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근데 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인간미 없는 얼굴만큼이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요?”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되물었다.

“결혼식이 내일이잖습니까.”

“결혼식이요?”

대체 누구 결혼식인데 나더러 출근까지 하지 말라는 거야?

“부회장님과 왕분홍 씨 결혼식입니다.”

“네? 제 결혼식이라고요?”

그녀가 내게 농담 할리는 없었다.

되물은 건 지극히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모르는 내 결혼식이라니.’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백지수표도 결혼얘기도 내일 당장 결혼식이라는 것도.

‘꿈인가?’

하고 손등을 꼬집어보았지만 아니었다.

‘어쩌지?’

내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 조차 헷갈렸다.

그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 건 사실인데, 그 결혼식이 내일이라는 게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부회장님께 못 들으셨습니까?”

“제가 모르는 제 결혼식이 내일이라는 거죠?”

내가 그와 결혼을 하는 게 맞는지, 신종 사기는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긴, 나한테서 뭘 뺏어갈 게 있다고 사기를 쳐? 아니지. 설마, 장기밀매?

“사모님 뜻이니 따르셔야 합니다.”

김 집사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랬다.

이곳에서의 신은 앞으로 나의 딱딱한 시어머니가 될 사모님이고, 그 분의 말씀이 곧 법이요, 진리다.

“제 뜻은 상관없는 건가요?”

“네.”

그녀는 단호했다.

내가 대단한 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뭐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내 결혼식인데?’

재벌들은 결혼도 제멋대로였다.

급하게 서두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생긴 건 멀쩡한데, 성격이 이상한가? 아님, 불치병? 내일 결혼하고 당장 죽을 병?’

혼자서 삼류소설을 써대며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했다.

‘잘 생긴 재벌과의 결혼 후 미망인이 된 왕분홍.’

슬프긴 한데 슬프지 않았다.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내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적어도 미망인이 된 내게 개미 눈물만큼의 유산은 남겨주지 않겠어?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속물이었다고?’

“괜찮으십니까?”

“아니오. 안 괜찮아요.”

김 집사는 내 대답에 살짝 미간을 움직였다.

날 맹랑하다 생각하는 눈치였다.

“으흠!”

그녀는 큰 숨을 들이쉬고는 할 말이 있는지 목을 가다듬었다.

덩달아 나도 긴장되었다.

“결혼을 결심하신 순간부터 왕분홍 씨는 이 집안사람이 되신 겁니다.”

내가 입은 옷과 구두가 나를 옥죄여 왔다.

마녀인 시어머니에게 가난한 영혼을 판 나는 웃지 못하는 인형이 될 거란 상상 때문이었다.

김 집사의 말은 죽어도 나는 이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벌써부터 힘들어지는 건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다는 복선이었다.

가슴에 집채만 한 돌덩이가 쿵하고 떨어졌다.

불안함이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나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난 회사가 마음에 걸렸다.

‘회사에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낙하산만 즐비한 곳에서 독버섯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버티던 나였다.

‘쳇! 무슨 상관이야? 이제 그깟 회사 안 다녀도 되잖아?’

묘한 희열 끝에 스며드는 불안함이 죄 없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나였다.

“회사 일은 제가 다 알아서 처리를 해 뒀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김 집사는 독심술로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읊어댔다.

내 뒷조사는 이미 했을 거라 짐작했다.

털어봐야 구질구질한 먼지와 어디하나 비빌 언덕도 없는 내가 우스웠을 것이다.

그녀라면 그깟 구멍가게만한 회사에 나 대신 사직서 하나 던지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 부분은 부회장님께서 따로 말씀 하실 겁니다. 오늘은 이만 편히 쉬십시오.”

김 집사는 할 말을 다한 듯 고개를 짧게 숙였다.

그녀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빳빳한 목에 있는 것인지 내게 있는 것인지 괜스레 궁금해졌다.

“부회장님은 오늘 들어오시나요?”

“네. 바쁘셔도 결혼은 하셔야 하니까요. 그럼.”

김 집사는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저택은 집 앞에 혼자 남겨진 나를 향해 괴물처럼 입을 벌렸다.

‘이 결혼, 정말 해야 하는 걸까?’

#1

“여기가 발리 모텔 맞습니까?”

이른 아침 출근길, 멀끔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내게 물었다.

억양이 높은 걸로 봐선 서울 사람이었다.

“모텔 아니고 호텔인데요?”

나는 그에게 따지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쳇!”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턱 선까지 오는 칼 같은 단발의 서울내기 그녀가 나를 흘겨봤다.

일행인 듯 했다.

쳇! 아침 댓바람부터 남자랑 호텔을 찾는 꼴을 보니. 알만하다, 알만해.

“저기 간판 안 보이세요?”

영업을 중단한지 1년이 넘은 호텔 간판은 새의 분비물과 먼지로 볼썽사나웠다.

“생긴 건 이래도 정식명칭은 호텔이라고요.”

정식 명칭이 호텔이라서 호텔이라고 한 것 뿐 이었다.

모텔은 억양만으로도 왠지 불순하게 느껴지는 탓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있었다.

멀끔하게 딱 서울 남자처럼 생긴 그는 호텔 외관을 훑어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보시다시피 영업을 안 하는 관계로 대실도 안 됩니다.”

아침부터 젊은 남녀가 이런 외진 곳의 호텔을 찾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밤새 유흥을 즐기다 에로틱한 시간을 위해 마지막 코스로 찾는 것.

보통은 불륜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젊은 남녀도 많이 애용하는 게 대실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호텔이든 모텔이든 천지예요.”

사장이 문어다발씩의 사업을 하는 바람에 경영이 악화되었다.

숙박보다 대실 비중이 큰 우리 발리 모텔은 30년 전통의 여인숙이었다.

그나마 10년 전 리모델링 후, 호텔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 근처엔 호텔이 여기 밖에 없어서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 할 거예요.”

나는 뜨거운 시간을 보내려면 당장 다른 모텔을 찾아보는 게 좋다는 걸 에둘러 말했다.

서울내기는 똥 씹은 표정을 하며 남자에게 구시렁댔다.

돈도 있어 보이는데 이런 외진 곳까지 찾은 걸 보면 불륜일 확률이 높았다.

우리 호텔을 찾는 주 고객들인 셈이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부끄러움도 없나? 아침부터 대실이라니. 쯧쯧!’

나는 서둘러 사무실 문을 열기 위해 호텔 외부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젊은 것들에 포함되는 나이지만 대실에 대한 고정관념은 구식이었다.

호텔 맞은편 외부 주차장에는 3층짜리, 날림으로 지은 건물이 있었다.

1층은 식당, 2층은 사무실, 3층은 이 호텔 전 주인이 살고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사무실은 식당을 개조한 곳이라 셔터 문을 올려야 출입이 가능했다.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한지 5년차나 된 막내였다.

부동산 개발과 호텔을 겸하고 있는 회사의 특이점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사장이 만화 속 캐릭터 가오나시의 실존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사장은 회사 덩치를 키우기 위해 인맥전술을 펼쳤다.

사업에 조금이라도 도움 된다 싶은 인맥들의 자녀나 친인척들은 무조건 낙하산으로 들여 앉혔다.

그 덕에 회사는 온통 낙하산 지뢰밭이었다.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사의 약점을 빌미로 급여에 위로금까지 두둑이 챙겨나갔다.

또 하나는, 나만 직급이 없는 만년 막내라는 점이었다.

낙하산들에게 밀려 백도 학벌도 없는 나는 어쩌면 평생 막내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이지!’

웃긴 게 사장이 낙하산들 눈치를 살폈다.

낙하산들은 사장 위에 군림했다.

회사 사정이 외부로 세어나가는 걸 막기 위한, 사장의 굽실거림이었다.

낙하산이 회사에서 신나게 놀 때, 나만 뼈 빠지게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 망할 놈의 회사!’

그래도 고아출신의 내가 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힘이 되는 곳이었다.

그것이 내가 이 망할 놈의 회사를 다니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바다가 코앞인 사무실과 호텔이 있는 곳.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이 회사를 다니지만 외지인들은 도시 속 낭만을 찾기 위해 청사포로 몰려들었다.

“청소나 시작해 볼까.”

사무실에서 키우는 나무와 식물만 해도 스무 가지 정도였다.

미세먼지가 많다는 이유로 사장이 여기저기서 주워 온 것들이었다.

용케 5년 동안 죽이지 않고 잘 키운 걸 보면 내 손이 똥 손은 아닌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

아침부터 누구지? 하고 돌아보니 그 남자였다.

아까 대실을 물어보던 남자다.

그가 내 뒤에 서 있어서 놀란 걸음이 휘청거렸다.

잘 생긴 그의 얼굴이 밀대를 든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사무실로 전봇대가 걸어들어 온 것 같았다.

“다른 모텔 알려드려요?”

난 사무실까지 따라 들어온 남자를 경계하며 좀 전보다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사장님 계십니까?”

“네?”

이번엔 대실이 아니라 사장을 찾았다.

무슨 일이지? 내가 불친절하게 굴었다고 클레임이라도 걸 작정인가?

“저희 사장님은 왜요? 무슨 일이신지 저한테 말씀하세요.”

그의 뒤로 고급 외제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서울내기 여자와 함께 운전석의 기사가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시선은 외제차에서 다시 그에게 옮겨갔다.

“무슨 일이신지.”

“사장님 안 계신가요?”

“아직 출근 전이신데요.”

사장의 출근 시간은 모른다.

마음 내킬 때, 일 있을 때,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들이닥치는 게 사장 스타일이었다.

“어이, 미스 왕.”

우리 회사 대빵, 김 사장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될 상의 사장이 막 들어서는 참이었다.

웬일로 평소보다 이른 출근이었다.

“누구신가?”

아침 대신 포도 한 송이를 갈아 마셨는지 입술까지 포도색이었다.

사장은 이 사이에 낀 포도 씨를 빼내려고 계속 쩝쩝거렸다.

“사장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김 사장의 표정은 이랬다.

아침부터 웬 잡상인?

“여기 호텔 부지 때문에 왔습니다.”

“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김 사장은 남자를 사장실로 데리고 가서 명함을 주고받았다.

나는 커피를 내어드리며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대실이 아니라 호텔을 사러 온 사람이었어?’

“미스 왕. 뭐해? 나가서 일 봐.”

“네? 아, 네.”

사장실 문을 닫고 나오니 낙하산들이 하나 둘 좀비처럼 사무실 자리를 채웠다.

“미스 왕, 저 사람들 누구야?”

“저 차 봤어? 벤틀리 맞지?”

“저게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며?”

낙하산들은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들고 일렬로 서서 벤틀리 감상에 나섰다.

오늘 그들의 첫 업무의 시작이 된 셈이었다.

사실 회사 경영난으로 호텔이 경매 붙여진지 1년이 지났다.

부지도 크고 수백억 원대 규모의 물건이라 눈독 들이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주변개발호재로 호텔 감정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쳐 쉽게 덤비는 곳은 없었다.

대신 전국의 사기꾼들은 죄다 몰려들었다.

쓸데없는 똥파리만 우글거렸다.

사장은 그 꾼들을 브로커로 내세워 동업까지 부추겼다.

오합지졸의 끝판 왕이었다.

새 호텔을 짓는다고 할 경우, 호텔은 세 배 이상의 가치가 된다고 했다.

한 달에 호텔 앞 대출이자만 해도 일 억에 가까웠다.

그 이자만 모아도 집을 몇 채는 사고도 남을 돈이라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돈이 돈을 벌고, 돈이 돈을 먹는 세상이구나.”

내가 이 회사에 와서 느낀 현실의 허상이 그러했다.

재주가 좋은 것인지 머리가 비상한 건지 사장은 자기자본 없이 호텔을 인수했었다.

한 마디로 난 놈이었다.

이자가 이자를 낳고 또 이자가 이자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였다.

그야말로 이자 지옥이었다.

월세보증금 오백, 적금 몇 백이 전부인 나는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사장은 모 아니면 도, 대박 아니면 쪽박의 삶을 살고 있는 풍운아였다.

풍운아의 회오리 속에 나도 속해 있긴 했지만 내 일만 열심히 하면 그 뿐이었다.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검찰조사, 국세청조사로 최악이었다.

평생에 겪을 일들을 여기서 다 겪은 셈이었다.

그 덕에 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은 강철심장이 되었다.

‘그래도 사장이 잘 되어야 나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텐데.’

바람 앞에 등불처럼 내 마음도 초조했다.

“제가 차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사장은 남자를 부회장이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잡상인 취급하던 태도와 눈빛과는 딴판이었다.

똥줄 탄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왕림해 주셨는데.”

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저래?

나는 사장 뒤를 따라나서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동시에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