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태는 가뜩이나 별로인 기분에 연습을 하다가 감독에게 또 한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공 배합에 대한 구상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집중력이 흐트러져 날아오는 투수들의 공도 여러 차례 놓쳤다.

결국 성태는 조금 전 굳건히 지켜오던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 당했다.

공을 백업 포수에게 넘겨주고 덕아웃에 돌아와 무거운 포수장비를 풀어 헤치며 괜시리 글러브와 장비에 화풀이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여자가 심기를 또 건드렸다.

“본 모습이요?”

“네, 방금 제가 본 장면이 영 잊히질 않아서요.”

“…별 일 아닙니다. 그냥 공이 잘 안 맞아서요.”

성태가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그래도 기자 앞이라 정중히 선을 그으며 변명했다.

“그래요? 김 선수님 좀 전까지 배트 휘두르는 모습 못 본 거 같은데….”

“제가 기자님 앞에서 훈련하는 모습까지 일일이 보여드려야합니까?”

“아니요, 뭐 그런 건 아닌데…. 김 선수 행동이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잖아요? 거짓말도 능하신 것 같고.”

“좀 무례하시네요.”

성태가 결국 참지 못하고 강하게 말을 하자 여진은 당황하여 페이스를 잃었다.

“뭐… 무례요…?”

“선수도 사람입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는 거지, 그거에 하나하나 이유 찾아 따지시는 기자님 같은 인간들 덕분에!”

“…….”

“숨 막혀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거예요.”

“…….”

성태의 큰 소리에 여진은 아무 대답 할 수 없었다.

여진은 원래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만 지나친 취재 욕구로 인해 선수들의 삶을 압박하는 기자들이 종종 있었기에 여진은 성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그런 기자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편견의 오류였다.

“유 기자님 덕분에 제영일보를 좋게 봤는데 모든 기자가 그런 건 아닌 것 같네요.”

성태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진에게서 등을 돌려 덕아웃을 벗어났다.

“하… 아무리 그래도 비약이 심하잖아…!”

자신은 그저 성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지 떠보려던 것뿐이었는데, 선수를 못 살게 구는 사람으로 분류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홀로 남은 여진은 억울함에 성태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

꼬르륵!

토요일, 강 팀장과 다연만 출근한 사무실에서 배꼽시계가 울렸다.

“흠흠.”

각자 조용히 일하던 사무실의 시계는 착실하게 오전을 보내고 어느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연은 굶주린 배에 바짝 힘을 주고 더 이상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책상 위 초콜릿 하나를 입이 넣었다.

꼬르르륵!

그러나 이 놈의 장기는 주인의 의지는 안중에도 없는 지 계속해서 아우성을 쳤다.

“저 팀장님, 식사 안 하세요?”

“혼자 드세요. 전 생각 없습니다.”

다연이 강 팀장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강 팀장은 다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밖에서 혼자 먹기 싫은데….

집에 있을 때야 혼자 충분히 밥을 잘 먹지만 다연은 집 밖에서 혼자 식당을 방문해서 혼밥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영국에서 회사생활을 할 때도 워낙 밝은 성격 덕에 주변에 항상 동료들이 있었기에 혼자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밖에서 먹기는 싫고… 간단히 사와서 일 하면서 먹어야겠다.

잠시 고민하던 다연은 지갑을 들고 일어서서 여전히 일하고 있는 강 팀장을 한 번 바라보았다.

“뭐 사다 드려요?”

“괜찮습니다.”

다연의 물음에도 강 팀장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여튼 일 중독자.

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A초밥세트 하나 포장해주세요.”

일식집으로 향한 다연은 고민 끝에 초밥의 종류를 따져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로 주문을 했다.

강 팀장 뭐라도 사다줘야 하는 거 아닌 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막상 초밥을 사서 혼자 먹으려니 영 마음에 걸렸다.

“A세트 하나 더 포장해주세요.”

결국 다연은 한 세트 더 주문을 했다.

눈치 봐서 먹을 기세면 주고 안 먹는다하면 집에 가져가서 저녁으로 먹지 뭐.

초밥 포장을 마친 다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로 돌아갔다.

“초밥 포장해 왔는데 진짜 안 드세요?”

사무실로 돌아온 다연은 자신이 나가기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일에 열중해있는 강 팀장을 향해 다시 물었다.

“괜찮습니다.”

아, 한결같은 사람.

한결같은 강 팀장의 대답에 다연도 더 이상 묻지 않고 포장해 온 초밥 한 세트를 꺼내 먹으면서 일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그 맛에 다연은 고개를 까닥이며 열심히 초밥을 먹었다.

“음음~ 흐으으흠~.”

허밍을 흥얼거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자 또다시 흥이 올라왔지만 혼자 있는 사무실이 아니기에 간신히 발끝으로 흥을 내보내며 참아 내었다.

강 팀장은 시야 한 편에서 까딱 거리는 고갯짓에 점점 집중력이 흐려졌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다연이 흐뭇한 미소로 초밥을 먹으며 고개와 발끝을 까딱거리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웃긴 여자였다.

자신이 쳐다보는 지도 모르는 채 다연은 흥에 취해있었다.

강 팀장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연을 관찰했다.

드디어 시선을 느낀 걸까?

고개를 까딱 거리며 흥얼거리던 다연이 멈칫하고 서서히 강 팀장을 돌아보았다.

“뭘 보세요?”

강 팀장의 시선에 당황한 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정 과장 봅니다.”

“…왜요?”

“신기해서요.”

“밥 먹는 게요?”

다연은 이해되지 않는 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초밥 남는 거 있습니까?”

“안 드신다면서요?”

“먹고 싶어졌습니다.”

“갑자기요?”

“정 과장이 하도 잘 먹어서?”

“뭐 넉넉하게 사긴 했는데….”

“같이 먹죠.”

다연이 쭈뼛대자 강 팀장은 다연의 자리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포장 되어있는 남은 한 세트를 발견하고 거침없이 꺼내어 포장을 뜯었다.

“어차피 나 주려고 사 온 거 아닙니까?”

“아닌데요.”

“그럼 이 걸 두 세트나 혼자 먹는다고요?”

“그럴 건데요.”

사실은 강 팀장 몫으로 사 온 건 맞지만, 강 팀장이 먼저 나서서 당연하게 제 것이라 여기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다연의 억지에 강 팀장이 피식 웃으며 다연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탈납니다.”

“지금 제 걱정 하시는 거예요?”

“네. 걱정됩니다.”

뭐야? 왜 이래?

“…왜요?”

평소와 다른 강 팀장의 모습에 다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상사가 부하직원 걱정하는 건 당연하죠.”

“그게 당연한 거예요?”

“당연하죠.”

“…….”

“정 과장 아프면 정 과장 일도 내가 다 해야 하잖아요.”

강 팀장이 초밥을 하나 입에 넣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지, 에라이 퉤!

“많이 드십쇼.”

강 팀장의 대답에 왜인지 모르게 김빠진 다연은 강 팀장 초밥에 침을 뱉는 상상을 하면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시은과 윤은 오전 내내 윤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아니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웠으나 시은은 제대로 된 휴식은 취하지 못했다.

윤은 눈을 감고 누워서도 멀쩡한 왼 손으로 끊임없이 시은의 몸을 더듬었다.

결국 시은이 손만 잡고 누울 거면 눕고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내린 후에야 시은은 편히 쉴 수 있었다.

“최근에 혹시 이상한 문자나 연락 받은 거 없었어?”

“이상한 문자요?”

“응. 협박 메시지라던가….”

윤은 최근 핸드폰에 수신된 문자의 협박 멘트와 시은의 사진들을 떠올리며 시은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받았었어요.”

“언제?!”

시은의 대답에 누워있던 윤이 벌떡 일어나며 되물었다.

“한 열흘 된 거 같은데, 핸드폰으로 이런 사진이 왔어요.”

시은도 따라 일어나며 며칠 전 0000으로 받은 문자를 보여주었다.

“왜 나한테 진작 말 안했어?”

“그야…. 윤이 씨 걱정 할 테니까….”

“시은이 네가 이런 거 숨기고 혼자 당하고 있는 게 난 더 걱정되니까, 앞으로 이 문자 또 오면 나한테 바로 말해. 알겠지?”

“그럴게요.”

윤이 한숨을 쉬며 시은에게 당부했다.

“내일 구단에 말하면 정식으로 경찰조사 들어갈 거야.”

“경찰조사요?”

“응. 이 사진 사실 나한테도 왔었어. 처음엔 그냥 극성팬이 보낸 거겠거니 하고 지켜봤는데, 이렇게 우리 주변에 서성이고 있는 거 알았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래도 괜히 경찰서 들락날락 거리다가 시끄러워지면 윤이 씨 이미지에도 안 좋고, 우리 관계도….”

“나한텐 그런 것보다 당신이 무사한 게 더 중요해.”

윤이 시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윤의 눈빛은 간절해보였다.

“알겠어요. 우리… 이 협박문자 범인 꼭 잡아요.”

시은이 윤을 꼭 안으며 다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소리를 느끼며 안정을 찾았다.

***

“여자친구!?”

“네, 유시은 기자 제 여자친구예요. 그러니까 팀장님이 다른 사람들한텐 알리지 말고, 이 문자 보낸 범인 좀 찾아주세요.”

다음 날, 구단 사무실에 들른 윤은 홍보팀장을 복도로 불러내서 어제 있었던 일들을 알렸다. 그러면서 시은과의 관계도 밝혔다.

“어쩐지… 유 기자가 유독 우리 팀 기사를 잘 써준다 했다.”

“그건 저랑 관계없이 우리 시은이 능력이 좋은 거고요.”

“얼씨구? 서 윤한테 이런 면이 있었어?”

“흠흠, 아무튼 경찰 조사 받게 되면 어차피 아시게 될 거니까 미리 말씀 드리는 거예요.”

“보통 이런 케이스는 극성팬 짓일 확률이 크지.”

“그게… 팬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홍보팀장이 뻔하다는 듯 말하자 윤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뭐 이상한 거 더 있었어?”

“이 사진이 제 핸드폰에 문자로 온 게 아니었어요.”

“문자로 받은 게 아니라고?”

“네, 3일 전 시합 때, 핸드폰 제출 전에는 분명 이런 사진이 없었어요. 그런데, 시합 끝나고 제가 핸드폰을 바로 안 가져갔었어요. 락커룸 갔다가 핸드폰 찾으러 덕아웃에 다시 왔는데, 그 때 핸드폰 확인해보니 사진첩에 이미 들어있었어요.”

“뭐라고? 그럼 덕아웃 출입이 가능한 사람이 네 핸드폰에 직접 사진을 옮겼다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덕아웃 출입 가능한 사람이면 우리 구단 직원이거나 기자들일 텐데….”

“우선 출입기자들 명단부터 다시 확인해볼게.”

“네. 부탁드려요.”

“일단 너 병원부터 가라. 그 손 다시 정밀검사 받아야지. 어제부터 김 코치 아주 난리야. 너 뼈라도 다쳤으면 어쩌냐고.”

“그럴게요.”

“서 윤!”

윤과 홍보팀장이 대화하는 사이로 김 코치가 멀리서 윤을 부르며 달려왔다.

“양반은 못되시네.”

“코치님 더 소리 지르기 전에 전 가볼게요. 아무튼 팀장님, 구단 내부에서도 은밀히 찾아주세요.”

“알겠어.”

“뭘 은밀히 찾아?”

어느새 윤의 옆으로 다가온 김 코치가 끼어들었다.

“아휴, 별 일 아니에요. 코치님, 어서 윤이 데리고 병원부터 가세요.”

“참! 그래. 윤아 손 봐봐.”

“괜찮다니까요.”

김 코치가 호들갑을 떨며 윤의 손을 살피자 윤은 손을 훠이 내저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 뒤로 김 코치가 윤을 쫄래쫄래 따라가며 연신 윤의 몸을 살폈다.

“흠… 내 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윤과 김 코치가 사라진 복도의 뒷편에서 설희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

“뭐라고요?”

김 코치와 함께 구단 전용 병원에 방문한 윤은 의사의 진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곳은 괜찮은데, 오른쪽 검지 뼈에 금이 갔어요.”

“하….”

“선생님, 그럼 우리 윤이 당장 공 못 던져요?”

“뼈가 다 붙고 재활까지 하려면 조금 걸릴 거예요. 게다가 손가락이어서…. 일상생활은 금방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정확히 공을 던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죠.”

김 코치의 다급한 질문과는 상반되게 의사는 차분히 대답해주었다.

윤의 찢어진 살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 상처였다.

하지만 문제는 손가락 뼈였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검지에서 나타났다.

아무래도 그 놈을 때릴 때 너무 큰 힘이 들어갔던 것 같다.

“우선 손가락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해드릴게요. 당분간은 공 던지는 건 물론이고 되도록이면 오른손을 쓰지 마세요.”

의사는 윤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도록 깁스를 해 주었다.

병원을 나온 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당분간 최대한 손 아끼고 재활하면 금방 공 던질 수도 있을 거라잖아. 너무 낙담하지 마, 윤아.”

“…….”

김 코치의 위로에도 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동안 운동을 하면서 자잘한 부상은 있었지만 3개월 이상 공을 못 던질 정도의 부상은 처음이었다.

윤에게는 부상으로 인한 운동 중단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코치님.”

“어, 그래.”

“얼마나… 걸릴 까요…?”

윤이 제 손을 내려다보며 김 코치에게 물었다.

“뼈 붙고 일상생활 하는 데 2-3주 정도라 했고, 손가락의 미세운동이 회복되려면… 다시 제구 잡기까지 1개월 보는데… 윤이 네가 재활 열심히 하면 조금 더 땡길 수 있을 거야.”

“최소 2개월은 봐야 하는 건데… 그 때면 이미 정규시즌 순위는 거의 확정될 때네요.”

“최대한 타선에서 받쳐주면… 1위 자리 지킬 수 있을 거야.”

윤이 허탈하게 웃었다.

김 코치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시즌 아웃이었다.

“재활군으로 내려가.”

감독은 윤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저… 감독님 2군에서 공 던지면서 준비하면 안 될까요?”

“서 윤. 애매하게 질질 끌어서 올해 통으로 날리고 싶어?”

“…….”

“재활군 내려가서 확실히 회복하고 그러고 공 던져.”

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을 던져보면서 회복하고 싶었으나 감독은 단호했다.

결국 윤은 1군에서 말소되어 락커룸에서 짐을 빼게 되었다.

“윤아, 일단 집에 가서 좀 쉬고 내일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짐을 챙겨 나온 윤을 성태가 붙잡으며 말했다.

“형.”

“응.”

“투수 조 애들 잘 챙겨줘.”

“그래, 여긴 걱정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가을야구 진출 할 테니까 넌 그 때까지 꼭 회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