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층으로 된 단독주택 앞에 하얀색 SUV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 곧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차에서 내려섰다. 큰 키와 제법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곧게 뻗은 두 다리는 성큼성큼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와?”

대문에 설치된 전자키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그 순간,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환한 미소로 남자를 반겼다. 목이 깊게 파인 박시한 스타일의 흰 티셔츠에 블랙 스키니진을 입은 여자는 제법 예쁘장한 외모와 170센티 정도의 큰 키를 지닌 늘씬한 체구였다.

“어.”

여자는 무척이나 남자를 반기는 표정으로 다정스레 말을 건넸건만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자신을 무시하지 않은 것에 대단히 만족해하는 표정이랄까.

“밥은 먹었어?”

“시간이 몇 신데.”

여자의 다정다감한 말투와는 아주 상반되는 말투였지만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꼬박꼬박하는 걸로 봐서는 아주 막돼먹은 사람은 아니었다. 남자는 더 이상 마주 보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여자를 지나쳐 집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그녀도 얼른 남자의 뒤를 쫓았다.

“간단하게 맥주 한잔 어때?”

“생각 없어.”

남자는 단칼에 거절을 표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싫어.”

이에 굴하지 않는 여자. 그녀는 제법 끈기 있게 재차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또다시 거절했다.

“그때 그 일로 아직도 화났어?”

조금 전 남자와 달리 내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던 여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자보다 큰 보폭으로 앞장서서 걷던 남자의 걸음이 그제야 멈춰 섰다. 느닷없이 멈춰선 남자 때문에 여자 또한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저기, 준성아.”

“알면 아무 말 하지 마.”

“…….”

여자의 물음에 내내 건성으로 답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쌀쌀맞진 않았다. 아니, 그에게선 시베리아 벌판의 그것만큼이나 엄청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그렇게 죽을죄 진 거냐고 묻잖아.”

“그걸 몰라서 물어!”

준성이 그만하라고 했을 때 그만했으면 좋았을 것을, 여자는 전혀 그만할 생각이 없는지 그의 화를 돋웠다. 결국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이에 여자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섰다. 제법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아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었기에 이런 것에 면역이 생겼거나.

“나도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 있는 여자라고 생각해.”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여자는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불쑥 꺼내며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하아! ……누가 아니래?”

“그럼 대체 난 왜 안 되는 건데?”

“난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그만할 건데? 내가 지긋지긋하다고 하잖아. 내 말을 매번 껌처럼 씹어버리는 것도 이제 지친다, 지쳐.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난 너한테 더 정떨어지는 거 몰라서 이래?”

“매번 이렇게 말하면 내가 상처받아서 그만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지? ……나 알잖아. 고작 그딴 말로 절대 상처받지 않아.”

“……하아. 최수경, 너란 여자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준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를 놓칠세라 ‘최수경’이라 불린 여자가 그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이에 당황한 준성이 소리쳤지만 수경은 전혀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그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재간은 없는지 수경은 금세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네가 이럴 때마다, 우리 15년 우정도 흔들린다는 거 몰라서 이래? 제발, 제발 그만 좀 해. 너 때문에 ……나도 다신 여자 같은 거 안 만날 테니, 너도 이제 그딴 미친 짓 좀 그만해.”

“……그럼 이제 나 좀 봐주면 안 되겠어?”

몹시도 답답하다는 듯 표정을 엉망으로 구긴 준성이 세찬 도리질을 치며 집 안으로 먼저 모습을 감추었다. 닫혀버린 1층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경은 고개를 숙인 채 이미 방울져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며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준성. 네가 이런다고 내가 널 포기할 것 같아?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널 좋아하지도 않았어. 난 너 절대 포기 못 해.’

#1. 독하디 독한 그녀, 최수경

수경은 절친한 친구 재인과 초저녁부터 만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하이고, 최수경. 너도 너다, 진짜.”

벌써 몇 년째 같은 말을 듣고, 말하고 있는지 모를 두 사람이었다. 수경은 차이고 또 차이고, 골백번은 더 차인 것 같은데, 붕어 대가리도 아니건만 모질고도 모진 ‘차준성’이란 놈에게 매번 목을 매고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포기가 안 되는 거냐고 물을 때마다 수경은 매번 똑같은 말로 재인의 속을 태웠다. 당사자인 수경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열네 살, 처음 만난 그때부터 내 심장은 차준성에게 각인되어버렸어.”

“지랄 똥을 싸세요, 아주 그냥.”

매번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말에 재인은 욕도 아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너도 독하지만 차준성 그놈은 더 독해. 그놈 죽어서 땅에 묻히면 독하고 독해서 풀 한 포기도 안 날 거야, 아마. 넌 뭐가 좋아서 실실 쪼개고 난리야? 내가 볼 땐 네가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아. 이 독한 계집애야.”

재인이 악담을 퍼붓든 말든 수경은 술에 취해 배시시 웃었다. 침만 흘리지 않았을 뿐이지, 딱 빙구 같은 미소였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쌍꺼풀진 커다란 눈, 작고 오뚝한 콧날, 도톰하고 자그마한 입술, 그것들이 조화를 잘 이뤄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그녀였다. 키도 크고, 조금 마른 체형이긴 했지만 그에 반해 나올 덴 나오고 들어갈 덴 들어간 것 같은데, 왜 이런 여자를 그가 마다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장장 9년씩이나.

“야, 최수경. 정신 좀 차려 봐.”

많은 양의 술을 들입다 부을 때 말리지 않은 건 재인이었다. 말리기보단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맞장구를 쳐주느라 자신도 제법 많이 마셨다. 이럴 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최수경의 동거인이자 15년 지기 친구인 차준성. 준성과 수경은 한 집에, 정확히 말하자면 2층으로 이루어진 단독주택에 준성은 1층, 수경은 2층에, 이렇게 살고 있었다.

얼마 후, 낡고 오래된 껍데기 집 내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키가 큰 미남자가 마치 똥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딱 봐도 누군가에 의해 마지못해 나온 모습이었다.

“어! 여기, 여기.”

재인이 미남자를 향해 한 손을 위로 쭉 뻗어 목청껏 아는 체를 하며 불렀다. 그것을 본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의 시선은 재인이 아닌 둥그런 은색 테이블에 코를 박고 세상모르게 퍼질러 자고 있는 수경에게로 향해있었다. 큰 보폭으로 재빨리 걸어와 수경의 옆 빈 의자를 끌어다가 그녀 가까이 앉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테이블 위엔 이미 소주병들이 다 치워진 후였기에 그녀들이 얼마나 마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정신 줄마저 놓은 채 퍼 자고 있는 수경의 모습으로 보건대, 엄청나게 퍼부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술이랑 웬수 졌냐?”

“난 아니고, 쟤. 쟤가 웬수 졌을 거야, 아마.”

“내가 얘랑 같이 놀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고 싶은데, 우리 둘이 성격이 지랄 맞아서 친구가 없어서 그래.”

두 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평범했고, 은근슬쩍 장난기도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꽤 친분이 두터워 보였다. 이 또한 최수경이 중간에 껴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일어나, 최수경,”

절대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게 아니었다. 귀찮은 투로 가운뎃손가락을 튕겨 수경의 한쪽 볼을 사정없이 때렸다. 수경은 아픈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마 오늘 중엔 눈 뜨기 힘들걸?”

“오늘은 또 뭔데?”

“몰라서 물어?”

“얘는 지치지도 않는데?”

“네가 지친다며? 지친 김에, 불쌍한 인생 구제해주는 셈 치고, 저 곰탱이 마음 좀 받아주는 건 어때?”

“잠시 잊었다. 네가 내 친구가 아니라 얘 친구라는 거. 넌 집에 갈 정신은 있지?”

“난 내가 알아서 잘 가니깐 수경이나 어서 데리고 사라져.”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난 최독종 데리고 이만 사라진다.”

준성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수경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친 후 껍데기 집을 빠져나왔다.

***

침대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여자, 그 곁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 수경은 이미 만취 상태라 집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침대에 사뿐히 내려놓은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누워있는 수경의 모양새는 형편없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준성은 긴 한숨을 내쉬며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일주일 전 그녀가 또다시 저질렀던 만행들이 떠오르자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15년 지기 친구만 아니면 확 그냥……!

일주일 전. 준성은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와 두 번째 만남을 위해 약속 장소를 향해 가던 중, 그녀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여자의 일방적인 전화였다. 아니, 대체 왜 그러냐며 묻기도 전에 이미 여자는 전화를 끊은 후였다. 너무나 일방적인 통화였다. 소개팅 당시 여자는 준성이 마음에 드는지 헤어지기 직전까지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두 번째 약속을 잡을 당시만 해도 그녀는 매우 기뻐했었는데, 어째서 이러는 거지?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금세 떠올랐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처음은 아니었기에…….

준성은 소개팅녀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후, 수경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야.

“너 지금 어디야?”

-나? 집이지. 왜?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있지.

“그럼 지금 해.”

-그 여자한테서 전화 왔어?

“…….”

-말귀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네.

“이번엔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너?”

-뭐, 별거 없는데…….

“최수경!”

-미안. 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떡하겠어. 시작하기 전에 끝냈으니깐 너무 그러지 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너무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진짜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끊어!”

준성은 불같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지만 수경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또 한 건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 얼쩡거리는 여자는 나 하나로 족해.’

준성은 술에 취해 잠들어있는 수경의 얼굴을 사정없이 노려보았다. 그것을 무의식 상태에서 느끼기라도 한 듯 수경의 몸이 점점 움츠러들었다. 한기라도 느꼈는지 밑에 깔려 있는 이불을 막 더듬어 애벌레마냥 몸에 똘똘 말기 시작했다. 이제 따뜻한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널 죽여, 살려?”

준성은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지,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미련 없이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보며 설레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터. 물론 그녀를 보며 가슴이 사정없이 두근거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친한 친구일 뿐,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예쁜 얼굴에 날씬한 체형을 지녔기에 주변 남자들에게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일방통행. ‘차준성’이란 남자에게 제대로 필이 꽂혀 9년간 한 우물만 들입다 파기 시작했고, 준성은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그녀의 고백은 스무 살 꽃다운 나이부터 시작해 그들의 나이가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잊을만하면 고백을 해오는 그녀. 아니, 누군가를 만날라치면 고백을 해오는 그녀였다. 지치지도 않는지, 거절당해도 오뚝이마냥 일어서는 그녀 탓에 오히려 준성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일주일 전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는 자신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외모, 성격, 다 나쁘진 않았다. 몇 번 더 만나다 보면 외모가 아닌 내적인 모습도 보게 될 테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니 몇 번 더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간에서 수경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단번에 그를 떠나고 말았다. 그의 인생에 마지막 여자라는 생각으로 나간 소개팅이었건만, 그마저도 수경에 의해 무산되고 만 것이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고 나니 다시는 여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지는 듯했다. 어제 수경에게도 이미 그렇게 말을 한 상태였다. 아무리 예쁘고 잘났다고 한들,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일방적으로 계속해서 들이대면 남자들은 도망가는 심리가 작용하는가. 아니면 준성에게만 해당 되는 것인가.

준성의 친구는 말한다. 아니, 대체 왜 수경일 마다하냐고. 남녀 사이는 그 당사자들만 아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

“윽!”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수경이 억지로 눈을 떴다. 천장을 휘 둘러보고,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나니 안심이 되는지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어제 일이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껍데기를 질겅질겅 씹다가 목이 말라 소주를 한잔 마신 기억까진 나는데, 대체 어떻게 집에 온 거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휴대폰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게 없어 하는 수없이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흐느적거리며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힘겹게 걸었다. 벽을 붙잡고서 겨우 1층에 도달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엌에서 나는 시원한 콩나물국 냄새를 쫓아 발을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려 괴로움에 찬 신음을 뱉어냈다.

“내가 분명 1층 현관문 이용하라고 했을 텐데?”

그녀의 인기척을 느낀 준성이 부엌에서 불쑥 나와 수경을 쏘아보며 쓴소리를 했다. 두 사람이 거주하는 단독주택의 구조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에도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걸핏하면 내부계단을 이용하는 수경이 못마땅한 준성이 외부계단을 이용할 것을 신신당부했건만 그녀는 오늘도 이를 무시한 채 내부계단을 이용해 1층으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행색이 말이 아닌 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화난 마음이 약간은 누그러지는 준성이다.

“나 죽기 1분 전이야.”

“그럼 그냥 죽든지.”

준성은 험한 말을 한 뒤 홱 돌아서더니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경은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개의치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이러니 내가 널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야.”

“아침부터 또 무슨 개소리야?”

“술 마셨다고 해장국까지 손수 끓여주는데, 어느 여자가 이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개수대에 확 다 부어버리기 전에 입 닫고 먹기나 해.”

“뉘에, 뉘에. 잘 먹겠습니다.”

수경은 그가 한다면 하는 성격임을 알기에 혹여나 그가 손수 끓여준 귀한 해장국을 못 먹게 될까 봐 그 두려움에 얼른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이 몹시도 귀여웠지만 준성은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라도 넌 아니야.”

“……그런 말은 밥이라도 다 먹인 뒤에 하는 게 어때?”

“억울해서 그런다, 왜?”

“그게 그렇게 억울해?”

“내가 성격이 좋아 참는 거지, 딴 남자 같았으면 너 이미 이 세상 사람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건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래도 두 번인가 연애해봤잖아, 너.”

“…….”

“결국 그 두 번 다 헤어졌고. 어차피 헤어질 거 왜 시간 낭비, 돈 낭비를 하는지 난 모르겠어서 말이야.”

“그럼 지금은 왜 방해하는 건데?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서 왜 이딴 또라이 짓을 해가면서까지 훼방을 놓는 건데? 대체 그 이유가 뭔지나 좀 알고 당하자, 나도.”

“…….”

수경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숟가락을 식탁 위에 사뿐히 내려놓더니 국 사발을 들고 반 정도 남은 국물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시원하다. 덕분에 해장 잘했어. 너도 어서 출근해야지?”

“결국 또 말 않는다 이거지?”

“한동안 소개팅은 안 하는 거지?”

“…….”

“그럼 저녁때 봐.”

수경은 오늘도 준성에게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준성은 그런 그녀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재차 물어본다고 한들 그녀는 말해주지 않을 게 뻔하니깐. 한번 말하기 싫은 건 죽어도 말하지 않는 그녀였다. 준성은 오늘도 긴 한숨을 시작으로 하루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