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약 결혼
“내가 진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 새끼가 치사하게 칼을 들고 있잖아. 이번만 눈감아주라. 어?”
“지수연.”
“살짝 째지긴 했는데 피도 많이 안 났고….”
“한국 들어와야겠다.”
“진짜 잘못했다고. 이제 정말! 하늘에 맹세코 다시는 오지랖 안 부릴게.”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
“회사에 문제가 생겼어. 들어와서 얘기해.”
규모가 크진 않으나 식품 업계에선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그룹 ‘에이레네’의 막내딸, 수연. 수연은 어릴 때부터 온갖 무술을 다 배운 탓에 타국에 와서도 종종 불의를 못 참고 오지랖을 부리곤 했다.
미술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이 미술관보다 경찰서를 더 많이 간다며 그룹 대표인 오빠에게 혼나는 게 일상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거장의 작품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만큼 큰 공부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날, 오빠의 연락을 받고 난 후 수연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한테 강요할 생각 없어. 다른 방법 찾으면 돼. 그뿐이야.”
“다른 방법?”
“….”
“오빠.”
“듣고 있어.”
“남은 방법이 없는 거잖아. 나, 그걸 모를 정도로 철없지는 않아.”
“….”
“최후의, 또 최후의 수단 끝에 남은 선택이었겠지. 오빠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버지 대신이라며 혼자 지고 있었을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잘 안다. 속없이 미술 공부를 한답시고 유학 가 있는 동생이 계속 뭐 모르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랐을 사람이다. 정략결혼이란 카드를 꺼내놓았다면, 이건 최후의, 다시 그 최후의 최후일 것이다.
그렇게 말괄량이 유학생이 하루아침에 조신한 평창동 며느리가 되었다.
***
호텔 데이모스, 1101호
프라이빗 룸.
연예인 부럽지 않은 외모에 피지컬까지, 수연은 왜 남자에게 이상한 소문이 돌았던 건지 이유를 알 것만도 같았다.
그룹 데이모스의 장남, 한강준 전무. 인물 좋고, 능력 좋고 집안까지 좋은 저 남자가 아직까지 결혼을 못 했단다. 숨겨둔 애인이 있다느니, 사내구실을 못한다느니 이상한 소문이 날 만도 하지.
“나에 관한 소문, 모르지는 않을 거고. 그걸 다 알고도 나랑 결혼을 하겠다는 겁니까?”
“네.”
“이유는?”
“아실 텐데요.”
“돈?”
“그럼 제가 묻죠. 아무리 소문 때문이라도 그렇지. 그 재력에 그 인물이면 제가 아니더라도 선택지는 많을 텐데요?”
제 무덤을 파면서도 당돌한 수연이 웃긴다는 듯 강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묻는다.
“그런 질문은. 오히려 당신한테 불리한 거 아닌가?”
“경영을 제대로 배우진 않았지만. 그쪽에서도 얻는 게 있어야 되는데.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으니까요.”
“데이모스가 다른 사업은 몰라도 식품 업계에선 신생 기업이나 다름없고, 에이레네는 우리가 필요한 역사와 전통이 있으니까….”
수연은 오빠에게 이미 백만 번은 더 들은 이야기를 해대는 강준의 말꼬리를 자른다.
“저를 너무 물로 보셨네요. 저는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를 묻는 게 아닌데.”
의외의 반응에 강준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자신의 재력과 외모를 보고 불나방처럼 뛰어들던 여자들과는 다른 모습에 흥미를 가진다. 이 여자라면, 자신의 긴 방황을 끝내줄지도 모르겠다.
“당신 표현대로 기울어진 혼사. 덥석 잡아 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중하네.”
“뭐가 더 있는 거죠?”
“예상하시는 대로.”
“저에게 따로 요구하는 조건이 있는 거고요.”
“눈치도 빠른 스타일이고.”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 프라이빗 룸 안으로 변호사 하나가 들어온다. 변호사가 다짜고짜 수연에게 비밀유지 서약서를 들이민다.
“워낙, 보안이 생명이라.”
강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들었다 내린다. 꽤나 여유로워 보인다.
수연은 도대체 비밀유지 서약까지 해가면서 제안할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비밀유지 서약을 끝내자 변호사가 또 다른 봉투 하나를 내민다. 강준이 읽어보라는 듯 눈짓한다. 강준은 수연이 계약을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은 듯하다.
1. 서로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는다.
2. 대외적인 행사를 포함한 양가 집안 행사에는 상호 합의가 있는 사유 없이 불참할 수 없다.
3. 스킨십은 대외적 혼인 관계 유지에 필요한 경우로만 한정한다.
4. 대외적 부부관계를 저해하는 불법적 일탈은 일체 금지된다.
5. 상대의 재산에 대해 증여, 상속, 기타 모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6. 위 조항을 위반하는 모든 사항은 이혼 요구 사유임과 동시에 귀책사유가 된다.
7. 이혼에 귀책사유가 있는 자는 법적 위자료와 별개로 50억의 위자료를 지급한다.
8. 계약의 유지 및 종료에 대한 권한은 모두 갑에게 있다.
수연이 조항을 찬찬히 읽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스킨십은 잠자리 포함인가요?”
수연의 물음은 당돌하고 솔직했다. 강준은 수연의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비웃으며 다시 반문했다.
“대외적으로 잠자리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 얼굴을 하고 매일 부딪히는데 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수연의 머리를 스쳤다. 거기에 재벌가 며느리로서의 메리트는 찾아볼 수도 없는 조항들이라니, 불공정 계약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 수연은 뜨거운 밥, 식은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재벌가 며느리지만, 내 것은 없고. 밖에선 세상 달달한 척하지만, 안에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는 거, 그거면 돼요?”
“그리고 귀책사유를 위반하는 경우 외에 이 계약의 종료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거 명심하고.”
“사인하죠.”
그렇게 수연은 강준과 부부가 되었다. 허울뿐이었지만.
***
1년 후,
강준과의 부부 생활은 대외적으로 행복했고, 대외적으로 평화로웠다.
“오늘 2시예요.”
“알고 있어.”
불필요한 대화 없이 깔끔한 의사소통이었다. 가끔은 강준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 걸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금방 그만두었다.
“아마 기자들이 따라올 거야. 말만 비공식이지 공식이나 다름없는 자리고.”
“알아요.”
흰 셔츠에 어두운 컬러의 넥타이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준은 여전히 소름 끼치도록 잘 생겼다. 이 사람과 그저 형식적인 부부일 뿐이라는 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다녀와요.”
“조금 이따 보지.”
***
갤러리 앞에 고급 세단이 멈춰 서고 강준이 연예인 포스를 풍기며 차에서 내렸다. 갤러리 밖은 기자들이 한데 엉켜 붙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전무님, 들어가시죠.”
강준을 발견한 수연이 갤러리에서 나와 강준에게 향한다. 수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왔어요?”
“그럼. 누구 취임식인데.”
강준이 수연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며 미소 짓는다. 수연도 기자들을 의식했는지 미소로 화답한다. 수연과 강준은 카메라 플래시를 뒤로하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갤러리 안에 전시된 그림을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밖과 다르게 조용한 갤러리 안에서는 사람들의 대화가 수연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종종 듣는 가십이지만 매번 거슬렸다.
“남편 하나 잘 얻어서 팔자 피고 좋댄다.”
“뭐가?”
“저 여자 말이야. 갤러리 대표. 남편 애인한테 밀려서 사랑도 못 받는다는데 뻔뻔스럽게 쇼윈도 부부 행세는.”
“야. 들리겠다. 조용히 해.”
“뭐 어때. 들으라고 해. 이런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하구만.”
수연이 참을 인을 마음속으로 그려가며 주먹을 꽉 움켜쥔다. 강준이 걸음을 멈추고 수연에게 나지막이 묻는다.
“숨겨둔 애인이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그건 나도 모르죠. 당신 사생활을 내가 왜.”
“가서 말하지 그래. 사랑은 못 받고 있지만 애인한테 밀린 건 아니라고.”
“당신은 위로를 그딴 식으로 하더라.”
“위로로 들렸나. 난 그저 팩트를 말한 건데.”
끝까지 고운 소리 할 줄 모르는 강준의 말에 수연은 무엇을 기대하겠냐 싶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자 강준이 수연의 귓가에 다가가 묻는다.
“꼬셔봐.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단 착각이라도 들게끔. 그래야 저렇게 의심하는 인간들까지 완전히 속지 않겠어?”
“꼬시면 넘어올 생각은 있고?”
수연이 보란 듯이 사랑스럽게 웃으며 묻는다. 수연은 그의 도발에 절대 지는 법이 없었다. 강준이 수연의 어깨를 더 꽉 감싸 안는다. 그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몇 분간의 지루한 부부연기를 마치고, 강준은 본사로 들어가기 위해 수연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여기 좀 보고 웃어주십쇼!”
수연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척 기자들을 위한 사진을 찍혀준다. 1년 정도 이 생활을 하다 보니 억지로 웃는 것도 이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이리 와.”
차 앞에서 강준과 수연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인파가 한 무더기다. 강준이 한 손으로 수연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과한 애정 연기에 수연이 눈을 크게 뜨고 강준을 올려다본다. 평소답지 않게 넘치는 애정 표현이었다.
“적당히 해요….”
수연이 눈은 강아지처럼 떠놓고는 앙다문 입술로 강준에게 중얼거린다. 강준은 마치 사랑 표현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에 꿀을 뚝뚝 흘린다.
다들 들으라는 듯
“나도 사랑해.”
맥락에도 맞지 않는 영혼 없는 멘트를 날리면서.
***
강준의 갤러리 방문이 나름 효과적이었는지 갤러리와 데이모스 본사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본사로 돌아온 강준은 모니터를 확인하다가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내선 전화를 든다.
“네, 전무님.”
“홍보실 연결해요.”
“네, 전무님. 홍보실입니다.”
“아내하고 대외 활동 스케줄 잡아요. 기왕이면 기자들 부를 수 있는 걸로.”
***
한강준 전무의 저택,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거실 창가에 앉은 수연이 편안한 차림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사모님, 전무님께서 부르십니다.”
수연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무슨 일이죠?”
“그건 저도 잘….”
“알겠어요.”
수연이 거실 통유리 창을 거울삼아 옷매무새를 확인한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검은 슬립이 오늘따라 자신의 살색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것 같아 어깨 위에 얇은 가운을 걸쳤다.
“전무님. 사모님이십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직원이 들어가라며 손짓하자 수연이 어깨에 걸친 가운을 다시 여미며 서재 안으로 들어간다.
“앉아.”
강준이 수연이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이 시간에 왜요?”
수연은 그의 목소리에 괜한 긴장감이 드는 걸 겨우 참아내고 차분히 묻는다. 강준은 수연의 물음에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하고 있던 타이를 반쯤 풀어내고 수연이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아무래도 대외적인 행사를 좀 더 잡아야겠어. 누구 연기력이 부족한지 자꾸 의심하는 사람들이 느는 게 상당히 거슬리거든.”
“아무리 연기라도 애정이 없으니까 티가 나겠죠. 몰입이 잘 안 되는 걸 어떡해요.”
“애정이라…. 당신은 나한테 애정이 없다는 말로 들리네. 서운하게.”
강준이 앉아있는 수연의 앞에 멈춰 선다.
“앞에 서 있지 말고 옆으로 좀 가주시죠. 서운하지도 않으면서 서운한 척하지 말고.”
수연이 일부러 더 태연한 척 반응한다. 이런 식으로 기에 눌리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몰입이 안 되면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강준이 수연의 옆에 앉아 수연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다가온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더 숨이 막힌다. 그의 눈빛에 심장이 먹혀버릴 것 같았다. 위험하다.
“당신 이러는 거 계약 위반이에요.”
수연이 강준의 양어깨를 잡고 밀어낸다. 급하게 일어나려 한 탓인지 어깨에 걸쳐두었던 가운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털끝 하나 안 건드렸는데 무슨.”
강준이 떨어진 가운을 주워 수연의 어깨에 올려준다. 맨살에 닿는 그의 두 손이 차갑다. 팔을 타고 느껴지는 찌릿함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외부 일정 잡았어. 부부 동반 모임이고. 이번 주말이야. 기자들 많을 거고. 보는 눈은 더 많을 거고.”
“그 말 하는데 이런 장난까지 칠 필요 없잖아요.”
“오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좀만 닿아도 움찔거리는 거. 다음에도 그러면 곤란하니까.”
강준이 태연하게 대꾸하자 수연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묻는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계약서 쓰신 건 그쪽이거든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이건 대외적 관계 유지를 위한 스킨십이야. 더 완벽하게 보이기 위한 연습이라고.”
“당신도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대외적인 스킨십은 좀 떨리는 척을 해줘야 더 먹혀.”
준비된 멘트를 치듯 더듬거림 없이 완벽히 대꾸하는 수연을 보고 강준이 두 손을 들어 보인다.
“난 이래서 당신이 좋아. 한 마디를 안 지거든.”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 난 그래서 당신이 싫어.”
“봐봐. 내 말 맞지?”
“더 할 말 없죠?”
“나가고 싶으면 나가 봐.”
수연이 일부러 소리가 나게 서재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나온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화들짝 놀란다.
“오우, 미안해요. 내가 힘 조절을 못 했나 봐.”
“괜찮습니다.”
“차는…. 다시 내오라고 할까요?”
수연의 뒤를 따라오던 직원이 수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아니, 괜찮아요. 9시가 넘었는데. 다들 얼른 퇴근하라고 해요.”
“네. 사모님.”
수연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괜찮은 척 직원을 돌려보낸다. 오늘 밤도 잠들지 못해 아주 기나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며칠 후, 서울 근교의 한 보육원.
정치인에서부터 연예인에 재벌가 사모님들까지, 그들이 대놓고 하는 봉사를 위해 제일 많이 찾는 곳이 이 보육원이었다. 삐뚤어진 후원이라도 많이 받는 게 아이들에겐 더 좋을 테니 그들을 막을 필요도 없었겠지.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