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누구야?”

해온이 한곳을 응시한 채 묻는 말엔 장난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누군데?”

마치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병실 안에 있는 모두가 얼었다. 하지만 땡을 외치며 장난이라고, 이게 다 놀이일 뿐이라고 외쳐야 할 술래는 지금 완벽하게 진심이었다. 저 눈빛이 그랬다.

“잘못 들어왔어. 모르는 사람이야.”

빠르게 들리는 찬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해온의 어머니인 천 회장이었다.

“나가세요.”

서늘한 시선이 매섭게 윤솔에게 콕 박혔다.

“나가세요. 부탁입니다.”

나가라는 말이 정확하게 윤솔의 귀에 꽂혔다. 부탁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한 명령이었다.

“김 비서, 병실에 아무나 들어오게 하면 돼?”

천 회장의 호통에 그녀의 비서가 빠르게 다가와 윤솔의 팔을 움켜잡았다.

“나가시죠.”

끌어내는 힘에 윤솔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뒷걸음질 쳤다.

‘해온아, 나 윤솔이야. 왜 그래? 왜 날 모르는 척해?’

눈동자에 담긴 간절한 외침은 윤솔에게 닿았던 해온의 얼굴이 돌아가면서 끝이 났다.

“최다인, 뭘 얼마나 울었기에 눈이 그 모양이야?”

“해온아…….”

“나 사고 나서 엄청 놀랐나 보다. 괜찮아. 걱정 마.”

입꼬리가 씩 올라가더니 해온의 얼굴엔 햇살을 가득 담은 미소가 화사하게 떠올랐다.

“해온아!”

다인은 뛰어가 해온의 품에 폭 안겼다.

“걱정했잖아.”

“살짝 부딪힌 거로 무슨 걱정이야.”

해온의 손이 토닥토닥 다인의 등을 쓸었다.

윤솔에게만 향했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고, 윤솔에게만 허락했던 따뜻한 품과 손길이었으며, 윤솔에게만 보여주었던 빛을 가득 품은 미소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이 흐른 것뿐인데, 그 모든 게 사라졌다. 한순간에 그 모든 게 다른 여자의 것이 되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없어졌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비서에게 끌려 밖으로 나온 윤솔은 병실 복도 한가운데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싹 비워져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냥 가세요. 더 있다가는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걱정이 담긴 비서의 말에 윤솔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이렇게 갈 수는 없었다. 해온이 저기 저 병실 안에 있는데, 제 사랑이 저기 저 안에 있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얼마 후, 병실에서 천 회장이 나와 윤솔을 향해 걸어와 망설임 없이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내 ‘짝’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너 같은 것 때문에 내 귀한 아들이 죽을 뻔했어. 평생 밑바닥에서 박박 구르다가 내 아들 잡으니 눈에 뵈는 게 없었지? 모자 사이도 이간질해 끓어 버리고, 거머리처럼 딱 붙어서 등골 빼먹더니, 결국 애를 저렇게 만들어?”

“저, 저는…….”

“닥쳐! 감히 누구 앞이라고 입을 뻥긋해!”

천 회장이 무서운 기세로 말문을 막아 버리자, 겨우 열렸던 윤솔의 입이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다시 닫혔다.

“너 같은 것하고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잘 들어.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마. 또다시 내 아들 눈앞에서 알짱거렸다가는, 이렇게 말로 안 끝내. 널 반드시 시궁창에 처박아 버릴 거야. 내 손으로 직접 그렇게 할 거야.”

“…….”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숨죽이면서 살아. 최소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내 아들 눈에 절대로 띄지 마!”

천미옥, 해온의 어머니인 그녀는 天(천) 그룹의 회장이었다. 아버지인 천갑성에 이어 천 그룹의 회장이 자리에 오르자마자, 200대 기업 안에 겨우 들던 천 그룹을 조금씩 키우더니 작년에는 50대 그룹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대단한 사업가였다.

평소의 모습에도 싸늘한 기운이 돌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운 인상이었는데, 그런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날엔, 그 기운에 밀려 대부분 입도 벙긋 못하고 움찔거리기 일쑤였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미옥은 마지막으로 윤솔을 무섭게 노려보고는 비서에게 “이거 치워.”라고 명령한 뒤 그대로 뒤돌아 병실로 걸어갔다.

“가요. 여기 더 있다가는 큰일 납니다.”

결국 윤솔은 또다시 비서의 손에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뭘 할 수도 없었다. 제 사랑이 저를 기억 못 하니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병원 밖으로 쫓겨나듯 나온 윤솔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끄윽, 끄윽.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흐르는 흐느낌은 지금 윤솔의 절망이 얼마나 깊은지 고스란히 들려주는 듯했다.

*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윤솔은 아주 작게 해온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해온아.”

그 소리가 들렸을 리가 없는데도 해온은 저 멀리서 화사하게 웃었다. 비록 해온이 웃어 준 상대는 자신이 아니지만, 윤솔은 그가 웃었다는 사실만으로 다 좋았다.

“해온이 너, 진짜 너무해!”

“뭐가 너무해!”

상대와 장난치는 평화로운 해온의 모습에 윤솔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야, 아빠 행복해 보인다. 그치?”

윤솔은 제 배에 손을 올렸다.

“다행이야. 행복해 보여서.”

훔쳐보는 거라도 이렇게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을 한번은 봤으니 됐다. 그것만으로 제 운명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남들이 들으면 멍청하다고 말할 만한 생각이라도 윤솔은 괜찮았다.

윤솔은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눈물이 마르자 다시 고개를 내려 해온을 응시했다.

“걱정 같은 거 하지 마. 우리 아주 잘 살게. 다 괜찮을 거야. 나 씩씩하잖아. 그러니까 너도 다 괜찮아야 해? 꼭 행복해? 이거 진짜 진심이야. 알지?”

혼자만의 이별이라도 상관없었다. 가까이서 얼굴 마주 보며 말할 순 없지만, 슬픈 독백이라도 이렇게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니까. 영영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뻔도 했는데, 당연히 다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안녕. 우리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나해온.”

윤솔은 마지막으로 해온을 향해 밝게 웃어 주고는 그대로 뒤돌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작은 가방을 고쳐 잡으며 한 발 한 발 힘차게 걸어 나갔다.

“……해…….”

몸이 어느 정도 괜찮아지자, 다인과 함께 병원 내에 있는 공원에 가볍게 산책을 나온 해온은 귓가에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왜?”

갑작스러운 해온의 행동에 다인도 주위를 살폈다.

“아니, 누가 부르는 것 같아서.”

“아무도 없어.”

“응, 그러네. 잘못 들었나?”

해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위엔 사람들이 많았고, 눈길 닿는 곳엔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으니까.

“현호랑 재유 언제 온대?”

“오고 있대. 뭐 사냐고 물어서 해온이 너 좋아하는 초밥 사 오라고 했어. 잘했지?”

“응. 잘했어. 이제 들어가자.”

해온에겐 그저 가볍게 흘러가는 수많은 날이 오늘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날씨도 따뜻했으며 바람도 불지 않았던 그런 날이었다. 바로 이날, 저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날이라는 걸, 해온은 아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에겐 가장 끔찍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제1장

윤솔의 첫 집은 경기도에 있는 작은 보육원이었다. 주소는 경기도에 속하지만, 강원도와도 가까운 곳, 억지로 찾고 찾아야지만 올 수 있는 곳, 바로 경기도 변두리라는 뜻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 부모 둘 중 누구도 필요치 않았고 책임도 지지 않았던 아이. 그러니까 결론은 고아. 윤솔이 자신을 소개할 때 빼놓지 않고 제일 먼저 하는 말이었다.

윤솔의 부모는 태어난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된 아기를 상자 속에 담아서 그런 보육원 앞에 버렸다. 당연히 생일이나 이름 같은 게 쓰인 쪽지도 없었다. 아기만 달랑 두고 가버린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없어서 아기라 불릴 수밖에 없었던 아기에게 원장 선생님이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그게 서윤솔, 이 이름이었다. 물론 생일은 윤솔이 보육원에 들어온 날이었다.

태어나 첫 세상이 보육원이었기에 윤솔은 그곳에서의 생활에 어려움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 무언갈 느꼈다 해도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보육원에서 여러 아이와 부딪치며 사는 게 익숙했고, 불쌍해하는 시선과 경계하는 시선을 아주 당연하게 느꼈으며, 윤솔의 행동과 상관없이 그저 보육원에 산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고아라는 사실만으로 이유 없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묵묵히 견뎠다. 그렇게 윤솔은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불평등에 무덤덤했다. 더 정확하게는 무덤덤해지려고 노력했다.

기 쓰고 착한 아이가 되려 노력해도 고아라는 이름 앞에 씌워진 색안경은 분명히 존재했고, 손가락질 또한 자주 있었던 일이었으며,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실수로 치부되는 작은 잘못이 저는 비난의 대상이 돼도 억울해하는 감정 같은 건 조금도 품지 않았다.

붙어 있는 목숨이기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무덤덤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 탓에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숨 들이마시고 내쉬며 사는 날까지는 그렇게 살아내 보리라 다짐도 했다. 그래서 뭐든 열심히 했다. 열심히 공부했고, 중학생이 된 그해부터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했다. 덕분에 성적은 언제나 좋았고, 통장에 차곡차곡 모인 아르바이트비는 꽤 두둑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으로 밤늦게 귀가하는 윤솔을 기다려 주는 사람은 원장이었다. 윤솔이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지 알기에 원장은 건강 챙기면서 일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방의 작은 보육원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사정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 안 좋아졌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좋으신 분들이었다. 진짜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해 주셨다. 덕분에 작고 가난한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비슷한 조건의 다른 아이들보다 밝았다. 윤솔이 실현 가능한 꿈을 꿀 수 있게 된 계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언젠가 윤솔이 제 꿈이 하늘 대학교에 입학하는 거라고 말한 날, 원장 선생님이 물었다. 그렇게 기 쓰고 하늘대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고. 그때 윤솔은 당당하게 말했다. 제 삶에 행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테니, 노력을 퍼부어 이룰 수 있는 단 하나, 하늘대 입학, 그것만은 이루고 싶다고.

윤솔의 말에 이어 원장은 또 물었었다. 하늘대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게 소원인 거냐고. 하지만 원장의 질문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늘대 졸업은 너무 큰 꿈이니 바라지 않는다고. 그렇게 대단한 행운을 꿈꾼다면 그건 욕심일 테니까, 그런 욕심은 절대로 품지 않겠다고.

바닥과 평생 함께할 인생이니 딱 한 번 위를 꿈꾸고 싶었고, 윤솔에게 위는 하늘대였다. 그래서 딱 입학까지만 꿈꿨다. 다른 꿈은 절대로 꾸지 않았다. 그래서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하늘대에 갔다. 하늘대 입학, 딱 거기까지가 윤솔에겐 유일한 목표였다. 노력을 퍼붓다 보면 어찌어찌 1학년까지는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르고, 기적이 존재한다면 2학년의 문턱 정도는 밟을 가능성도 있었다. 윤솔의 꿈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나 원하던 하늘대에 입학한 뒤, 윤솔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댔다. 하늘대라는 타이틀로 과외를 시작한 덕분에 중고등학교 때 기 쓰고 하던 아르바이트보다 돈을 조금 더 벌었지만,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생활하는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해온과의 만남은 바닥으로 내려가는 걸 뒤로 미룬 채로, 꿈속의 행복을 조금 더 오래 느껴 보겠다고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아내던 그때였다.

“새벽 알바를 할까? 요즘 24시간 하는 곳이 많으니까.”

대학에 합격하고 보육원을 나오면서 나라에서 받은 자립 정착금으로 당장 묵을 집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입학금과 1학기 등록금까지는 해결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지출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를 그렇게나 해댔는데도 등록금이 좀 모자랄 것 같단 생각이 들자, 윤솔은 새벽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장학금을 받으면 조금 사정이 나아지겠지만, 성적으로 주는 장학금을 받기엔 윤솔이 다니는 학교가 무려 하늘대였다. 대한민국에서 공부로 날고 기는 사람들만 다닌다는 그 하늘대.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모두 빼앗기는 윤솔이 오롯이 공부만 하는 그 애들과 같을 수 없었다. 다행히 많이 뒤처지지는 않지만, 두드러지게 잘하지도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장학금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세상이니 가정형편 어려운 학생들도 넘쳐났다. 각각의 심사를 거치다 보면 어느새 윤솔은 탈락자 명단에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네가 왜 탈락인지 모르겠다고 좀 알아보라고 했지만, 윤솔은 그렇게까지 해서 장학금을 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돈 줄 사람이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겠다면 그러라고 하는 게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저를 둘러싼 상황이 모두 힘겨웠지만, 윤솔은 그 현실에 만족했다. 간절히 원했던 꿈을 이뤘으니 당연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현실에 만족하며 모자란 돈만큼 일거리를 찾으려 노력하던 그런 날.

수업과 수업 중간, 잠깐 시간이 빈 그 틈에 윤솔은 하늘대 중앙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그녀의 주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윤솔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살피다가 벤치 아래에서 홀로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는 휴대폰을 발견했다.

“여보세요? 제가 휴대폰 주인이 아니라 휴대폰을 주웠거든요.”

전화를 건 상대는 재유라는 사람이었다. 휴대폰에 이름이 저장되었다는 건 적어도 친분이 있다는 뜻이기에, 윤솔은 서둘러 자신이 이 휴대폰을 주웠음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대며 주변을 살폈다. 휴대폰 주인이 어디쯤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 네. 저 그 휴대폰 주인이에요.]

휴대폰 주인은 밝은 음색의 남자였다.

“아! 네.”

전화 건 상대가 휴대폰 주인인 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윤솔은 다시 벤치에 앉았다.

[어디에 계세요? 제가 지금 찾으러 갈게요.]

“여기 중도 앞 벤치인데요. 이 벤치 아래서 휴대폰을 주웠어요.”

[아! 아까 거기 있었는데, 그때 떨어졌나 보네요. 제가 지금 갈게요.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나요?]

“네.”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티끌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음성이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목소리에서부터 사랑이 퐁퐁 샘 솟는데, 휴대폰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최신 폰인가?”

휴대폰은 최신 휴대폰임을 증명하듯 작은 흠집조차 없었다. 바꾼 지 얼마 안 됐다면 진짜 최신 폰일 것이다. TV에서 광고하는 그런 폰. 이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 5년 된 제 구닥다리 휴대폰이 왠지 가엽게 느껴졌다. 다른 주인을 만났더라면 벌써 서랍 한구석에서 푹 쉬고 있었을 텐데, 주인 잘못 만나 휴대폰도 고생한다는 생각에 윤솔은 픽 쓴웃음을 흘렸다.

윤솔은 휴대폰을 벤치에 있는 제 가방 위에 살짝 올려놓고는 다시 아르바이트 찾기에 열을 올렸다. 하루라도 빨리 적당한 아르바이트를 찾아야만 했다.

“저, 안녕하세요?”

정신없이 폭풍 검색 중이던 윤솔의 머리 위로 이미 한 번 들어 본 듯한 음성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눈 부신 햇살을 배경으로 둔 남자가 햇살보다 더 화사하게 웃으며 윤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이 휴대폰 주인이에요.”

남자는 생글생글 밝게도 웃으며 가방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시간 되시면 제가 커피라도 샀으면 하는데요.”

“아니에요. 이 자리에 그냥 있었던 것뿐인데요. 괜찮습니다. 그럼.”

윤솔은 가방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이대로 이 남자와 헤어져 가면 끝날 일이었고 그래야 하는 게 당연했다.

“점심 드셨어요? 저 아직 점심 전인데, 같이 점심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감사의 뜻으로.”

“그것도 괜찮아요. 감사하다는 말에 뜻은 정확하게 전달됐으니까, 더는 감사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저는 수업이 있어서 이만.”

희미하게 빙긋 미소를 머금은 윤솔은 다시 한번 더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남자를 지나 걸어갔다.

윤솔은 씩씩하게 한참을 걸어서 중앙 도서관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온 다음에서야 우뚝 멈추고 상체만 틀어 뒤를 봤다. 하지만 곧 틀어졌던 상체는 제자리를 찾았고, 천천히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을 향해 걸었다.

“자존심 엄청 상하게 하는 스타일이네.”

웅얼거리듯 말을 뱉어낸 윤솔은 입술을 삐죽였다.

남자는 넘치는 사랑과 넘치는 돈도 함께 받은 사람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잘잘 흐르는 게, 백 퍼센트의 확률로 있는 집에 사는 귀한 자식이었다. 윤솔이 저 밑바닥에서 사는 인생이라면 남자는 하늘 어디쯤에서 사는 인생일 게 뻔했다. 그러한 사실은 꼭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닥과 딱 붙은 인생이라 정반대인 저 하늘 위의 인생은 귀신같이 알아보는 법.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인생이라 더 눈에 들어왔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까.”

윤솔은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는 힘차게 걸었다. 아직 적당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지 못했기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다시 검색하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짓을 해서든 반드시 새벽 아르바이트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 생각한 남자를 다시 본 건 일주일 정도 흐른 후였다.

새로 찾은 새벽 아르바이트로 수면 시간이 줄어든 탓에 윤솔은 잠깐 쉴 생각으로 벤치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자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겨우 며칠밖에 안 된 탓에 몸이 아직 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