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단 몸부터 녹여요.”

호텔로 돌아온 그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욕조가 채워지는 동안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누워있었다.

춥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창피해서였다.

‘왜 하필 그때 나타날 게 뭐야. 으윽! 쪽팔려!’

띠이익- 띠이익-

머리맡 협탁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의 핸드폰이었다.

그는 욕조에 물을 받을 때까지 나올 생각이 없었다.

핸드폰 액정에 나리의 이름이 떴다.

나의 저녁시간을 망쳐놓은 장본인이었다.

「오빠? 저녁 같이 먹을 거지?」

“…….”

「저녁 먹고 우리 전에 갔던 와인 바, 어때?」

‘저녁을 먹고 둘이 와인 바에 간다고?’

그가 욕실에서 나오는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가슴에서 불이나기 시작했다.

“분홍 씨, 다 됐어요.”

‘둘이서 와인 바를 간단 말이지?’

다시 고개 든 질투와 의심이 나를 미치게 했다.

“자요?”

나는 이불을 젖히며 벌떡 일어났다.

“저녁은 안 먹어요?”

“아, 배고파요?”

“네. 무진장 고파요.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아요.”

허기가 아니라 그의 대한 불신이 나를 미치게 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녁 먹으러 가요. 아니, 룸서비스가 낫겠죠?”

그는 프론트로 전화해 룸서비스를 시켰다.

“다음은요?”

“네?”

“다음 코스는요? 아! 전에 나리 씨가 얘기한 그 와인 바 어때요? 아! 나리 씨랑 이미 가기로 약속하셨나? 단 둘이서?”

그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부정망상에 빠져 있었다.

“나리가 혼자 먹기 싫다고 같이 먹자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헛!”

어이가 없었다.

그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몰랐다.

“왜요? 잠도 혼자 자기 싫다면 가서 자 줄 건가요?”

이 말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날 건드린 건 그였다.

“화났어요?”

그는 화가 난 사람에게 화났냐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신 대표 만난다는 얘길 안 해서 화난 거예요?”

“……!”

“아니면 날 못 믿어서 그래요?”

“둘 다예요!”

내 말의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반대로 내 얼굴은 활화산처럼 활활 타올랐다.

“아직도 나리와 내 사이를 의심하는 거예요?”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의심할 행동을 하고 있잖아요!”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띵동-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가 온 모양이었다.

그는 팁을 챙긴 후 문을 열었다.

“오빠! 전화를 그렇게 끊으면 어떡해?”

불쑥 들어온 건 신나리였다.

그녀는 침실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모른 척했다.

“아깐 그렇게 가 버려서 내가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알아?”

나리는 그에게 은근슬쩍 팔짱을 끼었다.

나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내가 뭘 잘 못한 건 아니지?”

“나리야. 이러지 말고 그만.”

“분홍 씨, 그거 아냐?”

그녀는 잽싸게 그의 말허리를 끊어냈다.

“그거라니?”

“의부증 말이야. 내가 오빠랑 있는 거만 봐도 눈이 아주 뒤집히더라니까, 글쎄?”

“나리야, 너!”

그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 교태를 부렸다.

“그러게. 나랑 결혼했으면 좋았잖아. 안 그래, 자기야?”

‘자기?’

나리는 내게 보란 듯이 그를 안고 유혹했다.

알면서도 당하고만 있는 그가 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짓이에요?”

가까스로 분노를 삭이며 그 둘 앞에 섰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놀란 심장은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른다.

“어머나! 깜짝이야. 분홍 씨, 있었어? 난 없는 줄 알고.”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날 도발하기 위해 그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내가 없었으면 왜요? 나대신 와이프 놀이라도 하려고 그랬어요?”

더 이상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에게는 뜨거운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기야, 들었지? 쟤 아무래도 심각한 가봐. 얼른 병원 가 봐야하는 거 아냐?”

나리도 지지 않았다.

“잠깐만. 두 사람, 무슨 오해가 있는가본데.”

“오해?”

“오해!”

나와 나리는 그를 쏘아보며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두 여자의 살벌함에 그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자기는 빠져. 이건 우리끼리 해결 할 문제니까.”

“훗! 너무 무례한 거 아녜요?”

나는 코웃음을 날렸다.

아내인 내 앞에서 개념 없이 자기라고 부르는 왕 싸가지에게 응징이 필요했다.

“남의 남편에게 자기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가 턱을 치켜들었다.

여차하면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태세였다.

“내 자기를 자기라고 부르는 게 뭐 어때서?”

독고영웅은 그녀와 나 사이에 끼인 채 서로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리가 자신에게 오빠, 자기란 호칭을 거리낌 없이 써 왔다.

남들보다 친근하게 보이려는 의도 외에는 다른 뜻은 없다, 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부회장님께서 언제부터 신나리 말을 통역했어요?”

나도 모르게 백난정의 말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었다.

“나리야. 내가 이런 일이 생길까봐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는 나를 이해시키는 대신 왕 싸가지 설득에 나섰다.

그 편이 편해서일지도 모른다.

“안 된다고는, 싫다고는 안 했잖아?”

신나리의 말은 일종의 씨 뿌리기 같은 거였다.

일부러 그와의 미묘한 감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날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한 마디로 나쁜 년이었다.

“신경 쓸 거 없어요, 분홍 씨. 나리는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라고 불러요.”

습관이라며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나리도 그의 굳은 표정에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띵동-

“룸서비스입니다.”

입씨름을 하는 사이,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도저히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밥은 됐고. 우리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오해도 풀 겸.”

나리가 무슨 속셈인지, 술자리를 제안했다.

우리는 와인 바로 향했다.

달맞이에 위치한 제법 근사한 바였다.

밤바다와 멀리 광안대교까지 볼 수 있는 자리로 앉았다.

이 곳이 나리가 얘기한 와인 바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마시고 들어가자.”

그는 시계를 보며 나리에게 말했다.

저녁을 건너뛰었음에도 시간은 벌써 밤 9시였다.

“아직 초저녁인데, 뭐야? 일찍 들어가 봐야 둘이 할 일도 없으면서.”

“왜 할 일이 없어요? 우리 신혼인데.”

난 그녀의 말을 보란 듯이 받아쳤다.

한방 맞은 나리는 ‘뭐, 이런 게 다 있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올백을 한 중년의 여자가 인사를 했다.

짙은 마스카라에 옅은 립스틱이 그녀의 나이를 숨겼다.

영혼까지 매너로 무장한 와인 바 마담이었다.

“절 기억하시나요?”

“이런 미남을 기억 못하면 이 짓도 그만 둬야줘. 후후후.”

마담은 절제된 웃음으로 나와 나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날, 봉 마담한테 내가 슬쩍 흘렸거든. 자기가 대성그룹 후계자라고.”

“신 대표님, 제가 그럴 리가요. 전 정말 너무 미남이셔서. 후후후.”

그와 마담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안주가 세팅되었다.

마담은 직원이 가져온 와인을 각자의 잔에 따랐다.

“여기 같이 오신 분은?”

마담이 짙은 마스카라를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나를 뭐라 소개해야 할지 주저하던 찰나.

“제 와이프입니다.”

그의 말에 마담의 시선이 나리와 나를 오갔다.

살짝 난감한 표정이 그림자처럼 지나갔다.

분명 크리스마스이브 때의 두 사람을 기억하는 눈빛이었다.

“왕분홍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내 소개를 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봉 마담이 가고 다시 어색한 세 사람의 시간이 되었다.

“자기야, 우리 러브 샷 할까?”

“이 봐요, 자기 씨! 그 자기는 그 쪽 자기가 아니라 내 자기라니까요?”

나는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리를 상대했다.

그녀는 나의 적극적인 방어에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흥분해서 날뛰었다.

그녀는 벌컥벌컥 와인을 연거푸 마셔댔다.

맨 정신보다야 술기운에 사고를 쳐도, 그가 애교로 봐 줄 거라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만 마셔.”

“자기야, 기분이 술 같으니까 술이 술술 들어가네?”

독고영웅도 나리를 더 이상 말릴 생각이 없었다.

“말려야 되는 거 아녜요?”

뒷수습을 그가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술에 취했단 핑계로 그녀를 업고 방까지 데려다 줄 상상을 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네 계획을 모를 줄 알았지? 어디 마음껏 마셔봐라. 전봇대에다 확 묶어놓고 갈 테니까. 아예, 요트에다 태워서 태평양으로 보내 버릴까?’

“야! 너!”

잔뜩 혀가 말린 나리가 날 부르는 소리였다.

“왜?”

나도 질 수 없었다.

“마셔!”

“응?”

“마시라고, 마셔! 자, 원 샷! 아니, 러브 샷 하까?”

‘이게 미쳤나. 갑자기 반말에, 러브 샷?’

나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내게 팔짱을 끼며 러브 샷을 강요했다.

‘좋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 보자.’

그때부터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와인 다섯 병을 마셨다.

그는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다 잠깐 바람을 쐰다며 자릴 비웠다.

그녀의 말대로 기분이 술이니까 술이 술술 들어갔다.

“너, 왕 싸가지!”

나리가 나더러 자신의 별명을 불러댔다.

어이가 없다.

“야, 그건 네 별명이지. 내께 아냐, 이 왕 싸가지야.”

“서로 왕 싸가지 된 기념으루다가. 러브 샷! 딸꾹!”

못 이긴 척 그녀의 러브 샷을 수락했다.

나리는 와인 잔 그득 술을 채웠다.

그리고는 러브 샷을 한다더니 내 머리에 와인을 들이 부었다.

“미안, 미안, 미안. 내가 너무 어지러워서 그만 실수를 했네?”

실수라고 하기엔 그녀의 발음은 정확했다.

잔을 그득 채울 때부터 이럴 계획이었다.

저 서울 여우한테 당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봉 마담은 내게 휴지와 수건을 가져다주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와 나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암투가 흥미로웠겠지?

나는 머리부터 흘러내리는 와인을 일부러 닦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진짜 무서운 게 어떤 건지 보여줘야겠다.

“너, 샤토 마고도 못되는 주제에. 감히 우리 오빨 넘봐?”

누가 들으면 독고영웅이 진짜 네 오빤 줄 알겠다.

“너, 샤토 마고가 얼마나 비싼 건지나 알아? 헛! 하긴, 먹어 봤어야 알지. 그 순진한 얼굴로 내 남자나 꼬여낼 줄이나 알았지.”

“저기 오네. 내가 꼬신 남자.”

두고 봐. 이젠 내 차례야.

그가 와인 바로 들어섰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분홍 씨,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그는 가져다놓은 수건으로 와인에 젖은 날 닦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리의 아니꼬운 시선이 날 노려봤다.

“얼른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괜찮아요. 저 여기 좀 닦아줘요. 여기도, 요기도. 거기도.”

나는 그에게 이마와 목, 그리고 가슴을 내밀었다.

주춤하던 그의 손이 젖은 내 블라우스 위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손길이 내게 닿을 때마다 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야, 샤토 마고가 뭐야?”

“……!”

자기라는 호칭에 그가 눈만 끔뻑였다.

갑자기 진도를 뺀 호칭이 어색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