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핏줄이 성기게 돋은 시린 눈동자가 연수의 번들거리는 입술에 닿았다.

“입술, 벌려.”

순간 믿기지 않는 그의 명령에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왜, 끝까지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나?”

“오, 오빠.”

당황했는지 연수의 말이 뭉개져 입 밖에서 흐트러졌다. 막힌 숨 때문인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날숨이 기도에 걸려 헐떡거렸다.

“꿈이라며. 한낱 지나가는 꿈이라며!”

“꿈 맞아. 아니, 맞아야 돼.”

확고한 대답에 주완의 턱이 위험하게 틀어졌다. 날 선 눈으로 다가서자 연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주춤거리며 들어갔다.

쿵.

머지않아 단단한 팔 안에 연수의 몸이 갇히고 말았다. 손과 발은 모두 굳어 버렸고 눈에는 눈물이 일렁거렸다.

“지연수가 언제부터 이렇게 거짓말에 능통하셨지?”

“어차피 가망 없는 사이잖아. 더 이상 꿈이나 꾸….”

“가망 없는 사이라, 잠잔 걸 숨겼다?”

“이게….”

사실 이게 꿈과 다를 게 뭐가 있냐며, 강단 있게 외치려던 연수의 목소리가 주완의 입술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알 수 없는 음성이 흘렀고 주완은 연수의 턱을 세게 들어올렸다. 통증 때문에 입술이 크게 벌어지자 그 틈을 타 뜨거운 입술이 그녀를 옭아매며 장악했다. 설명할 수 없는 열기가 핏줄을 타고 돌며 심장이 들썩거렸다.

구석에 몰린 연수의 몸 때문에 엘리베이터 버튼이 눌렸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주완의 눈에 문이 열리고 닫는 상황이 보일 리가 없었다. 연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탑층에 다다른 주완은 연수의 입술의 입술을 놓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쾅.

현관문이 닫히기 무섭게 주완이 연수를 벽에 세웠다. 급하게 고개를 내리며 또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어느새 큰 손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었고 조각 같은 몸이 연수를 강하게 눌렀다. 고작 단 한 번의 경험일 뿐인데. 마치 학습된 사람처럼 모든 세포에 열이 돋았다. 야릇한 음성이 기도를 타고 몸 밖으로 흘렀다.

“입술, 제대로 열어.”

“오빠.”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네 오빠 아니야.”

15년을 오빠라고 부른 남자다. 절친한 친구의 오빠이자, 때로는 선생, 그리고… 자신의 첫 짝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그런데 이제와 오빠가 아니라니.

어느새 외투와 타이가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연수의 팔을 바르쥔 주완의 손이 벌겋게 변했고 연수의 입에선 참기 힘든 음성이 연이어 터졌다.

“내가 네 오빠라면, 진작에 이런 소린 내뱉지 말았어야지.”

“윽.”

그의 서늘한 땀이 느껴지자, 온몸이 긴장했는지 근육이 조여들었다.

“긴장 풀어, 지연수.”

“오빠.”

“그놈의 오빠 소린 집어치우고.”

가쁜 숨소리가 공간을 채우며 창가에 뜨겁게 습기가 피어올랐다.

“동생한테 키스를 퍼붓는 개자식도 있나.”

주완은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연수의 귀에 낱낱이 꽂았다. 어느새 연수의 카디건도 내던져진 채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그 입술로 다시 한 번 오빠라는 개소리 지껄여 봐.”

“…….”

“지옥이 뭔지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테니까.”

거친 입바람이 여릿한 솜털을 자극하자 연수의 두 눈이 감겼다. 하지만 연수는 몰랐다. 급하게 벌인 이날의 실수가 꺼져가는 삶에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1장

커프스 끝을 쓸어내리던 손이 멈췄다.

MH그룹의 둘째인 최주완.

그는 미국에서 월반을 거듭하며 졸업해 최단 시간에 본부장까지 올랐다. 재력은 물론 출중한 외모로 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그가 서늘한 눈동자로 회의실을 훑자 임원들이 눈을 피하며 가는 숨을 토했다.

“그깟 몇 푼 아끼자고 알루미늄을 장착하다니요. IQS(신차품질평가 지수)가 작년대비 5위가 하락됐습니다. 플랫도 아니고 9위가 말이나 됩니까.”

“하지만 본부장님, VDS(내구 품질 조사)에서는 무려 13위나 상승….”

유일하게 그를 마주하던 김 수석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닦자 주완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 범위가 갈수록 팽창하고 판매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용 환경과 조건까지 고려해야 하는 건 기본 아닙니까.”

미팅룸에는 냉기가 찼고 그의 목소리는 살벌하게 꽂혔다.

“신뢰성 하락은 브랜드 자체 이미지에 큰 데미지를 입힙니다. 고작 작은 테스트 하나 컨트롤 못하면서 무슨 영업 이익률을 올리겠습니까.”

190cm에 가까운 장신, 탄탄하게 들어맞는 슈트, 창백할 정도로 하얀 조각 같은 남자가 새카만 눈동자를 재규어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직원들은 눈동자도 고정한 채 고개만 숙였다.

“고객에게 차를 넘겼다고 끝이 아닙니다. 고객 눈엔 차가 인도된 후 수년까지, 아니 폐차될 때까지가 그 차의 평가 관점입니다. 팔아치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자리 보존할 생각이라면 당장 때려치우십시오.”

주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회의실을 떠났다.

그제야 등받이에 몸을 기댄 직원들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연수 역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휴, 망할 실린더 때문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구먼. 그러게 왜 피스톤 헤드 구멍을 몽땅 뚫어서는 이 사단을 만들어.”

“특수합금 대신 싸구려를 썼으니…. 쯧쯧.”

직원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양 상무를 흘겼다. 하지만 문제의 원흉인 양 상무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비릿한 입매만 늘였다.

해당 로비 업체의 제품을 쓴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주완의 이복형이자 본부장인 최태완을 등에 업었다는 뜻일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단정한 발소리가 들렸다. 잡음 없는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최주완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동시에 주완의 눈동자가 회의실 끝자락으로 향했다. 직원들이 입을 닫은 채 애잔한 눈으로 지연수를 바라보았다.

“지연수 책임은 나 좀 봅시다.”

이름이 불린 건 연수인데. 직원들의 눈동자가 떨렸다.

“부디 살아서 돌아오게, 지 책임.”

대답 대신 가벼운 묵례와 미소를 남긴 연수는 반듯하게 몸을 세워 주완의 뒤를 따랐다.

육중한 집무실 문이 닫히자 연수가 입술을 뗐다.

“부르셨습니까, 본부장님.”

주완은 그녀를 불러놓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오만하게 의자에 기대 회의 자료와 태블릿과 PC만 쳐다보았다.

“친환경차 전략 현황 브리핑 좀 부탁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현재 유럽 A사는 25년에 20~25퍼센트, 그리고 30년까지 3분의 1 비중으로 올릴 계획으로….”

미간을 좁힌 주완이 연수에게 눈동자를 느릿하게 돌렸다. 서늘한 시선에 연수가 입술이 멈췄다.

이 답변을 원한 게 아니다. 자그마치 15년이다, 저 얼굴을 마주한 세월이.

빠르게 시선을 원위치로 돌린 그녀가 재차 입술을 뗐다.

“25년까지 25퍼센트, 30년까지 50퍼센트의 친환경차가 차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25년 기준, 시장가치는 1,850달러가 상회하겠죠.”

“그래서.”

“이미 선진국은 지방의 대중교통 부족을 자율주행 차량으로 대체할 계획을 세우고, 친환경 자율주행을 모색하는 중입니다. 한국도 조만간 따라갈 테고요.”

“그래서 대중교통을 집중공략 하자?”

“네. 승용차완 다르게 대중교통은 정해진 루트만 이동하기에 안전한 운행이 가능하니까요. 단거리 단순 루트나 교통제약이 큰 도서 산간 운행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일본 역시 오키나와에서 25년을 목표로 개발 중이고요.”

작지만 단호한 부드러운 음성이 집무실을 채웠다. 순간 주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일, 최정주한테 갈 건가?”

논점을 완전히 이탈한 질문이다. 고로 연수의 브리핑이 완벽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높낮이조차 느껴지지 않은 음성이지만, 빠르게 의미를 파악한 연수가 자료를 내리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듣기 싫은 존대는 집어치우지.”

“회사니까요.”

그제야 눈을 치켜뜬 주완이 연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왜 어울리지 않게 반항하냐는 뜻일까.

주완이 몸을 일으키며 느릿한 걸음으로 연수에게 다가왔다.

“회사라….”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연수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지 책임. 사적인 얘기할 땐 제외라더니. 말이 계속 바뀌네.”

묵직한, 그리고 규칙적이고 단정한 토닥임.

그의 손짓은 덤덤했지만, 연수는 심장 어딘가가 아릿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떨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쥐어야 했다.

“번복해서 죄송합니다, 회사에서는 가급적 존대하도록 할게요.”

연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완이 한숨을 토했다. 이윽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A4 종이 더미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지연수.”

불만이어도 어쩔 수 없다. 주완과 자신은 그 어떤 접점도 없는 남이니까.

입을 꼭 다물자 주완이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고집하고는.”

“…….”

“그나저나 부탁이 있는데….”

그는 부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거만한 눈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녀는 손톱이 파고들도록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야 했다.

“말씀하세요.”

“내일 전까지 강윤이 좀 데려와.”

그제야 지금껏 평온을 유지하던 연수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내일은 연수의 친구이자 주완의 동생인 최정주의 기일이다. 애석하게도 강윤은 기일이 다가오면 누나 잃은 슬픔에 술집을 전전하며 방황했다. 벌써 세 번째 기일인데. 녀석은 면역은커녕 술주정만 심해졌다.

그런데 주완의 동생이고 정주의 동생이거늘. 자신더러 챙기라니.

곤한 몸을 이끌고 술집을 뒤져야 한다는 생각에 눈에 열기가 느껴졌다.

“오빠가 가죠.”

당황하니 본부장님도 아니고 오빠, 게다가 존댓말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내 말을 들어야 말이지.”

맞다. 강윤은 형 말은 곧 죽어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을 잘 따르는 것도 아닌데.

“제 말이라고 들을까요?”

“적어도 나보단 낫겠지.”

“…오빠 동생이잖아요.”

“확률로 따지면 나보다 네 설득이 먹히는데. 굳이 비효율적으로 내가 가야겠나?”

억지에 가까운 논리임을 본인도 알 텐데. 확률과 효율을 들먹이는 걸 보니 견적이 섰다. 합당한 이유와 핑계를 대도 자신을 시킬 거라는 걸.

결국 내가 가야 한다는 말인데.

주완 역시 찰나의 계산을 읽었는지, 피식 입꼬리를 늘이며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정주가 끔찍하게 아꼈던 동생인데… 못 보면 섭섭해 하지 않을까.”

아, 정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주완은 눈동자를 모니터로 돌려 보고서를 분석했다. 공이 이미 넘어간 걸 간파한 것이다.

이 약삭빠른 인간.

“참, 내가 말했던가. 의견 좋았다고.”

보나 마나 강윤이 때문에 불렀으면서, 주완은 쓸데없는 칭찬을 달며 연수를 달랬다. 의미 없는 분석을 듣고 있느니 퇴근을 서두르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입에서 한숨과 함께 대답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집 앞으로 와.”

“네.”

“그 재수 없는 말투는 집어치우고.”

“…….”

주완은 끝끝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키보드를 툭툭 두드리며 긴 다리를 여유 있게 까딱일 뿐.

연수는 화를 누른 채 묵례를 건네며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 문을 닫기 무섭게 뜨거운 볼을 손등으로 누르며 핸드폰 주소록에서 강윤의 연락처를 뒤졌다.

물론 그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비서들은 본부장의 독설에 된통 깨졌다며 애도의 눈길을 보냈다. 친절한 매너와 성격 좋기로 소문난 지 책임이 벌겋게 변할 정도면 얼마나 깨진 거냐며.

비서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지만, 연수는 발을 빠르게 옮기며 강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

강남의 한 술집.

얼굴이며 목이며 팔이며, 모두 붉게 변한 강윤이 양주잔을 바라보았다.

“최강윤.”

익숙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깔리자, 강윤이 낮게 욕지거리를 흘렸다.

“그냥 좀 가지?”

“강윤아, 이제 일어나자.”

“하, 씨.”

“최강윤. 오빠가 기다리잖아.”

그녀의 음성은 가늘지만 힘이 느껴졌고,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목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진초록. 굳센 바람에 흔들려도 꿋꿋하게 서 있는 푸른 소나무가 어울리는 음성이다.

그래, 사람들은 연수의 나른한 음성에 마음이 비뚤게 나가다가도 돌아서곤 했다. 청량하면서도 부드럽고 맑으며 단단한 목소리. 마치 토닥이는 것처럼 자상했다. 의도한 게 아니라 그렇게 타고난 목소리다.

“강윤아. 술 냄새 풍기면서 묘에 가면 정주가 좋아할까?”

이내 연수가 녀석의 정수리에 가볍게 손을 내렸다. 녀석은 쓰다듬는 작은 손짓에도 최정주가 떠올랐는지, 굳게 다문 잇새를 떨었다.

연수 역시 알았다. 녀석의 단점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돌아가.”

“너랑 같이 갈 거야.”

심지어 최정주와 목소리, 취향, 체구, 습관마저 비슷해 녀석의 눈에는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녀석이 연수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제 정수리 따윈 그만 만지라는 의미일 터다.

“빨리 돌아가.”

“최강윤. 충분히 애도했으면 그만 일어나자.”

결국 녀석은 연수의 다디단 음성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휴, 크려면 아직 멀었네.”

“나보다 30cm나 작은 여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신체 성장 말고, 정신 말이야.”

“하.”

사실 자신이라고 정주의 죽음이 괜찮은 건 아니다. 최주완과 그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자신이 무슨 재미로 살까.

사람들은 친절하다며, 바르고 곧다며 칭찬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기본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