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자는 미친 듯이 대로 한복판을 달려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오른쪽 차선에서 트럭이 미처 여자를 확인하지 못한 듯 앞서서 달려오고 있었고 트럭 운전사는 끼익끼익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우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시 넘겨 봐.”

그룹 ‘성진’ 본부장인 승규는 눈이 벌게지도록 사고 현장 CCTV를 확인하고 있었다.

트럭은 여자를 들이받았고 여자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자의 빨간 하이힐 한 짝이 도로 위로 떨어지고 이어서, 도로로 무참히 머리를 박고 떨어지는 여자. 그 위로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

“믿어지지가 않아, 사고 한 시간 전에 나하고 식사를 했어.”

“팀장님 차량은 다른 곳에 버려진 채 발견했습니다.”

“아내는 그날, 정확하게 트위드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승규는 수도 없이 해야 했던 말이었다.

“경찰에서 이미 반복 확인했고, 그 시각 교통사고는 한 건이었습니다.”

승규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여자가 있는 병원에 가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해봐야겠어.”

***

여준은 길거리 구두 수선집에 앉아서, 여자의 빨간 하이힐 굽을 수선하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새 구둔데 아깝게 굽이 떨어졌네요.”

“새 구두입니까?”

“밑창을 보면 알죠. 방금 신었어요. 흙도 하나도 안 묻었고.”

여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보호자분 지금 어디 계세요? 환자분 깨어나셨는데.”

“저기, 보호자가 아닙니다. 아무튼, 깨어나셨다니 반갑네요.”

“문제가 환자분이 기억을 못 하세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여준은 굽 수선을 마친 빨간 하이힐 한 짝을 봉지에 넣고 급하게 일어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재희는 해맑은 표정으로 여준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누구세요?”

재희는 여준을 궁금한 듯 쳐다보며 물었다.

“나요?”

여준은 당황해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럼, 나겠어요?”

“그렇겠죠.”

“내가 누군 줄 모른다는 거잖아요?”

“내가요?”

“아뇨, 내가요.”

“그러게요.”

여준은 눈앞에 기억을 잃은 여자를 보고 있다는 현실보다 예상치 못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게 더 믿기지 않았다. 재희, 역시 기억을 잃었다는 현실이 믿어 지지가 않아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제가 무조건 트럭으로 뛰어들었다는 거잖아요?”

“전 우연히 사고를 목격했을 뿐입니다.”

“이 상황에 감사를 드려야 하나요? 가족이 나타나면 인사는 당연히 드리도록 할게요.”

재희는 우아함을 잃지 않고 설명했다.

“혹시, 지금이 몇 년도인 줄은 아세요?”

“모른다고 해야겠죠.”

재희는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과거라든지 전혀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겁니까?”

“믿어 지지가 않아서요,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재희는 황당해서 웃어 보였다. 여준은 막막해서 재희를 바라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재희는 여준이 웃기 시작하자 허탈하게 따라 웃기 시작했다.

“잠깐요.”

여준은 재희가 두 남자에게 쫓기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여준은 며칠 정도 세수를 안 한 몰골로 도로 국밥집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서 국물만 후루루 떠먹고 있었다.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도로 건너편에 빨간 하이힐, 찢어진 청바지, 화려하게 프릴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죽자, 살자 인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다지 많지는 않은 행인들이지만 헤치면서 달리느라 이리저리 부딪쳤다.

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에서 인파를 헤치며 여자를 뒤쫓는 남자 1, 2, 행인들이 악악 소리 지르며 비키고…. 여자와 남자들과 거리가 좁혀지는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여자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차도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뛰어든 여자로 인해서 급정거하느라 끼익끼익 엉키는 차들, 뒤쫓아 오던 남자 둘이 놀라다가 바로 재희의 뒤를 쫓아 차로로 뛰어들었고 파란불로 달려드는 차들로 더욱 엉겨 붙는 강남대로.

여자는 미친 듯이 차도 한복판을 달려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오른쪽 차선에서 트럭이 미처 여자를 확인하지 못한 듯 앞서서 달려오고 있었다.」

“왜요?”

“남자 둘한테 쫓기고 있었어요.”

재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디였어요?”

“강남대로였어요, 나는 건너편 국밥집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거든요.”

“강남대로? 뭐, 검사 시작했다니까 결과가 나오겠죠. 내가 누군지 정도야 밝혀지지 않을까요?”

여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요, 다시 그쪽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텐데요.”

***

여준은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다가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일어나 앉는데 테이블에 놓인 여자의 소지품 보따리가 눈에 들어왔다. 못 본 척 눈을 감았다가 결국 보따리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병원에 도착해서 병실 문을 열었다.

“다시 오셨네요?”

여준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뭐죠?”

재희는 보따리를 받아 들며 물었다.

“그쪽이 수술하기로 했을 때 내가 전달받은 소지품이에요.”

“제가 누구인지 알 만한 물건이 없었나 봐요.”

“신분증은 물론 핸드폰조차 없었어요. 옷가지들은 피가 많이 묻어서 내가 버렸고 아, 착용하고 있던 보석은 봉투에 그대로 있을 겁니다.”

재희는 보따리를 열어보려고 하다가 그대로 침대 옆으로 밀어놓았다.

“한번 확인해 보죠, 그래도. 본인 물건인데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지 않겠어요.”

“뭘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어요.”

“아, 빨간 하이힐, 내가 굽을 수선하고 차에 뒀는데 못 갖고 왔네요. 갖고 올게요.”

“내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있었어요?”

재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어쩐지 이상해서요.”

“다 이상하겠죠, 기억을 잃었는데 지금은.”

“답답하네요.”

여준은 차에 가서 빨간 하이힐을 가지러 가려고 방을 나서다 돌아섰다.

“퇴원하죠.”

“네에?”

“아, 옷도 없네. 옆에 옷가게가 있는 걸 봤는데 아무 옷이나 사 올게요.”

여준은 서두르며 나가려고 다시 몸을 돌렸다.

“내가 기억을 잃었는데, 퇴원이 가능할까요?”

“가능해요, 내가 보호자 사인을 했거든요. 기억이 돌아왔다고 하고 우선 여기부터 빠져나가야겠어요.”

“병원에서 그 사실을 믿겠어요?”

“내가 남편이라고 해요.”

여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승규는 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김 실장은 조수석에서 내려서 승규를 뒤따라 들어갔다. 승규의 차를 뒤쫓아왔던 차량에서 남자들이 내려서 승규 차를 움직였다.

승규는 안내를 향해 바쁘게 걸었다. 순식간에 승규의 일행이 나타나서 승규의 주위에 적당한 간격으로 가이드를 하며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희는 긴 머리로 얼굴을 가렸고 발목까지 내려온 알록달록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로비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준은 재희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쳐다보았다.

승규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재희의 곁을 스치고 있었다.

***

5년 후, 성진 그룹 사장실, 승규는 창가에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었다.

-아내는 그날, 정확하게 트위드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경찰에서 이미 반복 확인했고, 그 시각 교통사고는 한 건이었습니다.

승규는 아내와 점심을 먹고 헤어졌었다. 오후에 아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있었지만, 나타나지 않았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홍 실장이 들어와 승규와 거리를 두고 섰다. 승규는 몸을 돌리고 홍 실장을 쳐다보았다.

“이사님, 오후에 한여준 씨 인터뷰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승규는 다시 돌아서서 등을 보이고 섰다.

“송구스럽지만, 이제 5년입니다.”

홍 실장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내의 시신이라도 찾아오라고.”

홍 실장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혜린이 들어섰다.

“어, 홍 실장님 여기 계셨네요. 아무도 없어서 제가 그냥 들어왔어요.”

“그럼….”

홍 실장은 방을 나갔다. 혜린은 들어와 제집 소파처럼 앉으면서 승규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지겨워, 그 모습 보고 있기도 이제 지쳤어.”

“…….”

“정신 좀 차려, 집 나간 아내 때문에 회사 꼬라지가 꼬라지가 아니야.”

승규는 천천히 몸을 돌려 혜린을 쳐다보았다.

“한 번만 더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말만 해봐, 너는 이 방이 아니라 회사 문턱조차 넘지 못하게 될 거야.”

“허, 나 엄연한 ‘산책로’ 실장 서혜린이야.”

“내 앞에 나타나지 말고 조용히 네 일이나 해.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하고 있어, 조만간 김승규와 서혜린 결혼 발표가 있을 테니까.”

혜린은 억울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승규는 성큼 다가와 혜린의 앞에 마주 섰다.

“결혼은 너 혼자 해.”

혜린은 모욕감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

지방 도시 장날에는 명절을 앞두고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경품 행사가 열리는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퀴즈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 구정을 뭐라고 하는지 아는 분 있는 겨? 손을 들어 봐유, 손을 들어어.”

여자들이 꺄악거리면서 여기저기 손을 들었고 그 가운데 재희가 끼어 있었다.

“저기, 민지 어므니!”

다른 여자들 실망해서 한마디씩 하면서 손을 내리고 재희가 씨익 웃으면서 일어났다.

“설날! 설날이요!”

“우리나라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거 아니여, 질문은 구정이 아니여.”

여자들 에이, 에이, 그러는 게 어디 있어,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

재희는 시장을 빠져나오고 있었고 손에는 경품으로 받은 생닭이 들려 있었다.

***

여준은 그룹 ‘성진’에서 건축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친구 태훈에게서 전해 듣고 입사 지원서를 냈고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회전문을 들어서서 사장실로 안내를 받아 승규의 방에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여준은 다른 지원자가 보이지 않아 당황한 가운데 승규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저는 인터뷰인 줄 알고 왔는데 다른 지원자는 보이지가 않네요.”

“인터뷰는 한여준 씨 혼자입니다.”

“…저는 일을 손에서 놓은 지가 한참 됐고 솔직히 좀 놀랍습니다.”

여준은 일을 찾고 있었고 그룹 ‘성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룹이었다. 그룹 ‘성진’은 계열사 중에서도 건축설계 사무소 ‘산책로’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였고 여준이 한창 시절에 잠시 일했다가 해고를 당했었고 좀 더 덩치가 커지며 이름만 바뀐 설계사무소였기 때문이었다.

승규는 벽면 스크린 리모트 버튼을 눌렀다. 벽면에는 여준이 입사 지원 때 첨부했던 건물 투시도가 나타났다.

얼핏 보면 도넛 건물 외곽이었으나 클로즈업시키자 뜻밖의 한국전통 문양의 창살이 자세하게 나타났다.

승규는 리모트로 스크린을 정지시켰다.

“제가 관심있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승규는 한국전통 문양의 창틀을 가리켰다. 여준은 당황했다. 한국전통 문양을 인용했던 건 아내 서경의 조언을 받았던 부분이어서다. 아니, 거의 서경이 손을 댄 부분이었다.

***

서경은 낮에 장날 경품행사에서 받았던 닭으로 만든 백숙 다리를 뜯어서 여준에게 건네주면서 쳐다보았다.

“어떻게, 솔직하게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지.”

“민지 아빠가 전에 일했던 설계 사무소라고 그러지 않았어?”

“당연히 알고 있지.”

“민지 아가씨, 아아.”

서경은 숟가락으로 백숙 국물의 찹쌀밥을 떠서 먹이고 있었다.

“후우, 뭐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기는 한데, 당신에게 입사 지원 제안을 한 건 그래도 너무 갑자기, 라서 놀랐어.”

“내가 무슨 일을 해. 민지는 누가 보고.”

서경은 관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혹시 당신이 전에 건축가였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인테리어 쪽이었을 수도.”

“여보,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지금도 악몽을 꾸면서 가끔 힘들어하는 서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