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１５

“집에 있는 거 알고 있어. 열어.”

성찬은 기어이 주현의 집을 찾아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으름장을 놓는 날카로운 음성이 문을 뚫고 주현의 귀에 꽂혔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듯 몇 번이나 문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덜컹거렸다.

“부수고 들어갈까?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해줄게.”

빨갛게 핏발 선 눈으로 문을 노려보며 성찬은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주현은 체념한 듯 문을 반쯤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성찬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넌 날 자극하는 방법이 뭔지 너무 잘 알아.”

“당신이 알려줬잖아. 상대를 무참히 밟는 방법.”

“그딴 식으로 받아치지 마. 그래 봤자 난 너 못 쳐.”

성찬은 실소를 터뜨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차라리 한 대 치고 끝내. 스캔들도 너랑 내 관계도.”

“네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해줄 것 같아?”

성찬은 주현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맹수처럼 주현을 덮치려는 듯, 한 손을 쳐들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에 덜컥 겁이 난 주현은 성찬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몸으로 문을 막고, 두 손으로 문을 힘차게 당겼다. 잽싸게 성찬의 긴 다리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리를 문 안쪽에 들이끼우고, 주현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벗어나기 위해 주현은 거칠게 팔목을 비틀었지만, 빠져나가기엔 힘에 부쳤다.  

“놔. 놓고 말해.”

“뭐가 문젠데. 뭘 원하는 거야?!”

“지겨우니까 이젠 끝내자고!”

“막 나가자는 거지, 지금?”

성찬이 주현의 팔을 내려놓고 밀친 뒤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에 난입한 성찬은 거실에 놓여 있던 물건들을 바닥에 던졌다.  

꽃병이 깨지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벽에 걸려 있던 그림도 엉망이 되었다. 그만하라고, 앙칼진 목소리로 몇 번이나 외쳤지만, 성찬이 물건을 집어던지며 만들어낸 소음에 주현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마치 이 집이 주현의 육체라도 된 것처럼 그는 거칠게 내리치고, 깨뜨리고, 파괴했다. 유리 파편이 튀어 주현의 얼굴에 핏빛 실금이 그어졌다.  

“말했잖아. 네가 마음대로 방송 펑크 내고, 제멋대로 굴어도 난 너 못 친다고.”

성찬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주현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성찬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묻자. 기어이 내가 한 말을 거슬러서 네가 얻는 게 뭐냐, 주현아.”

“당신의 무한한 관심과 자극.”

“그래서 만족해?”

성찬은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물었다.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었으니, 반은 성공한 거지.”

그녀는 무표정을 고수하며 바닥에 깨져 있는 꽃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을 왜 크게 만들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머리가 안 돌아가?”

“그래서 얻은 결론이야.”

“백치미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머리가 나쁜지 몰랐네.”

성찬은 실소를 터뜨리며 핸드폰 검색을 한 뒤 캡처한 화면을 주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차주현, 안하무인의 싸가지로 방송계에서는 정평이 나. 관계자들의 폭탄 발언. 차주현과 서강우 작가 사이의 진실 공방, 승자는?]

주현이 방송을 펑크 내고 난 뒤 수십 개의 보도가 쏟아졌다. 기사마다 달려있는 댓글엔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다.  

“폭탄 발언한 관계자들 상 줘야겠네.”

주현은 유리파편이 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맨발로 걸어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주현의 발바닥엔 핏물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 발언한 관계자들은 입 다물게 만드는 게 서 대표 일인데.”

성찬은 주현의 말을 듣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괜한 이야기 나오지 않게 떡밥 흘려. 이슈야 만들면 되는 거지. 증거 사진 배포하고.”

서 대표와의 통화라는 것을 눈치 챈 주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찬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통화를 하는 성찬의 손에서 핸드폰을 앗아갔다.  

“안 내놔?”

성찬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주현은 서늘한 얼굴로 빼앗은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  

“뇌물 수수 의혹 덮으려는 계획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주현이 빽 소리쳤다.  

“일부러 날 자극하려는 게 아니면 그 입 다물어.”

“우리 관계, 당신이 벌인 모든 일들, 불어버릴 거야. 난 지금까지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했어.”

“그래서? 내가 못 해준 건 뭔데.”

주현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성찬을 흘겨보았다.  

“네가 지금 발 딛고 선 모든 게 다 내 거야.”

“…….”

“내가 준 거라고.”

성찬은 토를 달 수 없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 모든 걸 앗아갔어.”

지난날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긴 주현의 눈빛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 떠올리며 주현은 수치심이 일었다. 자신을 담고 있는 육체가 부패한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지며 혐오감이 일었다. 성찬이 갖고 놀기 좋은 인형이 된 조건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 별 볼일 없던 소속사의 단역 배우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수치와 모욕을 참자, 인기와 명예가 뒤따라왔다. 한데 모든 것을 이룬 지금, 모든 것들이 모래알처럼 허황되게 느껴졌다.

“넌 마음 빼고 모든 걸 줬지, 나한테.”

“……!”

“계산 잘해. 여기서 나한테 칼을 겨누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이야.”

성찬은 주현의 마음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설마, 그래서 이 스캔들도 조작한 거였어…? 나쁜 놈!”

주현이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

“결혼정보회사 인수하고 알게 된 재미난 사실인데, 사람마다 등급이 있다는 거.”

주현의 날선 시선은 성찬에게 머물러 있었다. 키득 웃으며 성찬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린 채 웃었다.

“재산 1000억 이상, 판사나 병원장 아들 1등급, 500억 원 이상의 재산에 1급 공무원 2등급. 그 밑으로 하바리가 수두룩하지. 넌 어느 수준일 것 같아?”

“…….”

“내 덕분에 이 정도까지 올라왔지만, 실상 너 같은 계집애는 등급 축에도 못 끼워 넣어.”

성찬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손으로 주현의 턱 끝을 잡았다. 주현은 손길을 뿌리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딱 이 정도가 네 수준이야. 그런데 뭐? 누가 누구랑 관계를 인정해?”

“…….”

“싼 티 나게 굴지 말자고. 너 쿨한 것 좋아한다며 왜 이렇게 질척대?”

“먼저 시작한 건 당신이야!”

주현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앙칼지게 외쳤다.  

“불고 싶으면 불어. 이 스캔들이 비리를 덮기 위한 조작된 거라고.”

“…….”

“말하면 누가 네 말을 믿어줄 것 같아?”

“자만하지 마. 내가 갖고 있는 패가 어떤 건 줄 알고.”

“자만이 아니라 확신이야. 이 사실을 알면 서강우가 널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봐.”

성찬이 강우의 이름을 언급하자 주현은 창백하게 얼굴이 굳었다. 주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성찬은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시작도 네가 냈으니 끝도 네가 내야지. 사과 기자회견 할 거니까 준비해.”     

***     

“기사, 보셨어요?”

따끈한 밀크티를 건네며 희연이 살짝 미소 지었다. 미례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하며 잔을 건네받았다.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만들어줄 필요 없겠네. 희연 씨가 타 준 밀크 티가 더 맛있는 걸.”

“다행이네요. 이젠 제가 타 드릴게요. 위로가 필요할 땐 언제든.”

희연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기사는 아침에 봤어. 강우와 통화도 했고.”

“많이 놀라셨죠?”

“그렇긴 하지만,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

미례는 허리를 바로 세우며 담담하게 말했다.  

“차주현에게 씌워졌던 동정표는 지워졌으니 강우의 말은 설득력을 얻게 됐어.”

주현은 MC를 맡고 있는 프로그램의 녹화를 앞두고, 무단으로 촬영장을 이탈했다. 차주현 방송 펑크라는 한 줄의 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기사들을 탄생시켰다.  

[톱스타 갚질, 안하무인으로 촬영장에 6시간 늦기도…. 차주현 인성 논란]

미례는 핸드폰 화면에 뜬 뉴스 헤드라인을 보여주었다.  

“차주현의 인성 논란을 증언하는 방송 관계자들도 여럿 있던데. 희연 씨도 기사 봤지?”

“네. 차주현은… 왜 그랬을까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희연은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주현은 불안해한 걸까.

지금 시기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커리어에 금이 가게 만든 건 무슨 연유일까.  

그때， 희연의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잠시 만요.”

전화를 받는다는 눈짓을 한 뒤 희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가능해?]

발신자는 승호였다.  

“응. 말해.”

[기자들이 찾아왔어. ]

“기자들이? 왜?”

[프로그램 진행자인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

“내가 경솔했네. 어려운 부탁을 해서 너까지 곤란하게 만들고.”

［아니야. 촬영을 거부한 건 전적으로 차주현의 의지야.］

승호는 주차장에서 자신의 손을 뿌리치던 주현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혹시 뭐 들은 말이 있어?”

승호는 설명하기 어려운 듯 머뭇거리다 모호한 확실성과 염려가 뒤섞인 투로 말했다.  

［별다른 말은 없었어. 단지, 논란이 될 이슈를 일부러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어.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차주현은 스캔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이었어．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보였거든．］

“넌, 기자들에게 뭐라고 말했어?”

［아무 말도. 내가 아니어도 차주현은 충분히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 있는 것 같거든.］

어쩐지 희연은 주현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별적인 사건들이, 보이지 않는 줄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성찬의 비리 의혹. 강우와 주현의 스캔들.  더킹과 주현의 소속사인 라온 아시아 사이의 유착 관계. 소속사와의 분쟁을 종결시키고 재계약을 맺은 주현의 행보.  동정표로 승승장구하던 주현이 터뜨린 방송 펑크.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또는 우연을 가장한 치밀한 사건인 걸까.  희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통화를 마친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미례에게 말했다.

“팀장님, 부탁드릴 부분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표정이 심각해?”

미례는 희연의 표정이 자못 심각함을 깨닫고, 입가에 머문 웃음기를 거뒀다.  

“라온 아시아 소속 연예인들의 출연 방송, 담당 PD에 대해서 알아볼 방법이 있을까요?”

“그 건은, 이미 알아보고 있어.”

“그걸 팀장님이 어떻게…?”

“강우가 부탁한 건이야.”

“작가님이 직접 그 문제로 연락을 하셨어요?!”

“그래. 원래 어떤 기사가 나든 신경도 안 썼는데, 신기하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미례가 말을 이어갔다.  ‘신경 꺼.’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관심 없어.’ 따위의 방어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강우다.

그런 그가 직접 스캔들과 더킹의 관계에 대해 정보를 알아보다니. 희연은 진심으로 놀란 듯 옅은 한숨을 쉬며 빈 잔의 입구 부분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희연 씨는 강우의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급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희연은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더 킹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걸 눈치 채신 게 아닐까요? 전 작가님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점이 불안했어요. 자신을 소중하게 돌보지 않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미소 짓는 미례의 눈가에 옅은 주름이 그어졌다.  

“희연 씨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구나? 그 마음이 강우를 변화시킨 것 같네.”

“……?”

“지금 그 녀석은 자신이 아니라, 희연 씨를 위해 움직이려고 마음먹은 것 같거든.”

희연은 의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서강우 작가님이 본인이 아닌 나를 위해 마음을 바꿔먹었다니….  

미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싱그러웠던 미례의 안색이 어두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는데… 강우를 보면 그게 아닌지도 몰라. 어쩐지 희연 씨가 부럽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어투였다.  

＊＊＊

희연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송국 회전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문은 동일한 속도로 지루하게 돌며 움직였다.  

“그래. 물어보자. 물어보면 뭐든 알 수 있을 거야.”

결심이 선 표정으로 희연은 방송국에 들어섰다. 라디오 국으로 넘어오기 이전, 주 PD와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메인 작가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여자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서우진 작가님 맞으신가요？”

“내가 맞는데, 무슨 일이죠？”

“안녕하세요. 전 fate 살롱의 직원이자, 연애카운셀링을 하는 서강우 작가님의 매니저입니다.”

희연이 소개를 마치자 우진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 작가님 매니저분이 저를 찾아오신 거죠？”

“작가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주원형 PD님 아세요?”

“함께 일한 적은 있죠. 근데 주 PD는 왜요?”

“혹시 주 PD 님과 친분이 있는 소속사에 대해 알고 계시나 해서요.”

“많죠.  주 PD가 어떤 사람인데. 이 바닥에서는 잔뼈 굵은 인물이에요. 지금이야 그 사건 뒤로는 팽 당하고, 전 같지 않지만.”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내키지 않는 투로 작가는 대답했다.

“그 사건이란 건 어떤 일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한창 잘나가던 주원형 PD가 라디오 국으로 좌천된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아무리 연줄이 많아도, 보는 눈이 많았으니 물러서는 게 낫다고 판단했겠죠. 방송국 떠나고 난 뒤에도 라디오 쪽에서는 승승장구하는 거 보면 보통 인물은 아니에요. 하긴, 나도 아는 소속사가 많으면 화려한 캐스팅으로 시청률 높이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혀를 쯧 차던 그녀는 한숨을 섞어가며 하소연을 늘어놓듯 중얼거렸다.  

“그게 본인 능력이라고 믿는 작자예요. 직함은 PD인데, 딴마음 먹는 게 대놓고 보여서 같이 일하는 사람 여럿 피해 주는 스타일이랄까. 아무튼, 그 사람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녀는 순순히 대답해주는가 싶더니, 신경질적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묻고 싶은 게 더 있었지만, 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유진은 희연을 지나쳐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방송국을 나온 희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어깨를 살짝 움츠린 그녀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엇? 아니 이게 누구신가.”

걸걸한 음과 특유의 음흉한 눈빛으로 희연을 보고 있는 건 ‘주원형 PD였다.  

“술 한 번 얻어먹기 힘든 비싼 분을 여기서 보네?”

주 PD가 손을 건네며 저 혼자 낄낄 웃었다.  희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서강우 작가는 잘 계시나?”

노골적으로 강우를 안줏거리 삼아 농담을 던지는 태도가 거슬려 무시하고 돌아섰다. 희연이 몸을 돌리자, 원형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역시, 안하무인의 성격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속 편하게 살기 좋아.”

그는 껄떡대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국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만 올라가시죠, 주원형 CP님.”

곁에 있던 남자가 원형에게 말했다．CP라는 말이 거슬려 희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라디오 국 PD가 왜 방송국 CP로 불리는 거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희연은 잠시 혼란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원형과 눈이 마주쳤다. 주 PD는 호칭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희연의 의아한 시선을 눈치 챈 원형은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무슨 소린가 싶지? 내가 제 자리를 찾았거든.”

유심히 보니 원형의 모습이 전과 달랐다.  평소 검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까슬한 수염을 달고 살던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말끔하게 수염을 깎은 원형의 얼굴은 기름기로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