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을… 방에 가둬놓고.

전생에게.

전생아, 왜 이렇게 늦게 왔니. 네가 조금 더 서둘러 왔다면 내가 사고를 쳤겠니?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망했단다. 그래도 찾아와줬으니 용서는 해줄게. 그럼 이제 해결책을 좀 줄래?

‘해결책이 없다고? 이런 쓸모없는 전생 같으니라고!’

난 끄적이던 편지지를 구겨버렸다. 어차피 빌어먹을 전생은 주소도 없다. 그러니 방법은 단 하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뿐이다. 일주일 전 그랬듯 말이다.

**

에리아네 제국의 유일한 대공, 루한 세르비체와 독대를 하는 것만으로 계획의 절반이 성공한 거라 여겼다. 애당초 제국 삼대 공작의 동생인 나, 시에라 벨루니아가 축객령을 받을 거라고 예상한 적도 없지만 말이다.

“대공 전하, 저랑 결혼 좀 하시죠.”

내 패기 넘치는 말에도 대공은 아무런 답 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호기심 같은 긍정적인 감정 대신 귀찮음이 가득했다.

‘황위를 버린 자, 믿는 이의 손에 첫 번째 배필을 잃을지어다.’

역사상 가장 명료한 신탁이었다.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겨우 해석했던 과거의 신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공이 첫 번째 부인을 잃을 거라는 신탁에 모든 귀족들은 몸을 사렸다. 당연하게도 그의 부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검은 머리칼과 은색 눈동자, 날렵한 콧대와 시원한 눈매. 귀족적이고 오만한 태도, 그 태도에 잘 어울리는 권력과 명성. 그런 것들을 이유로 연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꽤 있었지만 말이다.

대공은 나를 그쯤의 여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연인이 되고자 하는 멍청한 불나방 정도로 말이다. 제 발로 자살 행위를 하러 온 여자라니, 할 말을 잃을 만하다. 이럴 때는 말보다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이건 계약서고요. 제 전 재산을 드리겠다는 것과 약혼 기간 중 다른 여자를 만나도 된다는 조항도 있어요. 결혼 이후는 굳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전 죽을 테니까요.”

그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하긴 사교계 영애 중 누구도 대공의 미소를 본 이가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웃어 보일 리가 만무하다.

“공녀가 대공비가 되겠다고? 내 저주에 대해 알고 있긴 하고?”

“알아요. 전하의 첫 번째 부인이 죽게 될 것이란 걸 누가 모르겠어요? 뭐, 정확히는 전하가 첫 번째 부인을 잃는 것이지만요.”

“그걸 알고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것 말이야.”

“계약서 안에 적어두었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읽어보세요.”

답 대신 계약서가 모든 걸 말해주리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껄끄럽기도 했고…. 대공은 별말 없이 계약서를 받아들고는 느긋한 손길로 종이를 읽어 넘겼다. 종이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심장이 멎을 듯 쿵쾅댔다. 한참 뒤, 대공은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계약 조건이, 샤론 그레이의 처형이라고?”

그레이 후작가의 외동딸, 샤론 그레이. 사교계의 악마로 이름난 그녀는 내 원수와 다름없었다. 그 여자가 오빠의 약점을 잡고 우리 남매를 사형대에 올리려 했기 때문이다.

“네,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예요. 괜한 사람을 벌주자는 게 아닙니다. 살인 미수, 협박, 납치 및 감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여자거든요. 악질 중의 악질이죠.”

아마 그도 샤론의 악행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샤론은 제국을 대표하는 악녀로 유명했으니까. 역시나 대공은 그리 놀랍지 않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이런 일쯤은 공녀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샤론 그레이의 소문만을 이용하더라도 공녀의 신분이라면 수사를 시작하게 만들 수 있을 테고. 목숨까지 바치려 한다는 게 쉽게 이해되진 않군.”

심호흡하자. 심호흡.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해서는 안 된다. 예상 질문을 뽑아 연습까지 했으니 준비한 대로 말하기만 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샤론에게 협박당하고 있어요. 약점이 잡혔거든요. 툭 하면 협박 편지가 와요. 불시에 제게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기도 하죠. 저 혼자 움직여서 뭔가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해 오빠의 약점이지만, 그것까지 말하진 않기로 했다. 이 약점이 까발려지는 순간 오빠는 역사상 손꼽히는 패륜아가 될 테니 말이다. 나로 인해 생긴 약점이니 내가 책임지고 싶다. 어릴 적 오빠가 그랬듯, 나 또한 오빠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뭐, 제롬 벨루니아, 아니 오빠는 이런 내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 고기나 썰고 있겠지만.

“더는 묻지 말아 주세요. 알면 다쳐요.”

대공은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끝났다는 걸 알려주듯 계약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나마 계약서를 자신의 쪽으로 가지고 가는 대공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민해보도록 하지.”

대공의 애매한 답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방긋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 중대한 사안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최선을 다해 인내하며 내가 대공의 희생양 역할에 제격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러나 사흘 뒤, 나는 쌓아 올리던 인내심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다시 샤론의 협박 편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대공을 찾아가 팔팔 뛰었다. 부디 대공의 마음에 내 간절함이 닿기를 바라며…… 그렇게 애를 썼는데.

“대공 전하, 그냥 도장 한 번만 찍으면 된다니까요? 저 죽으면 제 돈 다 가져요! 하늘에서 돈이 내린다! 와,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하지 않아요?”

그래봤자 대공은 나보다 돈이 많았고.

“콜록, 제가 사실 몸이 안 좋아서…. 제 소원은 죽기 전에 결혼하는 거예요. 어때요?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소원 한번 들어주는 건?”

많은 돈에 비해 감수성은 바닥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의 마음에 내 간절함이 닿은 건 아니었다. 대공은 나와의 계약 결혼이 손해보다 이익을 가져오리라 판단한 것이다. 동정하는 마음만으로 누군가를 도울 대공이 아니니. 어쩌면 황제에게 결혼을 독촉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쨌든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도장 찍힌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그때는 샤론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목숨을 버릴 수도, 재산을 전부 포기할 수도 있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날의 아침, 나는 샤론을 죽이기 위해 뭐든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기억이야.”

전생의 기억은 이 세상이 내가 쓴 소설 속이라고 말했다. 전생에 가난한 작가이던 내가 나도 못하는 연애를 주인공들에게 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울분이 찬 나머지 새드엔딩으로 완결시킨 소설이었다. 뭐, 울분이 차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줄 모르는 내 소설은 늘 새드엔딩이었지만.

<정의 따위 너나 챙겨.>

주인공은 그레이 후작가의 샤론과 제국의 삼대 공작 헤리온 제오노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순간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헤리온은 악명 높은 악녀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이게 되고, 샤론은 정의로운 헤리온을 타락시키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접근해가던 두 사람은 조금씩 사랑에 젖어간다.

샤론은 헤리온과 가족처럼 지내는 벨루니아 공작가를 경멸한다. 벨루니아 공작가로 인해 헤리온의 타락이 더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샤론은 벨루니아 공작의 약점을 잡고 공녀를 협박한다. 샤론과 공녀가 사교계의 대표적인 라이벌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교계 귀족들은 벨루니아 공녀를 지지했다. 쉬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진 공녀를, 방탕하기로 소문난 샤론보다 옹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샤론의 편을 드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숨죽여 사느냐고 소설에 잘 등장하지도 않던 공녀가 저주받은 대공과 손을 잡고 샤론을 처단한 것은 샤론이 프러포즈를 받은 다음날이었다.

“내가, 내가 공녀라니!”

연분홍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금안, 벨루니아 공작의 동생. 이 모든 것이 내가 샤론을 처단하고 죽는 공녀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공과의 계약 결혼으로 여주인공을 죽이고, 결국 대공의 저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벨루니아의 공녀 말이다.

소설 속에서 남주 헤리온은 혼자 남겨진다. 사랑하던 연인도, 가족 같던 친구와 그의 동생도 없이. 혼자 남겨진 채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경악할 부분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죽은 뒤 오빠가 나를 따라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빠가 나 때문에 죽는다고?’

내 목숨을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오빠의 목숨만을 그래선 안 된다. 오빠는 날 위해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날 위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짓이든 했다. 그런 오빠가 나를 따라 죽음을 택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악착같이 살아서 오빠 곁에 있어야겠어.’

22년 만에 처음으로 무병장수를 희망해보기로 했다. 오빠를 위해!

**

“…결혼 계약 좀 파기해주세요.”

순식간의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공으로선 어이가 없을 게 분명하다. 간절하다며 결혼을 제안하더니, 이번엔 계약 파기를 요구하니. 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샤론 그레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가만히 계시면 돼요. 편하고 좋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

“그렇다면 계약 파기도 하지 못하겠군.”

대공은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자리를 떴다. 난 그의 서재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야 했다. 처참히 무시당했다 봐도 좋았다.

그러나 이쯤에서 포기하면 내가 아니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가 귀찮게 굴었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시간 괜찮으면 계약 파기 좀 해줄래요? 아주 간단한데, 그냥 종이 한 번만 찢으면 돼요.”

“난 바빠서.”

거절당하면 다음 날 또 찾아갔다.

“상쾌한 아침이에요, 그런 기념으로 계약 좀 파기해줄래요?”

“아침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렇게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종이를 찢으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해요, 이참에 우리 계약서를…….”

“기각.”

“그러지 말고, 긍정적인 검토 부탁해요!”

“기각.”

어느 순간부터 그는 성의 한 자락 찾아볼 수 없는 ‘기각’만 반복하기 시작했다. 내가 인간과 대화를 하는 건지, 기계와 대화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체 어째서 계약 파기를 해주지 않는 걸까. 분명 자기도 처음엔 계약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 했으면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이없고 당황스러울 건 알지만, 어떻게 하든지 대공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다들 사랑에 빠지잖아.’

로맨스 소설의 계약 결혼에는 절대 법칙이 있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사랑에 빠지고, 이혼이나 계약 파기를 해달라고 하면 절대 해주지 않는다. 금기를 깨는 맛이 있는 걸까.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을 갈구한다면? 당신을 사랑한다며 유혹하려고 발악한다면? 이 세계도 결국 로맨스 소설 속 아닌가. 아마 질색하며 날 떼어낼 게 분명하다. 전생이라고 하더라도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 나름 이쪽 분야는 능통하다 자신할 수 있다.

‘대공을 유혹한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난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제 대공의 앞날에 창창한 지옥 길이 열리리라.

몇 번의 다짐과 만반의 준비 끝에 나는 새벽부터 부리나케 대공가로 달려갔다.

“뭐해요?”

“일.”

“저한테도 물어봐 줘요.”

“뭐해.”

좋다. 여기까지 왔으면 작전 성공이다.

“루한 생각이요.”

그의 미간이 이례적으로 금 갔다. 그 표정 안에 담긴 게 당황인지 분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대공은 내 드레스 소매를 살포시 잡고는 집무실로 이끌었다. 더러운 쓰레기를 줍는 듯한 동작이었다.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했지?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아니요, 보고 싶어서 달려오느라고 아직 한 끼도 못 먹었어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는 그를 보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럼에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 소파에 앉아 몇 번이고 기각 소리를 들은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불공평한 것 같으면 루한도 내 이름 불러요. 결혼할 사이에 이름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잖아요!”

“…….”

“자, 해 봐요. 시에라. 어서!”

내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비비 꼬아대자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좋은 징조다. 이렇게 몸서리치듯 싫어한다는 것은.

“고작 하루 전에, 계약을 파기해달라고 했으면서 무슨 속셈이지?”

“계약 말고 진짜 사랑을 하자는 의미였죠! 몰라요? 진짜 사랑?”

“뭐? 무슨 사랑?”

난 내 모든 정성을 담아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

“진짜 사랑!”

어떻게 이럴까.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마저 이렇게 괴롭다니. 대공의 무미건조한 반응과 달리 내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당연했다.

“루한, 말해 봐요. 사랑해! 시에라! 나랑 결혼하자!”

아무리 외쳐도 그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럽다. 이젠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붉게 변하고 있다. 붉게 달아오른 몸이 따갑게 느껴졌다. 내가 자동반사적으로 손부채질하자, 그제야 대공의 표정이 변했다. 비아냥대는 웃음이라는 점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부끄러운 건 아나 보지?”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난 부채질을 멈추지 못했다. 본능적인 생존 욕구와 비슷했다. 그래, 진짜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렇게 스스로 세뇌시키려 해 봐도 잘 모르겠다.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제발 뒷담화는 안 들리게 좀 했으면 좋겠다. 사용인들의 속닥거림이 계속해서 내 심기를 어지럽혔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

“다들 왜 그렇게 날 쳐다봐? 내가 너무 예뻐?”

“네, 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저은 하녀가 제 대답의 뜻을 알고 뒤늦게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굳이 뭐라 하지 않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용인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상한 소문이라도 도는 모양이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괜한 소리로 은근슬쩍 캐물어 보려 했지만 실토하는 이가 없다. 어지간한 소문이 아니곤 이렇게까지 입조심을 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다!

일단은 밥부터 좀 먹은 뒤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니까 식사라도 좀 마음 편히 했으면 좋겠는데.

테이블에 식기를 세팅하던 하녀가 손을 떨며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나, 나이프 바꿔드리겠습니다.”

떨어트린 나이프를 주워드는 하녀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식당까지 닿은 듯하다. 휴, 편하게 식사하긴 틀렸나보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다가 속으로 숫자를 둘까지 센 뒤 등을 돌렸다.

“꺅!”

셋까지 다 세고 돌까 고민했는데, 둘까지만 센 나를 칭찬하고 싶다. 음식을 내오던 주방장이 놀라 소리치며 주저앉았다. 하녀들은 주방장을 일으키며 떨어진 음식을 주워 담았다. 내가 참지 못하고 대놓고 이유를 물으려던 참이었다.

“시엘, 시에라!”

바보 같은 오빠 제롬 벨루니아는 날 부르짖으며 뛰어 들어왔다. 누가 보면 내가 죽었다가 돌아오기라도 한 줄 알겠다. 아무래도 오빠까지 소문을 알고 있나 보다. 이쯤 되면 나만 모르는 것 같은데?

“시에라! 네 방을 옮겨야겠어!”

뜬금없는 소리에 절로 눈살이 찌푸렸다. 방을 옮기는 게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데….

“방을 왜 바꿔? 이 오빠, 자기가 방 바꾸는 거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네…?”

명백히 부정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이상한 소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네 침실 하녀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대!”

하여간, 사용인들 입을 타면 소문이 과장되기 마련인데…. 오빠는 너무 예민하게 군다.

“그니까 무슨 이상한 소리. 내가 밤에 귀신이랑 대화라도 한대?”

오빠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지금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방을 바꿀만한 사건은 없었다.

“괴물 소리가 들렸다잖아! 하녀가 재연까지 했다니까? 끄아악! 이러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내 양팔을 쓰다듬었다. 오빠의 완벽한 연기에 소름이 돋았다. 슬프게도 저 괴물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어젯밤, 이불을 뻥뻥 차던 발, 그리고 괴물 소리….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그 괴물 소리가 내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리고 격분해 몸을 일으켰다.

“내 목소리가 어딜 봐서 괴물이야!”

격분한 내 반응에 오빠는 이제야 상황을 눈치 챈 듯했다. 우리의 식탁은 순식간에 차게 식어버렸다. 오빠도 나도 말이 없었다.

사용인들 사이에선 두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하나는 누군가가 비밀리에 동물을 키운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내가 미쳤다는 것. 그걸 가지고 돈내기까지 한 이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