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눈꺼풀을 억지로 벌리자 강렬한 태양 빛이 산란했다. 유리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가 느릿하게 일렁거렸다.

“아, 몸이 왜 이래.”

강윤이 뻐근한 근육을 달래기 위해 손가락 마디를 꼼틀대며 펼치자 온온한 타인의 살갗이 만져졌다. 매끈하면서도 굵은 핏줄이 얼기설기 튀어나와 뒤섞인, 마치 잘 짜여진 조각이 연상됐다.

“아니, 이게….”

맥없이 감기려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재빠르게 올라갔다.

정운과 닮은 남자를 유혹하고 호텔까지 데려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던 편린이 복잡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위를 가릴 새도 없이 강윤의 홍채가 좁아 들었다.

어제 오후, 친구 손에 끌려와 변장에 가까운 모습으로 클럽을 찾았다. 남자처럼 보였던 그녀의 커트 머리는 굵게 컬이 들어간 머리로, 헐렁한 후드티와 청바지는 아슬아슬한 칵테일 드레스로 바뀌어 있었다.

우연히 화장실에서 나오던 순간. 눈앞의 남자를 마주치기 무섭게 심장이 의지를 벗어나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정운… 선배?’

남자는 외꺼풀의 눈 속에 칠흑처럼 까만 눈동자를 품고 있었고, 높게 치켜든 턱은 함부로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거만했다. 벽에 기댄 채 오만하게 서 있는데도 큰 키가 한눈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첫사랑처럼.

분명 눈과 코와 입은 모두 다른데, 이목구비가 합쳐진 얼굴에선 선배가 그려졌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심지어 숲이 그려지는 음성과 체구, 그리고 똑같은 체향까지.

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욕심이 되어 결국 그를 꾀어내고 말았다.

남자는 강윤의 유혹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반항적인 양 입꼬리를 반쯤 올리며 응해 주었다. 그는 자잘한 솜털을 훑고 턱선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능숙하게 강윤을 리드했다. 남자의 손이 스치자, 그녀는 열이 가시지도 않은 재가 떨어진 것처럼 전신을 떨어야 했다.

‘하, 이를 어째.’

강윤이 남자를 쳐다볼 때였다. 이마가 굵은 주름 잡힌 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남자가 몸을 뒤척였다.

“으음.”

강윤이 흠칫 떨며 가는 손가락으로 광목 이불을 바르쥐었다. 이내 이불 사이로 몸을 뺐다.

‘나가자!’

설사 눈앞의 남자가 탑급의 연예인이라 한들, 술이 깬 이상, 환상적인 밤이 존재할 리 없었다. 아니, 자리를 지키고 있기엔 낯이 두껍지 못했다.

강윤이 까치발을 든 채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가지를 닥치는 대로 집었다. 얇은 칵테일 드레스를 발에 가까스로 꿰어 올리고는 조용히 객실 문을 나섰다.

탁, 하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발이 뒤틀리도록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힐이 틀리며 발목에 통증이 일었지만, 발가락 끝까지 마지막 힘을 박아 넣으며 탈출을 감행했다.

“정신 차려, 은강윤.”

속은 멀미라도 하듯 울렁거렸고, 시선이 닿는 곳이 모두 뿌옇게 보이길 반복했다.

코너를 돌기 무섭게 실리콘 밴드와 고정용 테이프에 붙은 가발을 가까스로 벗겨냈다. 이내 밴드까지 완전히 제거하자 눌렸던 짧은 머리칼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후아.”

비로소 핸드폰을 쳐다볼 여유가 생겼다.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액정을 내려다보자, 친구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난무했다.

“하, 미쳤어.”

이내 무릎에 힘을 주며 내디뎠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지만, 벽을 짚고 균형을 되찾은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반타블랙을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회의실을 기민하게 움직였다.

“웨어러블 수요 시장이 82.4만에서 439.5만까지 상승했습니다. 향후 1, 2년 안에 6퍼센트까지 점유율이 상승한다는 계산이 서겠죠.”

중학교 2학년 시절, 미국행을 결심한 최준혁. 그가 1년이라는 적응 기간을 두고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불과 5년 전에 2.18억 달러가 5.38억 달러까지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작 점유율이 0.6퍼센트 상승했다니요.”

준혁은 뼈마디가 굵직한 하얀 손으로 생수가 담긴 유리컵을 거만하게 둥글렸다.

“회사를 놀이공원처럼 굴리나 봅니다.”

팀원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가시 같은 시선을 피하느라 바빴다. 준혁이 어슷하게 꼰 다리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마냥 즐겁게, 그리고 한가하게 말이죠.”

귀국한 지 열흘 남짓. 준혁은 제 존재를 당당히 알리며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내년을 목표로 5.1퍼센트까지 끌어올려 봅시다. 물론 가능하겠죠?”

5.1퍼센트.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불가능한 데이터에도 알알이 맺힌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연방 고개를 주억였다.

“무, 물론입니다. 본부장님.”

입매를 비스듬히 올린 것도 잠시, 준혁이 몸을 일으켰다. 굵직한 허벅지를 둘러싼 정장 하의가 단정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냅시다.”

그는 살을 벨 듯한 찬바람을 일으키며 회의실 밖으로 곧게 뻗어 나갔다. 이내 준혁이 윤 비서를 불렀다.

“어머니는?”

“한 여사님께서 거의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봉안당까지 1시간 30분 내로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

준혁이 한 여사와 함께 40분쯤 차를 타고 가자 서울 근교에 있는 봉안당에 도착했다. 생전, 엄마를 살뜰히 살폈던 윤 기사가 잠들고 있는 곳이었다.

준혁이 슈트의 단추를 채우더니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같이 봉안당도 다 가주고. 고마워.”

“고맙긴요. 그나저나 윤 기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하긴, 그렇겠네. 중3 때 마지막으로 왔다가 갔으니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러게요.”

그때 웬 남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끙끙거리며 봉안당 밖으로 나왔다. 깁스 때문인지 어깨를 기우뚱대며 절룩거리는 발이 조금은 불편해 보였다. 모자를 쓴 남학생이 먼 산을 바라보자 투명한 눈동자가 마치 유리가 덮인 표면처럼 반짝거렸다.

무언가 잡히지 않은 기억이 공중을 부유하는 느낌.

그와 동시에, 얼마 전 클럽에서 마주친 여자가 떠올랐다. 겁도 없이 대놓고 그를 꾀어냈던 여자. 준혁은 단 몇 잔의 취기로 어리숙한 여자의 허리를 낚아채 호텔까지 함께했다. 저 망할 눈동자에 홀려서.

“어머…. 다리를 다친 모양이네. 우리 강이가 컸다면 저 나이 또래쯤 됐을 텐데.”

강이?

혹시 윤강을 말하는 건가.

더불어 십 수 년을 잊고 지냈던 꼬마가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도토리를 모아야겠다며 제 손을 꼭 쥐고 동네 산을 누비던 여자아이.

“남학생 같은데…. 묘하게 우리 강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글쎄요.”

태어날 때부터 만 7년을 넘게 본 녀석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강이를 보며 겨우 아문 생채기를 다시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

“지금쯤 스물여덟 살이겠네.”

“아마도요.”

“우리… 한번 찾아볼까?”

“잘 살겠죠.”

굳이 뒷말은 잇지 않았다. 그는 강이를 닮았다던 사내의 머리칼과 구겨 신은 스니커즈까지 훑으면서도 바르쥔 주먹만은 강강했다.

“그나저나 우리 윤 기사님, 준혁이가 프리지어를 사 와서 좋아하겠어.”

준혁은 씁쓸한 미소를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꽃을 좀 좋아해야지.”

그래, 윤 기사는 물론 그의 외손녀인 강이도 꽃을 좋아했다. 정원 이곳저곳을 누비며 벌새처럼 종종거리던 녀석은 꽃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길 반복했다. 덕분에 꽃 알레르기가 있는 그는 비염에 시달리면서도 꼬마와 정원에 살다시피 해야 했다.

그깟 하루해살이 풀이 무슨 대수라고. 준혁은 물론 동생까지 자객 흉내도 부려가며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강이 아빠가 재혼했다는 소식까진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소녀의 소소한 행복은 윤 기사의 사고로 끝이 났다. 강이는 친아빠에게 맡겨졌다. 한두 번의 왕래를 끝으로 뉴질랜드로 떠난 녀석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워낙 밝은 애잖습니까. 어디서든 잘 살겠죠.”

“네 말대로 그래야 할 텐데….”

그들이 윤 기사의 유골함으로 다가가자, 갓 사 온 듯한 작은 프리지어 한 다발이 유리에 붙어 있었다. 유골함 앞에는 윤 기사의 젊은 시절 사진도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어린 강이의 미소가 제법 뚜렷하게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어머. 강이도 왔다 갔나 보다.”

순간 봉안당 계단에서 마주친 사내의 옆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강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체형에, 옷차림이었다. 순간 고개가 기울었다. 하지만 여자애가 남자로 변할 리도 없고.

“그럴 리가요.”

“가족도 없는 사람이잖아.”

“친구는 많으셨죠. 윤 기사님 발이 좀 넓으신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 가시죠.”

더 이상 강이를 들먹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대화의 맥을 끊었거늘, 한 여사는 개의치 않고 아버지 얘기까지 끌어왔다.

“생각해 보면, 너희 아버지는 강이를 참 싫어했어.”

“후, 애들을 안 좋아하시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그 조그만 게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데. 한번을 안 웃어 주고 말이야.”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최 회장이다. 아버지를 닮아 준혁 역시 마찬가지고.

한 여사는 어렵게 가진 이란성 쌍둥이의 애정 교육을 위해서 어린 강이를 악착같이 돌보게 시켰지만, 그들의 애정은 강이를 끝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않았다.

“우리 강이, 보고 싶네. 뉴질랜드에서 컸으면 한국말도 다 잊었겠지?”

“…….”

준혁은 한 여사의 부담스러운 눈을 피해 발을 빠르게 내디뎠다.

***

강윤이 눈썹을 찌푸린 채 회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조 대리가 호들갑을 떨며 강윤을 이리저리 훑었다.

“어머, 자기 어디 아파?”

“사랑니 때문에 고생이에요.”

잇몸이 부었는지 발음도 뭉그러졌다.

“세상에. 염증 생겼구나?”

“네.”

“염증 가라앉으면 바로 뽑아야겠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전부 뽑아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다 뽑을지 모르겠어요.”

“일단 염증 없는 것부터 뽑아. 참, 이 옆에 미소 치과가 잘한대. 한번 가봐.”

강윤은 겨우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자기야. 소개팅 안 할래?”

“하하. 깁스까지 하고 누굴 만나겠어요.”

“하긴. 깁스를 풀어야 옷을 제대로 입든 하겠네. 그러게 왜 넘어지고 그래.”

“덜렁거려서 그렇죠.”

조 대리가 어이구, 라고 한탄하며 강윤의 등을 툭 쳤다.

“바보야. 너 지금 목소리도 이상한 거 알아? 어찌 된 게 남자처럼 목소리도 갈라졌어. 후두염까지 또 도진 모양이네.”

“네. 한두 주 고생하면 나을 거예요.”

“몸 좀 사려. 관리하라고, 이 인간아!”

“하하, 알았어요.”

두 사람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엘리베이터를 채웠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작은 문틈으로 카페테리아와 식당이 있는 2층 공간이 보였다. 순간 어디선가 맡아 본 향이 심해 어딘가의 기억들을 아스라이 들췄다.

아무도 타지 않자 문을 닫으려던 찰나. 장신의 남자가 하얀 손을 뻗어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을 잡았다. 그는 부하 직원처럼 보이는 여자를 대동한 채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얼굴을 채 살피기도 전, 강윤의 기도가 바짝 오그라들었다. 그러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그 남자다.

클럽에서 호텔까지 갔던 남자.

피가 얼굴 쪽으로 쏠렸는지 볼이 화끈거렸다.

“뭐야. 자기 어디 아파?”

미처 수습하지 못한 눈동자가 고장 난 추처럼 흔들리자, 조 대리가 그녀의 볼을 잡았다.

“어머 세상에. 아픈 거 맞네. 얼굴 뜨거운 것 좀 봐.”

반면 준혁은 이들의 사정과는 다르게, 두 남녀의 행동을 유별난 애정 행각이라며 조소를 흘렸다. 미국에서 온 그에게 동성끼리 부르는 ‘자기’라는 호칭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준혁은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는 태블릿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때, 준혁의 시선이 멈췄다. 발끝에 고정됐던 눈동자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내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눈동자에 자리 잡았다.

코팅이라도 된 듯 투명한 눈. 바로 저 눈이 좀처럼 준혁의 눈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걸 끌어당기고 휘감는 유리구슬 같은 사내의 눈 때문에, 어느덧 그의 두 손에는 밭은 힘이 들어갔다.

***

강윤은 불과 나흘 전 밤을 떠올렸다. 느른했던 남자의 음성이 귀를 어지럽혔다.

“재미있는 아가씨네.”

남자가 치아를 환히 내보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매력적인 아가씨라는 뜻이겠죠.”

남자가 눈썹을 호기롭게 올리며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매력적이라….”

술기운이 용기를 불러왔는지 강윤이 볼에 닿은 남자의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는 쟁연한 시선을 받아내며 너른 손바닥에 제 입술을 꾹 눌러 담았다.

쪽.

남자의 홍채가 풀어지는가 싶더니 그녀를 동공 깊숙이 박아 넣었다.

“어쩌지?”

“…….”

“난… 뒤로 무르는 법이 없는데.”

“무르라고 한 적 없어요.”

“겁도 없고 말이지.”

남자는 비스듬히 선 채 강윤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그걸 모르지 않는다면요?”

“하하.”

하지만 대담했던 수 분 전과 달리 그녀의 손끝은 자르르 떨려 왔다.

“귀엽네.”

준혁이 여유롭게 옷 위를 은근히 쓸었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덴 듯이 화하게 느껴졌다.

“그럼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그렇지 않나?”

그는 이내 반쪽짜리 미소를 짓고는 가볍게 턱짓을 했다. 클럽 위에 있는 호텔 방을 가리킨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럼요.”

순간, 허리에 놓인 손에 무거운 힘이 실렸다. 등줄기가 뻣뻣해질 때였다. 남자가 열띤 숨결을 뿌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올라가 볼까?”

그의 안내로 호텔로 올라갔다. 능숙하고 리드미컬한 손짓과 술기운이 더해져 룸은 금세 끈적한 습기로 달아올랐다.

강윤이 멍한 눈으로 엘리베이터 모서리를 유영할 무렵, 조 대리가 이마와 목에 손등을 차례로 갖다 댔다.

“자기야, 요즘 감기 무시하지 마. 얕봤다가 골로 간다?”

“그러게요. 약을 먹는데 차도도 없고 말이죠.”

물론 준혁은 강윤의 성별이 궁금하진 않았다. 그저 남자의 눈이 거슬릴 정도로 신경이 쓰였을 뿐, 그 어떤 이성적인 관심도, 호기심도 없었다.

더욱이 후두염으로 허스키해진 음성에 뭉개진 발음과 ‘자기’라는 호칭. 게다가 깁스 때문에 입은 반바지와 맨투맨 티셔츠 때문에 감히 여자라고 생각조차 못 했다. IT 분야로 성장한 탓에 느슨한 복장의 직원은 강윤 말고도 많았다.

눈썹의 능선이 올라간 것도 잠시, 준혁은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올려다보았다.

수초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강윤과 조 대리가 내렸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조 대리가 흘긋 뒤를 돌아보고는 강윤의 팔을 빠르게 두드렸다.

“자기야. 자기가 비서실로 언제 올라간다고 했지?”

“2주 후요.”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남자 있잖아. 왠지 내 생각엔 새로운 본부장 같거든?”

순간 미국에서 살았다던 회장 내외의 금지옥엽 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 남자가… 아들이라고?

서로의 열띤 숨을 얽히고설켰던 기억의 파편이 뇌를 사정없이 찔렀다. 들숨이 기도 끝에 걸렸고, 몸에는 혈관을 채우던 피가 모조리 새어 나간 듯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