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방으로 돌아와 곧장 독고영웅을 깨웠다.

“어서 일어나 봐요.”

그는 잠이 든 척 눈만 감고 있을 뿐, 이미 깨어있는 상태였다.

경직된 얼굴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그의 눈을 강제로 오픈했다.

“안자는 거 다 아니까, 그만 일어나시죠.”

“훗!”

“악!”

피식 웃던 독고영웅은, 나를 이불로 돌돌 말아서 누에고치처럼 만들었다.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누에고치가 된 나를 죽부인처럼 팔과 다리로 끌어안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입술을 내밀며 다가오는 그에게 정색하며 말해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불덩이처럼 내뱉었다.

“고등학생 때, 그 별채에서 당신이 나리를 물었죠?”

다가오던 그가 주춤하며 나를 빤히 보았다.

그 얼굴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두 사람, 와인 바에서 한 키스가 처음이 아니었죠?”

“……!”

“별채에서 샤워하고 나오던 나리와 부딪혔다고 말했던 그날, 두 사람 키스 했죠?”

가만히 듣고 있던 독고영웅이 입을 열었다.

처음 놀란 얼굴은 이미 달아나고 덤덤한 표정만 싸늘하게 남아있었다.

“나리가 그래요?”

“그날 똥개에게 물린 트라우마로 개를 싫어하게 되었다던데. 당신이죠?”

“그 키스도 내가 먼저 했다고 하던가요?”

그는 흥분한 나와는 달리 차분하게 물었다.

“분홍 씬, 나보다 다른 사람의 말이 더 중요한가 보군요.”

“난 그저 사실이 궁금한 것뿐이에요. 믿고 안 믿고는 나중 일이라고요.”

별채에서 있었던 일이었는데,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불쾌했다.

과거였지만, 과거의 나리는 지금도 그의 앞에 현재진행형으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였다.

지금이 지나도 과거고, 오늘이 지나고 과거인 시간은 내게 무의미했다.

내게 중요한 건 과거에도 지금처럼 나리가 그와 함께 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리와 함께했던 그의 모든 시간들이 다 내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난 나리를 여자로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날도 정말 우연하게 부딪힌 거였어요.”

그는 나리가 자신의 별채 샤워실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나오던 그녀와 부딪혀 넘어지던 순간, 그녀와 입술이 닿았다고 했다.

놀란 나리는 옷을 입기 위해 부랴부랴 드레스 룸으로 도망쳤고 그 사이 그는 똥개로 변했다고 했다.

그를 발견한 나리는 놀라서 자신을 발로 찼고, 홧김에 그녀의 다리를 물었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이래도 못 믿겠어요?”

그의 얘길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우연이었을까. 이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만 나리는 일부러 우연을 만든 게 분명해.’

이번에도 서울여우인 개나리에게 당했다.

나리는 분명 독고영웅이 먼저 키스를 했다고 했다.

나를 어떻게 요리해야 화를 돋울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리와 연관된 일이라면 그에게 화부터 냈던 일이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사과하긴 싫었다.

말을 하지 않은 그에게도 잘못이 있었으니까.

미안함에 고개를 떨어뜨리던 나의 시선 끝에 그의 발이 보였다.

‘맞아!’

“영웅 씨. 내 목걸이가 사라졌어요.”

나의 다급한 말에도 그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나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왜 안 놀라요? 혹시, 영웅 씨가 가져간 거예요?”

대답 없는 그의 눈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진짜 영웅 씨가 가져간 거예요?”

“…….”

그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에이. 장난 그만하고 돌려 줘요. 어서요.”

“분홍 씨.”

그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걱정 말아요. 다 분홍 씨를 위해서 그런 거니까.”

“뭐라고요?”

나리가 훔쳐간 걸 겨우 찾았는데 이번엔 독고영웅 당신이, 저주를 풀어야 할 목걸이를 왜 숨겼다는 것일까.

장난처럼 시작된 물음은 답을 알 수 없는 물음표에 깔려 발버둥 쳤다.

나는 이불속 누에고치에서 벗어나 그를 일으켜 앉혔다.

농담처럼 보이지 않는 표정이 나를 밀어냈다.

“당신을 위한 일이에요.”

“날 위한다면 돌려줘요.”

“분홍 씨.”

“그 발에 묻은 흙 말이에요. 설마, 새벽에 나갔다 온 게 목걸이를 숨기고 온 거였어요?”

그가 안으려했지만 난 밀어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변명도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다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목걸이에 이 집안과 이 집안 남자들의 운명이 달렸다.

그 운명을 내가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지만 내 남편인 독고영웅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목걸이가 다시 어머니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영웅 씨를 저주에서 풀어주지 않을지도 몰라. 그가 위험해질 거야.’

상상속의 결과는 지옥이었다.

“목걸이 찾으러 가요.”

“그만해요. 당신을 어머니처럼 살게 하고 싶진 않아요.”

바보 같은 변명이었다.

“내가 선택한 결혼이에요. 그건 내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목걸이의 주인은 난데 왜 당신 마음대로.”

기어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지독한 말보다 눈물이 앞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울음을 잘라 뱉었다.

이유 없는 눈물이었다.

이유 없는 절망감이었다.

이유 없는 부정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키스도 못 참으면서, 저주는 자신이 걸렸으면서 날 어떻게 지켜준다는 거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은 그렇질 못했다.

문득 어제 일들이 떠올랐다.

영재의 저주를 풀기위해 주저했던 일과 앞으로 주저해야 할 일들에 대한 결과가 그를 자극시킨 게 분명했다.

생각 없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 그를 움직였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날 힘들게 했다.

“걱정 말아요. 어머니도 당신을 어쩌진 못하실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의 등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래. 버린 건 아닐 거야. 그를 설득하던가, 내가 찾으면 돼.’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독고영웅은 더디긴 했어도 본래 그의 모습을 되찾았다.

영재도 다행히 저주에서 빨리 풀려나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여전히 그의 저주가 빨리 풀리는 것이 의문이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사이 별채는 영재와 나리의 신혼집 공사가 끝났고, 부산의 발리호텔과 사무동은 철거 수순을 밟고 있었다.

호텔 뒤편의 땅 수십만 평을 공원으로 개발해 시에 기부채납 하기로 한 것은 물론, 애초부터 주민들의 반발이 없게 가구당 넘치는 보상과 공공시설 등을 지원키로 하면서 호텔개발 진행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다.

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일 때문에 나리가 한 달간 부산에 머물게 되면서 운 좋게도 둘의 신혼여행이 미뤄졌다.

영재가 나리를 따라 부산을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내가 만류했다.

나는 영재를 불러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목걸이가 사라졌다고. 목걸이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키스하면 안 된다고 일러두었다.

나리는 영재가 한 달 동안 부산에 오지 않는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 일로 나리는 영재의 전화를 수신 차단했고, 의외로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리는 보편적인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나리는 영재와 신혼을 즐기기 보다는 독고영웅과 일을 핑계로 함께 지내는 걸 좋아했다.

물론 나도 독고영웅과 함께 부산에 있었고, 지긋지긋한 삼각관계는 여전했다.

합동결혼식이 있던 날,

나리가 지혜의 드레스를 밟아 찢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별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신 회장이 지분의 절반을 나리에게 준다는 각서가 효험이 있었다.

지혜와 신 회장의 신혼여행에 백난정과 독고장도 함께 동행 했다.

신 회장이 세계 크루즈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고,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두 사람도 여행길에 올랐다.

사실 백난정과 독고장의 동반여행은 내가 지혜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그 안에 독고영웅이 숨긴 목걸이를 찾기 위해 시간을 벌 목적이었다.

나는 나리와 독고영웅을 남겨두고 일주일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둘만 남겨두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더 불안한 일은 따로 있었다.

며칠 뒤면 여행에서 백난정이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목걸이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백난정이 목걸이가 사라진 걸 알게 되면 그 일이 어떤 화를 불러올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오로지 목걸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독고영웅은 목걸이에 대해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날 그의 발에 묻은 흙을 단서로 일주일간 이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질 요량으로 올라온 것이었다.

“유리정원 어딘가에 숨긴 게 분명해요. 그날 영웅 씨 발에 흙이 묻어 있었거든요.”

“형수. 흙은 어디에나 다 있잖아요.”

“그날도 눈이 펑펑 온 거 기억 안 나요?”

말을 하면서도 이상한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왜 신발을 신고 가지 않았을까?”

그거야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고 쳐.

“그런데 발에 왜 물기가 없었을까? 눈을 밟았다면 분명 발에 묻은 흙이 어느 정도 지워졌을 텐데 그대로였어. 흙냄새까지 그대로 살아있는 흙이었다고.”

“형수, 모르셨구나. 유리정원으로 바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영재는 나를 독고장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의 방에서는 바깥을 통하지 않고 유리정원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고 했다.

“삼촌,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당장 비밀통로부터 묻고 싶은 걸 참았다.

-한 집안에 있어도 얼굴보기가 힘들구나. 허허. 영재 넌 어쩐 일이냐? 사고 칠 때 아니면 통 얼굴로 안 비치는 녀석이.

“삼촌도 참. 누가 보면 제가 개망나닌 줄 알겠어요.”

-개망나니, 맞는데? 허허허.

독고진이 영재와 짧은 인사를 나누는 시간도 나는 아까웠다.

“삼촌. 영웅 씨가, 1월1일 새벽에 혹시 여기 왔었나요?”

-1월1일 새벽이라면. 영재 결혼식 날 말이겠구나.

“네, 맞아요. 그날이에요.”

생각보다 독고진은 기억력이 좋았다.

뭔지 몰라도 희망적이란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날 왔었지. 근데 그건 왜 묻는 거냐.

“형이 목걸이를 훔쳐서 형수 몰래 숨겼대요. 미친 거 아녜요?”

영재는 곁눈질로 흘겨보는 나의 시선에 딴청을 피웠다.

여기서 불필요한 감정은 자제하는 게 시간을 버는 거였다.

-목걸이를?

독고진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그날, 영웅 씨가 비밀통로를 이용한 게 맞아요?”

-그래.

내 예상이 맞았다.

“혹, 어디에 숨겼는지 짐작 가는 데가 있으실까요?”

-글쎄다. 하지만 영웅이라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숨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독고진의 말은 항상 어려웠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감추려는 자에게 찾는 자의 그림자가 보이면 더 꽁꽁 숨겨 놓게 되는 법이다.

“그건 걱정 안하셔도 돼요. 영웅 씬, 지금 부산에 있거든요.”

불현듯 그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먼저 돌아온 후로 그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해 내 안부를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만 이상해도 당장 달려올 것처럼 굴어서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독고진의 의미심장한 말에도 답은 없었다.

나와 영재는 독고진 서재와 연결된 비밀통로를 지나 유리정원으로 들어갔다.

그 통로는 사람들을 만나기 꺼려하는 독고진을 배려해 백난정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영재가 말했다.

조금은 의아하면서도 의외의 백난정의 마음 씀씀이에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짧은 감동은 거기까지였다.

유리정원에 도착한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거대한 산 하나를 옮겨놓은 정원을 살피는 것만 해도 일주일은 꼬박 걸리는 큰 규모였다.

“형수, 여길 어떻게 다 뒤져요? 땅을 일일이 다 파 볼 수도 없고. 설령 판다고 해도 어마마마가 아시는 날엔. 윽!”

그렇다고 포기 할 수도, 사람들을 풀어 찾아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침, 헛기침을 하며 우리 앞으로 걸어오는 박가가 보였다.

그에게서는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제가 그 목걸이를 숨긴 곳을 압니다.’

이렇게 말해주면 더 바랄 것도 없겠지만.

“아저씨. 제가 목걸이를 여기서 잃어버린 것 같은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일단, 거짓말로 운을 띄웠다.

‘아니지. 원래 내 것이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잖아?’

만일에 독고영웅이 숨겨놓은 걸 찾는다고 했으면 박가도 모른 체 했을 일이었다.

“목걸이요? 대체 어쩌시다가.”

“음, 뭐냐. 그, 그날이요. 소피, 소피 만났던 날.”

가장 가까운 기억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도 틈틈이 찾아보겠습니다, 작은 사모님.”

“아뇨!”

“예?”

박가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게, 제 말은 당장 빨리 찾아야 된다는 뭐 그런”

“형수도 참 답답하시네.”

보다 못한 영재가 불쑥 말허리를 끊었다.

“아저씨. 그러니까 그게 저주의 목걸이라고요. 그걸 못 찾으면 우리 형수, 쫓겨날 걸요?”

“예?”

박가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여기 CCTV같은 건 없어요?”

“입구밖엔 없습니다, 작은 사모님.”

희망이 또 날아가 버렸다.

“이틀 뒤면 어마마마께서 돌아오시니까 그 전에 찾아야 해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 글쎄요. 이틀이라면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네요. 콜록콜록.”

박가의 헛기침이 시작되었다.

난감한 입장을 대변하는 기침소리였다. 세 사람은 모두 패닉 상태였다.

“목걸이가 금속종류이지요?”

거친 숨을 고르던 박가는 뜻밖의 것을 물었다.

“그렇죠. 보석 빼고는 다 금이니까 금속이겠죠.”

내 말에 박가는 손으로 무릎을 내리쳤다.

무슨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제스처였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그게 뭔데요?”

우린 동시에 물었다.

“금속탐지기요. 아마 그거라면 찾기 수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콜록콜록.”

“그런 게 왜 여기 있어요?”

궁금한 내 질문에 답을 한건 영재였다.

“맞다! 어마마마가 아버지가 숨겨 둔 금 바 찾는다고 오래전에 사놓은 거죠. 그죠?”

그때부터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리는 박가가 가져온 금속탐지기로 유리정원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물론 넓은 정원을 다 스캔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삽을 들고 파는 행위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이제부터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목걸이를 찾는 건 어려웠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숨통을 조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