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_처음, 그날의 분위기

“무슨 책을 읽었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바이 섹슈얼의 성향을 가지고 있대. 근데 그 안에서 동성과 이성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었는가에 따라서 성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거야. 신기하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뜬금없는 친구의 말 몇 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가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동성애자 같은 거.”

“사람이 사람 좋다는데 생각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부럽지. 나도 누구 좋아하고 싶다.”

“근데 남자는 여자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 좋아하고 그게 맞잖아.”

“최지혁이 의외다. 나는 너 그런 생각 안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게이 많아.”

“어? 누구?”

“알렉산더 맥퀸이라던가, 마크 제이콥스라던가, 존 갈리아노라던가. 아! 그리고 suede 멤버 중에서도 한 명 있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 친구 말대로 그렇게만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지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어떤 규칙에서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길 바랐던 나는 스스로가 그 규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그게 불안했었다.

“…야, 나 수학여행 갔다 왔잖아.”

“응.”

“게임 하다가 걸려서 남자애랑 뽀뽀했어.”

“하하하, 진짜?”

“어. 근데….”

“응.”

“기분 좋았어.”

“오- 뽀뽀한 애가 괜찮았어?”

“아니, 걔가 괜찮은 게 아니고- 그냥 거부감이 없었어.”

“뭐, 그럴 수도 있지?”

“나 그리고 우리 중학교 때 김세현 좋아했다?”

“김세현이 누구지?”

“체육.”

“아- 선생님 말하는 거야? 몰랐어.”

“…나 남자 좋아하나 봐.”

맥락 없이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올 말을 기다리면서 조금 초조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긴, 최지혁 너는 뭔가 그려지지 않아.”

“뭐가?”

“여자애가 옆에 있는 게 상상이 안 돼.”

“하하하, 뭐래- 나 인기 많아….”

“알아! 아는데 그거랑 다른 거야. 너 고백받고 사귄 적도 없잖아.”

“어.”

“나 어쩌면 은근히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몰라. 솔직히 그럴 수도 있겠다 했어.”

“점쟁이냐? 야, 근데… 김수정한테는 말하지 마. 니가 처음이야. 이거 말한 거.”

“…비밀이 또 생겨버렸네?”

“말하고 싶어?”

“아니. 니가 싫다면 안 해. 너 얘긴데 내가 뭐하러…. 최지혁이- 근데 애인 생기면 나 소개해주냐?”

“…봐서.”

내 첫 커밍아웃의 순간이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최지혁, 나이 서른,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나’라는 사람 앞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이렇게나 많은데,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으면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든다. ‘사랑’도 잘 모르면서….

나란 사람은 모순적이다. 앞서 언급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사소한 것부터 나열하자면 ‘시간’의 개념부터 그렇다. 날짜와 요일은 항상 체크하고 있지만, 계절이 지나갔다는 건 뒤늦게 깨닫는다. 가끔은 내 나이도 헷갈리고…. 어딘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안정을 바라고, 바쁜 하루하루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여유가 찾아오면 늘 불안하다. ‘혼자’를 좋아하지만 밤마다 찾아오는 적막은 늘 무겁게 느껴지고, 아침엔 공허해서 가끔은 땅 밑으로 꺼져버릴 것 같다.

“동물이라도 키워야 되나….”

불쑥 혼잣말을 내뱉고는,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동물이라니….

까드득-

마시던 맥주캔을 일그러뜨리고 전화기를 찾았다. 쓸데없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내일 할 일을 되새기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무언가 결여되어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여태껏 살아온 대로 일단 살아간다. 좋아지겠지….

“4시간 밖에 못 자네….”

눕자마자 바로 잠들 수 있다는 전제하에 4시간이지 아마 3시간쯤 잘 수 있겠지 싶다.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야지….

.

.

.

“Okay!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 사진 잘 나왔어?”

“하핫, 형, 한 번 봐요. 어차피 A컷도 골라야 하는데.”

“에이, 우리 지혁이가 잘했겠지- 난 믿는다.”

어젯밤은 맥주 덕분인지 생각보다 빨리 잠들었다. 알람 소리에 깨어나서, 서둘러 짐을 챙겨서 파주에 왔다. 어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곱씹을 여유도 없이 바쁘게 보냈다. A컷이 많아서 추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다.

“태성이 형, 고마워요. 민석이 형이 서운해하는 것 같던데…. 이렇게 나한테만 맡겨도 괜찮아?”

“걔는 뭐… 스타일이 나랑 안 맞아. 재미없어.”

“제 사진은 재밌고요?”

“나 학교 다닐 때부터 니 사진 좋아했잖아. 몰라?”

“알죠. 그래도 솔직히 허접하잖아요, 혼자서 하니까 정신도 없고. 형들이랑 누나도 고생하고.”

“갑자기 왜 쭈구리처럼 말하고 그래? 정 고마우면 오늘 나랑 클럽 좀 가주시던지.”

“하핫, 형 안 무서워요? 얼굴 팔리면 진짜 어쩌려구?”

“그러니까 너랑 가야지. 나 ‘hole’ 가고 싶은데…. 요즘 거기 물 좋다며?”

“아, 형 안 가봤어요?”

“어. 나 파리에서 그제 귀국했잖아. 가자- 어?”

오늘은 태성이 형 밴드 앨범 사진을 찍었다. 프리로 이만큼 자리 잡은 데에는 형의 공이 크다. 16살에 모델로 데뷔한 태성이 형은 스물이 되자마자 밴드를 결성했다. 동갑내기 4명이 결성한 밴드 ‘Wing’. 올해로 15년 차,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밴드. ‘Wing’의 리더이자 학교 선배이기도 한 태성이 형은, 내가 프리 선언을 하자마자 여러 가지 일을 계속 물어다 줬다. 자기 밴드 앨범 재킷부터 시작해서 각종 화보까지…. 덕분에 건너 건너 계속 일을 받게 되었고, 입에 풀칠할 만큼은 벌 수 있게 되었다.

형은 나와 같은 ‘이반’이다. 어떻게 서로 알게 됐는지는 말하자면 길고, 아무튼 그 이후부터 형은 틈만 나면 이렇게 같이 놀러 가자고 나를 조른다. 그래봤자 걔가 걔고, 결국 그 물인걸…. 다 닳고 닳은 느낌이라 원나잇도 흥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형, 저 오늘은 진짜 안 돼요.”

“아, 왜- 너랑 가야 끼순이들이 달려오는데….”

“하핫, 형 혼자로도 충분할걸요?”

“혼자 무슨 재미로 가….”

“건우 형이랑 가요- 건우 형 남자도 상관없잖아.”

“쟤는 재미없어- 술도 안 마시는데….”

“아니면 저기 새로 왔다는 매니저는요? 이쪽인 것 같은데,”

“아직 파악 중…. 야, 근데 좀 그렇지? 그런 거 같지?”

“네, 뭐… 좀 그래 보이네요.”

“아, 오늘 최지혁 안 되면 쟤나 떠볼까, 진짜?”

“하핫, 술이나 같이 마셔 봐요….”

“넌 왜 안 되는데?”

“일이요. 미팅 있어요.”

“누구?”

“그냥 개인 작업이요. 자세한 건 말씀 못 드려요. 개인 정보 보호.”

“에라이….”

“믿음직스럽지 않아요? 형 개인 정보도 다 지켜주잖아요.”

“아- 이제 활동 시작하면 여유도 없는데….”

“바깥일은 이제 접으시라니까? 시즌마다 해외로 도니까 바쁜 거잖아요.”

“아직 안 돼. 나가서 그렇게 뛰어다녀야!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

초심이라….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게, 태성이 형은 역시 재밌는 사람이다.

“그럼 나랑 언제 놀아줄 수 있는데?”

“야, 최태성- 지혁이 그만 괴롭혀….”

“신비- 최지혁이 나보다 바쁘다는 게 이해가 돼?”

신비 누나. 본명은 모른다. 태성이 형 밴드 노래는 대부분 신비 누나에게서 나온다. 속을 알 수 없는 타입, 그래서 편한 사람.

“너도 생각해보면 바쁠 거야.”

“뭐야? 나 또 스케줄 잡혔대? 이건우, 나 너랑 또 세트야?”

“아니….”

“하핫, 다 모인 김에 A컷 좀 같이 추리고 가요. 현진이 형은 어디 갔어요?”

“담배 피우러. 신현진은 괜찮아. 신현진이야말로 태어난 김에 사는 애야. 내가 고르면 돼.”

“신현진 여친이랑 싸운 것 같던데?”

“아직 그… 어디더라?”

“런던.”

“아, 아직 그 여자분이랑 사귀는 거예요?”

“어. 야, 신비, 근데 저 애기 매니저 이름 뭐라고?”

“김 신. 외자래.”

“신 매니저님- 우리 다음 스케쥴 없는 거 맞죠?”

“네- 그래도 5시에는 움직이셔야 할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많이 막힐 거예요.”

“최지혁, 너 그 미팅 몇 신데?”

“형, 아직도 포기 안 했어요? 8시요. 저도 사진 좀 보다가 날아가야 돼요.”

“신비… 너라도 같이 갈래? 여자는 입장료 더블이긴 한데, 내가 내줄게.”

“나 할 일 쌓였어. 요즘 내가 제일 바쁠걸?”

“그건 그래. 아- 오늘이 날인데….”

“연습이나 해.”

“하핫, 시간 없으니까 일단 한 번 보세요. 제가 대충 나눠놨어요. 단체 컷은 이 앵글이 좋은 것 같은데 어떠세요?”

모두 모여 앉아 사진을 셀렉한 뒤, 이것저것 장비를 챙기다 보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정확히 5시 3분 전,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됐다. 트렁크에 꾸역꾸역 짐을 싣고 핸들 앞에 앉았더니 그제야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내비에 주소를 찍었다. 한 시간 안에 집에 도착하면 좋을 텐데 변수가 많은 시간대다. 계속 땀을 흘렸으니까 씻고, 기왕이면 깔끔한 기분으로 리프레시 하고 싶었다. 그 다음엔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의뢰인 만나고…. 좋을 대로 ‘의뢰인’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고객이고, 영업하러 가는 거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꾸물대는 시간도 아까워서 서둘러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경기도에서 서울까지는 그럭저럭 잘 빠져나왔는데 집으로 가기 직전에 갑자기 막혔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원하는 시간 안에 집 건물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차피 내일 또 촬영이 있으니까 카메라를 제외한 나머지 장비는 그대로 트렁크 안에 두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메모리 카드에서 컴퓨터로 사진을 옮기는 동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빵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허기를 채우고 작업물을 확인했다. 그나저나 어디서 만나는 거지? 시간은 가까워져 가는데 ‘의뢰인’에게서 연락이 없다. 시간만 정하고 장소는 오늘 정하기로 했는데…. 먼저 연락해야 하는 건지 고민스럽다.

며칠 전의 일이다. 인별그램으로 날아온 메시지가 시작이었다.

[winniethewon**** : 안녕하세요. 계정 구경하다가 문의드립니다. 개인 사진도 찍어주실 수 있나요?]

[ji.hyuk.docu**** : 안녕하세요. 네, 물론 가능합니다. 다만 스튜디오 작업을 원하시면 스튜디오 비용이 조금 더 발생할 수 있습니다.]

[winniethewon**** : 그건 상관없어요.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ji.hyuk.docu**** : 네. 어떤 사진을 원하세요? 작업 성격에 맞게 스튜디오 예약을 해야 해서요.]

[winniethewon**** : 누드요.]

처음엔 장난인가 싶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 메시지가 연달아 날아왔다.

[winniethewon**** : 제가 곧 생일이라서 남겨두고 싶어요. 만으로 39세가 되는 날이라서 마지막 30대의 기록으로요. 한국식 나이는 의미가 없어요. 마흔하나 되기 전에 찍어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장난이든 뭐든 동감하는 바다. 태어날 때부터 1년을 살고 나온 것처럼 한 살이 되는 건 좀 억울하잖아.

[winniethewon**** : 흑백으로 찍고 싶어요. 그거면 돼요. 그리고 기왕이면 작가님이랑 저랑 둘이서만 찍었으면 좋겠어요.]

누드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흑백이 어울리는 스튜디오라…. 그것도 일단 이 사람의 실물을 봐야 할 것 같았다.

[ji.hyuk.docu**** : 일단 한번 만나시죠. 어디서 보는 게 편하시겠어요? 같이 의견을 좀 나눠야 할 것 같네요. 개인 작업은 교감이 중요하니까요.]

[winniethewon**** : 제가 이태원 쪽에서 살아요. 30분 거리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아요.]

[ji.hyuk.docu**** : 저도 작업실 겸 집이 이태원이에요. 가깝네요. 편하신 대로 말씀하세요.]

[winniethewon**** : 목요일 괜찮으세요? 목요일 8시가 그나마 편한 시간이에요.]

[ji.hyuk.docu**** : 장소는 어디가 좋으실까요?]

[winniethewon**** : 그건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ji.hyuk.docu**** :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7시 37분. 정확히 45분까지 기다렸다가 연락이 안 오면 장난인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흔한 일이다. 돈이 오고 가기 전까지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고, 장난이 아니었더라도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벗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프로 모델도 아니고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야. 그래도 시간이 갑자기 너무 뜨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태성이 형이랑 적당히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 : 형, 어디에요? 나 스케쥴 뻥났_]

지잉- 지잉-

태성이 형에게 문자를 쓰고 있는데 ‘의뢰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winniethewon**** : 죄송해요. 너무 늦게 연락드렸어요. 아파서]

[ji.hyuk.docu**** : 몸 안 좋으시면 다음에 뵐까요?]

[winniethewon**** : 고양이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느라… 혹시 저희 집도 괜찮으세요? 나갈 수가 없어요.]

아프면 다음에 보자고 연락을 끊으려는데 동시에 뜬 메시지. 본인이 아니라 고양이가 아프단다. 고양이가 아픈데 왜 못 나오는 거지? 이해는 안 가지만 연락이 왔으니까 예정대로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날은 힘들기도 하고…. 이번 달 스케줄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ji.hyuk.docu**** : 주소 알려주세요.]

메시지로 받은 주소는 집이랑 가까웠다. 도보로 5분 거리, 담배 사러 가는 편의점 근처. 가까우니까 가겠다고, 8시에 맞춰 보자고 답을 보내고 집을 나섰다. 차로 다녀서 잘 몰랐는데 바람이 제법 쌀쌀한 게 겨울이 코앞이라는 게 느껴졌다.

“501호면 5층….”

딩동-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바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네, 최지혁이라고 합니다.”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새하얀 얼굴에 비쩍 마른, 아마도 나보다 10살이 많다는 그 사람이 나왔다. 어려 보였다. 특징 없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빨리 오셨네요?”

“아, 네. 가깝더라구요. 5분 거리예요, 저희 집.”

“이웃이었네요. 우리.”

우리…. 묘한 울림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네. 아무거나.”

“밤이니까 라벤더로 하죠.”

“네. 좋아요.”

그를 따라간 부엌, 식탁 의자에 앉으려니까 고양이가 어느새 따라와 발목에 얼굴을 부빈다.

“이름이 뭐예요?”

“아, 저는 ‘김 원’이에요. 외자.”

“아, 고양이요.”

“아, 하핫, 죄송해요. 제 이름 말하는 줄 알았어요. 걘 ‘푸우’예요.”

“아, 푸우….”

“하핫, 네. 저랑 산 지는 3년 째예요. 전 애인이 키우던 앤데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

이쪽일까? 그렇다면 아마도 제법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스타일이다. 아니, 일단 내 이상형에 가깝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계속 쳐다보게 만드는 묘한, 그런 특유의 분위기가 자꾸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끼 있는 스타일보다 저렇게 알 수 없는 모호한 스타일이 항상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말투나 차림새로 봐서는 ‘일반’일 것 같은데 그냥, 나도 모르게 이쪽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볼까?

“…애인이 있으시면 애인한테 부탁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지금은 없어요. 그 3년 전이 마지막이거든요.”

“아….”

첫인상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몇 마디 대화에 점점 호감으로 바뀌어 간다. 작업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다른 게 궁금해졌다.

“생일이 언제예요?”

“11월 30일이요.”

“그럼 촉박하네요. 촬영은 언제로 할까요?”

“그 날이요.”

“네?”

“제 생일날이요.”

“아….”

“역시 좀 타이트한가요? 스튜디오 섭외가 좀 어려우시려나?….”

“차라리 여긴 어떠세요?”

“네?”

“원 님 집이요.”

누구의 집에 가도 항상 마찬가지의 생각을 한다. ‘집’은 ‘사람’과 닮았다.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가, 향기가, 이 사람과 닮아있어서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공허하지만 그렇기때문에 더 안정감을 줬다.

“진짜 여길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왜요?”

“어울려서요.”

“흠….”

“…안 내키시면 스튜디오 알아보고요.”

그냥 여기서 하자고 해. 여기 말고는 너를 담아낼 곳이 없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계속 O.K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요. 여기서 하죠, 뭐. 덜 민망하긴 하겠네요. 비용은 어떻게 드리면 돼요?”

“…일단 해 보고요.”

“네?”

“누드는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요, 사실.”

“하하, 괜찮은 거죠?”

“네. 찍고 싶어요. 원 님.”

순간적으로 받아친 말에 잠시 얼굴이 붉어진 사람. 그 앞으로 끓어오르는 물의 수증기가 함께 어우러져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도 뭔가 신비롭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너무 직구였나? 민망해하는 것 같아서 ‘아차’하는 사이, 그가 말을 걸어왔다.

“시간은… 시간은 어떡할까요…?”

“낮이 좋겠어요.”

“낮?”

“네. 햇빛이 있는 시간이요.”

“햇빛?”

“피부가… 피부가 하얘서요.”

하얗다 못해 창백한 듯한 피부색과 공간 안에 가득한 초록 나무들, 그리고 사람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저 분위기. 더 필요한 거라곤 저 몸을 따뜻하게 비춰줄 햇빛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인위적인 거랑은 어울리지 않아 보여서…. 그림이 그려졌다. 아름다웠다. 공개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 괜찮은데 작가님 그날 시간 괜찮으신 거예요?”

“어떻게든 만들어볼게요.”

“어떻게든?”

“저도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고 싶어요, 항상. 그러려면 낮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하핫, 프로 맞네요. 믿어도 되겠어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더 정해야 할 게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가라는 건가….

“그럼 이제 차 좀 마셔요. 식겠어요.”

어느덧 연둣빛으로 변한 차를 내 잔에 따라주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사람….

“아, 티! 하핫,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나랑 엇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나보다 어른임이 느껴졌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게 능숙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아니, 라벤더 향 때문인가? 아무튼, 정해야 할 건 모두 정했고 차만 마시고 돌아가기엔 아쉽고. 괜히 머뭇대고 있는데 그가 다시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 애인 있어요?”

“없어요.”

“왜요?”

“글쎄요, 원 님은 왜 없어요?”

“저는 없게 생기지 않았나요?”

“아니요, 전혀요. 너무 예….”

이 병신아, 남자한테 예쁘다고 하면 어떡하냐? 뭔지도 모르면서…. 아니, 그보다 왜 자꾸 말이 막 나가는 건데? 일하러 온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