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저쪽 대한당 최 의원은 요즘 어떤 거 같아?”

차 뒷자리에 타고 있던 인수가 피곤한지 좌석 깊숙이 몸을 묻으며 눈을 감고는 앞에 앉은 소희를 향해 물어왔다.

“아무래도 선거를 앞두고 분주해 보이긴 합니다만, 자신이 당 대표가 될 거란 소문이 무성해서인지 별다르게 눈에 띄는 행보는 하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오히려 얼마 전에 염 비서관을 사직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편에 서 있던 의원들에게 반감을 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희는 인수의 물음에 최대한 자세히 답을 마치고는 사이드미러로 뒷자리에 앉아있는 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인수는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수가 고른 숨을 내쉬는 것을 다시 한번 사이드미러로 확인한 소희는 조용히 CD 플레이어 버튼을 누른다. 늘 같은 음률의 클래식이 차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차 창밖으로 지나치는 익숙한 풍경에 눈길을 묻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수의 제안에 그의 비서 겸 보좌관으로 일한 지 이제 꼬박 7년 차에 접어들었다. 졸업 가운을 벗기도 전부터 그녀는 인수의 사무실로 출근을 했고, 곧장 그의 국회의원 선거 캠프에서 일을 시작했다. 재선, 삼선을 거쳐 이제 인수도 나름 세력을 키웠고, 당내에서도 입김이 꽤 강하다 보니 당 대표까지 넘보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런 인수 곁에서 소희는 묵묵히 그녀에게 주어진 일들을 200% 이상 해내는 인물로 유명했고, ‘유소희’라는 이름 석 자가 인수를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오늘따라 이런저런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머릿속의 실타래를 우두커니 쫓다 보니 어느새 차가 인수의 집 앞에 도착해 멈춘다.

“의원님.”

곤히 잠든 인수를 조수석에서 돌아보며 소희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으, 으흠….”

힘들게 잠에서 깨어나며 인수가 목을 가다듬었다.

“다 왔나?”

졸음이 쌓인 눈을 어렵게 뜬 인수를 보며 소희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희, 너도 내려라. 안사람이 오늘 저녁 같이하자고 하더라.”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소희는 놀라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보다 먼저 앞서 걷던 그녀가 대문 초인종을 조심히 눌렀다.

‘띵동!’

‘철커덕!’

곧장 무거운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인수가 먼저 안으로 사라졌다. 소희는 그런 그의 뒤를 따르며 차 밖에서 그녀와 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던 운전기사 지태에게 눈길로 인사를 마치고는 대문 안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인수와 소희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태는 그때까지 힘들게 참았던 한숨을 저도 모르게 한꺼번에 몰아쉰다.

“휴우!”

지태는 손을 올려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 단추 두 개를 차례로 풀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몇 달을 이 짓을 해왔는데도 어떻게 된 게 매일같이 긴장의 연속이냐. 그나저나 어떻게 저 여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차인수를 몇 년 동안이나 저렇게 뒷바라지를 하고 사는지, 원. 으, 추운 거….”

중얼거리며 차를 단속한 지태가 아직 늦겨울 바람이 매서운지 코트 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인수의 집 옆으로 난 작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다녀오셨어요? 어서 와라, 소희야.”

현관에서 인수를 맞던 명진이 함께 들어서고 있던 소희를 반겼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여자라 나이가 육십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여전히 젊어 보이고 어여뻤다. 야리야리한 몸매만큼이나 목소리도 여성스럽고 나긋나긋했다. 항상 무게감 있게 짙은 색의 양복을 고집하는 인수와는 다르게 명진이 늘 갖춰 입고 있는 편안한 격식 없는 캐주얼 차림이 소희는 더 좋았다.

“안녕하셨어요?”

대문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땅으로 꺼질 듯이 무거웠던 그녀의 표정이 명진을 향해 살짝 풀린다. 그런 그녀의 인사에 명진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환히 웃으며 소희를 안으로 이끌었다.

“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격식 차릴 일 있니? 자주자주 들러서 반찬도 가져가고, 저녁도 먹고 가고 그러면 좋으련만… 이렇게 오라고 해야만 오는 건 무슨 심보야? 응?”

투정 부리듯 말을 마친 명진이 슬쩍 소희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웃어 보이자, 소희도 그런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늘 명진은 한결같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도, 그리고 이 집을 벗어날 때도, 명진은 늘 이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래서, 소희는 더 자주 올 수 없었다. 정이 들까 봐. 명진에게 조금이라도 기대고 싶어질까 봐. 정말 가족이 되고 싶을까 봐.

“애들은 왔나?”

인수가 명진을 향해 물었다.

“아, 석진이는 이미 와서 제 방에 있고요. 지혜는 지금 오는 중이라고 조금 전에 연락 왔어요.”

명진의 말에 소희의 심장이 느닷없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을 하는 중인 석진이 잠시 집에 다니러 온 모양이다. 얼마 전, 지나가는 말처럼 인수에게서 얼핏 그가 명성그룹 외동딸과 약혼을 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날 밤, 소희는 늦은 새벽까지 뒤척이느라 잠을 설쳤었다.

“소희야, 석진이가 왔어. 애가 얼굴이 반쪽이 되어서는… 쯧쯧.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낯선 나라에서 그러고 산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나저나 석진이가 유학을 떠난 후로 처음 한국에 온 거니까 꽤 오랜만이지? 얼른 올라가서 아버지 오셨다고 하고 데리고 내려오렴.”

명진의 말에도 소희는 차마 가볍게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명진은 그런 소희를 보다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까지 오게 된 소희는 차마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서 난간에만 살며시 손을 얹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 명진을 살피려는데, 자신을 사납게 쏘아보고 서 있는 인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 절대 흔들리는 모습을 의원님께 보여서는 안 돼!’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소희는 크게 심호흡을 뱉고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휴!”

너무나도 오랜만에 올라와 본 2층. 이 공간이 낯설다. 석진은 소희가 인수의 캠프로 처음 들어가던 때, 미국 유학을 떠났고, 꼬박 7년을 한국에 한 번 들리지 않았다. 한국대에서 법을 전공한 석진은 미국으로 유학 후, 시카고에서 정치학으로 석박사를 동시에 마쳤다고 했다. 지금은 시카고에 위치한 명문대에서 조교수로 미국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고 인수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늘 한결같이 하나뿐인 아들 자랑을 하곤 했다. 그런 그가 약혼을 하러 한국에 잠시 들른 것 같았다. 7년의 세월 동안 석진이 어떻게 변했을지 소희는 몹시도 궁금했지만, 이제부터는 예전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정혼자로 그를 편히 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서글펐다.

소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의 방문 앞에 섰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고 노크를 하던 곳. 그리고 그의 들어오라는 짧은 대답에 신나게 스스럼없이 들어서던 그 공간 앞에서 소희는 차마 노크를 위한 손도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하고 떨려 하고 있었다.

‘바보가 되지 말자. 무너지지 말자, 유소희. 비참해지지 말자!’

잠시 잠깐 또다시 스스로 주문을 건 소희가 천천히 손을 올려 노크를 했다.

‘똑똑!’

“네!”

소희의 손끝이 안에서 들려오는 석진의 대답에 살짝 떨렸다. 그녀의 심장이 이성의 지배를 무시하고서 익숙한 그 목소리에 울컥거렸다. 자신이 그토록 못내 그리워하던 사람. 그럴 때마다, 과거 함께했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그리움을 잊고 편히 잠들 수 있게 해주었던 사람. 차오르는 눈물을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애써 가둔 소희가 천천히 석진의 방문을 열었다.

“….”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던 중이었는지 책상 앞에 앉아있던 석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희를 보자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만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었다.

“왔어? 춥지?”

떨리고 두렵고 슬프기만 했던 그녀의 마음이 자신만을 향하는 한없는 그의 자상한 물음에 무장해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응.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님이 되시더니 많이 여유 있어졌네?”

평소 누구에게도 섣불리 하지 않던 농담이 그녀의 입을 통해 쉽게 흘러나왔다. 어린 아이에게도 실없는 소리는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한 유소희가 말이다.

그녀의 물음에 피식 웃던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곁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쿵, 쿵, 쿵, 쿵!’

소희의 심장이 그의 발걸음에 맞춰 북을 두드리듯 거세게 울리고 있었다.

석진이 오랜만에 보는 소희의 앞에 바짝 다가와 한동안 말없이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고 있던 소희는 긴장이 되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차가운 두 손이 미세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조금 늙은 거 같네, 유소희는?”

예전처럼 놀리는 말을 한 석진은 웃고 있었다. 그런 석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희는 속에 쌓아둔 말이 많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7년 동안 못 본 석진도 나이가 들었다. 서른두 살. 그녀보다 두 살 많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그의 나이 스물여섯, 그녀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은은히 풍겨오는 남자의 스킨 향.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에 사람 좋은 인상을 한 석진은 그녀의 오랜 첫사랑이자 지금까지도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묵직한 존재였다.

“손님이 오셨어요. 아버님이 내려오시랍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묘한 눈빛과 정적을 깨고 광주댁이 인수의 말을 전달했다.

손님. 소희는 순간 그 손님이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네. 갈게요.”

소희가 열려있던 석진의 방문 공간 사이로 광주댁을 빼꼼히 내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다시 석진을 향했다.

“아직 아버님은 못 뵌 거죠? 기다리시겠어요.”

방금까지 잠시나마 과거 속 편안했던 사이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던 소희가 속으로 또다시 빨간 경고등을 켰다. 눈빛과 표정을 이전처럼 차갑게 바꾼 소희가 석진을 향했던 몸을 돌려 먼저 그의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고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석진을 느끼며 소희는 여전히 온몸 구석구석이 떨렸다. 간신히 난간을 잡은 손에 떨리는 몸을 지탱하며 1층으로 내려온 소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지혜를 처음 만났다.

명성그룹 외동딸 서지혜. 소희는 인수에게서 석진과 지혜의 약혼 이야기를 전해 듣던 날, 인터넷으로 ‘명성그룹 서지혜’를 검색해 어느 정도 지혜에 대한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 소유주의 외동딸로도 유명했지만, 미국 최고의 로스쿨에 입학해 더할 나위 없이 화제가 되었다. 현재는 시카고에 위치한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는 시니어 변호사라고 했다. 솔직히 변호사란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지나치게 화사하고 화려했다. 지혜의 등장만으로 우중충하고 흐린 늦겨울의 날씨가 봄날처럼 화사해졌다. 소희가 바라본 지혜는 당당했고 여유 있어 보였다.

“유소희 씨 맞죠?”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버릇처럼 멈칫하는 소희에게 먼저 살갑게 지혜가 다가왔다.

“아, 안… 녕하세요?”

소희가 어색하게 지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빠에게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어요. 아버님께서도 방금까지 칭찬이 자자하시네요.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 반가워요.”

잘 정돈된 아름답고 긴 손을 내미는 지혜를 바라보며 소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오빠!”

소희의 뒤를 따라 내려오던 석진을 향해 더 환한 미소를 짓던 지혜가 소희와 악수하던 손을 먼저 놓고 석진을 향해 다가가서 스스럼없이 석진의 팔을 잡는다.

“왔어?”

불과 몇 분 전, 자신에게도 똑같은 어투로 물어보던 그의 다정한 물음이 지혜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소희는 속으로 잠시나마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 그 둘을 뒤에 남겨놓고 소희는 명진의 손짓에 따라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새 소희와 명진의 맞은편에 석진과 지혜가 다정하게 서 있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석진이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자지간이 아니라 사업차 만난 파트너쯤으로 그 둘을 착각할만한 거리감이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그래도 몇 년 만에 만난 아들이 인사를 하자, 인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지혜를 힐끔 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석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넌지시 그의 등을 두드리며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인수가 사람들에게는 석진을 대놓고 자랑했지만, 늘 자기 뜻과 반대로 엇나가는 아들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혜가 와있다. 그녀 앞에서는 세상 마음 좋고 너그러운 예비 시아버지가 되기로 인수는 결심했다.

“고생 많았지? 타국에서 내 나라 그리워하면서 철 좀 들더냐?”

누구보다 아들을 아끼는 것 같은 인수의 제스처를 지혜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짓고 바라보았지만, 소희에게 그런 인수는 다소 낯설었다. 인수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앉자 석진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착석했다.

“소희야, 어때? 잘 어울리지? 우리 석진이 배필이야. 시카고에 있을 때 만나보게 했는데, 다행히도 지혜가 저 까탈스러운 석진이 녀석 비위를 잘 맞춘 거 같구나. 이런 게 또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소희는 명진의 말을 듣고 나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랬다. 명진의 말대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절제미가 있는 지혜와 딱딱해 보이지만 속은 더없이 다정다감한 석진이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묘하게 밸런스가 맞아 보였다.

“석진이 녀석도 지혜가 좋고 마음에 있으니까 약혼까지 결심하게 된 거지. 사실 지혜 양만큼 완벽한 여자도 드물잖아?”

인수는 예비 며느리가 무척이나 흡족한 듯 그 둘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제 우리 소희만 좋은 남자 만나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완수하는 셈인가?”

인수의 자상한 미소가 예고 없이 소희를 향한다. 별말 없이 소희는 다시 그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남자 친구 없으면 제가 좀 나서 볼까요? 괜찮은 사람 주변에 많은데….”

지혜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그래, 그래라. 네가 소개한다고 하면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구나.”

괜찮다고 하려는 소희의 말을 자르며 인수가 지혜에게 부탁의 말을 남겼다. 소희는 거북했다.

“본인이 좋을 때 하는 거지,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석진이 소희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그래요. 자연스럽게 인연이 곧 나타날 거예요, 여보.”

아내인 명진까지 석진의 말을 거들자, 인수는 금세 얼굴이 굳는다. 하지만, 얼른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고 있는 지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자, 식사합시다!”

명진이 잠시나마 어색해져 버린 자리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모두가 그녀의 뒤를 따라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명진의 뒤를 인수가 따르고, 석진과 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발걸음을 하고 나서야 제일 뒤에서 소희가 석진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처음으로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석진에게서 뭔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일어날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었다. 하필 그날이 바로 오늘인 게, 준비되지 못한 지금의 상태로 갑작스럽게 그를 만나고, 그의 여자를 소개받은 게, 조금은 서운하고, 조금은 속상하고, 또 조금은 아쉬운 저녁이었다.

#1부

소희는 어색한 차 안의 뒷자리에 앉아 가로등이 빠르게 스쳐 지나는 도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하게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주장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운전석에는 석진이, 조수석에는 지혜가 앉아있었다. 지혜가 주도하는 별로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앉지도 못한 상태로 그저 짧은 동의어나 감탄사를 내뱉던 소희는 1초라도 더 빨리 집에 가 쉬고만 싶었다.

사실 소희는 지혜와 공통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정치를 논하기엔 인수가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어 서로가 거북스러웠고, 경제를 논하자니 지혜의 집안에 누가 될까 조심스러운 마음에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가십들은 소희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지혜가 앞에 앉아 시카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석진에게 묻고 난 후 그의 대답을 듣고, 뒤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소희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어, 오빠. 이 길은 우리 집에 가는 길 아니야? 소희 씨 아파트가 더 가깝던데….”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소희는 지혜의 말에 그제야 이 길이 자신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님을 깨닫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운전하는 석진을 바라봤다.

“소희는 이따가 돌아올 때 내려주지, 뭐. 소희 먼저 내려주고, 너 내려주면, 집에 돌아오는 내내 혼자 심심할 거 같아서 말이야.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돼서 졸리거든. 시간이 늦어서 너희 집 부모님께 인사는 다음에 시간 내서 낮에 찾아뵐게.”

석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희는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혜를 바래다주고 그와 단둘이 이 답답한 공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오빠, 그럼 나 여기서 내려주고, 지혜 씨네 가서 조금 쉬었다가 집에 가. 졸릴 때 운전하면 안 돼. 나는 여기서 택시 타면 기본요금이야.”

소희의 말에 석진이 사뭇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룸미러를 통해 말을 마친 그녀를 바라봤다. 석진은 눈으로 소희에게 말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밤에 너 혼자 택시 태워 보낸 걸 아시면 아마 어머니께 못해도 100일 동안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걸? 그러니까 네가 지혜 내려주고 나면 졸지 않게 말동무나 해 줘. 그럼 괜찮으니까.”

무슨 말인가를 더 해서 그를 설득하고 싶은데, 계속되는 그의 따가운 눈빛에 소희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그를 만류했다가는 더 어색한 분위기가 될 것만 같았다. 소희는 하고 싶었던 말을 아끼고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던 석진의 눈은 다시금 앞의 유리창을 향했다.

“오빠, 그럼 우리 집에 가서 기사 아저씨한테 부탁할까? 소희 씨도 좀 바래다주시고, 오빠도 데려다 달라고 말이야. 졸린다니까 걱정되잖아.”

소희가 바라보던 차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을 마친 지혜의 뒤통수를 지긋하게 바라봤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걱정하는 애교 섞인 말투와 목소리. 그녀보다 더 많이 석진을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