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사랑, 그 하찮은 감정에 흔들리다

제 두 뺨을 얼얼하게 훑고 가는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아름다운 가을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어느새 달라진 풍경들. 시간을 느낄 사이도 없이 또 한 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어쩜 조금도 기다려 주지를 않냐? 야속하게. 난 여전히 제 자리인데.”

새삼 시간의 빠름을 느끼며 잠시 멈춰 선 채 도하의 시선이 가을 풍경 속에 머물렀다.

“그래도 덕분에 숨이라도 쉴 수 있었던 것 같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가을을 향해 말했다.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는 듯.

*

텅 빈 가슴 가득 가을을 담은 도하의 자전거가 아파트 앞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

“설마.”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설마 했던 마음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민도하 씨!”

마치 저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환한 미소로 제게 손을 흔드는 남자. 그 사람이었다. 두 번 다시 사랑, 그 하찮은 감정 따위에 놀아나지 않겠다던 제 마음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어 버린…… 그 사람. 도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 가는 것만 같았다.

#1화. 첫 만남

6년 전.

‘쾅!’

찰나의 순간이었다. 신호가 초록 불빛에서 노란 불빛으로 바뀌는 순간. 당연히 빠른 속도로 내달려 교차로를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앞차가 우뚝 멈춰 섰다. 저 역시 속도를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생각보다 꽤 큰 충격이 가해졌다.

“으악! 허, 이를 어쩌지?”

처음 겪는 상황에 도하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서둘러 내려 앞차로 다가갔다.

똑똑똑!

운전석의 남자가 문을 열고 내리는 대신 차 문을 내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괜찮습니다.”

“저…… 차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도하가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가리켰다.

“아…….”

그제야 남자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길고 긴 다리가 펴지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여자 평균 키에도 훨씬 못 미치는 도하와 달리 큰 키에 몸에 딱 떨어지는 슈트가 꽤 근사했다. 그 남자에게서 퍼져 나오는 아우라에 도하가 뒤로 한 발 물러나 차 뒤쪽 범퍼를 살피는 남자를 훑었다. 영화배우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양 미간이 일그러지더니 얼굴 가득 못마땅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죄송해요. 보험 처리하시고 연락주세요.”

도하가 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됐습니다.”

도하가 내민 명함도 받지 않고 운전석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아니, 저기요. 괜찮다고 하고 나중에 뺑소니네. 어쩌네, 다른 소리 하지 마시고 제 연락처 받으세요.”

“…….”

남자가 굳이 괜찮다는 데도 명함을 내미는 도하를 귀찮다는 듯 쳐다봤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서로 사진 찍고 헤어지죠. 보험 처리 끝나시는 대로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따지고 보면 제 과실도 있는 거니까 서로 알아서 처리합시다. 부딪친 걸로만 보면 내 차보다 그쪽 차가 훨씬 더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움푹 들어가 있는 도하의 차에 시선을 두었다.

“저……. 혹시 모르니까 저도 연락처 하나 주시겠어요?”

운전석으로 돌아가려는 남자를 다시 한 번 잡았다.

“…….”

남자가 도하를 빤히 쳐다봤다. 괜찮다고 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질척대냐는 눈빛으로.

“크험.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저 다른 의도로 연락처 달라는 거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고요.”

이건 뭔가 묘하게 기분이 상하는 상황이었다. 지금껏 남자들로부터 저런 무관심한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 도하였다. 키가 좀 작긴 했지만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만한 외모였다. 크고 짙은 쌍꺼풀진 눈에 오뚝한 코, 갸름한 얼굴. 거기에 비율로만 보면 키가 조금 작더라도 다 포용이 되고도 남을 터.

“오해 안 합니다. 저 역시 약속이 있고 그렇게 큰 접촉사고는 아니었으니까 각자 알아서 처리했으면 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마음 변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한 입으로 두말 안 할 테니까.”

도하가 제 명함을 얼른 남자의 손에다 쥐어 주고는 차로 돌아갔다. 혹시라도 또, 거절을 하게 되면 더 난감해질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저를 스토커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 도하를 바라보던 남자가 차로 돌아갔다.

“뭐가 저렇게 까칠해? 나중에 딴소리하기만 해봐라. 그나저나 늦지는 않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세 좋게 차를 몰았다. 앞차를 멀찌감치 떼어 놓으며.

*

“어. 엄마. 나 방금 도착했어. 지금 차에서 내려요.”

- 도하야. 오늘은 제발 좀 알지?

“언제는 내가 잘못한 적 있나 뭐. 걱정 마요. 끝나고 전화할게.”

- 그래. 있다 통화해.

“응. 끊어요……. 후우, 에고. 내 팔자야.”

얼굴 가득 그렸던 억지웃음을 거둠과 동시에 전화를 내려놓으며 신세를 한탄했다. 도하 나이 스물일곱. 이 꽃다운 나이에 한 달에 한 번 맞선 자리에 앉아야 하는 제 처지가 참 딱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

서둘러 호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최시현 씨 되시죠?”

도하가 안내받은 테이블 옆으로 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뭔가 모를 기시감이 일었다. 긴 다리를 늘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 시원한 머스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어?”

“민도…… 하 씨?”

조금은 놀란 기색이 스치는 남자에게서 묵직한 제 이름이 흘러나왔다.

“네. 민도하입니다. 여기서 또 보네요.”

이곳으로 오는 길 만났던 그 앞차 남자였다. 시화제약 둘째 아들이자 시화바이오닉스 연구원. 출발 전 엄마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 남자의 프로필이었다.

“일단 앉으시죠.”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참 무표정한 얼굴이다 싶었다. 보통 인사치레라도 한 번쯤은 엷은 미소 정도는 보여주기 마련이거늘. 꽤 훈훈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찬바람이 불어대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뭐 굳이 웃어주지 않아도 저 좋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테니. 그 조차도 필요 없는 건가 싶었다. 자리에 제 몸을 앉히며 최시현이라는 맞선 상대를 훑었다.

*

“솔직히 저 별로죠?”

시원한 입매를 한껏 늘인 도하가 시현을 향해 물었다.

“…….”

음료 주문을 끝낸 도하가 대뜸 묻는 말에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저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나와 있는 이 자리도 본인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데…….”

“…….”

시현은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나 좀 도와줄래요?”

도하가 코끝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민도하 씨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됩니까?”

“아뇨. 그 반대요.”

순간, 도하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

“나 벌써 2년도 넘게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이 선이라는 걸 보고 있거든요. 이쯤 했으면 더 이상 만날 사람이 없을 법도 한데 생각보다 많은가 봐요. 나랑 선 볼 사람들이. 어차피 오늘이야 최시현 씨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앉아있다 끝나긴 하겠지만 벌써 다음 달이 걱정이에요. 이 자리에 또 나와 있어야 할 테니까.”

국내 화장품 업체 3위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려놓은 더 아름다움의 외동딸인 민도하. 벌써 도하에게는 오늘이 스물두 번째 맞선이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만 다를 뿐, 한 달에 한 번, 장소도, 시간도, 매번 꼭 같았다. 계절이 바뀌고 또 다른 계절이 찾아와도 항상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재작년 겨울이 그 시작이었으니까.

다소 굳어있던 입매의 시현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어디 계속해보라는 듯 느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도하를 바라봤다. 그런 시현을 보며 도하가 싱긋이 웃자 동그란 두 눈이 이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도 휘어지며 반짝였다.

“많이는 안 바랄게요. 딱 6개월만 그쪽이랑 나,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걸로 해 주면 안 될까요?”

“지금 계약 연애라도 하자는 겁니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뭐, 말하자면 그렇긴 한데. 계약 연애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그냥 만나는 걸로만 해두면 안 될까요?”

“그냥 말로만 만나는 걸로 해 달라?”

시현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하하. 바로 그거죠.”

또 한 번 시원한 반달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좋은 일 하는 셈 치면 나는 뭐가 좋은 겁니까?”

“최시현 씨도 이런 자리 안 나와도 되지 않나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이렇다 저렇다 대꾸도 없이 묘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도하를 쳐다봤다.

“하하하. 뭐 정 싫으시면 못 들은 걸로 하시고요. 근데 묘하게 재주가 있으시네요.”

“재주요?”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참 묘하게 기분 상하게 만드는 재주랄까요?”

“하, 내가 그랬습니까?”

“하하하. 모르시는구나. 아까 길에서도 그러시더니 지금도 쭉 그러신데. 아, 혹시라도 오해할까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까도, 지금도, 저도 최시현 씨한테 별로 관심 없습니다.”

꼬박 꼬박 존대를 하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도하였다.

“아. 기분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제 면전에 대놓고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무례한 쪽은 도하가 아닐까 싶었다.

“아뇨. 뭐. 괜찮아요. 의도한 바는 아닌 것 같으니까. 뭐 딱히 할 말도 없는데 우리 그만 일어날까요? 가는 시간이 아깝잖아요.”

도하가 웃는 얼굴로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은 감정으로 만나기로 했다면서 바로 일어나 버리면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 누가 볼지 모르는데.”

“아. 전 제 제안에 탐탁지 않아 하시는 줄 알았는데…….”

시원한 입매를 늘어뜨림과 동시에 눈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흥미가 생길 것도 같네요. 식사라도 하죠.”

“네. 뭐.”

*

도하의 주도로 몇 차례 질문이 오고 간 후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질문을 하는 족족 툭툭 끊어내는 느낌이랄까. 그저 묵묵히 제 앞에 놓인 접시의 음식들을 먹어 치울 뿐이었다. 이 상황이 어색한 건 도하뿐인 건지, 앞에 앉은 무뚝뚝한 남자는 좀 전과 다름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런 표정. 주스 한 잔이었으면 될 시간이 오히려 예상보다 더 길어지고 있었다.

“일어나야 합니까?”

이미 몇 차례 손목시계를 힐끔 내려다보는 도하를 향해 물었다.

“하하하. 뭐, 전 사실 이렇게 어색한 자리는 불편해서요.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네요. 꿀 먹은 벙어리도 아니고.”

도하가 나이프와 포크를 살며시 내려놓고는 입을 닦았다.

“…….”

시현이 또 한 번 입매를 늘이며 말없이 도하를 쳐다봤다. 흥미롭다는 듯.

“초면에 실례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무표정한 편인가요? 아니면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가요?”

“지금 내 표정이 문제가 됩니까?”

“뭐, 인사치레라도 좀 웃어주시고 하면 덜 어색할 것 같아서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잖아요.”

“훗.”

시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 봐요. 보기 좋잖아요. 그렇게라도 웃으니까 훨씬 부드럽네요. 앞에 앉아있는 사람도 덜 불편하고.”

도하가 또 한 번 코끝을 찡긋거리며 예쁘게 휘어진 반달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민도하 씨는 원래 마음에 담아 놓는 거 잘 못하는 성격입니까?”

“네?”

“보통 면전에 대고 그런 말 잘 하지 않지 않나?”

“아……. 그런가요? 하하 하하하.”

도하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일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혼자 하는 거에 더 익숙하다 보니 다른 사람 배려를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 뭐, 갑자기 그렇게 정색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 제가 더 미안하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 제 앞에 앉은 저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민도하 씨.”

“네.”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봅시다. 민도하 씨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으니까. 나도 뭐, 얻을 수 있는 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잖습니까?”

“뭐, 그렇게 따지면 그냥 맞선 보는 거랑 별 차이가 없겠는데요?”

어쩌면 맞선 자리가 더 편할지도 몰랐다. 이건 뭐 벽 보고 앉아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럼 민도하 씨 좋으신 대로.”

시현이 저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본 사람이랑 밥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도하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맞선 자리에 나오다 보면 별 거지같은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까. 경우 없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되레 이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맞선 많이 봤습니까?”

또 한 번 저도 모르게 무심히 웃음을 흘렸다. 이 저녁, 괜한 호기심이 일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을 시현에게.

“아마 오늘이 스물두 번째쯤. 최시현 씨는요?”

“뭐, 아마 나도 그 비슷할 겁니다.”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자체가 없었다. 때문에 딱히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결혼에 대한 관심도 없었던 시현이었다.

“후후후. 그럼 이 맞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혼인가요?”

“아마도. 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모두가 원하는 건 그거겠죠?”

“아무리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으려고 해도 가끔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내 의사랑 전혀 상관없이 이렇게 희생당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남자가 싫은 겁니까? 아니면 결혼이 싫은 겁니까?”

저답지 않게 궁금했다. 제 눈앞에 있는 저 여자가.

“글쎄요. 거창하게 비혼주의자도 아니고, 남성 혐오주의자도 아니에요. 단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에요.”

도하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

빌고 또 빌었다. 제 사랑을 한 번만 봐 달라고. 당신의 잣대로만 바라보지 말고 가슴 따뜻한 한 사람으로 지켜봐 달라고.

‘흐윽, 흑흑! 엄마! 제발! 나랑 서준이 좀 제발 허락해 줘요. 나, 서준이가 너무 좋아. 사랑한다고. 이렇게 숨이 끊어질 것처럼 여기가 너무 아픈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정말 숨을 못 쉬겠다고.’

비처럼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엄마에게 매달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