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眉친 갈망
“왜, 작가님은 왜 안 드세요? 단 거 싫어하세요?”
“…응, 싫어.”
“맛있는데.”
참 맛있어서 너는 좋겠다. 남은 속이 확 뒤집히겠구먼. 드러내 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뭐로 확인해 볼 수도 없는, 마치 고구마 한 포대 삶아 먹은 것 같은 이 답답함을 풀 길이 없었다.
어느새 접시에 담겨있던 망고와 호두 파이는 깨끗이 다 비어 있었다. 여신은 그제야 포만감을 인식했는지 만족스러운 눈매로 한수를 응시했다. 아까는 배고픈 강아지였다면 지금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보였다. 헉, 속눈썹이 저렇게 길었었나? 피곤함과 포만감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감았다 하는 그녀의 눈매가 느린 동작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으, 배부르니 이제 졸리네요.”
“…….”
“작가님, 오늘은 이만 일찍 잠자리에 들면 안 될까요?”
“…….”
“작가님? 작가님!”
“으응? 그, 그래. 그러지 뭐.”
여신이 자신을 크게 반복해서 부르는 소리에 한수는 잠시 딴 생각하다 불려 나온 듯했다. 딴생각은 딴 게 아녔다. 여신의 속눈썹을 보면서 더듬어 보고 싶다는 갈망을 하고 있었다. 저 속눈썹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더듬으면 어떤 촉감을 줄까. 손가락이 지나갈 때 그녀는 눈을 감을까. 감았다 다시 뜨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색깔로 변할까… 이런 미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친, 말 그대로 미친 게 분명했다.
‘지한수, 너 정말 어쩌냐.’
“설거지를 해 드리고 싶은데 오늘은 손이 이래서… 죄송해요.”
여신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죄 많은 어린양이 되어야 했다. 그녀의 다친 손가락은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핑거 스프린트까지 해두어서 손 전체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니까.
“관둬. 내가 아픈 사람 일 시킬 인간으로 보여?”
“안 아프면 당연히 시킬 분으로는 보여요.”
“방여신, 말장난 그만하고 일찍 쉬어. 이미 많이 늦었지만.”
벽시계는 벌써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늦어도 한참 늦어버린 저녁 식사였다.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으로 내려앉아 작은 불빛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또 죄송했고요.”
본의 아니게 민폐녀가 되고 말았다. 늘 장착하고 있던 긍정의 웃음 코드도 오늘만큼은 제 기능이 발휘되지 않았다. 여신은 감사와 사과의 인사말을 하면서도 너무 염치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원한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정말 제 몫의 역할은 충실히 이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잘 자.”
“그럼, 작가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식탁 위의 접시를 치우는 한수를 향해 여신은 인사를 했다. 그녀의 인사말에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다른 말은 없었다. 마치 얼른 자리를 비워달라는 무언의 뜻을 전하는 듯했다. 그녀는 주방 입구에서 쭈뼛거리다가 자기 방을 향해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후…….”
여신이 주방 밖으로 사라지자, 한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좀 전에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다시 그녀의 눈과 마주친다면 조금 전에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던 불순한 갈망들이 불쑥 행동으로 옮겨질 것만 같았다. 미친 생각들의 끝에 미친 행동들까지 이어진다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 건지.
빈 그릇들을 개수대로 옮기고 대충 음식물을 털어낸 한수는 식기세척기 안에 넣고 작동시켰다. 평소 같으면 몇 개 되지 않는 그릇들은 직접 설거지를 하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하루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기에. 얼른 뒷정리를 마치고 자신도 방으로 가 쉬고 싶었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제맛이 아닌 듯했다.
지이이잉.
식기세척기 혼자 돌아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한수는 2층에 있는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피곤한 하루의 끝은 달콤한 수면만이 달래주리라 믿으면서. 복잡해진 자기 생각들은 다만 무한의 꿈속에서 잘 정리되기를 바라면서.
그가 잠자리에 들자, 집 밖의 산에서는 고요한 짐승들의 울음들이 가끔 들렸고 또 한 사람의 잠 못 드는 무거운 한숨 소리도 가끔 흘러나왔다. 그 한숨이 나오는 곳으로 산 위에 뜬 달빛이 숨어들고 있었다.
“후…….”
침대에 누운 여신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아니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일들에 대해서 곰곰이 되짚어 보는 중이었다. 서울서 한수와 이곳 속초로 옮겨 오고, 그와 함께 글 작업을 해냈고,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손가락 베이는 사고가 있었으며, 다친 그녀를 데리고 그는 병원에 가주었다. 또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주 맛있는 카르보나라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자신이 겪은 일들이 중요한 게 아녔다. 그 모든 일을 겪는 중에 느낀 자신의 낯설고도 반복되는 감정과 의문들이 문제였다. 지한수에 대해 자꾸만 생겨나는 이성에 대한 갈망들과 왜 이런 갈망들이 반복되는지에 대한 의문들 때문에 여신은 지금 잠 못 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감정들이 잘못된 건지… 아님, 지극히 당연한 것에 대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자꾸만 떠오르는 한수의 여러 모습 때문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그에 대한 영상들이 광고 화면처럼 순식간에 바뀌면서 새로운 장면들을 연출해 주고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상처가 자리 잡은 손가락은 밤 기온을 덧입어 시큰거려 왔다. 왜 이렇게 쓰라린지 생각하던 끝에 병원에서 처방해준 항생제와 소염제를 먹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저녁 먹고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여신은 누워있다가 한참을 뒤척인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방 안에 있는 약봉지를 들고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층 거실에는 아주 약한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온 집이 조용했다. 행여라도 2층에 있는 한수의 침실까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봐 그녀는 발끝을 들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걸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불을 켤까 하다가 창문으로 투영해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하기로 했다. 머그잔을 꺼내 싱크대 위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있을 때였다.
스팟!
“뭐해?”
“어맛!”
쨍그랑!
갑자기 켜지는 불빛과 함께 들리는 한수의 음성에 여신은 놀라서 그만 물컵을 놓치고 말았다. 사기로 된 머그잔은 주방 바닥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깨진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여기 와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사고의 연속이었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 지르며 망연자실한 채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그대로 가만있어.”
“제가 할게요.”
“가만있으랬잖아.”
다급하게 소리치며 한수가 뛰어 왔다. 먼저 여신의 발 주위를 꼼꼼히 살핀 뒤, 청소도구를 꺼내 와서 조심스럽게 컵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먼저,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큰 조각들을 쓸어 담은 뒤, 진공청소기를 꺼내 와서 작은 조각들을 빨아 당겼다. 마지막으로 물티슈로 아주 미세한 조각들까지 깨끗이 닦아내는 것이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섬세하담!’
여신은 지금 사고를 친 상황에서 해서는 안 될 게 엉뚱하면서도 발칙한 상상까지 해보았다. 청소하면서 미세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한수의 손과 손가락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남자의 손가락이 전문 손 모델보다 더 예뻐 보일 수 있는 걸까.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네, 네. 또 죄송해요.”
“물 마시러 내려온 거야?”
“약을 안 먹었어요.”
한수는 별말 없이 새로운 머그잔에 다시 물을 담아서 여신에게 전해줬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는 물컵을 전해 받아서 약을 먹었다.
“작가님은 왜 나오셨어요?”
“…물 마시러.”
“아… 그럼.”
물컵을 다시 싱크대에 올려놓은 뒤 여신은 주방을 벗어나 밖으로 나갈 참이었다. 둘 다 잠옷을 입고 있는 모양새가 꼭 한 집에 사는 부부처럼 여겨지는 건 기분 탓일까. 잠옷을 입고 있는 한수를 보자 괜히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서로에게 좋을 듯싶었다.
“방여신.”
언제부턴가 한수가 불러주는 자신의 이름이 여신은 참 듣기 좋아지고 있었다.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스며드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누군가 들을까 싶어서 주위를 한 번쯤은 둘러보곤 했었는데. 그가 부를 때면 세상 모든 이름을 제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기분 좋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제대로 미쳐가고 있는 거지.
“네?”
“…….”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수의 눈길이 여신의 눈동자를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고도 잠시 아무 말 없는 그를 응시했다. 저녁에 그의 마음을 번민으로 물들이던 그녀의 긴 속눈썹은 여전히 그를 향해 떨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세한 떨림은 그의 마음에 또 한 번 돌멩이를 던져 파문이 일게 했다. 좀체 진정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파문은 결국 그를 굴복시켰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동시에 한수의 눈빛이 매우 위험하게 번뜩였다. 여신이 그를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선이었다. 둘 사이를 메우고 있던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했다. 당황스러운 그의 말에 그녀는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뭘…, 읍!”
여신이 물어볼 새도 없이 한수의 손이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아당기며 그의 넓은 품 안으로 이끌었다. 거의 동시에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면서 입술이 와락 빨려 들어갔다.
‘어쩜… 이렇게… 달콤할 수가!’
저녁에 먹은 치즈 풍미 가득한 카르보나라가 떠올랐다. 노란 달걀 물을 잔뜩 머금은 파스타의 긴 면발이 지금 여신의 입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거다.
‘미쳤어… 지금 이 남자,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데 너무 좋다. 어디선가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들려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수가 이 기습적인 키스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마치 그녀도 오래전부터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여신… 방여신…….”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수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에 여신은 아쉬움만 가득했다. 조금만 더 머물지…. 싶은 바람에 감긴 두 눈이 쉽게 뜨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있을 순 없으니,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내가 생각한 대로야.”
“뭐, 뭐가요?”
“역시… 아냐.”
아니라니, 아니라니!
여신은 똑똑히 보았다. 한수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좀 전의 맹수 같은 짙은 동공은 다시 평소의 잔잔한 바다 물결 같은 색깔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 이성을 찾은 거지. 오늘 자신 때문에 놀라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어서 잠시 제정신이 아녔던 게 분명했다.
근데,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 이건 뭐지?
허락도 없이, 아무리 만만하게 여겼어도 그렇지 이건 아니지. 여자의 입술을 마음대로 훔쳐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아니라니. 뭐가, 뭐가 아닌데!
“역시, 연민은 아니란 말이지.”
“네? 연민… 그게 무슨 말…….”
“늦었네. 그만 들어가서 자.”
“작가님!”
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나가버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혼자 남겨진 여신은 잠시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차,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남자의 기습적인 키스엔 역시 따귀를 날렸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던 거다. 너무 당황해서? 아니, 너무 좋아서 그만, 황홀해서, 그의 키스에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정신을 못 차려서 그만.
이제껏 다른 남자들과는 이런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와는 그저 입술의 바깥 표면만 닿는 입술박치기 정도가 다였었다. 그게 키스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니. 그건 방금 한수가 자신한테 안겨준 농염한 키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녔다.
키스 장인! 지한수 이 남자, 정말이지 못하는 게 뭐냐!
여신은 뭔가에 홀린 듯 휘청휘청 걸어서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멍하니 얼빠진 사람처럼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도 했다.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자기 침실로 찾아 들었다. 문이 닫히기 전 좀 전의 한수가 머물렀던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여전히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듯했다.
‘이 남자, 너무 기습적이야!’
**
간밤에 잠을 설쳤다. 한수는 뿌연 새벽빛이 밝아오는 창문을 응시하면서 지난밤에 자신이 저지른 기습행동에 대해 반성을 했다. 아니, 반성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반성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은 잘못 한 게 없다.
‘여신이 화를 내진 않겠지?’
좀 뻔뻔했던가. 갑자기 확인한다면서 기습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덤벼들다시피 했으니. 그 순간 자신은 당연히 그녀의 손찌검을 당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아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분명 좀 더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키스에 대한 갈망이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도!
‘방여신, 너도 네 감정을 드러내 봐.’
한수는 뭔가 결심한 듯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잠옷을 벗어 던지고 나른한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여신과 함께 보낼 시간이 사뭇 기대되었다. 그런 기대감에 그의 입매가 기분 좋게 그려 올려졌다. 혼자 지낼 때와는 달라지는 자신의 감정변화들이 신기하면서도 소년처럼 설레어갔다.
**
“어머, 벌써 일어나셨어요?”
늦잠을 잔 것 같아서 여신은 서둘러 1층으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주방으로 먼저 들어가 보았다. 역시, 한수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그의 신세를 너무 많이 진 듯해서 오늘은 어떻게든 자신이 할 일은 잘해내고 싶었다. 간밤의 일은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깼어?”
“제가 할게요, 작가님.”
“놔둬. 그 손으로 아직은 무리야.”
“…죄송해요. 아무런 도움도 못 돼서.”
식탁엔 벌써 맛난 반찬들이 몇 가지 차려져 있었다. 이 남자가 글쎄 못 하는 요리가 없다니까. 여신은 식탁 위를 둘러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들이 놓여있는 걸 확인했다. 벌써 입안에는 군침이 돌았다.
“반찬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이것들 전부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에요. 어쩜, 제 입맛을 이렇게 잘 알고 계신 거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아… 네.”
그럼, 그렇지. 뭐, 어쨌든 자신의 입에도 잘 맞으니 투정 부릴 건 아녔다. 여신은 남이 차려준 음식을 받아먹는 게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 평생 내 옆에서 내 밥을 차려주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보면서.
평생… 내 옆에서…!
뭐, 상상은 자유 아니겠어? 상상에는 커트라인이 없잖아. 한수와 지내는 시간이 여신의 상상 이상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상상의 끝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거니까. 비록 그 끝이 헛된 꿈으로 끝나더라도 지금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거잖아.
“작가님, 오늘도 글 작업하실 거죠?”
“아니. 오늘은 쉴 거야.”
“…저 때문에, 제가 도와드리지 못할까 봐서요?”
“그 손가락 다친 거랑 내 글 쓰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럼…….”
“바람 쐬러 나가자.”
“네?”
“다 먹었지?”
한수는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식탁 위를 치우고 정리하면서 서둘러 설거지까지 한 뒤 주방 뒷정리까지 마무리했다. 여신이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
‘무슨 남자가 빈틈이 없어.’
너무 완벽해 보이는 남자, 지한수를 가지고 싶다는 꿈을 꾼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갖고 싶은 갈망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단지 꿈에 불과 하다는 현실의 직시가 함께 섞여 울렁대고 있었다.
“뭐해? 가서 외출 준비해.”
“갑자기. 어디로 가실건데요?”
“좋은데. 가보면 알아.”
여신이 아는 지한수는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다. 굉장히 신중하고 빈틈없고 철두철미한 작가라면서 업계에선 벌써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작업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정에도 없던 외출을 하겠단다. 아침부터 무슨 댓바람이 불어서 그가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걸까.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바람 좀 쐬러.”
대충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여신은 집을 나와 한수의 승용차에 올라타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날씨는 너무 좋았다. 가을 초입으로 들어가는 늦여름의 하늘은 어제보다 더 푸른 기운이 만연했다. 살랑 불면서 지나가는 바람들이 조금 열어둔 창문 안으로 슬그머니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사실 집 안에서, 어두컴컴한 서재에서 종일 노트북만 쳐다보는 것보단 백배, 천 배 낫다. 이런 깜찍한 선물을 안겨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여신은 괜히 기분이 좋아서 한수를 보며 농담을 던졌다.
“바람은 집 창문 열어도 실컷 쐴 수 있을 텐데요.”
“왜? 나랑 외출하는 게 싫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작가님 하실 일이…….”
“방여신 머릿속엔 내가 글 쓰는 일만 들어 있는 거야?”
“그건, 작가님이 여기 절 데려온 목적이잖아요.”
더는 말이 없었다. 한수는 뭔가 말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그저 앞만 보면서 운전에 집중했다. 조수석에 앉은 여신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몰래 쳐다봤다. 아침 햇살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눈과 코와 입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꾹 다문 그의 입매에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순간,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더 정확하게는 그가 그녀에게 행한 기습적인 키스! 잊힐 수가 없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