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선계이다. 선계는 영가의 죄를 다스려 재판하고 벌을 정하고 행하는 곳이다.

만약 당신이 살인의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죽으면 가장 먼저 땅의 나라 신인 흑천, 아니 이제 흑천은 인간이 되었으니 지금쯤은 다른 신이 배정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신은 땅의 나라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읊어야 한다. 땅의 나라 신은 당신의 진술과 진실을 가늠하여 벌을 정한다.

벌이 정해지면 당신은 불의 나라 여신 앞에 끌려간다. 불의 나라 여신 샐라는 선계의 네 신 중에서 가장 살벌하고 잔인한 신이다.

끓어오르는 용암 속에서 벌을 받을 것인데 살과 뼈가 녹아내리는 것은 기본이고 그렇다고 죽지도 않지. 그렇게 당신의 육신이 없어지면 어느샌가 몸이 생겨나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어떤가? 인간들의 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다. 이쯤에서 당신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존재한다.

샐라의 벌을 충실히 받는다면 아주 약간의 확률로 감형이 가능하다. 인간들이 말하는 환생이 그것이지.

자,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아아,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군.

샐라가 당신을 찾아오기 전에 땅의 나라 신은 당신에게 물 한잔을 권할 것이다. 그것은 망각의 샘에 흐르는 샘물로 그 물을 마시면 인간계의 일을 모두 잊는다.

즉, 당신이 그 물을 마신다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도 모르고 샐라의 잔인한 형벌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환생하게 될까? 뭐라고? 평생을 착하게 살았다고?

만약 당신이 샐라에게 끌려갈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면 바로 신계로 향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계, 선계, 신계를 거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신계에 올라온 영가는 신이 될 수도 있고 가장 이상적인 환생을 할 수도 있지. 바로 영가가 원하는 대로 환생이 되니 말이야.

자, 인간. 잘해 보시게. 응? 내가 누구냐고?

인간들이 나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니 신경 끄는 것이 좋겠네. 그래도 궁금하다고?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나는 신계, 선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 천제이다.

#제 1 부

“뭐 하십니까?”

불만이 가득한 저음에 천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늠름한 풍모를 가진 타이푼이 서 있다.

“어? 아, 아니다. 근데 어쩐 일로?”

오늘 천제의 모습은 아주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다. 모습이 변한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변신하는 것을 선계의 신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영감. 치매가 오십니까? 영감이 부르신 걸로 아는데?”

“아, 그랬던가?”

천제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더 하고는 목소리를 깔았다.

“인간계에 좀 다녀오너라.”

“인간계는 왜요?”

“불의 나라에서 영가 하나가 도망쳤어.”

“오호, 간 큰 영가네. 샐라에게서 도망이라.”

“덕분에 지금 그 녀석, 제정신이 아니다.”

“그럴 만도 하죠. 천제 말고 여기서 누가 샐라 성질을 이겨요?”

“설상가상으로 모든 기억을 가진 채 사라졌으니 인간계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벌일지 모른다. 속히 잡아들이도록 해라.”

타이푼은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을 가진 채 불의 나라로 갔단 말입니까?”

“그렇다.”

“망각의 샘물도 믿을 게 못되네요.”

“그게 천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니 누구의 잘못인지 가늠하기 어렵구나.”

“오랜만에 몸 좀 풀죠 뭐.”

“괜히 딴 짓거리 하지 말고.”

“딴 짓거리라니요?”

천제는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흑천이 거기 있지 않느냐?”

“아아. 그렇죠 참. 그러고 보니 영감, 그 녀석 기억을 그대로 두셨다지요?”

“그것이 순리이니 따를 수밖에.”

“뭔가 그 녀석에 관한 일이 아직 남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제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타이푼 턱 밑으로 걸어왔다.

“해모수 흉내를 내는 것이냐? 너 답지 않게 왜 머리를 쓰누?”

“아 진짜. 그 정도는 저도 생각하거든요.”

“어서 가. 인간이 다칠지 모른다.”

“네.”

“아 참, 그리고 이거.”

천제는 품에서 유리 목걸이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어렵게 만든 것이다. 그 영가의 흔적이 거의 없어서.”

호리병 모양의 유리 목걸이는 도망간 영가의 흔적으로 만든 것이다. 영가가 가까이에 있다면 환한 붉은 빛을 내는, 천제가 만든 신계의 물건이다.

“이번 일이 어렵긴 하나보네요. 이런 것도 주시고.”

“잘해 봐라.”

천제의 말에 타이푼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천제의 모습이 사라지고 정원 위로 화려한 날개를 펼친 봉황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고했습니다.”

송주는 인사하고 나가는 학생들을 한번 쳐다보고는 교재를 챙겼다. 옆에 놓아둔 저주인형도 챙긴 그녀는 무심히 강의실을 나왔다.

“저기, 교수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송주가 고개를 돌렸다. 남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죠?”

“혹시 시간 되시면 상담 좀 부탁드리려고 하는데요.”

“상담?”

학생은 송주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주 인형에 관한 건데요. 이게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얘기라서요.”

힘이 없던 송주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 괜찮아요?”

“지금요? 그, 그럼 감사하죠.”

“내 방으로 가요.”

“감사합니다.”

송주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남학생은 어딘가로 몸을 돌리더니 엄지를 치켜 올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인 학생들 무리가 그 모습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오오. 성공.”

“조용히 해. 교수님 들어.”

“드디어 교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건가?”

“제목은 여교수의 은밀한 사생활. 어때?”

“개섹시한데. 큭큭.”

무리들은 송주의 뒤를 따라가는 남학생을 보며 킬킬거렸다.

“들어와요.”

교수동 8층에 위치한 송주의 교수실 앞에 다다르자 송주는 학생을 한 번 보고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 위를 슬쩍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방울 여러 개가 묶음으로 달려 있었다.

“와아, 교수님 방 처음 와 봐요.”

학생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방울이 울리기 시작했다. 송주의 눈이 빛났다.

“어?”

학생이 방울의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송주가 얼른 말했다.

“아, 그냥 장식. 신경쓸 거 없어요. 거기 앉아요.”

학생은 송주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3인용 소파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송주의 교수실은 교수실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출했다.

‘뭐야? 이런 교수실은 또 처음이네.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소문. 한얼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한송주에 대한 소문은 학교에서 꽤 유명한 편이다.

- 거기를 한 번 갔다 온 학생은 꼭 귀신을 본 것처럼 멍청해지거든.

학생은 소문을 떠올리며 귀신을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교수실은 송주의 책상과 소파, 그리고 소파 앞의 탁자와 벽에 붙은 책장 정도로만 채워져 있다.

“상담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 네. 그랬죠.”

학생은 눈치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면서 소파 뒷편 벽에 붙은 부적 액자를 쳐다보았다. 창문 위에는 오래된 풍경이 걸려 있고 문 위에도 방울이 있다.

‘그러고 보니 민속학과 교수답게 민속적인 걸로 채워져 있기는 하네.’

학생은 소파에 앉으며 친구들의 수다를 떠올렸다.

“한송주 교수님, 좀 이상하대.”

“귀신을 본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게 아니라 귀신을 미끼로 남학생을 꼬신대.”

“이쁘게 생기긴 했는데 뭔가 좀 음침하지 않아?”

“남자든 여자든 교수실에 다녀온 사람은 좀 이상해진다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우리들 중 한 명 뽑아서 보내볼까?”

그래서 선발된 학생이 방금 송주의 교수실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곁눈질로 송주를 쳐다보았다.

‘빠지는 미모는 아니야. 꾸미면 꽤나 이쁠 거 같긴 한데 왜 저러고 다니는 걸까?’

그의 말대로 송주는 적당한 키에 마른 몸매라,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단발머리와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만 어떻게 하면 보통은 넘는 외모다.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지?”

“네? 아, 이민수입니다.”

“민수 학생. 손 좀 내밀어 볼래?”

“손이요?”

“그래, 손.”

“아, 저는 상담하러…….”

그러자 송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거 아니잖아.”

“네?”

민수는 고개를 들어 송주를 쳐다보았다. 송주는 등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손을 뒤로 하고 민수를 보고 있다.

“교수님?”

송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서는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순간 민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어어, 이거 왜 이러지?”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군가 소파 뒤에서 손을 내밀어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손.”

송주는 단도를 들어 그의 손을 가리켰다.

“교, 교수님. 살려주세요.”

“손.”

“교수님.”

“손은 움직일 수 있어.”

민수는 겁이 잔뜩 스민 눈빛으로 송주를 보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그가 손을 돌려 손바닥을 내보였다. 송주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칼을 들어 그의 손바닥을 스윽 그었다.

“으악!”

민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큰 손놀림에 비해 상처는 크지 않았다. 밴드를 붙이면 되는 정도였다.

“그대로 있어.”

송주는 손을 오므리려는 그의 손목을 누르고 노란 부적을 붙였다. 순간 부적이 붉게 변하면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으으. 교수님.”

“가만있어. 아직이야.”

하지만 민수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하자 송주는 얼른 부적 위에 손을 올렸다.

“시답잖은 괴물인데 꽤나 끈질기네.”

손가락 사이로 부적의 색깔이 금색으로 변하는 것이 보이자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뗐다.

“끝났어.”

송주는 민수의 손에 붙여진 부적을 조심스럽게 뗐다. 그리고 서랍에서 밴드를 꺼내 붙여주었다.

“마셔.”

송주는 민수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놓았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송주가 물었다.

“뭘 봐?”

“그, 그거 뭐였어요?”

“백륜. 사물형의 괴물. 배웠지?”

“네. 백륜이라면 하얀 바퀴 모양의?”

“그래. 힘은 별로 없어서 위험한 건 아닌데 이렇게 찾아내지 못하고 오랫동안 두면 지병인 것처럼 몸 안에 출혈을 일으켜서 사람을…….”

송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툭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송주는 말을 멈추고 민수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옆으로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송주는 그가 마신 찻잔을 치우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어나면 그냥 꿈이라 생각하게 될 거야.”

“온 건가?”

타이푼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호화로운 대저택인 듯 한 곳의 거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깼어?”

여자의 목소리에 타이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샐라.”

“오호,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 꽤 멋진데.”

인간계에서의 타이푼은 신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하얀 피부와 짧은 머리, 그리고 정장이 잘 어울릴 정도로 날렵한 몸매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거 보니 네 죄를 알렷다?”

샐라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무사히 깼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어. 그만 갈게.”

“잠깐.”

“왜?”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난 할 말 없는데.”

“진짜?”

타이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샐라는 쭈뼛거리며 붉게 타오르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아아, 미안해. 죄수 관리 잘못한 거 맞아.”

타이푼은 얄미운 듯 그녀를 노려보다가 크게 숨을 내쉬고는 소파에 툭 앉았다.

“됐어. 가 봐.”

“근데 완전 내 잘못은 또 아니지 않나? 기억을 안 지웠다면서?”

“그게 내 잘못이냐?”

“그건 아니지. 그렇다고 이미 인간이 된 흑천을 닦달할 수도 없잖아.”

“그만 조잘거리고 가라. 할 일이 많다.”

“아유 걱정 마. 도와줄게.”

“뭐? 일은 네가 저질러놓고 도와 줘?”

타이푼이 벌떡 일어나자 샐라가 화들짝 놀란다.

“그, 그게 아니라 언제든지 내 힘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뜻이었어.”

“다 각자 일이 있다만 이건 좀 그렇다. 적어도 불의 나라에 들어갔으면 끝이어야지, 안 그러냐?”

“그래. 내가 죽을죄를 졌다.”

“알았으면 그만 가라. 딱 대기하고 있고.”

“쳇.”

화르륵 샐라만더의 불길이 일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흐음, 여기가 인간계란 말이지?”

언젠가 흑천이 이곳에서 일할 때 와본 적이 있는 저택이다. 이곳은 인간계에 존재하지만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의 영역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타이푼은 목에 걸린 호리병 모양의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유리펜던트가 은은한 녹색을 띄고 있다.

“만약 같은 기운이 주위에 있다면 붉은색으로 변할 것이다.”

타이푼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현관 옆에 붙은 큰 거울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바뀐 모습에 발걸음이 멈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