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초야

‘토독 토로록 토독’

흠뻑 젖은 초가지붕에 고였던 빗물이 경사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희미한 불빛을 뿜어내는 창호문을 뚫고 끊임없이 방안으로 퍼졌다.

방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사랑을 나누느라 지친 신혼부부의 숨소리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는 아쉽게도 홀로 잠든 신부의 숨소리였다.

방 한쪽을 차지한 화사한 모란 병풍 아래 놓인 새 원앙금침과 주안상이 무색하게 연두색 원삼에 화려한 족두리를 여전히 벗지 못한 신부는 반닫이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위태롭게 끄덕이던 신부의 고개가 마침내 크게 떨어지며 무릎에 부딪히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신부는 얼굴을 들었다. 깨문 혀로 퍼지는 비릿한 피 맛과 얼얼한 통증에 잠이 확 달아났는지 그녀는 빈방을 두리번거렸다.

푸른 빛이 어슴푸레 스민 창호문을 보며 그녀는 코로 큰 숨을 내쉬고는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기지개를 크게 켰다. 결국, 새벽이 되도록 신랑이 오지 않은 것이다.

신랑도 없이 초야를 맞이한 신부의 이름은 하의진. 그리고 오늘은 아버지를 따라 지모산에 온 지 삼 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밀어붙이시더니…. 이리되어 속이 후련하시려나.”

얼핏 탄식처럼 들리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서글픔이 없었다. 신랑 없는 초야는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밤새 거추장스러운 혼례복을 입고 생고생을 한 것이 약이 올랐을 뿐이었다.

규방의 요조숙녀처럼 청초하고 도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사실 선머슴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앞쪽으로 넘어온 댕기를 귀찮다는 듯 휙 쳐서 넘기고는 주안상의 다리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어제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뱃속으로 차갑게 식은 전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바쁘게 밀어 넣더니 이내 켁켁 기침을 하며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러고는 술잔을 연거푸 비워냈다.

전과 떡을 안주 삼아 술 한 병을 비우자 금세 술기운이 올랐고 의진은 원삼 위에 둘린 허리띠를 훌렁 풀어냈다. 하지만 그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이내 거추장스러운 원삼을 벗으려 옷고름에 손을 올렸다.

그때 밖에서 ‘찌그덕’하고 마루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손을 멈춘 그녀는 숨을 죽이고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마루가 소리를 내자 의진은 허리띠를 냉큼 집어 허리에 둘렀다. 하지만 뒤로 넘긴 두 손이 매듭을 채 묶기도 전에 문고리가 달그락거렸고 그녀는 허리띠는 제쳐두고 얼른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밀려드는 찬바람에 의진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문이 닫힐 줄 모르자 그녀는 호기심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러나 눈을 들어 신랑의 얼굴을 보려던 그녀는 놀람과 공포로 얼어붙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신랑이 아니었다. 온통 검정 일색으로 차려입고도 얼굴까지 복면으로 가린 사내는 진흙이 잔뜩 묻은 신을 신은 채 방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낯선 사내의 등장에 입술을 덜덜 떨던 의진은 그의 손에 들린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보고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왜, 왜 이러시오?”

사내는 대답 대신 한 발짝 더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칼을 높이 들자 의진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움츠렸다.

‘으아악!’

몸을 강타한 충격에 비명을 내지른 의진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깨어났다.

자신을 짓누르는 것이 바위가 아니라 축축하게 젖은 사내의 커다란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의진은 진저리를 치며 사내의 등에 주먹을 꽂았다. 그러나 돌덩이 같은 사내는 축 늘어진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간신히 옆으로 밀어내고 일어나 앉은 의진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두 손과 앞섶을 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산을 뒤흔들 정도의 비명에도 깨어나지 않는 사내를 옆에 두고 급히 제 몸을 살펴보던 의진은 자신을 적신 피가 모두 그의 것임을 알았다. 동시에 사내의 목덜미에 꽂힌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의진은 그가 화살을 맞고 자기 위로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진은 반사적으로 열린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새 푸른빛이 돌기는 해도 산에 둘러싸인 마당은 여전히 어두웠고, 고요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쳤지만 의진은 눈을 바쁘게 굴리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사내가 쓰러지면서 주안상도 함께 부서졌는지 상다리와 깨진 접시들이 나뒹구는 방을 훑은 의진은 다시 사내의 목덜미를 살폈다.

눈을 감을 새도 없이 단번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살의 끝에 달린 꿩깃이 바람에 미세하게 펄럭이는 것을 보며 의진은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방문에 붙은 창호지가 덜덜 소리를 낼 정도로 거센 바람을 뚫고 사내의 목 정중앙에 화살을 꽂아 넣을 실력이라면 고수도 보통의 고수는 아닐 터였다.

‘이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활을 쏜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라도 하려는 듯 관자놀이를 두 손으로 꾹꾹 누르던 그녀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등골이 서늘해진 표정을 지었다.

‘나를 죽이려 했다면 아버지도?’

당장이라도 방을 뛰쳐나갈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난 의진은 열린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쪽 벽에 몸을 붙였다. 마음이야 곧장 달려나가 아버지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지만, 화살을 날린 자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무턱대고 나갔다가는 뒤에 누워 있는 사내의 옆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살을 쏜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자는 나를 도운 것인가, 아니면 나를 노린 것인가?’

하지만 이대로 날이 밝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결국 방을 나섰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차가운 새벽공기보다 누군가 자신을 겨누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머리끝이 쭈뼛쭈뼛 솟아올랐다. 그러나 의진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사랑채를 향해 내달렸다.

치렁치렁한 혼례복 치마를 입고 진창이 된 마당을 뛰자니 그녀는 두 번이나 크게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렸는지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드는 다리를 끌고 간신히 사랑채에 도착한 의진은 활짝 열린 방문에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다급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안에 계세요?”

사랑채 마루로 기어 올라가 방안을 살피자 난장판이 된 방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가운데 정작 아버지는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녀는 다시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버지!”

갑자기 밀려드는 공포와 두려움에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들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진흙이 묻은 소매로 닦은 의진은 사랑채 뒤쪽에 있는 아버지의 작업실로 향했다.

“아버지. 여기 계세요?”

살짝 열린 작업실의 문을 조심스레 밀던 의진은 어두운 바닥에 누운 사람의 형체를 발견하고는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버지 하길윤이었다. 의진은 엉망진창이 된 작업실 바닥에 누운 아버지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버지! 아버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쓰러진 아버지의 소복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고 입가에서 흐른 피는 진흙과 뒤섞여 턱과 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의진이 아버지를 안아 올렸지만 길윤은 이미 축 늘어진 채였다.

“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아버지!”

울먹이며 아버지의 뺨을 두드리는 의진의 손에는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감촉만이 전해져왔다. 한참이나 아버지를 흔들던 의진의 눈에서는 마침내 체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의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숨을 죽였다.

***

한 시진 전.

인적 없는 골목으로 네 명의 괴한이 살금살금 들어섰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까지 쓴 그들은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는 기와집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 완벽히 몸을 숨긴 채 돌담으로 다가가던 그들이 골목 끝자락에 도착하자 갑자기 요란한 개의 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쫓기듯 담을 넘었고 사내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자 개의 울음도 잦아들었다.

뒷마당 한쪽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들은 개가 잠잠해지자 동시에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이어진 비명과 거센 반항이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집안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고요를 되찾았다. 빗물을 타고 비릿하게 퍼지는 피 냄새와 함께 다시 한곳에 모인 사내들은 복면 사이로 희번덕 눈빛을 주고받고는 다시 집안 곳곳으로 흩어졌다.

집안 곳곳을 뒤지고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급히 챙긴 사내들은 마침내 담을 넘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시끄럽게 짖는 개의 울음이 골목을 깨우기도 전에 민첩하게 골목을 내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를 깨고 뒷간의 문이 삐그덕 열렸다. 자기가 문을 열고도 소리에 놀란 사내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멈춰섰다. 그러고는 다시 주위를 몇 번이나 살핀 후에야 덜덜 떨리는 다리를 앞으로 움직였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사내는 이 집의 막내아들 한사흠으로 바로 의진이 밤새 기다리던 신랑이었다.

엊저녁 뭘 잘못 먹었는지 연이은 설사에 밤새 뒷간을 들락거리던 사흠은 우연히 뒷간 나무 틈 사이로 담을 넘는 이들을 발견했다. 세찬 비에 어둠까지 짙게 내린 시각이었지만 복면을 뒤집어쓴 그들의 모습에 겁을 먹은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곧이어 괴한들이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사흠은 뒷간의 문을 부여잡았다. 그가 비처럼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덜덜 떠는 사이 집안을 돌아다니며 피를 뿌리던 자들은 마침내 담을 넘었고, 그제야 사흠은 뒷간 구석에 주저앉았다.

걸을 힘조차 없어 기다시피 사랑채로 갔지만 그는 터져 나오는 울음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방마다 쓰러진 시신들과 사방으로 퍼진 피는 그곳이 바로 아비지옥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혹시나 살아남은 이는 없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집안을 살피던 사흠은 절망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꿈이라면 깨고 싶었다. 그러나 피와 물로 흥건하게 젖은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심장에서 솟구친 피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지 짐승의 신음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그는 갈 곳을 잃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었다. 그러다 손에 들어온 작은 물건에 그는 울음을 멈췄다.

손에 물건을 쥔 채 빗속을 떠도는 귀신처럼 마당을 서성거리던 사흠은 대문을 향해 잰걸음을 걸었다. 그러고는 근처 지모산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02. 부녀

3년 전 한양 북촌.

방에 들어온 의진은 보료 위에 앉아 치마를 걷어 올렸다. 하얀 종아리 위로 선명하게 남은 회초리 자국을 보며 그녀는 턱 끝에 걸린 눈물을 훔쳤다.

유모가 상전의 종아리를 때리는 일이 양반집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10년 전 처와 사별한 길윤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유모 오 씨의 손에 떠넘겼고 어린 의진이 하소연을 할 때마다 늘 오 씨의 편을 들어주었다.

오 씨가 이렇게까지 방자해진 데에는 몇 년 전 벼슬을 내려놓은 길윤이 전국 각지를 떠돌기 시작한 것도 큰 몫을 했다. 그가 여러 달씩 집을 비우자 집안의 하인들은 대번에 기강이 해이해졌다. 그리고 집안의 하인 중 우두머리 격인 홀아비 이씨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오씨는 의진을 훈육한다는 핑계로 안채의 하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의진을 괴롭혔다.

점점 도를 넘는 유모의 만행을 견디며 의진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몇 달 만에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줄 짬이 없었다. 조정에 올릴 상소를 만든다며 며칠 밤을 지새우더니 상소를 올리고 나서는 벌써 며칠째 사랑채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의진이지만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낸 아버지가 몇 년 전부터 왜란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에 반해 조정 대신들은 아버지의 의견을 한낱 근거 없는 낭설 정도로 치부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다 깜빡 잠이 든 의진은 몸종 월이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영감 마님이 찾으신다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와 등잔불부터 밝힌 월이는 의진의 구겨진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겼다.

드디어 오 씨의 만행을 밝힐 때가 왔다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월이가 흐트러진 의진의 머리를 야무지게 빗기는 동안 의진 역시 경대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단단히 의지를 다졌다.

아무리 오 씨의 편만 드는 아버지라지만 붉은 자국이 선명한 종아리를 보시면 제 말을 믿어주실 것이다. 사랑방으로 가는 내내 몇 번이고 할 말을 되뇐 의진은 당장 억울한 심사를 토해낼 기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주한 아버지는 부쩍 노쇠해 보였다. 일렁이는 등잔불에 푹 팬 볼과 눈가의 주름골마다 검은 그림자가 짙게 내려온 모습을 보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쏙 들어간 의진은 얌전히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의진이 앉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길윤은 서안 위에 올린 두 손을 몇 번이나 비비듯 마주 잡았다. 굳은살과 거친 살가죽이 맞부딪히며 만드는 작은 소음이 들릴 정도로 침묵이 이어지자 의진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너도 이제 열일곱이니 시집을 가야겠구나.”

생각지도 못한 길윤의 말에 의진은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굳은 뺨을 보며 답을 하려는데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너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다는 집안이 있다. 네가 혼인을 하면……. 나는 고향 지모산에 가서 생활할 생각이다.”

창례현에 자리한 지모산은 한양에서 꼬박 엿새는 걸릴 거리였다. 자신을 늘 짐처럼 여기시더니 이번에는 아예 자신을 남의 집에 넘기고 후련하게 떠날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 말에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울분이 터진 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께 쏘아붙였다.

“혼인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시지요. 늘 그렇게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의진의 버릇없는 대답에 성난 눈을 치켜떴던 길윤은 딸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지자 시선을 서안 위로 떨어뜨렸다. 한참 동안 서안 위에 올린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가 풀기만 반복하던 그가 마침내 눈을 들어 의진을 보았다.

“만일…. 나와 산으로 간다면 혼례는 고사하고 여염집 아낙들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뜻밖의 길윤의 제안에 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길윤은 방금 한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터무니없다고 느껴졌는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을 무르려는 순간 의진이 냉큼 물었다.

“누구와 가는 것입니까?”

“너와 나. 단둘이서 가는 것이다.”

단둘이라는 말에 의진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는 늘 어색했다. 게다가 어머니를 여읜 어린 의진을 모진 유모에게 던져두고 이제껏 나 몰라라 한 것에 대한 원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혼례도 싫고 홀로 한양에 남겨지기도 싫은 의진은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예. 가겠습니다.”

인생의 향방이 걸린 중요한 질문인데도 곧장 답을 내놓은 의진이 못 미더운 길윤은 훈계하듯 덧붙였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거라.”

“이미 결정하였고 번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진의 확고한 대답에 길윤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도 길윤은 몇 번이나 의진에게 생각에 변화가 없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섯 번째로 같은 답을 내놓자 마침내 세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모산으로 떠나는 날. 빠르게 집과 살림을 처분한 길윤이 가져갈 짐을 챙기는 사이 의진은 안채에서 여종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패물을 하나씩 건네며 아쉬운 이별의 정을 나누던 그녀는 여종들을 모두 물리고 오 씨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오 씨는 본래 남편과 사별한 과부로 노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갈 곳을 정해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유모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데다가 노비인 이씨와 살림을 낼 생각도 없는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혹시나 의진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빈손으로 보낼까 봐 염려하던 오 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점잖은 척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알아주니 고맙구나. 앞으로도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고 여인으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 씨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의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철썩 내리치자 놀란 오 씨는 뺨을 부여잡고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그 눈빛에도 전혀 겁먹지 않은 의진의 손은 다시 그녀의 반대쪽 뺨을 세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부어오른 두 뺨을 감싸 쥔 오 씨를 보며 의진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네 이년! 반상의 법도가 지엄한데 어디 함부로 하대하는 것이냐? 내가 그동안 네년의 오만방자한 언행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는데 떠나기 전에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말을 마친 의진은 벌떡 일어났다. 방을 나서던 그녀는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 오 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라. 그동안 네 모자란 됨됨이를 참아주느라 내가 수고가 많았다는 뜻이니.”

오래된 체증이 내려간 듯 후련한 마음을 월이와 나누며 대문 쪽으로 걸어간 의진은 지모산 근처까지 짐을 나르기로 한 행랑아범과 아버지를 따라 한양을 떠났다.

장장 엿새 동안 이어진 여정 끝에 지모산 초입에 다다르자 부녀는 행랑아범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인적 없는 산길을 아버지와 단둘이 오르자니 의진은 행랑아범이 더욱 그리웠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길윤과 한참 거리를 벌려 걷던 의진은 산마루에 그림처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저기, 저기 좀 보세요!”

의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너른 들판 위로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던 길윤은 이내 실망한 듯 멈춰 섰다. 내려앉은 지붕과 반쯤 떨어져 나간 문짝만으로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