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드디어 키르탄

황자의 막사는 급히 만들어진 것치고는 제법 근사했다. 작전용 테이블과 의자, 한쪽엔 널찍한 침대까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레오나르도와 세레나가 담소를 나누었다. 언제 전투가 있었냐는 듯 황자의 표정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는 이런 일이 익숙했지만 세레나도 같을 수는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기습 공격을 받은 그녀는 불안으로 심장이 쫄깃했다.

“말씀 안 해주실 거예요?”

세레나의 말에 레오나르도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우리 아가씨 무엇이 궁금한 거지?”

“아까 공격해온 자들이요. 진짜 산적이 맞아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연애를 시작한 이래로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지만 가끔은 황자의 의중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산적의 솜씨는 아니었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황자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쓸어내렸다. 황태자가 변방으로 추방된 지 벌써 이 년이었다. 그가 산맥을 넘어가는 자신을 노릴 거라는 것은 이미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분명히 전문적인 살수를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는 실력이 없는 용병들이어서 오히려 시시하게 전투가 끝나버린 것은 의외였다.

“황태자가 살수를 보낸 거지요?”

“모른다. 자백을 받아낼 시간이 없었어.”

대놓고 기습할 사람이야 뻔했다. 하지만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었다. 기습한 자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살아있는 자들은 도망쳤다. 그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범인을 찾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사절단은 빨리 산맥을 벗어나야 했으니까.

“하지만 황태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이제 그만. 골치 아픈 생각은 털어버리고 이제 우리만의 시간을 갖자고.”

사절단이 출발했을 때부터 자신의 눈은 계속 세레나를 쫓았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시선이 갔다. 이럴까 봐 그녀를 데려오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세레나를 데려가자는 악마의 속삭임에 그는 무너져 버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황자비가 될 사람이었다. 위험하지만 함께 있고 싶었다. 맹수 같은 황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세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점점 다가오는 황자를 보면서 그녀가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느긋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막사 밖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막사 안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묘한 자극이 되었다. 황자를 피해서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그녀가 점점 뒤로 몸을 숨겼다. 도망치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그가 여유롭게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

“누구라도 들어오면 어쩌시려고?”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숙녀의 명예를 위협하고 계시잖아요.”

그녀의 사소한 저항이 가소롭다는 듯이 그가 걸음을 멈추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람들 눈치 보느라 손도 잡아보지 못한지가 일주일이 넘었어.”

“말씀만 하시면 손은 언제든지 잡게 해드릴 수 있었어요.”

“그럼 작고 예쁜 그 손부터 이리 내놓으시지.”

그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세레나의 손을 잡아서 깍지를 꼈다. 그러자 두 손에서 전기가 짜릿하고 흘렀다. 손의 느낌이 이상해서 세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서 끌어당기자 그녀가 훅하고 그의 품으로 딸려왔다. 세레나가 마치 누가 듣는 것처럼 속삭였다.

“손만 잡게 해드린다는 말이었는데….”

“거짓말.”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투명한 푸른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남자의 눈에 짙은 갈망이 엿보였다. 그가 살며시 그녀의 입술에 버드 키스를 날렸다. 한 번, 두 번, 쪽하고 입술이 떨어지자 세레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야릇한 기운이 흘렀다. 천천히 레오나르도가 고개를 내렸다. 남자의 입술이 끝도 없이 사랑하는 여자의 입속을 헤맸다. 키스가 깊어지고 그의 은밀한 손길이 여자의 늘씬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세레나가 숨을 들이마시며 속삭였다.

“누구라도 들어오면….”

“아무도 안 와.”

거침없는 손길이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따라 내려가자 갑자기 달콤하고 동물적인 욕망이 두 사람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정신없이 서로를 탐닉하고 있을 때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전하, 쉬시는 데 죄송합니다. 잠깐 나오셔야겠습니다.”

“기다려!”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레오나르도가 세레나를 마지못해 떼어냈다.

“내 부하들은 왜 이리 타이밍을 못 맞추는지 모르겠군.”

그가 흐트러진 채 헐떡이는 세레나의 옷매무시를 바로 잡아주었다.

“숙녀의 명예를 훼손했으니 반드시 책임을 져야겠지?”

“지금 농담이 나와요?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 하다고요. 빨리 가보세요.”

“기다릴래?”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진짜 못 말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세레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플로리아가 모닥불 앞에서 불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친구의 모습이 짠해 보여 세레나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리아, 왜 그러고 있어?”

“아무것도 안 해.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편해.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중.”

“그럼 나도 멍 좀 때려볼까.”

세레나도 플로리아 옆에 앉아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들은 소꿉친구였다.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 사이.

“황자 전하와는 좋은 시간 보냈어?”

정곡을 찔리자 세레나가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이실직고했다.

“미안해, 리아. 네 마음이 얼마나 심란한지 잘 알면서 나만….”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해. 너와 황자 전하가 잘 되어서 내가 얼마나 기쁜 줄 알아? 내 눈치 보지 말고 있을 때 잘해.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후회? 네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후회를 해.”

“여러 가지 것이 후회돼. 겁먹고 용기 내지 못했던 것, 좀 더 솔직하지 못했던 나. 루치아노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했거든. 결국 못난 나 때문에 키르탄으로 추방당했고.”

플로리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루치아노가 추방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시때때로 아려왔다. 루치아노는 자신을 사랑해서 잘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모닥불만 뚫어지라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중얼거렸다.

“루치아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아.”

“너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플레임 경은 호락호락 당할 사람이 절대 아니야.”

“그럴까?”

“당연하지. 플레임 공자를 상대하려면 특공대 정도는 붙어야 한다고.”

“위로가 되네. 대단한 남자긴 하지.”

“맞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가져. 이제 곧 네 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쓸쓸해 보이는 플로리아의 작은 어깨를 세레나가 듬직하게 안아주었다. 친구의 위로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밤이었다.

*

다음날,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려서 사절단은 산을 내려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 다음 산맥을 넘어갈 때 또 한 번 기습공격이 있었다. 이번에 살수들은 실력이 더 월등한 자들이었지만 소드 마스터 호위 기사들의 철통같은 수비를 뚫지는 못했다. 살수들은 황자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모두 사살되거나 도망쳤다.

말에 탄 사람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고스란히 다 맞아야 했다. 비에 홀딱 젖은 채 사절단은 펠레아 제국을 떠난 지 열흘 만에 키르탄 왕국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자 키르탄에서 마중 나온 기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르탄의 슈트라우스 왕이 보낸 사자들이었다.

“먼 길 오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캐빈 슈트라우스입니다.”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나르도 폰 드미트리입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키르탄 궁까지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키르탄을 대표해서 키르탄의 캐빈 왕자가 펠레아 사절단을 마중 나왔다. 계속된 암살자들의 기습공격으로 바짝 긴장해 있던 사절단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키르탄 궁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다. 키르탄은 펠레아보다 더 북쪽에 있어 날씨가 훨씬 추웠다. 나란히 말을 몰면서 캐빈 왕자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루치아노 플레임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잘 있습니까? 최근에 연락이 끊겨서 신변에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히 잘 있습니다. 다만 펠레아 제국에서 루치아노 플레임의 감시를 강화해 달라는 황명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우호국으로서 황명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와 관련해서는 저에게 물어보실 게 아니라 펠레아 궁에 물어보시는 편이 더 빠르실 겁니다.”

루치아노의 손발을 묶기 위해 황태자가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황자는 황태자의 마수를 사전에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했다. 이틀을 더 이동한 후 그들은 드디어 키르탄의 수도 호크만에 입성했다.

“도착했습니다.”

아치형의 거대한 왕궁의 문을 통과해서 사절단은 웅장한 키르탄의 궁으로 들어갔다. 키르탄 왕궁의 규모는 펠레아 궁 못지않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치형 건물들과 잘 가꾸어진 정원,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궁전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사절단은 건물 중 한 채를 통째로 숙소로 배정받았다.

숙소에 짐을 푼 뒤 레오나르도는 예를 갖춰 의복을 차려입은 후 캐빈 왕자를 따라 키르탄의 왕을 알현하러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숙소에서 쉴 수 있었다. 플로리아가 짐을 풀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세레나가 들어왔다.

“어서 와. 셀, 피곤했지? 짐은 풀었어?”

“그것보다 리아, 황자 전하가 가시면서 귀띔해 주셨는데, 플레임 공자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대.”

“뭐라고?”

“우리를 마중 나왔던 캐빈 왕자가 힘을 써 주셨다나 봐.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게 됐어. 내가 다 떨린다. 리아.”

플로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리아. 빨리 준비하자. 이렇게 꼬질꼬질한 상태로 너의 님을 만날 순 없어.”

“내 몰골이 이상해?”

“응, 이상해. 일단 씻자.”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플로리아는 기억할 수 없었다. 펠레아에서 데리고 온 하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플로리아를 씻기고 예쁜 드레스를 입혀주고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려준 뒤 화장을 해주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까부터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 한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플로리아 아가씨, 현관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루치아노 플레임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두근. 창백하게 질려서 숨을 내쉬는 플로리아 대신에 세레나가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전해주세요. 바로 내려갈 거라고요.”

세레나가 활짝 웃으며 차가운 친구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서 가. 이 년 만에 만나는 님이라니 내가 다 흥분된다.”

“꿈은 아니겠지?”

세레나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플로리아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절대 아니야. 자, 빨리 일어나. 기다리는 님 애 그만 태우고.”

“나 어때? 조금은 예뻐 보여?”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지금 아주 예뻐.”

세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로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방을 뛰쳐나갔다. 왜 하필 방은 이층인 거야. 그에게 가는 길이 너무 멀잖아. 거의 뛰다시피 내려오는 플로리아의 모습을 루치아노가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천천히. 고슴도치. 나 어디 안 가. 그러다 넘어진다.”

그는 분명히 루치아노 플레임이었다. 키가 훌쩍 커졌고 체격이 훨씬 좋아졌지만, 분명히 루치아노 플레임이 맞았다. 내려오던 모습 그대로 계단에 멈춰버린 플로리아의 모습을 그가 눈에 새겼다. 왜 이리 떨리는 거야. 덜덜 떨면서 얼음처럼 굳어 버렸지만, 신경은 온통 그의 움직임에 가 있었다. 현관은 숨이 막힐 듯이 조용했다.

“오랜만이야.”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수면 아래에 묻어두었던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에 물기가 어렸다.

“응, 루치, 오랜만이야.”

그녀가 간신히 대답했다. 어떻게 이 목소리를 듣지 않고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는 이 긴 시간을 떨어져 있을 수가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르는 원망이 새어 나올 것 같아 플로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건강하게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감정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한 걸음 한 걸음 루치아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플로리아의 뇌리에 아주 느리게 각인되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빨간 머리, 더욱 깊어진 연회색 눈동자, 사내다워지고 성숙해진 조각 같은 얼굴. 그의 존재가 그녀를 압도했다. 마침내 루치아노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계단을 두세 칸 정도 남겨놓고 눈높이가 맞자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윽고 플로리아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런,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네. 고슴도치! 여전히 울보구나.”

“너 때문이야. 네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꼭 꿈같아서.”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이거 진짜 꿈 아니지? 루치아노 플레임 맞지?”

“맞아. 바보야. 만져볼래?”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따뜻한 손에서 그녀의 차가운 손으로 마나가 흘러들어왔다. 그 생소하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느낌에 그녀가 그만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루치아노의 따뜻한 품을 끌어안자 그리웠던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루치, 오, 나의 루치.”

그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흐느껴 우는 플로리아 때문에 루치아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는 그녀의 가냘픈 몸을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향긋한 플로리아의 향기가 그를 취하게 했다. 어떻게 잊고 살 수가 있을까. 정신을 놓게 만드는 이 여자만의 체취를. 맞춘 것처럼 품에 안기는 이 여린 몸을. 싱그러운 풀밭 같은 에메랄드 눈동자를.

다시 만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홀로 놓고 떠났다는 사실에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는지. 루치아노가 작은 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다시 만났을 때는 훨씬 단단한 모습을 보여 주려 노력했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플로리아는 울보처럼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었어. 고슴도치.”

“나는 보고 싶어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이 년 만에 보는 연회색 눈이 수많은 감정을 담고 일렁거렸다. 그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참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던 플로리아가 드디어 제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또다시 미성숙한 소녀처럼 울고 있다니.

“평소에는 잘 안 울어. 오늘은 너를 만나서 우는 거야. 너를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그래.”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연신 닦아 내렸다. 그 섬세한 손놀림에 심장이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격하게 두근거리고 뺨이 달아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은 하염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선이 훨씬 남자다워졌다.

“눈물겨운 재회는 이제 끝났나요?”

세레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플레임 공자, 너무 근사해서 깜짝 놀랐잖아요. 역시 기대 이상이에요.”

루치아노 플레임은 매혹적인 남자로 여전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기운을 가졌다.

“블랙 영애, 그대 역시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니 우리 리아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세레나의 말에 루치아노가 천천히 플로리아를 바라보았다. 고슴도치의 눈이 잠깐 사이에 울어서 퉁퉁 부어있었다. 코도 빨갛고 입은 눈물을 참느라 앙다물었다.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여전히 못생겼는데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여전히 울보에다가.”

플로리아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렸다. 오목조목한 얼굴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여성스럽고 단아했다. 이제 확연히 숙녀 티가 나는 몸매는 완연한 여자였다. 말없이 바라보는 루치아노의 시선만으로도 플로리아의 얼굴은 빨개졌다.

“여전히 짓궂으시네요. 언제까지 밖에 서 계실 거예요? 응접실로 들어가세요. 차를 내오라고 할게요. 아니 방해하면 안 되겠구나. 두 분이 좋은 시간 보내시라고.”

세레나가 사랑의 큐피드처럼 속사포를 쏘아대고는 응접실로 두 사람을 밀어 넣고 문을 닫고 나갔다. 비로소 온전히 두 사람만 있게 되었다. 얼굴이 상기된 채 앉아 있는 플로리아를 루치아노가 벽에 기대어 느긋하게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