한 집을 무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포위하고 있을 때였다.

화륵-

갑자기 집 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처음에는 한구석에서 불길이 솟구치더니 곧이어 집 안 곳곳에서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은 점점 거세지더니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감쌌다.

“뭐야, 이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담벼락 앞에서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우두머리 사내가 문틈으로 집 안을 살폈다. 가느다란 틈새로 보이는 집 마당 쪽에서 한 남자가 뭐라고 주절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야… 용희야아아! 흑흑….”

불이 타오르는 장작을 한 손에 쥔 남자는 비틀거리며 집안 곳곳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곧 넘어질 듯이 비틀거리던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울먹거리면서도 손에 쥔 장작은 꼭 쥔 채 방화를 멈추지 않았다. 집 안을 불로 뒤덮은 남자는 갑자기 우뚝 서더니 불이 활활 타는 장작을 꽃이 만연한 풀숲 쪽으로 던졌다. 언뜻 보면 풀숲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누군가가 공들여 가꿨음이 분명한 정원이었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만연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 그 정원의 꽃들이 일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타들어 갔다. 남자는 불길에 휩싸인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집 마당 한복판에 누웠다. 불이 남자를 둘러쌌으나 개의치 않았다. 꼼짝 않고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슬픔 섞인 평온함과는 달리 집 밖에서는 복면의 무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다들 어쩌지 못하고 대장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사이, 문틈으로 모든 상황을 살피던 우두머리는 곧게 누워 있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다 문에서 눈을 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자결이라니. 그것도 방화라… 불에 다 타들어 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지….’

잘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대장, 이제 어쩝니까?”

어안이 벙벙한 무리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두머리만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불길에 휩싸인 집을 노려보던 우두머리의 시선에 덜덜 떨고 있는 꼬마 아이가 보였다. 그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그분의 명대로 교육도 할 겸, 오늘은 꼬마 너 혼자 해치워줘야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와 사내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는 무리에게 검은 연기가 짙게 번졌다.

***

아직 찬 공기가 가득한 새벽, 바람 사이로 언뜻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운현산을 한 여인이 허겁지겁 오르고 있었다. 여인의 눈은 산꼭대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엇을 애타게 찾기라도 하는 듯 그녀는 오직 산 정상만을 바라보며 가파른 운현산을 뛰어올랐다. 산새가 험해서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는 그곳이었으나 여인은 매우 익숙한 듯 보였다. 그녀는 불쑥 나타나는 높은 바위도, 앞을 가로막는 무성한 나뭇가지도 쉬이 넘어 올랐다.

‘제발, 제발…!’

꼭대기에 올라갈수록 짙어지는 매운 연기를 들이마시며 그녀의 얼굴에 점점 불안이 스쳤다. 험준한 산을 급히 오르느라 생긴 생채기도 모르는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그녀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 흐르는 눈물에 얼굴이 흠뻑 젖으면서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산을 오르던 그녀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녀가 애타게 바라보던 산꼭대기에서였다. 망연히 선 그녀의 눈앞에 검은 잿더미가 가득했다. 쌓여있는 재 사이에서 언뜻 눈에 띄는 나무 기둥의 흔적만이 이것이 불타버린 집의 자취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까맣게 그을린 누군가의 시신….

‘안 돼…!’

입을 틀어막은 채로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시신을 붙드는 그녀의 시선에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너무도 익숙한 그것을 단숨에 알아본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 물체를 집어 들었다.

“아… 아… 아아아! 악! 아아악!”

그녀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넋이 나간 듯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에 쥔 무언가를 품에 꼭 안은 채로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격렬하게 저어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깊은 분노와 원망… 악에 받친 그녀의 비명이 운현산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온 나라를 뒤덮을 피의 저주는 그렇게 시작되고 말았다.

#1. 어린 날의 이야기

연주국(聯珠國)의 어린 세자 류서는 아침부터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꼿꼿하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의 뒤에서 함께 걷던 환관 용식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저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안타까움을 담은 용식의 목소리에 묵묵히 걷던 류서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류서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으나 그 눈만큼은 맑고 깨끗했다. 용식은 류서의 그 어린 눈망울에 배어있는 슬픔과 두려움에 마음이 아파 당장에라도 그를 도로 동궁에 데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환관의 신분인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중전마마께서 새로 자수 옷을 완성하셨다고 하옵니다. 필시 오늘은 기분이 좋으실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추며 말하는 용식을 류서는 빤히 바라보더니 대꾸 없이 몸을 돌려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마께서 이미 나를 미워하신 지 오래이거늘, 당장 오늘 기분이 좋으신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무기력하게 내뱉은 류서의 얼굴에는 어느새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류서를 오랫동안 보필한 용식은 그런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기에 더 이상 무어라 말을 붙이지 않고 중전의 거처인 효덕궁 입구 쪽으로 향했다.

‘마마만 아니었어도….’

깊은 원망을 담은 눈으로 눈앞의 효덕궁을 잠시 노려보던 용식은 어느새 한참을 앞선 세자 류서를 쫓아 황급히 발걸음을 이었다.

***

강렬한 꽃 향이 가득한 방에서 비단옷에 놓인 자수를 들여다보는 중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그녀는 흡족한 듯 옷소매 부분에 수놓인 학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마마, 저하께서 방문하셨사옵니다.”

갑자기 들려온 궁녀의 보고에 중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의 그녀는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들라하라.”

그녀의 허락이 떨어진 후, 조심스레 열린 문 사이로 잔뜩 굳은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세자가 보였다. 중전은 세자를 보고는 인상을 쓰며 눈을 질끈 감더니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보기 싫은 벌레를 본 듯한 그녀의 표정에 류서의 얼굴이 더욱 얼어붙었다.

“…어마마마께… 문안인사를 올립니다.”

류서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굽혀 중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무릎이 채 바닥에 닿기 전, 중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박혔다.

“알겠으니 나가보거라.”

세자는 아직 문안인사를 올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중전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잠시 그 상태로 굳어 있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중전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던 그의 등 뒤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던 기분이 다 망가졌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린 중전이었다. 그녀의 한마디가 류서의 마음을 아프게 때렸다. 내내 미동 없던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두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가에 물기가 가득해진 그는 나가려던 몸을 돌려 중전을 향했다.

“마마… 소자가…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류서의 깨끗한 눈빛이 날카로운 중전의 눈과 맞붙었다. 그는 중전의 차가운 눈초리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물 고인 갈색 눈으로 중전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를 이리 대하시는 연유가 대체 무엇이온지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류서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단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유?”

류서의 눈을 응시하던 중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이라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지독히 매서운 눈빛이었다.

“너의 존재가.”

“예?”

“네가 내 몸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수치다.”

나지막이 내뱉는 중전의 말에 세자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 독사 같은 사람의 핏줄이… 내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

감정 없이 뱉어대던 중전의 목소리는 어느새 점점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이, 격렬한 분노를 애써 삼키고 있는 듯이.

“더러워.”

중전이 세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자신을 향해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어미의 모습에 류서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얼이 빠진 듯 넋이 나간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이제 알겠느냐?”

중전이 다시금 차가운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죽는 날까지 나에게 어미의 사랑 따위는 바라지 말거라. 네가 아무리 애써도 내가 널 사랑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싸늘한 목소리로 끝까지 아들의 마음을 후벼 파는 어머니의 말에 어린 세자는 부들부들 떨더니 도망치듯 효덕궁을 뛰쳐나갔다. 매일같이 자신을 쫓아내는 어머니의 말에도, 제대로 바라봐주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차가운 시선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류서는 그렇게 한 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오늘, 중전은 어린 세자의 노력을 완전히 짓밟아버린 것이다. 아들이 다시는 그녀를 사랑하지 못하게끔.

***

“중전이 진정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냐?”

자신을 똑 닮은 황갈색 눈동자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자를 그의 아비, 영민왕이 가슴 아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모진 얼굴로 아들을 노려보았을 중전의 얼굴을 생각하니 간신히 잠잠해졌던 두통이 다시금 심해지는 듯했다.

하늘이 유달리 맑고 청명한 오늘, 영민왕과 세자는 실로 오랜만에 장터로 견문 학습을 나가기로 한 터였다. 견문 ‘학습’이라고 하긴 하지만 사실 세자에게 더 넓은 세상을 구경시켜 주고자 최소한의 호위 무사만 대동하여 궐 밖 장터로 잠행을 나가는 부자간의 소소한 나들이였다. 매번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다녀온 자신과 아들만의 소중한 소풍. 평소 감정표현을 잘하지 않는 세자도 장터에 나가는 날만큼은 환한 미소를 보이곤 했다.

그런 세자가 오늘 아침 돌연 견문 학습을 가지 않겠다고 말을 전해온 것이다. 영민왕은 크게 놀라 하던 업무를 제쳐 두고 세자를 불렀다. 그러나 정작 류서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환관 용식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중전이 그에게 또 모진 말을 내뱉은 모양이었다. 차마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용식을 보며 영민왕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마음의 근심 탓인지 갑자기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아 그는 조용히 두 주먹을 말아 쥐며 고른 숨을 내뱉으려 애썼다.

중전이 자신과 세자를 증오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세자가 아무 죄 없이 중전한테 상처를 받는 이 상황에 그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그였기에 더욱. 왕인 자신마저도 끓어오르는 증오의 눈빛으로 노려보던 중전의 얼굴이 떠올라 영민왕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세자.”

그의 부름에 류서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영민왕을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장터로 나가자꾸나. 이건 어명이다. 어명을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어린 아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게 한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채워주지 못하는 만큼 자신이 두 배로 아들을 사랑해주는 것. 그에게 자신의 최선을 다해주는 것.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은 옥체를 보전하시는 것이 먼저라고 사료되옵니다만….”

곁에서 지켜보던 상선이 간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견문 학습은 소신에게 맡기시고 부디 전하의 옥체를 보전하심이….”

“상선,”

영민왕은 자신을 걱정하는 상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따듯함이 묻어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오전 내에 돌아올 것이다. 지금 못한 업무는 오늘 안에 마치도록 하자꾸나.”

“전하, 하오나…!”

“세자, 어서 나갈 채비를 하거라.”

영민왕이 상선의 말을 끊고는 세자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상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덩달아 두려워진 류서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영민왕을 올려다보았으나 영민왕은 안심하라는 듯 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이 가득한 그의 두 눈을 가만히 보던 세자의 얼굴에도 마침내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네, 아바마마. 명 받들겠습니다.”

밝은 대답에 영민왕이 만족한 듯 류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도 얼핏 근심의 빛이 비쳤다. 그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정신없는 장터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그 스스로도 장담하기 어려웠지만 눈앞에 있는 아들이 더 소중했다. 마음속의 두려움을 애써 털어버리려는 듯 영민왕은 자신을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상선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상선은 무어라 말을 꺼내보려 하였으나 이내 자신의 말이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전하.”

편전의 무거운 공기 속에 오직 영민왕을 바라보는 세자의 얼굴만 밝게 빛났다.

***

이른 아침 장터는 매우 분주했다. 고운 콩가루를 묻힌 과자부터 여인의 옷을 치장하는 장신구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펼쳐있었다. 이제 막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친 상인들은 오늘의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힘차게 손님을 불렀다.

“이리 오시오, 만물을 다 가질 수 있는 만물상이오!”

“사과 열개에 5현, 5현!”

앞다투어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 때문에 정신없는 시장 한편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한 사내가 여자아이를 붙들고 무어라 속닥거렸다.

“자, 들어가서 뭐라고 하면 된다고?”

수상한 남자가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대답을 재촉했다.

“어떤 사람이… 수정구 하나를… 훔쳐갔다고….”

아이는 괴로운 얼굴로 마지못해 답했다.

“자, 그다음에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이는 잠시 주저하다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장터 한복판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사라졌다고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는 남자와 달리 아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남자는 그런 아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손에 쥔 포대 자루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아버지…!”

남자가 휙 아이를 돌아보았다. 고압적인 그의 시선에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는 눈을 질끈 감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저… 도둑질 안 할래요. 차라리 밥을 굶을게요!”

질끈 감은 아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겁에 질린 듯했다. 사내는 그런 아이를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바라보더니 돌변하여 순식간에 아이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