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음이 쓰여서 (2)

서훈의 입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부분은 때때로 발작처럼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아직 윤 회장에게는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컸다.

다만 이브와 심 여사에게는 많이 마음을 연 편이었다. 둘에게는 때로는 웃어 주고 이젠 조금이나마 말을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외지만, 솔현에게도 서훈은 마음을 열었다.

“희한하네요. 신랑님에게는 마음을 여는데 아버지에게만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

“아마, 아버지라서 그렇지 않을까?”

“아….”

이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서훈을 지속 학대했던 것은 아버지였다고 했으니 비록 그 아버지가 윤 회장보다 훨씬 젊지만 어쩌면 단어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건드릴 수 있었다.

“어쩌면 좋을까요. 이러면 어느 집이라도 힘들 텐데.”

한숨을 쉬던 찰나, 오랜만에 함께 봉사에 나선 진하가 다가왔다.

“이브야. 아이들 줄 간식 슬슬 꺼낼까 하는데.”

“아, 그래. 신랑님 이거 마무리만 부탁해요.”

“응. 어서 가봐.”

바빠서 자주 오지 못해도 지속적으로 진하는 S 호텔의 이름으로 시설 간식을 지원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워낙 재료도 신경 써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다 보니 아이들이 진하가 오는 날이면 빙 둘러서서 한 번씩 안길 정도였다.

“요리사 누나!”

“어머. 많이도 컸네. 잘 있었어?”

“네에!”

직접 눈앞에서 만드는 것을 아직 보여준 적이 없는데 아이들은 진하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엔 놀라서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더니 하나같이 들려오는 대답은 같았다.

‘달콤한 냄새가 나요.’

“휴우. 다 받았나? 아, 서훈이. 어디 갔지?”

“여…기 있어요….”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서훈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소심해서가 아니라 어린 동생들이 먼저 간식을 받고 난 이후에나 어딘가에서 이렇게 잘 나타나곤 했다. 그 모습이 예쁘면서도 이브에게는 많이 안쓰러운 것이었다.

“자, 받아. 서훈이도 많이 컸구나. 그렇게 똑똑하다던데.”

“고맙습니다….”

“그래. 아휴, 예뻐.”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자 수줍은 미소가 지어졌다. 동생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 하나하나 간식 먹는 것을 봐주고 챙겨 주며 먹는 것을 보다가 이브는 진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에게 트라우마라는 거지? 흐음. 잠시만.”

“방법이 있을까?”

“내 생각이 맞다면?”

간식 시간이 끝날 때쯤, 진하는 서훈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서훈아, 누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네에.”

“서훈이는, 이브 누나 어떠니?”

“좋아요.”

“그럼, 이브 누나의 엄마는?”

“좋아요. 따뜻하고.”

“윤 회장님 뵌 적 있지?”

“네에.”

“어떠니?”

진하는 일부러 아버지, 아빠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말을 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서훈의 입에서는 “싫지 않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브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구나. 혹시, 왜 죄송한지 물어도 될까?”

“저는요, 아버지가 무서웠어요. 아파서. 지금도 그래요 사실. 윤 회장님은 무섭지는 않아요. 항상 다정해요. 하지만 아버지잖아요. 이브 누나의 아버지.”

“으응. 그렇지. 조금 더 이야기해 줄래?”

“제 아버지는 저기로 가셨대요. 저를 아프게만 하고… 미안하다고 말도 안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라서, 다정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요.”

“그랬구나.”

“제가 이런 마음으로 윤 회장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완전히 원래 아버지를 지워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그건 그렇지 않아. 서훈아.”

이브는 울컥하는 마음에 다가왔다. 겨우 일곱 살이다. 이 나이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자신은 처음부터 원망하면서도 그리울 아버지가 없었지만 이 아이는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학대를 당하고도 그리워한다는 그 마음이 그저 슬펐다.

“지우지 않아도 돼. 가끔 그렇게 생각해도 돼. 우리가 널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건, 그 마음까지 사랑하기 때문이야. 서훈아.”

“누나….”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해도 돼. 아버지는, 그리고 어머니도 나도 그것까지 안아 주고 싶어.”

여전히 서훈은 울지 않았다. 지금껏 얼마나 눈물을 쏟았으면 그랬을까 싶지만 도리어 웃으며 다가와 이브에게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

몇 달이 흘렀다. 하늘이 흐리고, 눈이 많이도 내리려는지 하나둘, 함박눈이 될 하얀 꽃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은 누군가에게든 스며드는 시기.

“누나.”

“으응.”

날이 추워서 그런지 어느새 서훈은 또 이브의 침대로 꼬물거리며 들어와 있었다. 방학을 맞아 어제 막 본가에 돌아와 피곤함에 일찍 잠들어 몰랐는데, 부스스한 머리와 따끈한 아이의 체온이 여기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잘 잤니?”

“네.”

방긋 웃으며 작은 손이 이브의 잠옷 자락을 꼭 쥐었다. 처음 이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는 없던 버릇인데, 정이 들려니 얼마 뒤 예정된 이브의 결혼 탓에 무의식중에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마음이 들어 가끔 이렇게 함께 잠이 들고는 했다.

상태는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한다고 말해 주자 놀랍게도 빠르게 이겨내고 있었다. 워낙 두뇌가 비상하다 보니 일반 초등학교에 보낸다는 것도 사실 걱정인데 서훈은 자신과 같은 또래와 어울리는 법을 배우겠다며 스스로 원했다.

“아휴, 많이 컸네. 이제 당분간 본가에 있을 거야. 학생회도 넘겼고 수능도 끝났으니까 우리 서훈이 많이 놀아 줄게.”

“정말요?”

“그럼. 예쁜 내 동생.”

동그랗고 예쁜 이마에 뽀뽀해 주고 이브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유가 생기다 보니 요샌 조금씩 살이 붙어 한층 보기 좋아졌다. 시계를 보자 오전 여섯 시. 아직도 이른 시간이었다.

“추우니까 이불 속에 더 있어. 아침 만들어 줄게.”

“나도 할래요.”

“응? 그럴래? 그럼 같이 가자.”

“네에.”

이브는 서훈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나와 불을 켰다. 오늘 윤 회장은 저녁에 출장이 끝나는 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올 것이고, 심 여사도 같이 간 터라 집에는 이브와 서훈, 둘뿐이었다.

함께 간단히 프렌치토스트를 만들고 우유는 미리 따끈하게 데워 두었다 식히는 중이었다. 이브가 마실 향이 좋은 커피도 내리고 둘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서훈이도 요리에 소질이 있네?”

“누나가 잘하니까, 나도 잘하고 싶어요. 누나 결혼하면 나중엔 내가 엄마 아빠 아침 만들어 줄 거예요.”

“착하다, 우리 서훈이. 그래도 불은 위험해. 조금 더 크고 해야 하니까, 꼭 요리할 땐 어머니랑. 알았지?”

“네.”

조용한 아침이었다. 같은 또래에 비해 흘리는 것 하나 없이 점잖게 식사하는 서훈은 먹을 때도 조용하기만 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브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말은 많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구람.”

이브는 일어나 현관을 열었다. 혹시나 예상했지만, 역시나.

“나 왔어!”

“신랑님 지금 시간이…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서훈이 선물 사왔는데.”

“…어서 오세요.”

가끔 윤 회장 부부가 출장이나 여행을 가고 나면 솔현은 어김없이 아침 일찍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고는 했다. 설마 오늘도 왔을 줄이야. 밖을 보니 마당엔 조금씩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 그치면 일하시는 아저씨가 출근해 눈을 치울 텐데, 굳이 눈길에 운전까지 해서 온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이브는 마음에 걸렸다.

“서훈아!”

“매형, 어서 오세요.”

아직 누가 봐도 아기인데 매형, 어서 오세요라니. 참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였지만 이미 익숙해졌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서운한 척을 해보았다.

“에이, 그냥 형아 해도 된다니까.”

“서훈이 성격 알면서 그래요?”

“으흠. 그건 또 그렇지. 아, 맞아. 일단 밥 먹고 이야기하자.”

“네에.”

넉넉하게 토스트를 만들길 잘했다. 이브는 먹성 좋은 그를 위해 접시에 한가득 쌓아 놓아주고 다시 앉았다.

“나 올 줄 알았네 뭐.”

“안 와도 드실 분이 있거든요.”

“아아, 그건 그렇지. 고마워.”

“드세요, 얼른.”

어째 결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너무 거리낌이 없나 싶지만 그래도 이브는 좋았다.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는 서훈과 둘만 놀기엔 심심하기도 했고, 보고 싶기도 했다. 수능 이후 잠시 바빠 몇 주를 또 오지 못했더니 더 그랬다.

식사를 마치자 솔현은 바깥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선물 상자를 꺼내 왔다.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서훈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리본을 푸는 그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주 가끔 보이는 어린아이다운 맛이었다.

“와아.”

일단 상자에서는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상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한정판 동화책이 있었다. 서훈은 동화를 잘 읽지 않았는데, 이건 원서였다.

“영어로만 되어 있네요?”

“그냥 동화는 읽지도 않잖아. 영어 공부하면서 동심을 기르라고 준비해 봤지. 의외로 내 신부는 아이 같은 선물 좋아하는데, 처남은 아니란 말이지.”

“감사합니다, 매형.”

“그래. 이거 국내에선 안 파는 거다?”

“진짜 감사해요. 잘 읽을게요.”

머리가 좋기는 해도 아직 영어가 완벽한 것은 아니기에 기꺼이 서훈은 동화책을 껴안았다. 두께는 어찌나 두꺼운지. 팔이 아플까 싶어 이브가 들어 방에 놓아 주고 나오자 이번엔 빈 품에 상자가 하나 들어왔다.

“제 거예요?

“으응. 열어 봐!”

“이번엔 무슨 장난을 준비하셨을까나.”

상자는 작았다. 하지만 열어 보니 그보다 작은 상자가 또 들어 있었다. 이러다 지난번 갑자기 보냈던 선물처럼 뭔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불안해졌는데, 계속 열다 보니 카드 키가 하나 나왔다. 덤으로 자동차 키까지 톡, 떨어졌다.

“이건…?”

“우리 신혼집 카드 키. 비밀번호 눌러도 되지만 굳이 이렇게 키도 만들어 봤다는 말이지.”

“예에?”

“아, 그리고 자동차는 이따가 우리 집 은 비서가 몰고 올 거야. 곧 스무 살이니까, 학교 다닐 때나 필요할 때 타라고. 참고로 자동차는 우리 어머니 선물. 집은 내가 월급 모은 거로 샀어. 일부러 좀 작은 집으로.”

이브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직 몇 달이 남았는데 벌써 신혼집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깜빡거리자 솔현은 헛기침을 하고는 속삭였다.

“1월이 되면 입주 먼저 하자. 응?”

“예?”

“우리 다닐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았어. 집안 어른들도 일부러 본가로 들어와 살지는 말라셔. 자주 인사만 오라고. 둘이서 신혼 생활 즐길 만큼 즐기다가 식 올리고 아이 낳기 전까지는 거기에서 살라고 하시고.”

“하지만… 저기, 그게.”

“싫은 거야?”

“아니요, 그게.”

“부끄러운 건가?”

“조… 조금….”

“흐음. 어차피 1월이면 성인이잖아. 맘 편히 나랑 살자.”

“일단 부모님 오시면 이야기해 봐요. 네?”

“다 아실 텐데.”

“에…?”

***

솔현은 저녁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이브는 아까 그가 했던 이야기에 평소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단 첫 번째, 비록 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집에 이렇게 다 큰 남자와 함께 있어도 되는가. 이 부분이 제일 우선이며 제일 컸다. 지금껏 이런 생각을 못 해봤던 것이 더 기가 막힐 정도였다. 미리 하는 예측이라면 자신이 있는데도 동거를 시작하자는 이야기에 갑자기 의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무슨 짓을 할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결혼은 하겠지만.’

두 번째, 동거를 시작했을 때에 이 사람이 과연 결혼식 전까지 지켜 줄 것인가? 상식적으로 봤을 땐 그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한집에 산다는 것이….

“흐익!”

“왜,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무슨 일 있어?”

“전혀요. 하하.”

그렇지 않아도 잘 빨개지는 얼굴을 애써 수습하느라 미칠 것 같았다. 솔현이 갑자기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괜히 시계만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좀 늦으시네요. 서훈이랑 책이나 읽어 볼까요?”

“서훈이 자는데?”

“…그러네요.”

“피곤했나 봐. 이 두꺼운 책을 벌써 반이나 읽었네.”

“방에 좀 눕혀야겠어요.”

“내가 할게.”

솔현은 일어서서 서훈을 번쩍 안아 들었다. 워낙 가벼워서 힘든 내색 없이 방에 가서 잘 꾸며진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도 덮어 주었다. 마치 꼭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라 그만 이브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자상하시네요.”

“그야 하나뿐인 처남인걸. 잘 보여야지. 우린 1층에서 이야기나 더 하자고.”

“그래요. 저도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응?”

차를 두 잔 타서 거실에 온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브는 며칠 뒤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집을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만약에 같이 살게 되면, 결혼식 때까진 그냥 오빠 동생처럼 지내 줄 수 있어요?”

“응? 그야 어렵진 않지만… 아냐. 오빠 동생은 아니야.”

“에?”

“뽀뽀만 하자.”

“풉.”

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차마 크게 웃을 수가 없어 억지로 배를 잡고 버티는데 솔현은 거기에 대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결혼식까지는 다른 건 다 아껴 둘 거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뽀뽀는 해야겠어. 무려 3년을 참았다고.”

“그건 또 그러네요. 이제 1월이면 저도 술도 마실 수 있는 성인이니까요.”

“응. 뽀뽀는 하고 살아야지. 성인인데. 그러니까, 오빠 동생 말고 우리, 연애하자.”

“연애는 지금도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은… 물론 그렇지만. 조심하느라 손도 제대로 많이 못 잡아 봤잖아. 더 설레어 보자고.”

귀여워서 어쩔까, 이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야기를 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반대로 이 남자를 안고 싶어서 문제였다. 사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도 어려울까. 한집에서 손도 잡고 뽀뽀도 하면 그다음 단계도 분명 있을 텐데. 어쩌면,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