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 사람이 좋아 (2)

무사히 중간고사가 끝난 후, 드디어 내일이 기다리던 전시회였다.

“다행히 토요일에 잡혀 있구나.”

“그래서 좋지. 그림은 전시회 끝난 이후에 옥션 통해서 판매한다더라고. 관심 있으면 구입해도 괜찮지.”

이브는 빙긋이 웃으며 하선과 느긋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윤화는 잠시 면담을 하러 갔고, 진하는 늦게까지 신메뉴 개발에 열중하는 탓에 입학식 이후 처음 둘만 식당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나저나 내일 전시회는 온갖 관심 있는 기업에서 전부 보러 올 텐데. 부담스럽지는 않니?”

“부담… 되기는 해. 듣기로 예성에서는 이 여사님이랑 신 회장님, 솔현 씨까지 세 분이 오신다네.”

“별일이야 없겠지. 너무 걱정 마.”

“시어머니에 시할아버님, 예비 남편까지 온다고 한번 생각해 봐….”

“아.”

도저히 마음을 편히 가지려 해도 그러기 힘든 상황임에 분명했다. 이런 일은 나이를 얼마나 먹었던지 세상 모든 며느리들은 시부모님을 어려워하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아버지랑 어머니도 꼭 오신다고 하셔서… 상견례 하는 기분이야….”

한숨을 푹 쉬다가 이브는 문득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 이슬 양….”

지난번 사건 이후로 이상하게 부쩍 그녀가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던지는 일이 많아졌다. 다만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바로 얼굴을 돌려 버렸으니 그 이상 이야기를 하는 법은 없었다.

“다른 반인데도, 부쩍 많이 보네.”

“네가 보기에도 그래?”

하선에게 묻자 당연하다는 말이 돌아온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 도망쳐 버리니 이거야 원….

오늘도 역시나 시선을 피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브는 하선에게 전시회 초대장을 내밀었다.

“강 사장님은 못 오신다고 했지?”

“응. 우리 학교야 뭐 그냥 통과지만 손님 초대는 초대장 소지가 필수니까. 언니 가져다주게.”

“한창 후계자 수업 중이실 텐데, 바쁘시지 않으려나.”

“뭐 바쁘기는 한데 언니도 은근 그림 좋아해. 주면 좋아할 거야.”

처음 여는 전시회임에도(물론 개인 전시회는 아니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준다는 것은 이브에게 있어 큰 행복이었다. 그만큼 부담이야 되겠지만 충분히 열심히 했으니까.

“참, 우리 중간고사 성적 나온 거, 윤화가 지금 앱에서 확인하라고 연락 왔네.”

“어? 아, 그러네. 윤화도 곧 오려나 보다.”

“우리 하나 둘 셋 하면 볼까… 동시에… 난 아무래도 국어 쪽은 약해서….”

“그래. 그럼, 하나 둘… 셋!”

동시에 앱에 접속해 성적을 조회해 보니 역시. 이브가 현재 일등이었고 그 아래 진하의 이름이 보였다.

“너 정말 너무 잘하는 거 아니니…”

“너도 만만치 않은데? 봐, 5등.”

“윤화는… 8등?”

“우리 다 상위권 방어했네.”

이 어려운 곳에서 첫 관문을 겨우 통과한 것이지만 그녀들은 안도했다. 워낙 잘난 집안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 천지다 보니 그만큼 점수 차이도 크지 않았다.

이브의 경우는 올 백. 그리고 그 아래로 평균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 기껏해야 1점 차이로 갈라지기까지 했다.

“윤 회장님이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그러게. 이따 전화드려야겠네.”

“아, 윤화. 왔어?”

때맞춰 돌아오는 윤화를 보며 손을 흔드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면담을 하고 와서일까. 성적은 충분히 괜찮을 텐데….

“무슨 일 있어?”

“있어… 나한테….”

“으응.”

“혼담이 들어왔대.”

그 말에 잠시 하선과 이브는 함께 표정이 굳어졌다. 이브의 경우에도 파격적으로 빠른 혼담이었지만 윤화의 경우는 애매한 시기라고 볼 수 있었다.

보통은 기말고사까지 끝나고 1학기 성적이 나오고 나서, 혹은 연말 학년 최종 성적이 나오고 나서 이런 면담이 오긴 하는데 1학년의 경우는 많지 않았다. 보통은 두고 보다가 2학년부터 슬슬 말이 나오는 것이 정석이니까.

하지만 들은 바로 이런 경우엔 본인이 의사 표시를 하면 충분히 미루거나 없던 일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럼에도 윤화의 표정으로 보아 거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집안인데?”

“그게… 기업은 아니고 현재 한류 스타로 널리 유명해진 사업가 겸 배우 도현준 씨야.”

“그분… 분명 나이가….”

“서른여덟 살.”

“그건 좀 너무한걸…?”

“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특별히 반대는 없으셨나 봐.”

이런 혼담이 들어왔을 때 1차적으로 집안의 큰 반대가 없으면 일단 면담을 진행하고, 학생이 반대할 때 다시 집안에 알리고 없던 일이 될 경우 무산, 아닌 경우 재 면담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단 나는 반대한다고 말씀은 드렸는데… 나이 차이 나는 것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분은 좀 많네….”

“그러게. 졸업하고 결혼한다고 해도 스물한 살 차이면 너무하긴 하지….”

“도대체 아버지가 왜 반대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싫어.”

“무사히 잘 넘기기는 해야 할 텐데.”

윤화는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괜히 손에 쥐고 있던 포스트잇 한 장을 가지고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다. 이브는 잠시 가만히 놔두다가 3분쯤 지나 떨리는 작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일단 내일, 전시회 즐기고 기다려 보자. 마음 편히 가져 윤화야.”

“그래야지… 일단은.”

***

“에에? 어머니. 내일 옥션에 참가하지 말라뇨!”

“왜 그렇게 놀라니? 그럼 이 엄마랑 아들이 경쟁을 해야 하니?”

“아니, 내 신부 얼굴을 그린 그림을 어머니가 어디다 쓰실 건데요?”

솔현은 기가 막힌 듯 이 여사에게 따지며 괜히 옆에 있던 아버지 신 사장을 간절하게 보았다. 내일 열릴 옥션을 위해 꼬박 돈을 모았지만 아예 참가조차 말라니.

애석하게도 신 사장은 딴 곳을 보며 아들의 억울해 죽겠다는 발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음, 이제 날도 많이 따뜻해졌으니 어때요, 여보. 우리 내일 일정 끝내고 오면 데이트라도?”

“어쩌죠. 당신이 참가 못 한다고 해서 내일 이브 그 아이 데리고 점심이나 먹을까 했는데요.”

“저런, 그거 아쉽군. 그럼 저녁은 어때?”

“아버지, 어머니!”

“거참, 아빠 엄마 어디 안 갔다 이 녀석아. 시끄럽기는.”

능청스럽게 타이르는 모습에 그저 황당함뿐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들의 의견 따위는 묵살해 버리는 모습이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솔현은 잔뜩 씩씩대다가 회사 사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게 말이 돼? 할아버지한테 말려 달라고 할 테다!’

지나치는 회사 직원들마다 인사를 건넸지만 지금 그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한동안 어머니가 던져 주는 일, 그리고 형들의 영혼 없는 응원에도 얼마나 성실하게 버티며 노력했던가!

물론 한 번 도망치기는 했었지만 그나마도 할 일을 안 하고 간 것도 아닌데. 이번 중간고사 성적도 나름 잘 나와서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나은데. 하고 싶은 운동도 참았는데!

어느새 회장실 앞에 도착해 경우 없이 비서들의 만류에도 문을 쾅 열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할아버지!”

우렁차게 외치고 안으로 들어간 그를 보며 비서들은 하나같이 “또 시작이시네. 도련님.” 하고 중얼거리고는 금방 각자의 위치에서 기계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가끔 이렇게 심통이 날 때 이런 상황을 벌이고는 했기에, 어릴 적 이후 처음 보는 것이지만 언제나 솔현은 그들에겐 어린 도련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놈아. 문 부서지겠다.”

“할아버지, 이게 말이 돼요? 아니, 일단 예의 없이 군 건 죄송합니다. 아무튼. 어머니가 저 옥션 참가하지 말라 한 거 할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으휴….”

신 회장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고 옆에 놓인 지팡이를 들어 솔현의 머리를 콩 때려 버렸다.

“아야!”

“겨우 그런 일로 이 할애비한테 와서 투정이야? 스무 살이 넘은 놈이 하는 꼴하고는….”

“겨우 그런 일이라뇨, 내 신부 얼굴은 내가 가져야겠다고요!”

“너는 그 애 졸업하면 평생 얼굴 보고 살 거면서 그림이 왜 굳이 필요해!”

“이브 그 애가 직접 그린 걸 갖겠다는 것도 잘못이에요?”

“야, 이 녀석아. 할애비 혈압 오르겠다. 나가 이놈아!”

신 회장은 괜히 소파의 쿠션을 손자에게 사정없이 던졌고 그 기세에 그는 마지막으로 고래고래 외치고는 나가 버렸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빠도 다 미워!”

“저… 저놈이 무슨 다섯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신 회장은 문이 닫히고 더 이상 솔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책상 한구석 책 밑에 깔린 봉투를 보고 씩 웃었다.

“이건 다행히 들키지 않았구만.”

***

전시회 당일, 이브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새로 부모님이 보내준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따로 겉옷을 챙기지는 않아도 좋을 것 같아 앙증맞은 크기의 백을 바로 들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보았다.

“…이 정도면 되려나?”

아무래도 어려운 분들을 처음 보는 자리이니만큼 더 신경을 써야 하나 싶었다. 옅은 메이크업이지만 평소보다 공을 들였고,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를 했다.

시험이 끝난 후 학교에서 고생했다며 피부 관리사를 보내줘 관리도 받아 그렇지 않아도 고운 피부가 유난히 돋보였다.

충분히 그 나이답게 사랑스러운 모습이지만 긴장감에 최종적으로 점검을 마친 이브는 적당히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기다리고 있을 박 비서에게 향했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박 비서님.”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지요. 얼른 타시죠.”

늘 솔현이 데려다주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어서인지 이브는 오랜만에 타는 박 비서의 차가 낯설었다. 정확히는 아버지의 차량이지만 입학 후 한 번도 타보지 못했으니까.

“참, 아버지랑 어머니는요?”

“전시회 시작이 열한 시부터라 따로 오신다 하셨습니다. 아가씨는 오늘 일찍부터 보셔야 하지요?”

“네, 준비할 것도 많네요. 설아 선배님 만나서 미리 인사도 해야 하고요.”

차는 한참을 달려 전시회장 앞에 도착했다. 역시나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곳답게 주차 공간도, 그리고 전체적인 건물 인테리어 및 안의 그림 배치까지도 눈에 확 들어오게끔 잘 되어 있었다.

“어서 와요, 아침부터 피곤하겠어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요. 일단 소개해 줄 분이 계시니 이쪽으로 와요.”

“예.”

따라가면서도 조금은 의아했다. 이른 아침부터 소개해 줄 사람이라… 전시회 관련된 어느 그룹의 일원일까?

뜻밖에도 키가 당당히 큰 어느 여자가 이미 이브의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선배님, 데려왔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이라는 것은 LS고 출신 학생이었다는 거겠지 해서 정중하게 인사하자 그녀는 그런 이브를 보다가 갑자기 확 끌어안아 버렸다.

“반가워요. 민하경이에요.”

“앗…!”

순간 놀라 눈이 커진 이브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 솔현의 형수인 그녀를 처음 보는 것과 동시에 품에 안기고 나자 그만 기가 죽어 고개를 다시 숙여 버렸다.

“어머. 귀여워라.”

“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직 어린데 뭐.”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다행히 이때 설아가 두 사람에게 대기실로 갈 것을 권했다.

“자, 그럼 따라가요.”

가면서 이브의 손까지 꼭 잡아 주니 언니 같기도 한 느낌이지만 마음은 긴장감으로 들썩거렸다. 평정을 찾아야 한다… 평정을….

속으로 몇 번 외치고 다짐하자 겨우 대기실에 도착했을 즈음 이브는 진정할 수 있었다.

***

시간이 지나자 이제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 선생님은 조심해. 그분은 어떻게 잘해 내도 점수가 짜거든.”

하경은 어느새 이브에게 말을 놓고 편안하게 대해 주었고 이브 역시도 동서지간이 아닌 언니와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아 제법 조잘조잘 담소를 이어 나갔다.

단연 이야기의 주제는 솔현에 관한 것들이 절반 이상, 나머지는 학교에 관한 꿀 같은 조언들.

“도련님이 그렇게까지 한다는 말이야? 어머, 집에선 마냥 아이 같기만 한데.”

“그런가요? 제가 아직 많이 어려서 그런가 봐요. 오빠 같기도 하고.”

“내가 본 이브는 충분히 어른스러워. 아마 도련님도 안사람 될 아이라고 어른답게 행동하시려는 거겠지?”

“아… 그럴지도요.”

첫날 그가 보냈던 사랑스러운 토끼 인형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원래 장난기 많고 천진난만한 쪽이 훨씬 대하기는 편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로서의 어필은 잘 되지 않을 테니.

“그렇지. 오늘 도련님 생일인데, 알고 있었지?”

“네. 일부러 티는 내지 않았지만요. 선물도 잘 챙겨 왔고요.”

“역시 이런 건 참 잘하네. 혹시 선물 뭔지 알려 줄 수 있어?”

“그… 그게….”

이브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상기된 얼굴로 간신히 말했다.

“RC카요.”

“어어?”

“솔현 씨는 아무래도 이거저거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있지 않을까 해서… 운동을 좋아한다고는 들었는데 그러면 장비도 어마어마할 거고요.”

“그야 그렇지. 하긴, 어쩌면 그 선물이 이브가 줄 수 있는 최고일 거야. 추억도 되고.”

“감사합니다. 사실 조금 망설이던 선물이기는 해요.”

“두 분, 이제 나가야 해요.”

설아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이미 수많은 작가들과 기업 관계자들이 모여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작품 감상을 하거나 친분 있는 작가들에게 꽃다발과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이브도 천천히 앞으로 나서 평소 친분 있던, 혹은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꼬박 인사를 다니며 바빴다.

“그림 좋던데요.”

키가 아주 큰 날렵한 몸매의 남자가 이브 앞에 멈춰 서서 칭찬의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분이라 제가 누구신지 잘 모르는데….”

“아, 전 저 그림 그린 신인 작가예요. 지호 선생님 제자이기도 하고.”

“그러셨군요. 저도 지호 선생님께 수업 듣고 있어요. 작가님 그림도 너무 멋진데요.”

“고마워요. 귀여운 아가씨.”

그의 그림 아래 명패에는 선명하게 ‘유철영’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순간적인 눈짓으로 그것을 보고 정중하게 이브는 자기소개를 했다.

“윤이브입니다. 유 작가님.”

“그냥 철영 씨라고 불러 줘요. 고등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실력이 대단하네요.”

“별말씀을요. 워낙 멋진 작가님들 그림이 많아서….”

“내 칭찬받을 만한 분은 많지 않아요. 저도 아직 신인이기는 하지만 꽤 이름도 알려졌고. 그런데 이브? 특이한 이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