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그와 처음으로 한 침대를 쓴 날이었지만, 설이가 있어서 그런지 설렘 제로. 푹신한 침대가 나를 감싸 아주 푹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역시, 침대는 비싸야 하는 건가.

그렇게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엄마.”

설이 내 품으로 파고들며 나를 깨웠다. 내가 눈을 뜨지 못하고 부스럭거리자 설이 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간신히 눈을 떠 옆자리를 보니 그는 이미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팔만 뻗어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터리는 일찍 이러나떠.”

설의 대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흘렀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조깅을 갔나보다.

“엄청 부지런해. 어휴.”

이서라 인생에서 평생 없을 것 같은 단어 ‘조깅’이었다.

설이와 만나고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는 것도 가끔은 벅찬데, 아침부터 뜀박질이라니.

이서라 심장에는 무리였다.

내 심장 부근을 톡톡 두드리고 눙지의 밥을 챙겨주었다.

눙지도 일찍 일어났는지, 나와 설의 기척이 들리자 나타나 밥그릇 앞에 착석했다.

눙지의 밥을 챙기고 설과 함께 먹을 아침을 준비하는데 그가 돌아왔다.

“아빠!”

오늘따라 유독 컨디션이 좋은 설이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설을 가볍게 들어 올린 그가 한쪽 팔로 설을 지탱하고 부엌으로 들어와 아침 인사를 했다.

“잘 잤어요?”

“네. 꽤 피곤했었나 봐요. 아주 잘 잤어요.”

“다행이네요.”

“주세훈 씨는요?”

“저도 정신없이 잤습니다.”

그가 설을 설의 전용 의자에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아침에 어울리는 굉장히 산뜻한 미소였다.

설을 내려놓고 물을 따르는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반짝거렸다.

나는 눈을 돌려 내 왼손을 바라보았다.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내 손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심장이 간질거려 배시시 웃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오늘 저녁에 본가에 가는 것 잊지 않았죠?”

“그럼요. 설이랑 준비하고 있을게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가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시댁, 더군다나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진 시댁이었다.

설과 그가 함께 집을 나섰다. 설은 어린이집으로, 그는 회사로.

차 앞까지 배웅을 나섰다.

“이 기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네. 사모님.”

응?

나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기사님의 태도와 호칭에 눈만 껌뻑거렸다.

“아, 왜 그러세요. 엄청 어색하네.”

내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이 기사님이 평소 보여주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엄연히 주 전무님의 아내시니까요. 예전처럼 대할 순 없죠.”

“그래도…….”

“제가 이게 더 편합니다. 사모님도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

나와 이 기사님의 대화를 들었는지, 그가 다가왔다.

“서라 씨가 편한 대로 대해주세요. 이 기사님.”

“네? 아 그래도…….”

세훈은 이 기사님에게 그렇게 말한 후 나에게 몸을 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평소와 다를 것 없었으나, 매우 다른 아침의 시작이었다.

집안일을 돌봐주시는 이모님들과도 한참의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 기사님처럼 갑자기 변한 이모님들의 태도에 나는 진땀을 흘렸고, 설득의 설득을 거듭해 조금이나마 편한 상태로 바뀔 수 있었다.

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왔을 때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큰 동그라미 두 개와 작은 동그라미 두 개에 길쭉하고 짧은 선들이 얼기설기 붙어있는 그림이었다.

“설아, 이게 뭐야?”

내가 묻자 설이 그림을 바닥에 놓고 쭈그려 앉아 설명을 시작했다.

“이거는 아빠고, 이거는 엄마, 이거는 눈지! 이거는 터리야.”

아무래도 가족 그림을 그린 모양이었다.

액자를 사러 가야 하나.

나는 흐뭇하게 그림을 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그에게 보냈다.

[설이 처음으로 그린 가족사진이에요. 가장 높이 있는 동그라미가 주세훈 씨 같아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는 그 그림을 바탕화면으로 저장했다.

얼마 후.

[아무래도, 우리 설이 미술 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 보소. 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본인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거면서, 설이 미술에 재능이 있다니.

이 팔불출 아빠를 어쩌면 좋나 걱정했다.

[딸기 팩에 있던 그림의 가치도 몰랐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요.]

내가 답장을 보내자 얼마 후 바로 답장이 왔다.

[잊어주세요.]

내가 핸드폰을 들고 킥킥거리자 설이 나에게 나가와 목을 꼭 움켜 안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엄마 햄복해?”

“응?”

내가 되묻자 설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엄마 핸복하냐고.”

“응. 엄마 행복해.”

나는 설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그에게 회사 일이 좀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집에 도착해 같이 출발한다면 약속 시각보다 한참 늦을 것 같아 설과 둘이 출발한다고 하니 그가 전화를 걸어 반대했다.

“그냥, 같이 가죠. 할아버지께 전화해 두겠습니다.”

“아니요. 그냥 설이랑 저만 먼저 갈게요. 같이 식사하는 자리인데 우리 모두 늦으면 실례에요.”

“그렇지만……. 그냥 같이 가죠.”

나는 그에게 설과 둘이 가도 괜찮다 답했다. 그럼 그가 최 집사님께 미리 말해두겠다고 말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와 전화를 끊고 설의 옷을 갈아입혀 주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최 집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전무님께 들었습니다. 설이 아가씨와 둘이 먼저 출발하신다고요?

“네. 그렇게 됐네요.”

-이쪽에서 시간에 맞춰 차를 보내겠습니다.

“아. 안 그러셔도 됩니다. 멀지 않으니 설과 함께 택시 타고 갈게요.”

-그러면 제가 회장님께 혼납니다. 차 보내겠습니다.

전화기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절로 그녀의 인자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이따 뵙겠습니다.

설과 준비를 다 하고 집 앞으로 나가니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카시트까지 있어, 설과 안전하게 세훈의 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집은 언제 익숙해질까. 올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집이었다.

설과 함께 차에서 내려 정원을 지나가는 길.

최 집사님이 서둘러 집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작은 사모님. 설이 아가씨도 안녕하세요?”

그녀가 깍듯이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하하. 그냥 편하게 서라 씨라고 불러주세요.”

내가 최 집사님께 말하자 그녀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작은 사모님은 이지스 그룹 주성오 회장님의 하나뿐인 손주며느리시니까요. 그에 적당한 호칭과 대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으시겠지만, 그 부분도 작은 사모님이 노력해서 익숙해지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나는 온화한 미소에서 나오는 단호함에 깜짝 놀랐다.

내가 놀란 것을 알아차렸는지 최 집사님은 더욱 온화한 표정을 만들었다.

“천천히 하시면 됩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네? 아, 네…….”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가자 주성오 회장님과 결혼식 때 잠깐 뵈었던 세훈의 고모 내외분이 계셨다.

“안녕하세요.”

내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하자 가만히 바라보던 설이 나와 같이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테요.”

그 모습을 보고 주성오 회장님이 껄껄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그래. 설이도 어서 와라. 세훈이에게 연락은 받았다.”

“네.”

주성오 회장님은 설에게 시선을 옮겼다.

“주설. 엄마 아빠가 생기니 좋으냐?”

“응!”

설이는 요즘 엄마와 아빠를 자랑하고 다니기 바빴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낯을 가릴 새도 없이 자랑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엄마랑 아빠랑 코 했더!”

“서, 설아. 했어요. 해야지.”

오직 어린이집에서만 존댓말을 하는 설이었다. 나와 그에게 반말하는 것이 익숙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에게 반말하는 설을 보니 조만간 존댓말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하하. 그랬구나. 설이 엄마와 아빠가 생겨서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다행히 주성오 회장님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껄껄 웃으며 넘겼다.

“조카며느리. 존댓말 안 가르쳤나 봐?”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고모님은 꽤 날카롭게 생겼고 생긴 것과 같이 내뱉는 말투도 굉장히 날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모님. 천천히 가르쳐볼게요.”

일단은 아무리 4살 아이라도 보는 눈에 따라 버릇없어 보일 수 있으니 알겠다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서두를 것 없어. 아직 4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천천히 하면 돼.”

회장님이 그의 딸을 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 말에 세훈의 고모, 주희라는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우리 아버지, 성현이 장가가서 애 낳아도 그렇게 예뻐해 주시려나?”

그러자 주성오 회장님이 다시 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고나 치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장가나 가라고 해.”

그 말에 고모님이 펄쩍 뛰었다.

“아버지! 우리 성현이가 무슨 사고를 그렇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고모님은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더니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떴다.

“신경 쓰지 마라. 워낙 성격이 불같아. 그런 건 날 닮았지.”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주성오 회장님이 나직이 말하며 설을 향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세훈이 오면 같이 식사나 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나와 설은 주성오 회장님의 뒤를 졸졸 쫓아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설은 얼마 전 동물원에서 산 코끼리 인형을 조물조물하며 내 옆에 얌전히 앉았다.

“그래.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고? 너무 짧게 다녀온 것 아니냐?”

“설이 조금 더 건강해지면 함께 다시 다녀오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인자한 반응에 나도 점점 긴장감을 풀고 주성오 회장님의 질문에 차분히 답해갔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래도, 내 앞에 앉아 스캐너처럼 나를 훑어보고 있는 고모님의 시선에 완전히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잠깐의 정적이 돌았을 때, 나는 그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대뜸 대 핸드폰을 들어 주성오 회장님 앞에 들이밀었다.

“이거, 오늘 설이 어린이집에서 그려온 가족이에요.”

처음 내 행동에 놀라던 주성오 회장님이 내 말에 돋보기를 코에 걸쳐 내 핸드폰에 있는 설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허허허. 이건, 세훈이고, 이건 자네인 것 같고……. 이건 뭐지?”

주성오 회장님이 설이 그린 눙지를 가리켰다.

옆에서 흘긋대던 설이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 할아버지 옆에 가 내 핸드폰 액정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거는 눈지야! 그것도 몰라?”

설이 말했다.

설의 말에 내 등 뒤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어머. 쟤 지금 뭐라는 거니?”

깜짝 놀란 고모님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지야. 눈지. 눈지하고 나하고는 칭구야.”

여전히 핸드폰 액정에 담긴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제 나름대로 친절히 할아버지에게 설명하고 있는 설이었다.

“하하하. 그래. 할아버지가 못 알아봤네.”

“저, 설이 말하는 눙지는요, 제가 키우던 강아지인데요…….”

“눈지는 가족이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 모습에 여전히 껄껄 웃으며 주성오 회장님이 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 할아버지는 언제 그려줄 테냐?”

“응? 아니야. 지끔은 아니야.”

나는 조금씩 나간 정신이 돌아오며 설을 자제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아. 할아버지께는 존댓말 써야지. 어린이집에서는 잘하면서 왜 그럴까…….”

내 말에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고모님이 입을 열었다.

“이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하다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죄송합니다.”

내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서라 씨가 고개 숙일 일 아닙니다.”

언제 도착했는지 그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세훈을 발견한 설이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응. 설이 잘 놀고 있었어?”

“응!”

여전히 가벼운 몸짓으로 설을 안아 올린 그가 설에게 웃어 보였다. 좀전의 날카로운 말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왔냐? 급한 일은 잘 처리했고?”

“네. 잘 해결됐습니다.”

그가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고모님에게도 인사했다.

“그래. 다들 모인 것 같으니 식사하자꾸나.”

눈치 없는 나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세훈과 고모님이었다.

고모님에 대해 딱히 들은 바는 없으나, 세훈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모부랑, 성현이는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왔어.”

“네.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세훈의 말에 콧방귀를 뀐 고모님이 다시 악어와 같은 입을 벌렸다.

“너희 누나는 왜 안 나오니? 하나뿐인 동생 결혼식에 참석도 안 하더니……. 아무리 아프다고는 하지만 너무한 것 아니니?”

“주희라.”

“아니, 아버지 그렇잖아요. 오빠 떠나면서 이 세상에서 저희 남매 단둘인데.”

“시끄럽다. 조용히 밥 먹자.”

날카로운 공기가 다이닝룸을 채웠다.

호화로운 인테리어도, 진수성찬의 만찬도 전혀 빛을 내고 있지 않았다.

“아빠, 나 고기.”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설이 의자에 앉아 발을 팔랑거리며 반찬을 훑더니, 역시나 고기 먼저 찾았다.

그는 굳은 얼굴을 풀고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설의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설의 고기 타령에 얼굴 근육이 풀어진 건 그만이 아니었다.

“고기 찾는 거 보면 딱 주씨 가문이 맞네.”

“회장님은 이제 그만 고기 좀 줄이셔야 해요.”

옆에서 온화하게 웃고 있던 최 집사님이 말을 보탰다.

“허허. 그래야지. 나이 먹으니 소화도 잘 안 돼. 그래도 설이는 아직 어리니까 많이 먹여야겠어. 덩치가 저리 작아서야.”

“서라 씨 들어오고 나서 3킬로나 늘었어요.”

“그래? 허허허.”

이 좋은 음식들을 놔두고 분위기에 눌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설이 덕분에 조금은 풀어진 기분으로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고모님은 휑하니 사라졌고, 차 한 잔씩 하자며 우리를 붙잡은 주 회장님이 최 집사님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