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회

밤새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점령했다. 눈이야 헤쳐가면 그만인 듯,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살갗이 공기에 노출되지 않게 꽁꽁 싸매고 자기 갈 길 바빴다. 낮은 앵클부츠 힐을 신은 나의 발 또한 부지런히 움직였다. 살얼음 같은 공기에 노출된 속눈썹에는 구슬처럼 서리가 맺혔다. 후회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평소라면 보일러를 잔뜩 돌려놓은 뜨끈한 방 안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얌전히 있었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개팅 자리를 강제로 마련한 친구가 떠오르자 원망 섞인 한숨이 푹 나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약속 장소까지 목전에 두었고, 억지로 소개팅을 받아들인 나의 탓도 있으니 이번에는 예외 없이 책임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두 번 다시 겨울에 소개팅하지 않을 거야.”

입 안에서 뿜어져 나온 후회에 입김이 더해져 새하얌이 탁할 정도로 짙었다. 매서운 추위에 대한 기분 저하와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일절 모른 채 소개팅을 나가야 한다는 이유가 뒤섞여 짜증 섞인 소리가 강하게 나온 탓이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이길래 꽁꽁 숨기는 건지. 이상형을 빼닮은 남자를 자리에 앉힌 게 아니라면 유경에게 원망 섞인 소리를 가차 없이 폭격하리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복수심에 양쪽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또각또각 굽 소리를 우렁차게 내며 차갑게 언 도보를 걸었다.

[그 남자는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대. 너도 도착하면 내 이름 말해. 그럼 직원이 자리로 안내해 줄 거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네이비색 코트 위로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툭툭 터는데 주선자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메시지 내용을 파악한 후 눈동자를 쓱 움직여 시간을 확인했다. 휴대폰에 표시된 시간은 아직 약속 시각에 도달하기까지 멀었다.

칼같이 약속 시각을 지키는 사람이구나.

휴대폰 홀더 버튼을 누른 후 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상대방이 도착했다는 문자에 마음이 급해졌다. ‘띵’하고 도착 소리를 낸 엘리베이터는 문을 활짝 열었다. 프런트를 향해 걸으면서 다급한 손길로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마지막 점검에 박차를 가했다.

“한유경으로 예약했어요.”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불필요해진 거울을 가방에 넣고, 멀뚱히 서서 예약확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눈만 움직여 내부를 살피는데 직원의 등 뒤로 적혀있는 레스토랑 이름에 시선이 걸렸다. 불현듯이 잊고 있던 정보가 떠올랐다. 내가 서 있는 이 레스토랑은 아이돌 티켓팅 수준처럼 예약하기가 고난도 수준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도대체 한유경은 얼마나 대단한 남자를 소개해주길래 무슨 능력으로 이곳에 예약했는지, 속내를 알 수 없어 괜히 불안해졌다. 설마 8년 지기 친구를 이상한 놈에게 팔아먹는 몰상식한 유경은 아닐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혼자 엉뚱한 상상에 빠져있는 사이, 직원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자리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잽싸게 뒤따라가며 레스토랑 안을 관광하러 온 사람처럼 구경했다. 실내는 시원하게 뻥 뚫린 오픈 형식이 아닌 룸 형태로 되어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를 정도로 비밀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질 만한 프라이버시 한 내부였다.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걷고 있는 길 중앙에 치우쳐진 조명 때문에 어두운 편에 속하는 복도는 왠지 모를 위화감이 나를 짓눌렀다. 꼭 팔려 가는 기분에 긴장이 되어 가방끈을 손이 새하얘지도록 쥐었다.

남자가 평범한 남자가 아닌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도 친해질 수 있을 만큼 사교적인 한유경의 호화로운 인맥을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남자에 대한 별의별 추리가 머릿속을 차지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직원의 발걸음이 멈추자 어질어질하던 추리도 자연스럽게 멈췄다.

제발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마음의 준비로 침을 한 번 꼴깍 삼키자마자 진한 갈색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대낮처럼 밝은 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문이 열리자 오른손을 배에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만남에 좋은 인상을 남기려는지 눈과 입을 잔뜩 휘어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 남자와는 다르게 나는 끝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어딘가 낯익은 얼굴을 뚫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옷깃을 스쳐온 사람을 포함하여 몇 없는 갖고 있는 인맥 중 저런 흔치 않은 완전무결한 얼굴을 가진 남자는 내 인생 속에 딱 두 명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야, 이나야.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바닥에 본드가 칠해졌는지 제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선 상태로 남자를 기억해내는데 감미로운 미성의 목소리가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힌트를 주는 인사에 가느다랗게 뜬 눈이 이번엔 동그랗게 커졌다. 룸을 가득 채우는 큰 키와 블랙 넥터틀 니트 너머로 마른 것 같지만 근육층이 여실히 느껴지는 남자는 나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소개받는 여자로서가 아닌 과거에 나를.

맞든 틀리든 설마 하는 목소리로 떠오르는 두 남자 중 한 명의 이름을 툭 하니 던져봤다.

“...김유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남자는 기쁘다는 듯 해맑게 답했다.

“응. 보고 싶었어, 이나야.”

말도 안 돼.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닫혔던 입술이 떡하니 벌어졌다.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안 가 한참을 문밖에서 얼어붙었다.

“얼른 들어와.”

미소를 풀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온 유한은 내 손을 잡아 룸 안으로 끌어당겼다. 사고회로가 정지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던 나는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버린 손에 뜨거운 온기가 전해지고 나서야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너무 놀란 바람에. 네가 이 자리에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어.”

“아니야. 사실 유경이한테 정체를 숨겨달라고 부탁했거든. 서프라이즈로 네 앞에 나타나고 싶어서.”

따뜻한 봄 햇살처럼 싱긋 웃는 유한의 얼굴은 8년 전처럼 여전히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평생을 못 볼 줄 알았던 남자와의 재회에 상대방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우윳빛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하얀 피부에,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담을 것 같은 큰 눈, 이목구비를 담고 있는 부드러운 얼굴선. 청초해 보이던 여리함이 지금은 단단해져 수려해 보였다.

“여전히 잘생겼네.”

“이나 너야말로 그때 모습 그대로다. 길 가다 마주쳐도 바로 알아보겠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유한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중학생 때는 없었던 통통한 젖살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어딜 봐서 그대로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빈말이었어도. 헛기침하며 수줍음을 감추려 코트를 벗는데 등 뒤로 다가온 유한은 마지막으로 팔을 빠져나간 코트를 받아들고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여전한 건 외모뿐만 아니라 배려하는 심성 또한 그대로였다. 사라졌을 것만 같은 설렘 세포가 새살 돋듯 살아나는 기운이 느껴졌다. 오늘이 유한과의 첫 만남이라 가정을 해도 저 모습에 회까닥 넘어갔으리라 장담했다.

“이나야, 편하게 골라. 먹고 싶은 걸로.”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 톤에 메뉴판 안에 들어 있는 글씨를 훑어봤지만, 뭐가 뭔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을 만나 얼떨떨한 여운이 맴돌았다.

아, 정신 차려야 하는데.

고개를 털며 뒤늦게 현실을 자각했지만 이미 유한은 직원에게 함께 식사할 메뉴에 대해 전달하고 있었다. 8년 만에 만난 남자에게 허술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점수 안 깎이게 집중하려 심호흡을 비장하게 내쉬었다. 이것만으로 부족했다. 앞으로 풀어나갈 대화를 위해 목을 촉촉하게 축여 놓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생기자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마시며 유한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김유한. 성장통처럼 사춘기가 불쑥 찾아왔던 중학교 2학년 시절, 반년 동안 함께 교실을 썼던 교우이자, 함께 다니던 중학교의 만인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인 유경마저도 몰랐던, 나만 알고 있는 나의 첫사랑. 김유한에 대한 나만의 수식어였다. 일방적인 감정에 고백조차 시도도 못 해보고 끝낸 짝사랑이었다. 그러니 이 재회가 나에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 몰라 마냥 설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나야?”

언제 주문을 끝냈는지 직원은 온데간데없었고, 유한이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려 테이블을 똑똑 내리쳤다. 컵을 입에 문 채 멍청히 유한을 쳐다보던 나는 살짝 움찔하다가 컵을 원래 자리로 내려놓았다.

“아, 미안. 정신이 없네.”

민망함에 괜히 머리를 정돈하는 척했다.

“우리 만나는 거 비밀로 하지 말 걸 그랬나. 이렇게까지 놀라 할 줄 몰랐어.”

“아니야, 서프라이즈였다며. 완전 제대로 놀랐으니까 성공했네.”

“유경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먼저 다리 놔달라고 했으니까.”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유한의 앞에 놓인 그릇을 쳐다보던 눈은 점점 올라가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내가 지금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을 나로 착각한 건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유한아, 다른 사람을 나로 착각한....”

“착각할 리 없어. 강이나라는 석 자를 말하면서 만남을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했는데.”

“아....”

나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콕 집어서 만나려 했는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비록 한 학기만 같은 반이었지만 당시에 난 조용한 학생이었고, 유한은 주변 학교까지 이름이 소문날 정도로 유명했고 주위에 사람으로 득실거렸다. 그런 환경이었으니 유한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쉽사리 다가갈 수도, 말 한마디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결론적으론 좋은 인상으로 남을만한 특별한 일화가 딱히 없었다는 말이다. 유한에게는.

흐트러짐 없이 한 자세로 앉아 있던 유한은 오른손을 들어 뻐근한 목을 쓸어 만졌다. 답답한 히터 바람 때문인지,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유한의 말 때문인지 입술 안이 건조했다.

“혹시 기억나? 나랑 부딪혔다가 이나 네가 화들짝 놀란 바람에 칠판 앞에서 넘어질 뻔했던 거. 내가 그때 넘어지지 않게 잡아줬었는데.”

아, 그날.

물을 마시려 컵을 들려던 손에 힘이 절로 빠졌다. 이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봄과 여름에 경계선에 놓인 무렵, 앞번호 당번이 조퇴하는 바람에 뒷번호였던 내가 대리 당번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원래 당번이었던 유한과 함께. 빼곡하게 하얀 분필 글씨로 가득 채워진 청 칠판을 유한과 지우다가 몸이 부딪혔었다. 멍하니 지우고 있던 터라 갑자기 느껴지던 낯선 감촉에 까무룩 놀라 뒤로 넘어질 뻔한 걸, 유한의 반사적인 신경 덕에 민망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새빨간 얼굴을 얻어버렸지만.

“응. 생각나.”

당연하게도 유한과의 몇 없는 추억 중 하나이니, 기억날 수밖에 없었다.

“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어.”

“...아.”

“맑고 또렷한 눈이 똑바로 눈을 맞추면서도 볼만큼은 솔직하게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조금만 더 일찍 너와 친하게 지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했었지.”

사고회로에 서버가 펑 터졌다. 바보같이 벙찐 표정으로 유한을 보았다가 땀이 날 것처럼 열이 확 오르자 휙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나에 대해 간지러운 평을 한 것이 거짓말 같아 얼떨떨하면서도 어쩌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졌던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두근거림이 튜브에 바람 넣듯 점점 부풀었다.

히죽거리는 웃음이 터져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눈을 들어 유한을 살폈다. 시종일관 곡선을 그리던 유한의 눈과 입꼬리가 풀이 죽어 내려가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표정을 숨기는 모양에 씁쓸함이 느껴져 상승세를 보이던 기분의 그래프가 뚝 떨어졌다.

“그러게. 유명인사와 같은 반이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교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을 줄 알았더라면 일찌감치 친해질걸. 나도 아쉬웠어.”

“그래서 이번엔 기회를 잡으려고. 그러려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유경이한테 간곡하게 부탁한 거야.”

“내가 안 나왔으면 어쩌려고 했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흠흠 목을 가다듬고, 부러 부정적인 물음을 꺼냈다.

“어쩌긴. 네 친구를 들들 볶아서라도 어떻게든 만나려고 했을 거야. 아마 직접 널 만나러 갔을지도 모르지.”

유한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나와의 만남이 당연하게 이루어졌으리라 믿는 자신감이었다. 근거 없는 당당함에 웃음이 풋하고 터져 나왔다.

“이나야.”

“응?”

“오늘 이 자리, 단순히 너와 만나자고 마련한 자리는 아니었어.”

“그럼?”

순수한 물음에 유한은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둘 사이에 거리가 조금 좁혀졌을 뿐인데도, 바로 눈앞에 형체가 있는 듯했다.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난 너에게 그저 스쳐 지나갔던 옛 동창으로 남고 싶지 않아. 그 시절 무념하게 보냈던 시간을 앞으로 만나면서 채워나가고 싶어.”

“아....”

정확한 포인트를 딱 짚기가 수수께끼처럼 어려웠다. ‘평범한’ 친구로 남기는 싫고 ‘특별한’ 동창으로 기억되고 싶어 만나자는 걸까, 완전히 동창이라는 가면을 벗고 남자 대 여자로서 썸을 타자는 걸까 헷갈렸다.

“그래도 될까?”

입은 웃고 있지만 올곧게 뜬 눈은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듯이 나를 옭아맸다. 묘한 압박감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좋아.”

라고.

***

차창 밖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들이 별들로 보인다면 거짓말일까.

암흑으로 물들여진 밤하늘에 잠식되지 않으려 도시는 색색의 조명으로 풍경을 밝히고 있었다. 조수석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감상에 젖었다. 오늘의 일과가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일어난 하루 같다. 첫사랑과의 의도치 않은 재회는 현실감을 동떨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유한과 함께 보낸 저녁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얼얼하면서도 8년 전과 다르게 업데이트된 프로필을 읊으며 차근차근 알아가던 시간은 머릿속에 또렷이 박혔다.

“이나야, 도착했는데 여기 맞아?”

“응? 아, 맞아.”

상념에서 깨고 눈의 초점이 낯익은 검은 문양으로 이루어진 철문을 향해 맞춰지자, 부산스럽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사이 차에서 내린 유한은 보닛을 지나 조수석 문을 손수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에 공격당한 몸이 전복처럼 움츠렸다 펴졌다.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뭘 이 정도 가지고. 이나야, 휴대폰 좀 줘볼래? 번호 알려줄게.”

불쑥 내민 섬섬옥수 유한의 손에 몸이 움찔했지만, 곧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우리 사이에 확실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가방 속에 넣어뒀던 휴대폰을 꺼내 잠금 화면을 풀어낸 뒤 유한의 손바닥 위로 올려놨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유연하게 자판기를 두드렸다. 소개팅이라는 명분 하에 만나서 그런가. 추위를 불사한 단아하고 나풀거리는 옷차림을 하고, 연락처까지 주고받는 상황이 영락없는 소개팅한 남녀 사이임을 명명백백 밝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스러운 기운이 나를 적셨다. 손가락이 멈춤과 동시에 유한의 블랙 코트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확인한 유한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다시 휴대폰을 되돌려주었다.

“이제 번호도 알았으니까 자주 만나자. 매일 만나면 더 좋고.”

매일?

휴대폰을 가방에 넣느라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정말 그럴 거냐는 눈으로 유한을 응시했다.

“응.”

유한은 간질거릴 정도로 작게 대답하며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세심하게 넘겨주었다. 그에 입술이 수줍게 휘었다.

“나도 좋아.”

유한과 만나면 만날수록 반가운 감정이 거듭되리라. 어쩌면 어린 날에 풋풋한 감정도 다시 돋아날지도 모른다.

“그래.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연락할게.”

추위 때문인지 내 앞에 남자 때문인지 통통한 볼에 올라온 열감을 쓱 어루만진 유한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남기고 집 앞을 떠났다. 검정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다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자 왼손을 들어 남자의 손이 닿았던 볼 위에 눈처럼 살포시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