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사랑’과 ‘사람’은 변한다

22살 가을, 나에 관한 모든 일이 마치 처음부터 짜여있다는 듯 순조롭게 흘러갈 때 너를 만났다. 내가 가장 빛나던 순간에, 그리고 네가 가장 빛나던 순간에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끌리듯 왔다.

“얘는 강민하. 나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같이 나온 애. 나랑 인생 절반을 함께 했지. 그리고 지금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멋쩍게 웃으며 민우가 인혁에게 날 소개했다. 민우의 멋쩍은 웃음에 나 역시도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빤히 보는 너의 시선이 뜨겁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민하야. 얘는 내 동기, 김인혁. 오늘도 자기 여자 소개 안 시켜주면 가만 안 둔다고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여자 없으면 죽어 그치?”

아 그래? 금방 올 거야. 라고 짧게 뱉었다. 그런 내 목소리엔 나만 느낄 수 있는 떨림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내 손을 잡아 오는 민우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는 시선에 느껴져, 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마주한 눈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다. 무슨 기분이지, 이건 무슨 감정일까. 내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나를 보는 너의 눈.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왜 나는 몰랐을까, 우리의 인연은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었다는 것을. 나는 11월 15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널 보는 날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울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박민우와 나는 미친 듯이 싸웠다. 나는 20대를 박민우에게만 쏟고 싶지 않았고, 나의 예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모든 감정과 시간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쏟아부어달라고 애원하는 그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수화기 넘어 귀가 찢어질 듯, 집에 일찍 들어가라. 왜 아직도 밖에 있냐, 안에 있는 나는 생각도 안 하냐 외쳐댔다. 나는 들려오는 잔소리에 그냥 전원을 꺼버렸다. 그게 민우와 나의 끝이다. 시간이 흘러 4월 즈음, 너에게 연락이 왔다. 전역했다고 밥 한번 먹자고, 무엇이 이유였을까.

처음부터 너무 뜨거웠다. 너랑 내가 가까워지는 속도는 그 무엇도 이길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렇게 흠잡을 거 하나 없이 나에게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3년, 딱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은 3년이다. 3년이 지난 후 우리가 뜨겁게 사랑했던 날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 마냥 너는 나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너에게 미친 듯이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싫어했던 박민우의 연애방식이 나의 연애방식이 되어버렸다. 애처롭게 나만 봐 달라고 애원하고 처절하게 무너졌다.

쿵, 쿵,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여자 목소리 남자 목소리. 아주 가관이구나. 이제 네가 막 나가는구나. 멀리 있다는 이유 하나로 난 너의 모든 것을 믿고 이해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금 어딘데! 다섯 시에 퇴근한 사람이 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연락 한 통도 없고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야?”

“뭐라고?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네. 나가서 다시 전화할게.”

뚝- 끊겨 버린 전화에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됐어, 내가 너 아니면 만날 사람이 없어? 연락? 하든지 말든지 다 너 알아서 해라 싶은 마음이 들어 휴대폰을 침대 위로 거세게 집어 던졌다.

“진짜 내가 뭘 더 이해하고 사랑하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지.”

신경 쓰지 않겠다 다짐을 하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너에게로 쏠려 있었다. 머리가 띵하고 온 얼굴이 뜨겁고 눈시울이 붉어져 코가 찡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오늘도 너로 인해 무너지고, 너로 인해 울고 있다. 너와 함께 웃었던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헤어지라니까? 왜 그걸 꾸역꾸역 잡고 있냐고 멍청하게.”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 앙숙이자 내 든든한 지원군, 그리고 내 남자친구를 죽도록 미워하는 언니가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죽을래? 와 나 지금 진짜 없는 애도 떨어질 뻔했다.”

“결혼은 한 대? 걔 부모님 말고 걔가 말이야. 부모님은 뭐하는 사람이야? 자기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넌 이번 주도 연차 내고 간다며. 야 나였으면 진즉 때려치웠어. 4시간 거리를 어떻게 다니냐? 그냥 헤어지라니까? 걔는 너랑 결혼할-”

“거기까지만 해. 언니 아니어도 나 지금 심란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내 일이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욕해도 내가 욕해.”

너에게 풀어야 할 감정들을 언니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몰아세웠다. 그래, 나는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다. 내가 너를 욕하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널 나쁘게 보는 건 죽을 만큼 싫었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이 널 예뻐하고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애의 대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당찬 포부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길고 긴 새벽이라는 시간동안 1분 1초 죽어가며 울었다. 알림 소리가 들리면 너일까 싶어 아린 눈을 떠 화면을 보고, 또 실망하고를 반복하며 그렇게 해를 맞았다. 새벽 내내 내 귀에 울리던 모든 사랑 노래가 우리의 과거 같고, 가슴 아프게도 일방적인 사랑을 담은 노래는 지금의 나의 마음과 같게 들렸고, 절절한 이별 노래는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담은 노래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로 드라마 한 편을 쓰고 말았다.

내가 일을 하는 순간에도 그 수많은 알림 중 너의 알림은 없었다. 이 순간에도 네가 집에는 잘 들어갔을까?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겨서 연락을 안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힘차게 벨 소리가 울렸다. 기대 아닌 기대에 화면을 확인하니 엄마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편두통이 머리를 울렸다. 그리고 왜 네가 아닐까,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받고 싶지 않은 타이밍임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걱정하실까 싶은 마음에 전화를 들었다. 네가 아닌 모든 사람을 나를 걱정한다.

“여보세요.”

-오늘 정훈이 생일이니까 집에 좀 들려. 얼굴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

오늘 내가 집에 간다면 정훈이, 부모님 모두 네 소식을 물을 거고 언제 얼굴 볼 수 있냐고 재촉을 할 것이 분명하다. 눈을 굴렸고, 핑계 댈만한 거리를 찾았다.

“나 오늘 야근이야. 셋이 맛있는 거 먹어. 계좌로 돈 넣을게. 미안해, 엄마”

엄마의 전화가 달갑지 않다는 것을 티라도 내듯 내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괜히 죄 없는 사람한테 화를 내고 내 감정을 고스란히 보였다. 또, 한편으론 이런 나를 받아내느라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또 머릿속에 너를 그린다. 띠-링. 경쾌한 문자음이 달갑지 않지만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왔다. 내가 그토록 밤새 기다리던 너였다. 내가 널 원망했던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싶을 만큼 기뻤다.

[나 어제 집 안 들어갔어. 친구네 집에서 잤어.]

또 나는 너를 몰아세우겠지, 나는 또 너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겠지. 뚜르르르- 뚜르르르르- 딸깍.

“넌 도대체 어디서 뭘!”

“미안해. 어제 친구 생일이라 너무 취해서 그랬어.”

미안한 말투로 투정 부리는 듯한 너에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하고 싶은 말은 가득했지만, 나에게서 네가 등을 보일 것만 같아 입을 닫았다. 아팠던 머리가 다시 지끈거린다.

“속은 괜찮아? 오늘 출근은 안 해도 돼?”

“내가 말 안 했나? 오늘 휴무야. 아 그리고 내일 올 필요 없어.”

뭐? 올 필요가 없다고? 너의 의미심장한 말에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이런 작은 말에도 무슨 이유일까, 혹시 우린 한 걸음 더 멀어진 걸까? 온 생각이 머리를 휘감아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것에 한숨이 났다.

“아 아버지가 휴가 미리 다녀오라고 하셔서 내가 오늘 가려고. 이따 출발하면서 전화할게.”

“아… 알겠어. 조심히 오고, 안 그래도 오늘 정훈이 생일이라 엄마 전화 왔더라.”

“알고 있었어. 아까 정훈이랑 통화도 했어. 나 잘했지? 이따 만나면 예뻐 해줘라. 어?”

어젯밤, 오늘 새벽 날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고 쉴 새 없이 눈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들던 너는 없다.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예뻐해 달라는 너의 말에 내 마음이 탁 힘없이 풀렸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다.

그렇다. 나의 모든 감정이 다 너에게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다 너로 인해 널 거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그게 너라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제 머리가 아팠냐는 듯, 오전에 풀리지 않던 일들도 쭉쭉 상행선을 탔다.

“저 대리님. 머리 아픈 건 좀 괜찮으세요?”

조심스럽게 타이레놀을 건네어 주며 묻는 신입사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더라,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목에 달린 사원증을 확인했다. 최우건? 아 얼마 전에 팀에서 신입사원을 뽑았다고 했었는데 새로 들어온 사원인가보다.

“아 괜찮아요. 감사해요. 상비약으로 둘게요.”

쭈뼛거리며 몸을 움찔거리는 최우건의 행동에 화면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떼어냈다.

“할 말 있어요?”

내 말에 무슨 영문인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손사래를 치며 당황해한다. 뭐지, 내가 그렇게 말 걸기 힘든 타입인가. 그럴만하지, 새벽에 잠도 못 자서 가뜩이나 눈밑은 아이라인을 겹겹이 칠해 놓은 것처럼 까매졌을 거고, 오전 내내 김인혁 망할 놈 때문에 예민해져서 눈꼬리가 매서웠을 거고, 신입사원이라 여기저기 눈치도 봐야 할 입장일 텐데.

“괜찮아요.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안 잡아먹어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그제야 어쩔 줄 몰라 하던 손이 멈췄다. 정신없어서 죽는 줄 알았네 생각을 하면서도 상냥하게 웃었다. 아주 가식적인 그런 미소로 마주했다.

“아니, 별말은 아니고요. 다른 분들이랑은 말 많이 해봤는데 대리님이랑은 제가 말을 못 섞어 봐서… 항상 바쁘시니까.”

“아, 죄송해요. 요즘 외근도 많고 주말에 워크숍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참석이 늘 불가능해서요. 회사에서 일 같이하니까 종종 봬요.”

뭐 심심하면 오셔서 얘기도 좀 하고요. 끝을 흐렸다. 나는 누군가에게 친절한 사람도 아니고, 무언가를 베풀어 본적 없었던 사람이라, 나의 친절은 오로지 김인혁에게만 늘 베풀어졌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활짝 웃는 우건 씨 덕분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뭐 내가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다면, 아니 그냥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띠-링.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그럼 저 일 좀 해도 될까요?”

“아 그럼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럼 다음에 커피 한 잔 마셔요. 강 대리님!”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다 반사적으로 쥐었던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애정이 가득한 너의 메시지에 웃음이 났다.

[자기야. 나 지금 출발해, 걱정 안 하게 조심히 가고 틈틈이 연락할게. 이따 봐 사랑해.]

어제는 내가 잠시 착각을 하고 네 마음을 오해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합리화에 가까운 생각이지만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기에. 조심히 와, 보고 싶으니까 너무 늦게 오지는 말고. 간결하게 답장을 보낸 뒤 다시 밀린 업무에 정신을 차렸다.

“강 대리님, 팀장님이 찾으세요.”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튀어 올랐다. 입사를 꽤 일찍 해서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조금 편해질 법도 한데 나는 아직도 어려웠다. 그저 타고난 성격이랄까? 이런 내가 유일하게 편했던 사람은 너 하나였다. 그래 내 모든 일상과 내 모든 일정은 네 위주로 흘러간다. 너로 시작하여 너로 끝난다.

“부르셨어요.”

“아 다른 게 아니고 신입사원 사수 배치하려고 하는데 강 대리가 최우건 씨 사수 좀 해줬으면 해서. 강 대리 입사했을 때 나이랑 똑같잖아. 그때 내가 사수였고, 그리고 우리 부서에서 강 대리만큼 일 잘하는 사람도 없고 부탁해.”

달갑지 않았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감싸주고, 내 스타일과 정반대인 일인데. 난 지금이 너무 편한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지.

“네 뭐.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업무 적응시킬게요.”

“아 너무 기계같이 굴지 말고, 어? 인정을 다 해서. 마음을 다 해서.”

얼척 없다. 목적성이 뚜렷한 이 직장에서 마음을 다 해 밑에 사원을 가르치라니. 내가 누굴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었으면 교육 계열로 갔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다가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애써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제 내 회사 생활 혼자 조용히 좀 편해지나 했더니, 저기 해맑게 앉아서 웃고 있는 저 어린양을 나에게 던져주면 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내일은 연차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무려 4일이라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으니까. 기분 좋음에 혼자 작게 미소를 짓고는 월요일부터 내 옆에 있을 어린 양에게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아니 왜 수줍은 미소야? 뭐야? 마치, 내가 본인 사수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저 표정.

“월요일부터 제 옆자리로 오시면 돼요. 저 내일은 연차니까 월요일까지 계획안 제출하실 거 가지고 오시면 돼요. 각오는 하시고요.”

“아 그럼요! 저 엄청 열심히 잘 놓을게요. 푹 쉬시고 월요일에 봬요! 대리님!”

“아. 그렇다고 야근을 하지 마세요.”

가볍게 웃어 주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가슴이 쿵쿵 뛰는 게 머리까지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너를 볼 생각에 이렇게도 설렌다. 너는 어떨까? 네 마음을 의심하고 추궁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만 궁금했다.

“난 진짜 세상에서 우리 민하만큼 예쁜 사람 못 본 것 같아. 진짜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아 뭐야. 하지 마.”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아니 빨개서 예쁜 게 아니라 넌 얼굴이 까맣든 하얗든 다 예쁠 것 같아. 알아?”

“아 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나는 너를 쳐다보며 부끄러워했고, 그런 너는 나를 칭찬하는 것인지 나를 놀리는 것인지 모를 말투로 나를 예뻐해 줬다. 넌 매사 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네가 너무 좋았다. 그런 너를 생각하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운전대를 잡았다. 마치 지금 흐르는 노래가 ‘우리’ 같아서 미소를 작게 지었다. 매사에 솔직하던 너에게 한 번이라도 고맙다고 말할걸, 내가 고맙다고 말했다면 지금의 너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후회한다.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어, 여보세요? 조심히 오고 있어?”

“당연하지 너 보러 가는 건데, 조금 피곤하긴 한데 우리 자기가 더 피곤하지 않을까 싶네. 어제 잠 못 잤지? 내가 연락 없어서.”

너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안다. 알면서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투정 섞인 말을 해 네 기분이 상한다면 다시 차를 돌려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야. 나 잘 잤어. 얼마나 걸려?”

“지금 1시간 정도 더 가면 될 것 같아.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없어. 그냥 빨리 와. 보고 싶다. 일주일 안 봤는데 너무 보고 싶어.”

호탕하게 웃으며 나도 보고 싶어, 금방 갈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왜 아직도 너와의 짧은 통화조차도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정말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붙들고 묻고 싶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면 다 나 같느냐고.

가족들과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행복했다. 한 손은 핸들을 남은 한 손은 내 손을 꽉 잡아주는 네가 너무 좋다. 환하게 웃으며 이 어둠 속에서도 나는 너의 얼굴을 눈에 담고 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그래. 부끄럽다.”

“뭐가 부끄러워 내가 내 거 마음대로도 못 보나? 그만큼 보고 싶었다 이런 거지.”

알아, 나도 보고 싶었어. 짧고 간결하게 미소를 보이며 말을 하는 너에게 난 또 한 번 심장이 뛴다. 띠-잉. 뭐지? 내 알림음은 아닌데, 액정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니 네 휴대폰이다.

“민호한테 카톡 왔는데?”

“뭐래? 확인 좀 해 봐.”

너의 부탁에 나는 카톡을 확인했다. 입가에 은은하게 띄어져 있던 내 미소는 아쉽게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어제 지연이 누나 집에서 잤어?]

[대단하다 너도. 아무리 필름이 끊겼어도 그렇지.]

[민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아무 일 없었지?]

[누나 말 들어 보니까 없었던 것 같은데 조심해.]

“차 세워.”

나에게 남아 있는 이성 따위는 없었다. 휴대폰을 쥔 손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고, 너는 영문을 모른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왜? 뭔데? 하며 눈치 없이 말을 뱉기 바빴다. 우리가 늘 싸울 땐 3자가 있었다. 나는 늘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고,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몰랐다.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아니면 네가 남긴 흔적에 늘 알고 싸워야만 했다.

“차 세우라니까? 내 말 안 들려? 차 세워!”

내가 들어도 앙칼진 목소리가 좁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내가 기대했던 너와의 행복한 시간은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내 가슴으로 꽂혔다.

“변명이라도 좀 해 봐. 도대체 내가 뭘… 왜 자꾸 거짓말을 해.”

“아니 어제는… 내가 기억이 없어서. 근데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야 미안해.”

네 말이 아픈 가슴을 찔렀다. 어떠한 변명도 없이 미안하다고 하는 너에게 나는 또 다시 내쳐져 바닥을 나뒹구는 것만 같았다. 이 불완전한, 불안한 관계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나는 왜 너를 놓을 수가 없는 것일까.

“왜 거짓말을 해. 도대체 왜!”

언성을 높이는 나의 목소리에 네 미간이 좁혀졌다. 무척이나 어두운 이 공간에서도, 난 네 얼굴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하… 씨발. 소리 좀 지르지 마. 내가 너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져? 술자리에 여자가 있다 근데 친구다. 아는 누나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럴 일 없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아 그렇구나. 알겠어. 하고 넘긴 적 있어? 네가 자꾸 소리 지르고 화내고 그게 싸움이 되니까 그러는 거라곤 생각 안 해봤어? 나도 내 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네가 너무 싫어하니까. 그래서 거짓말하는 거잖아.”

“너… 지금 그거 핑계라고 대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는 친구가 없어서, 내 생활이 없어서 너한테 매달리고 네 위주로 사는 줄 알아?”

“내가 너보고 그렇게 지내라고 시켰어? 네가 선택한 거잖아.”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너의 말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끝이 아파 왔다. 눈시울이 붉어져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나는 내 눈에 담은 너를 놓칠 수가 없었다. 무어라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이 상황을 내 눈이 말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너의 미간에 아까보다도 더 진하고, 깊은 주름이 생겼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어?’ 라고 다정하게 말하던 과거의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울어? 지겹다. 나는 뭐 울 줄 몰라서 안 우는 줄 알아? 나도 여기 운전해서 왔고, 우리 며칠 더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만 싸우자. 내가 다… 그래, 다 미안해.”

“우리 그냥 빨리 결혼하면 안 돼?”

내 말에 너는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그 얘긴 나중에 해. 차에 먼저 타.”

또 이렇게 나는 너에게 결혼을 재촉하고, 널 구속하고 속박하는 사람이 되었겠지. 너는 나를 또 다른 사람처럼, 다른 마음으로 대하겠지? 이 마음이, 그리고 이 감정이 불편했다. 차에 앉아서 사이드미러로 본 너의 모습은 잔뜩 짜증이 났고 화가 난 모습이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잔뜩 구겨진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것만 같았고, 이제 내 휴대폰으로 올 연락이 무슨 연락일지도 예측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네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네가 무슨 짓을 하든 헤어지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겠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너를 밀어낼 준비가 안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까지 이런 너를 이해하고 마음 아파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이중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할 때 즈음, 차 문이 열리며 좋지 않은 향이 코끝을 찔렀다.

“미안해.”

“…응.”

“어제 민호 그 자식이 나 두고 가버리는 바람에, 나는 정신도 없었고.”

“알았어. 그만 얘기하자.”

정적이었다. 집에 얼른 도착해서 씻고 싶었다. 따듯한 물줄기에 몸을 맡기면, 이러한 내 감정들도 깨끗하게 씻겨 내려 갈 것만 같았다.

“나 먼저 씻을게.”

“혼자?”

장난스러운 어조로 내 뒤에 따라붙는 네가 싫었다. 네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나는 단 한 번도 네가 귀찮게 느껴졌던 적이 없다. 네가 하는 행동들에 불편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다.

그날도 그랬다. 아직도 생각하면 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그 날, 그날도 나는 너에게 금방 다시 마음을 열었었다. 작년 11. 20일 김인혁 생일, 뚜르르르, 뚜르르르, 연결이 되지 않아. 뚜 뚜 뚜- 하,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본인 생일에 내 친구도 아닌 본인 친구들 사이에 나를 던지듯 놓고 잠깐 앞에 다른 친구들이 왔다고 인사 좀 하고 오겠다고 나간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밀려오는 짜증과 피로가 고개를 들어 올릴 때 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