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서계약

“대체 이게 몇 번째야 이 녀석아! 다른 것도 아니고 파혼만 두 번째라니! 혹시 고자니 너?!”

“에이, 할머니. 손주한테 그게 무슨 막말이야.”

능글맞게 웃으며 위기를 모면하려는 그였다. 최고로 이뻐하는 손자이지만 두 번째 파혼을 당한 이번만큼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혹시 사주가 안 좋나 해서 용한 점쟁이한테 가봤다. 내년에 결혼 못 하면 네놈 평생 홀아비가 될 팔자라더라. 점쟁이 말이 당장 가장 가까운 곳에 여자부터 붙여두라고 했어. 올해까지 진득하게 붙어있을 수 있는 여자로.”

“뭘 그런 걸 믿고 그래요.”

“네 이놈! 그런 거라니! 그런 거라니! 파혼을 두 번 당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

할머니의 우렁찬 고함에 그는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아니, 주눅이라기보다는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의 비위를 맞춰 혈압을 내려드리기 위한 시늉이었다.

“잔말 말고 다음 주부터 신임 대표이사로 취임했으니까 비서부터 뽑거라. 할미가 일 잘하는 여비서들로 추천해 줄 테니 그중에서 골라봐.”

“꼭 여비서여야 해요?”

“가장 가까운 곳에 여자부터 두라고 하는데 비서만큼 또 가까운 게 없지 않니. 네 녀석이랑 정략결혼은 맞지 않는 것 같으니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을 것 같구나.”

대기업 식품회사 SG푸드의 장남 서이준. 그는 할머니 강석순의 말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퇴임했지만 SG푸드의 회장이었던 할머니의 취향은 늘 한결같았다.

‘부잣집에서 고상하게 잘 자란 참한 아가씨들이겠지 또. 벌써부터 고리타분함과 따분함이 밀려오는군.’

말이 비서지, 공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임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할 일이 산더미일 게 뻔했다. 그런 이준에게 상전과도 같은 부잣집 공주님들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할머니 추천이면 부잣집에서 고상하고 얌전하게 자란 여인들일게 뻔한데, 그 여인들은 날 못 버텨요. 아직도 손자를 모르시나.”

“뭐야 이 녀석아?!”

“워워, 진정하세요. 누가 비서 안 뽑겠데? 할머니 말대로 당장 여비서 뽑을게요.”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생각했다 이 녀석아. 그래, 어떤 아가씨로 골라줄까?”

“대신, 내가 직접.”

이준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손자의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한 할머니의 표정이 새침하게 변하였다.

“아무라도 좋으니, 꼭! 올해까진 진득하게 붙어있을 수 있는 여비서로 뽑아서 이 할미 눈앞에 데려와.”

SG푸드 8층 이커머스팀 마케팅 부서.

하루 일과의 시작처럼 조미정 팀장의 비아냥이 시작되었다.

“진선미 주임. 이런 수준 떨어지는 시장 조사는 초등학생들도 하겠어. 마케팅이랑은 너무 동떨어진 거 아니야? 이거 컨펌 못해주니까 월요일 출근 전까지 다시 제출해.”

조미정 팀장은 겉보기엔 멋진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유독 선미만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1년 전 선미가 입사한 초반 당시, 조미정 팀장은 꼰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1. 본인이 한 업무지시는 무조건적으로 따르기

2. 막내 사원에게 커피 심부름 등 모든 잡일 떠넘기기

3. 업무처리는 스피드가 생명이라며 은근히 주말 출근 강요하기

선미가 입사하기 전까진 위 내용들은 당연시되었던 부분이었다. 선미는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 순간부터 조미정 팀장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진선미 쟤 또 왜 저래. 하여튼 간에 부서 골칫덩어리라니까.’

조미정 팀장의 주도하에 팀 내에서 ‘진선미’는 골칫덩어리로 낙인찍혀버렸다. 그 탓에 어느 순간부터 동료들이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시간 화장실.

볼일을 보고 있는데 화장실 너머로 익숙한 두 여자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 들었어? 신임 대표이사님 오늘 취임해서 출근하셨데.”

“아 진짜? 소문 듣기로는 벌써 파혼만 두 번째라던데.”

“얼마나 고약하고 못생겼길래 파혼만 두 번째일까? 백마 탄 왕자님은 기대하면 안 되겠어.”

“그나저나 진선미 주임 오늘도 그렇게 깨지는데 표정 하나 안 변하는 거 봤어?”

“얼굴만 반반하지 업무 능력은 제로잖아.”

“그러게, 자기가 무슨 미스코리아도 아니고 이름도 진선미가 뭐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조미정 과장의 왼팔과 오른팔이었다. 앞에서는 파이팅 어쩌고 위로해 주는 척하더니 뒤에서는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그녀들.

‘업무능력은 다들 도긴개긴이면서.’

단지, 팀장한테 사랑받느냐 사랑받지 못하느냐 이 차이일 뿐이었다. 가식적인 것은 알았지만 막상 욕을 어쩌다 들으니 더 큰 화가 밀려왔다. 앞에서 대놓고 하는 욕보다 뒤에서 어쩌다 듣는 욕이 더 기분 나쁘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그녀들은 문을 ‘쾅’ 열고 나가자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하하… 선미 주임 여기 있었어요…?”

“네. 주임님들 얘기 안에서 아주 잘 들었어요.”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런데 혹시 진짜 눈치가 없는 거예요? 보통 이런 상황이면 모른 채 할 텐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녀들이었다. 조미정 팀장 백을 믿고 저러는 걸 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제가 죄라도 지었나요? 모른 척하는 건 죄짓는 사람들이 하는 거죠. 전 아무 죄가 없잖아요.”

논리적인 말에 할 말이 없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성을 내기 시작했다.

“아, 진짜 재수 없어. 그러니까 팀장님이 진선미 주임을 싫어하는 거예요!”

간신히 화가 나는 것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악감정이 섞인 재수 없다는 말 한마디가 잠재되어 있던 파이터 본능을 깨워주었다.

“업무능력도 제로인데 얼굴까지 안 되는 분들이 팀장님한테 사랑받으시니까 참 좋겠어요.”

선미가 시원하게 팩폭을 날린 후 화장실을 나섰다.

“야! 너 말 다 했어?!”

뒤따라 나온 조미정 팀장의 왼팔 오른팔들이 선미의 머리카락을 뒤에서 세게 잡아당겼다.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피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이 구역의 미친년은 바로 나다!’

선미가 두 손을 뻗어 드릴이 돌아가듯 빠르게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휘어감았다.

“아야! 진선미 주임 이거 안 놔?!”

“당신들이 먼저 시작한 거잖아!”

2대1로 엉겨 붙어 머리카락이 빗자루가 될 때까지 앙칼진 비명 소리들이 이어졌다. 손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쥐어졌을 때쯤이었다. 누군가가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회사 한복판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대표이사님도 오셨는데…!”

펄쩍 뛰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커머스팀의 기획 실장이었다.

‘하필 걸려도 사업부의 최고 실세한테 걸릴 게 뭐야. 게다가 이 타이밍에 대표이사라니.’

대표이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위기를 느꼈는지 조미정 팀장의 왼팔 오른팔들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으으윽… 진선미 주임이 갑자기 저희 머리를….”

연약한 척, 피해자인 척. 처음부터 누가 좀 봤어야 했다. 2대1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놓고도 저런다는 것을. 그녀들의 여우같은 행동에도 선미는 개의치 않았다. 쿨하게 빗자루가 되어 앞을 가리던 머리를 정리하자, 못 보던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저들 중 누가 대표이사라는 거지?’

창피함도 모르고 궁금함에 그들을 둘러보던 중 유난히 튀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흥미로운 듯 얕은 미소가 번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85cm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주먹만 한 소두. 거기에 넓은 직각 어깨가 한몫을 더해 8등신은 거뜬히 넘을 듯해 보였다. 쌍꺼풀 없이 날카롭고 길게 뻗은 눈매의 끝은 살짝 쳐져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설마… 저 사람이 대표이사?’

파혼을 두 번 당한 남자치고는 너무나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이 아니라 상위 1% 안에 속할 법한 외모였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유지한 채 유유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선미가 신나게 집 근처 포장마차로 향했다.

‘조미정의 왼팔, 오른팔들아. 너희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오늘의 엿 같은 기억을 소주의 쓴맛과 함께 날리기 위해 선미는 빠르게 주량을 넘어서고 있었다.

다음 날.

눈을 뜬 선미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제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두병인가 마시고 전봇대에 토를 한 기억 밖에는 없는데,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우리 집이 아닌 남의 집이었다.

‘아임 크레이지?’

선미가 아임 크레이지를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방안의 욕실 문이 열렸다. 샤워를 마친 한 남자가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왔다.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선미는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이불 안을 먼저 들여다보았다. 어제 입고 있던 옷은 온데간데없이 속옷만 입고 있었다.

“어제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오!”

선미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자, 이불 밖에서 중저음의 보이스가 들려왔다.

“어제 무슨 짓을 한건 그쪽인 거 같은데.”

“네…?”

덮고 있던 이불을 슬며시 걷은 선미가 남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데, 저 남자는… 저 남자는…!’

선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어제 화장실 앞에서 싸움을 하여 거지꼴이 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 남자. 상위 1%의 외모를 가진…… 신임 대표이사였다.

“정장 바지, 재킷, 셔츠, 구두, 넥타이까지 해서 총 1000만 원이야. 당신이 어제 나한테 토하는 바람에 못 입게 되었어. 당장 갚아야겠는데.”

눈앞의 남자가 신임 대표이사라는 사실에 다 놀라기도 전이었다. 오바이트로 인해 버리게 된 금액이 1000만 원이라는 사실이 선미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어제 분명 전봇대에다가 토를 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머리를 쥐어짜 봐도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선미가 애써 부정하려 큰 소리를 쳤다.

“1000만 원이요?! 당장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당장 못 갚을 거면 제안하나 하지.”

“무슨 제안이요?”

“몸으로 때워.”

출근 첫날.

사무실로 돌아간 이준은 아까의 당돌하고 창피함을 모르던 여직원이 계속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획실장에게서 사업부의 요주의 인물이라고 하는 진선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마케팅 부서의 진선미라. 흥미롭네.’

강단 있고 씩씩한 여자. 자신이 통제하는 게 아닌, 어쩌면 자신을 통제해 줄 수도 있는 여자. 바로 그가 원하던 여비서의 모습이었다.

이준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조력자인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님. 진선미라는 직원에 대해 좀 알아봐 주세요.”

이준이 출근 첫날부터 자료 검토를 위해 야근을 하던 중이었다. 김 실장에게 선미가 포장마차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체하지 않고 즉시 포장마차로 향했다. 할머니의 취향대로 공주님 비서를 모시지 않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했다.

포장마차 투명 비닐 너머로 취기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선미가 보였다. 여자의 표정에서 오늘 하루의 쓴맛이 느껴졌다. 더 늦기 전 대화가 필요했다. 이준이 포장마차 안으로 향하려 하는데 선미가 벌떡 일어섰다. 속에서 뭐가 올라오는 듯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은 채 뛰쳐나왔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는 현실을 부정하는 개소리였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온 선미로 인해 이준은 그 자리에서 목석이 되고야 말았다.

“우웨에엑!”

“……….”

취임 후 첫 출근이라 고가의 정장을 한껏 차려입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선미의 위 속 이물질이 이준의 가슴부터 발끝까지 그림을 그린 듯이 뿌려졌다. 자신이 한 짓도 모른 채 정신을 잃고 그냥 쓰러져 버리는 선미의 모습은 더 가관이었다.

“하아….”

이준은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을 억지로 억눌렀다. 선미를 차에 태운 뒤 포장마차 이용 금액을 자신이 지불했다. 이자 값도 톡톡히 받고 말겠다며 입술을 꽉 깨문 채 집으로 향했다.

이준의 집.

일단 선미를 소파에 눕혔다. 냄새와 이물로 얼룩진 찝찝함을 씻어내기 위해 곧장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오자, 답답한지 선미가 무의식중에 옷을 벗기 시작했다. 혹시나 정신을 차린 것인가 했지만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이준은 속옷만 입고 있는 선미를 보자 한숨이 밀려나왔다.

‘저 꼴을 저대로 그냥 놔둬, 아니면 미친 듯이 흔들어서 깨워?’

한숨을 내쉰 이준이 선미를 안아들었다. 침대에 살포시 눕힌 뒤 자신은 곧장 소파로 향했다.

“정장 바지, 재킷, 셔츠, 구두, 넥타이까지 해서 총 1000만 원이야. 당신이 어제 나한테 토하는 바람에 못 입게 되었어. 당장 갚아야겠는데.”

“1000만 원이요?! 당장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당장 못 갚을 거면 제안하나 하지.”

“무슨 제안이요?”

“몸으로 때워.”

팽팽히 대치중이던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몸으로 때우라는 이준의 말에 괜한 부끄러움과 모욕감을 느낀 선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대표이사님 옷에 토를 했다는 증거 있어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어 증거 핑계를 대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핸드폰 사진첩에는 어제의 만행이 드러나는 사진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증거로는 빼도 박도 못하니 다음 스탭은 생트집이다.

“몸으로 때우라니요? 대표이사라고 사람을 그렇게 쉽게 보시는 거예요?”

“대체 뭘 생각한 거지?”

“몸으로 때우라면서요…! 그 말은 한 가지밖에 없잖아요.”

“아, 육체적인 쾌감 말하는 건가.”

계속 비꼬아대는 이준의 질문에 선미의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선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소문 상의 파혼을 왜 두 번이나 당했는지 알 것 같네.’

평범한 집안이지만 선미는 부모님께 늘 강강 약약을 배우며 자라왔다. 오만방자한 이준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렸다. 선미가 뱀눈이 된 채 이준을 노려보았다.

마치 독이라도 뿜어낼 듯한 선미를 보자 이준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지금 이 상황이 재밌으세요?”

선미가 어이없어하며 이준에게 묻자, 예상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당신 말고도 하룻밤 즐길 여자는 많아.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그럼요?”

“내 정식 비서가 필요해. 따지고 보면 그것도 몸으로 하는 일이니까.”

“네?!”

놀란 선미의 이마에 주름이 잔뜩 지어졌다. 거기에 입까지 떡 벌어져 버렸다.

“어제 보니 마케팅 부서에서 지내기도 힘들 것 같던데, 이참에 비서실로 이동하도록 해. 대신 1000만 원의 빚은 매달 100만 원씩 차감해 주도록 하지.”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선미가 뜸을 들이자 이준이 다시 천만 원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000만 원 당장 갚을 수 있나? 당장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 난.”

“제… 제가 비서 경험도 없는데…! 갑자기 비서 업무를 어떻게 해요….”

“어려울 거 없어. 하루만 교육받아도 충분할 거야.”

“그래도… 갑자기 비서라니….”

“그럼 1000만 원 당장 내놓거나, 1000만 원짜리 옷을 새로 새놓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

이래저래 천만 원에 묶이게 된 처지였다. 상대방은 바로 돈을 내놓거나 새 옷을 사 올 것을 원하지만 선미에게 당장 그럴 돈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 알겠어요! 할게요… 비서.”

“그럼 바로 계약서 작성하도록 하지.”

이불을 감싸 안은 선미에게 이준이 계약서와 펜을 건넸다. 미리 준비해둔 계약서의 중요 내용은 이러했다.

1. 비밀 준수하지 않을 경우 위약금 500만 원 발생

2. 올해 안 무통보 계약 해지 시 위약금 500만 원 발생

3. 비서와 관련된 모든 업무는 순응할 것

정확한 갑과 을의 계약서였다.

‘쳇. 있는 놈들이 더하네. 위약금까지 걸다니!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철저한 을의 입장인걸.’

선미가 시무룩하게 계약서에 사인을 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이준이 계약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인 거야.”

계약이 성립되기가 무섭게 이준이 선미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나랑 바로 갈 곳이 있어.”

“네? 어디요? 그리고 제 옷은…!”

“토 냄새 나길래 같이 버렸어.”

토 냄새에 민망해진 선미가 이준이 건넨 쇼핑백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일단 씻고 옷 갈아입고 나와.”

이준이 옷을 갈아입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쇼핑백 안에는 택에 어마 무시한 가격이 찍혀 있는 명품 브랜드의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연핑크 계열의 참한 느낌을 주는 원피스였다.

선미가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쭈뼛쭈뼛 방에서 나왔다. 선미의 표정에는 어색함이 역력한 반면, 이준의 표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마치 호랑이가 토끼를 사냥하기 직전을 즐기는 듯한 시선처럼.

“첫 번째 관문이야. 최대한 참하게 보여야 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이준이 선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향한 곳은 전신거울 앞이었다. 이준이 거침없이 선미의 긴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머리에 가려졌던 선미의 하얗고 뽀얀 목선이 드러났다.

“이게 훨씬 참해 보이는데?”

이준이 한 손으로는 머리를 잡아 올리고 한 손으로는 목선을 쓸어내렸다. 거침없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선미가 몸을 돌려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복숭아처럼 보기 좋게 붉어진 얼굴과 앙칼진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