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의 한국이다.

빌딩으로 이루어진 숲.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거리.

‘이렇게 돌아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잘한 결정이기를.’

그녀는 밖을 내다보기 위해 열어 놓았던 창문을 닫고 뒤로 돌았다. 아직 풀지 않은 박스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 외에는 무심한 성격의 그녀였기에 짐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나마 박스의 대부분이 책이었다. 박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침실로 들어오자 그녀가 직접 가지고 온 캐리어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먼저 풀기 시작했다.

캐리어 한쪽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생필품과 옷가지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그녀가 요즘 몰두하고 있는 연구와 관련된 서적과 부품이 들어 있는 박스가 채우고 있었다. 캐리어에 든 물품들만 간단하게 정리한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상대방은 그것을 기다렸는지 몇 번 신호가 간 후에 금세 화면에 나타났다.

“엄마, 아빠.”

- “도착했어?”

“응. 잘 도착했어요.”

- “한국으로 돌아가니 어때?”

“아직 잘 모르겠네.”

- “짐 혼자 챙기려면 힘들 텐데.”

“괜찮아요. 천천히 하지 뭐.”

- “연구소에서 준비해 준 집은 어떠니?”

“좋아요. 과하게 좋아.”

- “그래도 다행이다. 피곤하겠다. 짐도 혼자 풀어야 하고.”

“아냐. 천천히 챙기려고.”

“엄마라도 들어가서 도와줄걸 그랬나 봐.”

“지구 반대편에서 짐 챙기러 오려고? 괜찮아요.”

동생 내외와 독일에서 살고 있는 부모님이 미안해하는 것을 본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너무 힘들게 챙기지 말고 쉬면서 해.”

“응. 그럴게요.”

- “그래. 출근하면 거기서도 잘 하고. 어서 쉬렴.”

“네. 엄마 아빠도 쉬세요. 애들한테도 안부 전해 주세요.”

통화를 끝낸 그녀는 잠시 앉아 있다가 짐을 챙기기 위해 일어섰다.

연구소가 준비해 준 아파트는 연구소에서는 거리가 어느 정도 있지만 교통이 나쁘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출퇴근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고 내부 시설은 그녀의 기대보다도 훨씬 크고 깨끗했다.

‘혼자 사는데 방 세 개라니, 정말 과하게 기대하는 느낌인데.’

그녀의 요청대로 책장이 벽면을 채우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박스를 열어 책을 꺼내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양해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이후 로봇 공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지난 학기까지 미국의 모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의 로봇 공학 연구소에서 그녀에게 끊임없는 러브콜과 설득을 한 결과였고 어렵게 계약을 하게 된 이상 그녀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잘 봤습니다.”

“감사해요.”

남자는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남자를 쳐다봤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생김새의 그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배우 이지원이다.

연기력을 기준으로 하거나 외모를 기준으로 하거나 흥행력을 기준으로 하거나 항상 상위에 랭킹되는 배우. 연기와 외모뿐 아니라 키와 몸매, 목소리, 게다가 매너까지도 완벽하다고 평가되어 전 국민의 호감을 받고 있는 배우다.

소유 건물을 관리 보고하기 위해서 이렇게 들렀다가 사무실에 돌아가면 그를 보고 왔다는 것만으로도 여직원들이 모두 집중하는 게 느껴질 지경이다. 자신보다 다섯 살밖에 어리지 않은 서른 정도의 남자에게 이렇게 보고를 하고 그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준다는 것이, 부러울 때는 있어도 질투심이 느껴진다거나 싫지 않았다.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인성이 나쁘지 않아서이기도 일 것이다.

남자는 마주 앉은 지원에게 보고 서류를 내밀었다.

“세입자가 몇 명 바뀌었습니다. 지난번 보고 드렸던 금액으로 계약했습니다. 그중 두 곳은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보고 때와 변경되어 계약되었습니다. 한 곳은 기존 세입자가 연장 계약했고, 한 곳은 회사입니다.”

“네.”

그는 남자의 보고를 들으며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넘겼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에 간편한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를 이어 나갔다.

“계약만료로 세입자가 곧 나가기로 한 집은 아직 다음 세입자가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보러 오는 사람들이 몇 있어서 검토 중인데 결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아, 계약했다는 회사가 여기군요.”

지원은 손을 멈추고 서류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네. 외국에서 오는 직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장기로 들어오는 거라고 해서 세입자의 간단한 정보도 받아 두었습니다. 다음 장을 보시면 됩니다.”

남자의 말을 따라 다음 장으로 넘겨 대수롭지 않게 보던 지원이 잠깐 마른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네. 지금도 이 이름이 기억날 줄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름의 주인에 대한 정보를 읽어 보았다. 간단하게 이름과 생년월일과 성별, 입주 예정일이 적혀 있었고, 연락처는 비어 있었다.

‘나와 동갑 그리고 여자인 양해주.’

지원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왜 그러시죠?”

지원은 남자가 의아하게 묻는 바람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연락처는 비어 있네요?”

“네, 미국에서 오는 거라고 하더군요. 어차피 계약자는 회사이므로 직접 세입자에게 연락할 일은 없으니까요.”

“그럼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면 그 회사에 요청해야 하나요?”

“네? 어떤 정보가 더 필요하십니까?”

“아,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고,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신 거 같은데, 세입자에 대해 좀 더 알아다 드릴까요?”

넌지시 건넨 질문에 그가 망설이는 듯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기에, 한마디 더 했다.

“그냥 개인적으로라도 알아봐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그제야 반응을 한다.

“제가 벌써 몇 년째 담당해 드리고 있는데, 그 정도야 해드릴 수 있죠.”

“어, 음, 그러니까 그저 궁금해서요. 미국에서 데려오는 건데 한국 이름이니까, 그냥 호기심으로요.”

“네, 이해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이해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 게 눈에 보이는 데도 지원은 그에게 됐다고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 것인지만 대충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아, 네. 그냥 궁금한 거예요. 어떤 사람이라 회사에서 집도 주나 해서, 그런 거요.”

“네네.”

남자는 자신이 대답했지만 지원의 말이 자신에게 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번 보고는 이 정도로 하고 가보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아 참, 아기는 잘 커요? 유치원 들어갔어요?”

“아, 이번에 들어갔습니다. 기억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에이, 그래도 몇 년째 정기적으로 보는 사인데, 기억하죠. 이거 아기 갖다 주세요.”

지원은 무심하게 테이블에 종이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에는 어린아이용 장난감이 들어 있었다.

“광고 촬영하는데 들여다봤더니 주변에 선물하라고 안겨 주더라구요. 새 거래요. 근데 아기 나이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별거 아니라는 듯한 그의 말이었지만 그것을 챙겨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저 얼굴로 저렇게 행동하니 여자건 남자건 안 좋아하고 배기겠어? 여자 없이 사는 게 이상할 뿐이지. 하긴 가깝지도 않은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어섰다.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별도로 연락드릴게요.”

“아, 네. 고마워요.”

남자가 돌아간 후 지원은 천천히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뒤로 기대앉으며 긴 다리를 테이블에 올리자 그 자리에 놓여 있던 보고서가 다리에 걸려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에잇.”

그는 귀찮음에 그것을 무시하려 하다가 작게 의성어를 내뱉으며 몸을 억지로 일으켰고, 보고서를 집어 들어 마지막으로 보던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는. 그럴 리 없잖아? 아니, 그리고 이게 걔면 또 어때. 안 그래? 뭐,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아니, 친구였던 것뿐이었는데.’

오랜만에 떠오른 단어에 그가 픽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고 보니, 걔를 내 셔틀이라고 둘러대던 때도 있었지.’

“그 옛날 일이 뭐 어쨌다고.”

지원은 혼잣말로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파일을 접었다.

***

지원은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의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큰이모에게 들러야 하는 엄마의 심부름을 끝내고 나서 전화를 하니 수고했다며 용돈을 쏴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도균을 불러 피시방을 갈까 하다가 혼자 영화라도 보러 갈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그였다.

근처 영화관의 위치를 검색하고 걸음을 옮기면서 의미 없이 아무 데나 시선을 던지던 지원이 발을 멈췄다.

‘어디 가는 거야?’

그의 시선 끝에는 길 건너에서 걷고 있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양해주.’

지원은 어느새 떠오른 미소를 깨닫지 못한 채 해주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지나쳤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를 놓쳐 버릴까 봐 쉽사리 건널 생각을 못 하고 천천히 따라가던 지원은 어느새 그녀의 목적지에 함께 도착해 있었다.

‘너답다.’

그녀가 먼저 들어가 버린 도서관 건물을 올려다보던 지원이 작게 웃다가 따라 들어갔다. 도서관 안쪽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생각보다도 먼저, 이유를 떠올릴 새도 없이 그는 해주를 찾아가고 있었다.

‘찾았다.’

두 번째였을까, 세 번째였을까, 층과 실을 조용히 옮겨 가며 도서관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던 중에 해주를 발견한 지원이 잠깐 멈춰 섰다. 그제야 저 아이를 찾아 돌아다니던 자신을 깨닫게 된 그였다.

‘뭐, 그냥. 갑자기 길에서 마주쳐서 신기했으니까.’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 있던 지원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과 노트를 나란히 펼쳐 놓고 공부를 하고 있는 해주의 맞은편이었다.

‘교실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뭐가 되고 싶은 거야? 아,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는데, 뭔가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그는, 해주와 같은 반이 되기 전에 복도에서 우연히 들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물었고, 해주는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이과로 가지 않을 거라고.

‘네가 이과로 갔으면 같은 반이 될 일도, 옆자리에 앉게 될 일도, 친해질 일도 없었겠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세운 팔로 턱을 괴고 해주를 지그시 바라보는 지원이 중얼거렸다. 교실 옆자리에서 지켜보던 공부하는 모습에 익숙해서인지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해주의 모습은 어쩐지 색다르고,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양해주.’

그대로 해주를 응시하던 지원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지원은 쉬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이나 친구들이 싫거나 귀찮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과한 관심을 표하는 여자아이들이나 주위에 그와의 친목을 자랑하기 위해 거친 말투로 친한 척하는 남자아이들에게 가끔 피곤함을 느끼던 그였다. 그나마 어릴 때 같이 농구부에 있던 도균은 원래 성격이 활발하고 서로에게 익숙한 믿을 수 있는 친구였고, 그가 지쳐 갈 즈음에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곤 했기 덕분에 무리 없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고자 하는 강박이 없는 해주와 친해진 후로,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그였다. 물론 그는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해주를 조용히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지원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해주는 책을 보느라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 익숙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방토. 해주야.’

그가 지어 준 별명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보는데,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 순간 해주가 고개를 들었다. 훔쳐보던 것을 들킨 듯한 느낌에 움찔했지만 지원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덕분에 해주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그 반응은?’

그를 마주 본 자세 그대로 눈만 몇 번 깜빡거리는 해주의 반응에 중얼거린 지원이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놀란 얼굴을 한 해주가 얼떨결이 분명한 태도로 그를 따라 손을 약간 들었다.

지원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해주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기만 했을 뿐 특별한 반응 없이 앉아 있었다. 단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고개가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올라갈 뿐이었다.

“안녕.”

작게 얘기하는 지원의 인사에 해주가 주위를 빠르게 쳐다보더니 노트에 뭔가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도서관인 것을 신경 쓰는 듯했다.

- 안녕. 깜짝 놀라서 헛 거 보는 줄 알았어.

그녀의 목소리 대신에 적힌 귀여운 글씨를 보고 지원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그를 보고도 반응이 없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해주가 여전히 들고 있던 펜을 가져가 그 아래에 적은 지원이 노트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 나도 도서관 올 줄 알아.

- 그건 나도 알지. 근데 가방도 없이 왔어?

해주의 글을 본 지원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 언제까지 공부할 거야?

- 왜?

- 엄마 심부름하고 용돈 받아서 영화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자.

노트를 내려다보던 해주가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다가 대답해 주었다.

- 앞으로 최소한 한 시간 반은 더 있을 거야. 지금 하던 건 끝낼래.

- 그럼 그동안 기다릴게.

- 응. 고마워.

노트를 도로 가져가 다시 집중할 준비를 하던 해주가 여전히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지원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무언가 적은 노트를 다시 내밀었다.

- 그냥 앉아서 한 시간 반 기다리려고?

- 응. 괜찮아. 이러고 있다가 심심하면 책 가져다 읽을게. 얼른 공부해. 한 시간 반 되면 나갈 수 있게.

너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대답할 수 없던 지원이 길게 글을 써서 해주에게 넘겨주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 책을 몇 권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