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너와의 하룻밤(2)

부산 선미의 집.

이준의 약혼 기사를 접한 선미가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으며 집에 도착했다. 때마침 절친한 친구인 유화에게서 온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선미! 이게 얼마 만이야. 지금 어디야?]

“나 지금 부산 집.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나야. 우리 이따 저녁에 만나야지.]

“응. 그러자. 오늘 몇 시 퇴근이야?”

[나 6시 퇴근! 때마침 오늘이 고등학교 3학년 동창 애들이랑 모이기로 한 날이었거든. 너 온다고 다 연락해놨어.]

“와, 동창 모임인 건가?”

[응. 우리 고3 때가 제일 재밌었잖아. 너 오랜만에 온다고 하니까 애들 다 반가워하더라.]

“기대된다. 시간 맞춰서 약속 장소로 갈게.”

절친한 친구의 이름은 고유화였다. 유화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왔고 부산 말보다 서울말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친해지게 되었다. 부산에 있을 때만 해도 종종 동창 모임에 참석하곤 했었는데 서울에 올라간 뒤부터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약 4년 만의 동창 모임. 그곳에서 웃고 떠들 생각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부산 시내의 한 고깃집.

약속 장소인 고깃집에 들어서자, 유화 포함하여 먼저 와있던 친구들이 선미를 반겼다.

“꺅 진선미! 진짜 오랜만이다!”

“선미야! 이기 얼마 마이고!”

등등.

오랜만의 만남으로 정감 가는 인사들이 오고 갔다. 모인 친구들은 5명으로 다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었던 친구들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선미가 유화 옆자리에 착석했다.

“선미 너는 서울 가더니 더 예뻐졌다.”

“유화 너야말로 무지 예뻐졌어. 연애의 힘인가?”

“아니라고 할 순 없지. 참, 맞다. 너 차종현 기억나?”

“차종현이면… 아 기억나!”

고등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 이름과 매칭되는 한 친구가 있었다. 성적은 상위권에 운동도 잘하고 굉장히 잘생겨서 인기가 많았던 친구였다. 인기에 비해 숫기가 없어서 여자를 잘 안 만났던 친구로 기억한다.

“오늘 종현이도 여기 온대. 걔도 서울에 있는데 때마침 오늘 내려왔다고 하더라고.”

유화와 선미가 종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쪽에서 고깃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현이 왔다! 이야, 억수로 까리하네!”

종현의 등장에 선미도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기억 속에는 살짝 젖살이 남아 있는 어린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선이 딱 잡혀있는 훤칠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와, 더 멋있어졌네.’

서글서글한 눈매 빼고는 모든 것이 다 날카로웠다. 각진 넓은 어깨와 접어 올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팔의 힘줄. 긴 목으로 인해 더욱 드러나는 날렵한 턱 선까지. 예전의 앳된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사를 마친 종현이 비어 있는 선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진선미. 계속 동창 모임 할 때마다 엇갈려서 못 봤는데 이제서야 보네.”

종현이 수줍게 눈웃음을 지으며 선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거의 6년은 된 것 같은데. 어? 그런데 너 지금은 부산 말 안 쓰네?”

“아, 나도 군대 제대하고 나서부터 계속 서울에 있다 보니까 조금씩 변하더라고. 그래도 아직 억양은 남아있어.”

“서울에 있는 거 알면 연락 좀 할걸 그랬다. 서울 어디쯤에 있어?”

“성수동 쪽에 있어. 너는?”

“나는 지금 신사동 쪽에서 회사 다니고 있어.”

“아 맞다. 지난번에 들었을 때 SG푸드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하던데. 대단하다.”

“에이, 말단 주임인데 뭐. 너는 서울에서 뭐해?”

“내가 커피를 좀 많이 좋아해서 작은 카페 하나 운영 중이야.”

“와, 진짜? 우리 나이에 사업도 하고 대단하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다 부모님 도움 덕분이지 뭐.”

한참 동안 둘만의 대화가 이어지자, 동창들의 눈빛이 므흣하게 변했다.

“종현이 너, 선미 앞에서 말 되게 잘한다? 우리 나머지 동창들 섭섭해지려고 해.”

유화의 장난스러운 말에 종현이 수줍게 미소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나 평소랑 똑같은데. 선미랑 오랜만이라 너무 반가워서 그래.”

“자, 그럼 못다 한 인사는 다음에 또 둘이 나누시고. 다 같이 짠 한잔합시다!”

고기 굽기를 담당한 종현이 말없이 선미와 유화의 접시에 구워진 고기를 한 점씩 놓아주었다.

“엇, 괜찮으니까 너 먼저 먹어.”

“나도 구우면서 계속 먹고 있어. 탈까 봐 주는 거야.”

“우리 종현이 완전 매너남이 다 됐네.”

유화의 장난에 종현이 보는 사람들까지 기분 좋아지는 눈웃음을 수줍게 지었다. 종현의 예전 이미지는 굉장히 조용한 이미지였다. 지금은 다정하게 할 말을 다 하는 종현을 보니 신기했다.

“자, 오랜만에 모인 거니까 진탕 마시자고!”

모처럼 만에 만난 동창들과의 시간이 선미는 너무나 즐거웠다. 옛날 얘기하며 실컷 웃고 떠드니 서울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싹 다 풀리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술이 달콤한 음료처럼 홀짝홀짝 잘 넘어갔다.

‘크으, 술이 쭉쭉 잘 들어가네.’

알싸한 취기가 빨리 돌아 바람을 쐬러 잠시 선미가 밖에 나와 있자, 종현이 함께 따라 나왔다.

“서울 가서 연락해도 돼?”

종현이 핸드폰을 꺼내며 선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도 카페에 놀러 가도 되지?”

“언제든지. 아 참, 혹시 번호 바뀌었어? 저장된 번호는 프로필이 다르던데.”

“아, 맞아. 중간에 한 번 바뀌었었어. 핸드폰 이리 줘봐. 바뀐 번호 찍어줄게.”

선미가 바뀐 번호를 찍어서 다시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종현이 눈이 없어질 듯 웃으며 좋아했다. 넋을 놓고 빠져들 정도로 순수한 미소였다.

“서울 가서 꼭 연락할게.”

그 시각.

비즈 호텔 2010호.

이준은 기수진이 있는 비즈 호텔 2010호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자, 잠시 후 객실 문이 열렸다. 기수진은 마치 짜 놓은 각본처럼 샤워를 막 끝낸 듯한 젖은 머리에 섹시한 가운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오셨어요. 대표님.”

이준은 신발도 갈아 신지 않은 채 객실 소파로 향했다. 기수진이 이준을 따라 소파에 착석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가운이 벌어지도록 느슨하게 묶어 하얀 속살들이 내비쳤다.

“아직 저녁 식사 전이시죠? 제가 룸서비스 시켜놨어요.”

“식사는 괜찮습니다.”

“그럼 와인 한잔하세요. 대표님이랑 같이 한잔하려고 일부러 챙겨왔거든요.”

이준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기수진이 일어나 와인과 와인잔을 챙겨왔다. 기수진이 와인을 따른 후 잔을 손에 쥐려고 한 순간, 와인잔이 테이블에 엎어졌다. 마치 일부러 잔을 넘어뜨린 듯 타이밍이 절묘했다.

“어머!”

엎어진 와인은 그대로 기수진의 가운으로 쏟아졌다. 기수진은 작정한 듯 그 자리에서 가운을 벗었다. 짧은 실크 슬립 사이로 탐스러운 몸매가 다 드러났다.

‘이건 뭐. 이래도 안 넘어가? 라는 식의 뻔한 몸부터 들이대는 꼴이네.’

이준이 뻔히 보이는 행동에 코웃음을 쳤다. 기수진이 어디까지 할 셈인지 지켜보았다.

“저 잠시 방에서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어머!”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가운에 걸려 넘어진 듯 기수진이 이준의 품에 달려들었다. 말랑한 속살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되었지만 이준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가까이에서 풍겨오는 인위적이고 진한 향이 이준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을 뿐이었다.

“저희 어머니한테 아직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이요? 안 그래도 아까부터 어머님이랑 연락이 안 돼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닌지 이준 씨한테 여쭤보려던 참이었어요.”

“격 떨어지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시죠. 향이 너무 진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이준의 단호한 태도에 기수진이 눈을 흘기며 밀착되었던 몸을 떼어냈다. 머리 아픈 진한 향과 멀어지자, 이준이 정장 재킷 주머니에서 아까 강 회장이 던진 기수진의 사진들을 내밀었다.

“이 정도면 기수진 씨가 협박한 사진과 맞바꿀만하겠죠. 약혼 기사 관련된 것은 내일 정정보도 나갈 겁니다. 그저 잘못된 정보에 의한 해프닝이었을 뿐이라구요.”

사진을 본 기수진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게 어떻게… 이거 저 아니에요!”

“그럼 DN그룹 사내 인트라넷에 이 사진이 퍼진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군요?”

“그… 그건….”

기수진은 당황한 듯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더 이상 할 말 없는 것 같으니 일어나겠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인 걸로.”

이준이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객실 문 앞까지 도착하자 기수진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표님. 저랑 안 자고 싶어요?! 대체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이준이 짧은 실소를 내뱉으며 기수진을 향해 돌아섰다.

“DN그룹에서 왜 기수진 씨를 경영권에 두지 않고 신부수업만 시켰는지 알 것 같네요. 외모로만 사람 마음을 잡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면을 좀 가꾸시죠.”

객실문이 쾅 하고 닫히자 2010호 안쪽에서 기수진이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악!]

기수진의 발악에도 개의치 않고 이준은 무심하게 가던 발걸음을 옮겼다. 차에 탄 이준이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던 골치 아픈 일이 해결되자, 순식간에 갈증이 밀려왔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가지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독한 위스키 한 잔? 시원한 찬물 샤워? 하룻밤 원나잇?’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있었다. 휴가를 보낸 탓에 안고 싶어도 당장 안을 수 없는 여자. 다른 거 다 제치고 지금 눈앞에 아른거리는 여자. 답은 바로 그의 비서. 진선미였다.

다음 날.

어제 동창들과 오랜만에 과음을 한 선미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점심 12시였다. 해장하라고 엄마가 끓여준 북엇국을 한 숟갈 뜨려던 그때, 김 실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지? 설마 내가 실수 한 거라도 있나?’

휴가 기간에 오는 전화라 괜한 불안감이 앞섰다.

“네. 안녕하세요. 김 실장님.”

[아, 진 비서님 휴가 기간에 전화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스피커 너머로 김 실장이 정말 미안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혹시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대표님께서 첫 휴가로 본가에 내려갔는데 선물이라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네에에에?”

김 실장의 말을 듣는 순간, 선미가 매우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명절도 아니고, 휴가 선물을 챙겨준다고? 서이준 대표가 뭘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먹은 게 분명해.’

[선물 보내려 하는데 사내 시스템에는 본가 주소가 없네요. 본가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 휴가만으로도 정말 감사한데.”

[누릴 수 있으실 때 실컷 누리십시오. 그럼 주소는 문자로 좀 보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참, 김 실장님!”

[네. 말씀하세요.]

“대표님… 약혼 기사 났던데 사실인가요?”

이준에게는 직접 물을 수 없던 선미가 김 실장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마 대표님께 직접 곧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직접 곧 들을 수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의문이 남았지만 일단 쓰린 속을 해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선미가 시원한 북엇국으로 쓰린 속을 해장한 후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제 과음으로 인해 오늘은 그냥 집에서 푹 쉴 생각이었다. 아직 5일이라는 꿀 휴가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지이이잉, 지이이잉.

약 1시간쯤 흘렀을까. 조용하던 핸드폰으로 진동 소리가 울려댔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왠지 모르게 떨려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발신자는 바로 이준이었다. 선미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안녕하세요. 대표님.”

[잘 쉬고 있어?]

“네. 덕분에 잘 쉬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야? 집에서 쉬는 중인가?]

“네. 집이에요. 아 참, 대표님께서 휴가 선물 보내라고 하셨다던데… 감사합니다.”

[그 선물 도착했어 지금.]

“네…?”

[직접 선물 배달 왔으니까 집 앞으로 잠깐 나와.]

이준의 말에 화들짝 놀란 선미가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정말 밖에는 이준의 차가 떡하니 주차되어 있었다.

‘진짜 선물 주러 직접 부산까지 온 거야? 진짜 서이준 미친 거야?’

선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지저분한 머리를 단정히 정리해서 묶었다. 거울을 보니 너무 초췌해 보여 입술에만 살짝 붉은색 틴트로 색을 입혔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이준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선글라스에 흰 티셔츠와 청바지. 기본 착장이지만 몸매가 받쳐주니 굉장히 스타일리시 했다.

‘뭐야. 저 복장은. 놀러 온 복장이잖아. 서이준도 설마 휴가 온 거야?’

이준이 곧바로 뒷좌석 문을 열더니 정말로 선물세트를 꺼내서 선미에게 내밀었다. 완전 초비싼 한우 선물세트였다.

“자, 선물.”

“뭘 이런 걸 다… 대표님이 어떻게 직접 오셨어요?”

“어제 홈 파티 프로젝트 메뉴 론칭하고 나니까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오늘 하루 연차 썼어.”

“아, 언제 올라가시는데요?”

“내일 오전에. 휴가 기간인데 괜히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미안하군.”

아무리 비싼 선물을 들고 왔어도 휴가 기간에 찾아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을 보니, 아예 상도덕이 없는 상사는 아니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인 것은 굳이 왜 직접 여기까지 왔냐는 것이다.

“아니에요. 어차피 오늘 약속도 없어서….”

이준과 대화를 나누던 중 선미의 눈에 저 멀리서 엄마로 보이는 인물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가게에 있을 시간인데 엄마가 집에는 갑자기 왜?!’

“대표님. 일단 차에 타요…!”

혹시나 엄마한테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킬까 봐 선미가 서둘러 조수석에 탑승했다. 그동안 연애 좀 하라고 노래를 부르던 엄마였기에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피곤해질 게 뻔했다.

“바로 직진… 직진…!”

다행히도 엄마가 보기 전 선미를 태운 이준의 차가 집 앞에서 멀어졌다.

“휴우….”

선미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준이 물었다.

“어머니이신가?”

“네. 저희 엄마 제가 남자랑 같이 있는 거 보면 난리가 날 거예요.”

“재밌네.”

다른 구역에 차를 주차한 이준이 잠시 선글라스를 벗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직접 부산까지 운전해서 왔다면 장시간 운전이라 피곤할 만했다.

“그렇게 피곤하신데 뭣 하러 선물세트까지 직접 주러 오셨어요….”

분명히 걱정되는 마음이었는데 약혼 기사가 떠오르자 선미의 입에서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았다.

“뭣 하러? 나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온 줄 알아?”

피곤한 탓인지 이준 또한 말에 삐딱선을 탔다. 공격적인 그의 말투에 선미의 고삐가 풀려버렸다.

“그럼 때마침 저도 없는 집에서 약혼녀랑 푹 쉬시면 되지, 멀리까지 시간 내서 부산은 왜 오셨어요?!”

눈을 부라리며 새침하게 말하는 선미를 향해 이준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내가 분명 보이는 것만 믿지 말라고 했을 텐데. 또 보이는 것만 믿었군.”

일침을 가하는 듯한 이준의 말에 선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속보 뉴스 알람이 온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시 기사 나갔을 텐데.”

서둘러 뉴스를 확인한 선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준과 기수진의 약혼은 잘못된 정보에 의한 해프닝이었다는 정정 기사였다. 그제서야 보이는 것만 믿지 말라고 한 이준의 말뜻이 이해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괜히 혼자 오해하고 성질을. 오해하고 성질부릴 자격도 안 되면서. 서이준 대표랑 나는 상사와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한우 선물세트를 품에 꽉 안은 선미가 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이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물세트 안 뺏어가. 이제 그만 들어가 봐.”

“대표님은 이제 뭐 하시려고요?”

“하고 싶은 거야 많지.”

“그럼 제가 그래도 부산 좀 아니까 가이드라도 해드릴까요?”

“휴가 기간인데 괜찮겠어?”

“네. 오늘은 약속도 없고 괜찮아요. 비싼 한우 선물세트를 그냥 맨입으로 받을 순 없죠.”

“지금 하고 싶은 거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뭔데요?”

“듣고 나서 거절해도 상관없어. 휴가 기간은 예외니까.”

“말씀해보세요. 웬만한 건 다 들어드릴 테니.”

선미의 당당함에 이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농염한 시선이 선미에게로 깊게 고정되었다. 뚫어질 듯 점점 조여오는 시선을 참지 못한 선미가 그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곧, 옆 좌석에서 들려오는 이준의 말 한 마디가 귀를 간드러지게 만들었다.

“너와의 하룻밤. 그것도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