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의 남자

누군가는 집으로 누군가는 약속으로 한 주간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려는 듯 모두가 각자만의 장소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금요일. 예리도 서둘러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몇 해를 입었는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늘어진 트레이닝복. 아웃렛 세일에 맞춰 샀던 앞이 닳고 닳은 운동화를 신은 예리는 약속 장소인 서울 신사동의 어느 곱창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입구부터 매콤하고 고소한 곱창의 향기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곱창 굽는 소리와 뿌연 연기, 빈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찬 손님들로 곱창 가게 안은 시끌벅적 가득했다.

“어! 서예리! 여기야!”

밝은 웃음으로 동시에 예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세 명의 여자. 중, 고교를 거쳐 대학 시절까지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매일을 함께 해왔던 예리의 절친 삼인방. 그중 제일 먼저 취업에 성공한 미주의 입사 한 달 차 뒤늦은 축하 모임 자리.

“야! 얼굴들 좀 보고 살자,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이게 대체 다들 얼마 만이야!”

“우리가 다른 얘들처럼 결혼할 때나 연락하고 그렇게 형식적인 인간들로 살면 되겠어? 안 그래?”

“자, 자! 다들 목부터 축이고 이야기하자고.”

작은 잔 한가득 소주가 담기고 예리와 친구들 너나 할 것 없이 잔을 부딪치며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술의 뒷맛이 달게 느껴졌다.

“크아아!”

“푸훗, 뭐냐? 순간 남자 온 줄!”

“그러게 오늘따라 유난히 술이 입에 착착 감기네, 달다 달아!”

“뭐래,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말하는 거 하고는. 여전하다. 서예리.”

“그게 우리 서예리의 매력이지. 소탈함과 솔직함, 말린 북어 같은 거친 저 말투.”

“야, 그나저나 이 미주 축하한다. 그래도 우리 중에 제일 먼저 번듯한 직장에 취업까지 하고 기특하다. 그것도 대기업에, 한 달 입사 소감이 어때?”

“뭐가 어때? 그냥 난 온종일 정신없을 뿐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비위 맞추려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니고 복사 심부름에 커피 심부름에 회의라도 있을 땐 회의 준비까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대기업이라고 별수는 없구나.”

“대기업이 원래 더 해, 한 달 지나고 늘어난 거라곤 눈치, 줄어든 거라곤 잠자는 시간뿐이다.”

“그래도 취업한 게 어디야, 특히 백진 그룹이면 대한민국 3대 기업 중 하나인데 난 들어가기만 한다면야 온갖 고난과 역경 그런 것쯤 다 참고 물리칠 수 있겠다.”

백진 그룹.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기업 중 하나로 건설, 전자, 중공업, 식품 관련 사업까지 손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 진출까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 얼마 전에 얼핏 뉴스 보니까 회장이 고령이어서 차기 대표에게 위임하려고 승계 준비 중이라고 나오는 것 같은데?”

“맞아, 우리 회장님께서 연세도 많으신데다. 지병까지 있으셔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 하신다더라고, 그래서 외국에 있는 손자인가가 이번 주에 귀국한다고 했던 것 같아, 백진 그룹을 이끌어 갈 차기 주자.”

“백진 그룹 손자? 참 어떤 남자인지 복도 타고났다.”

“그러게, 그런 그룹의 손자라니 우리는 어디 상상이나 하겠니? 몇 년째 취업 준비, 아르바이트만 죽어라 하고 있고 딴 세상 얘기지 뭐.”

“야! 서예리 너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우리 만난다고 옷이 그게 뭐야!”

“내 옷이 뭐?”

“그 옷 고3 때 독서실에서도 내내 본 것 같은데?”

“회장 손자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불똥이 나한테 튀어?”

“그래도 우리 예리가 이렇게 아끼고 아낀 덕분에 다음 달에 드디어 꿈의 아파트에 입주하잖아, 그것도 바로 그 유명한 백진 건설 아파트, 월세가 아닌 전세로! 입사는 미주가 선배지만 우리 중에 자기 이름으로 된 집 계약해서 입주하는 건 예리가 처음이네.”

“그러고 보니까 백진 건설은 미주보다 예리가 먼저네, 집 계약도 계약은 계약이니까.”

“그만해, 누가 들으면 내가 집이라도 산 줄 알겠다. 그래봤자 반전세 계약이야, 계약 기간 끝나면 또 이사해야 하고 갚아야 할 대출 이자만 해도… 에휴, 일단 저지르긴 했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반전세가 어디야! 너도 이제 꿈에 그리던 전셋집도 계약했겠다. 대기업은 아니어도 든든한 직장도 있겠다. 연애도 하고 좀 그래, 남들처럼 꾸미기도 하고 솔직히 너 정도 얼굴이면 밥 안 먹어도 난 배부르겠다!”

“맞아, 서예리! 너 그렇게 얼굴 막 쓰고 다닐 거면 나주던가!”

늘어진 트레이닝복, 앞코가 닳아 없어진 운동화, 언제 산 건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안경, 대충 휘감아 질끈 둘러 묶은 긴 머리.

지금의 모습과 달리 예전 예리의 미모는 모두가 인정하던 탑 오브 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문 밖 줄 서던 남학생들과 대학교 때 메이퀸까지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 신이 인정한 미모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로 남자들의 사랑과 동시에 여자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하고 맑은 피부, 체리 빛 붉은 입술, 뚜렷한 이목구비. 그중 예리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는 단연 짙고 깊은 갈색 눈동자. 예리의 갈색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야! 내가 다시 말해야 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날 배신하지 않는 건 오직 돈! 돈밖에 없다고!”

“그래 뭐, 우리도 아직 그 인간들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데 넌 오죽하겠냐? 진짜 생각만 해도 아직 개 짜증이다!”

달달 하게만 느껴졌던 한잔 술이 갈수록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예리는 어딘지 쓸쓸하고 허탈해 보이는 웃음으로 그렇게 술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인천 국제공항.

열린 도착 게이트 안으로 들어선 예사롭지 않은 외모에 한 남자.

캐시미어 트렌치코트에 180은 족히 넘어 보이는 훤칠한 신장, 뚜렷한 이목구비, 굳게 다문 입술이 한눈에 보아도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기 충분한.

보는 이마다 탄성을 자아낼 외모의 소유자.

그가 바로 백진 그룹 차 정석 회장의 손자이자, 백진 그룹의 본부장 차준석.

“본부장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어딘지 차가워 보이는 인상. 그의 조금은 날카로운 듯한, 눈빛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카리스마가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공항을 벗어나 별다른 말 없이 공항 밖 대기하고 있던 은색 벤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앙! 앙앙.”

준석의 무릎 위.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몸, 초콜릿처럼 새까만 눈을 가진 하얀 포메라니안 한 마리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짖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루이스, 너도 고생 많았다. 집에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눈빛이 자신의 애견 루이스를 볼 때는 마치 눈에서 꿀이라도 뚝뚝 떨어져 넘쳐흐를 정도의 정반대 눈빛으로 돌변했다.

“난 회사로 갈 테니까 김 실장은 루이스 먼저 집에 데려다주시죠.”

“예, 본부장님!”

***

“자,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조만간 또 보자!”

“난 예리 집하고 멀지 않으니까 데려다주고 갈게, 먼저들 가라, 아무튼 축하해! 이 미주! 파이팅!”

어둑해진 날씨, 예리는 술이 약한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연거푸 술잔을 비워낸 탓에 온몸이 비틀비틀 어디론가 정신없이 빠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예리 너! 술도 별로 못 마시면서 오늘따라 뭘 또 그렇게 열심히 마셨어?”

“친구야! 넌 알지? 내가 왜 연애를 못 하는지 아니 안 하는지?”

“알지! 알지! 그럼, 그래도 세상 모든 남자가 그렇게 나쁜 놈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마음을 좀 열어.”

“아니, 인간은 말이야, 다 똑같아! 특히 남자! 남자는 언젠가 변해, 변하게 되어 있어! 남자? 다 거기서 거기야! 세상에 나를 배신하지 않는 건 돈밖에 없다고.”

“으이구, 제발 어디서 우리 서예리 하나만 사랑할 진심 가득한 남자 한 명만 나타나라!”

“후후, 여하튼 잘 가! 친구!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간다.”

“정말 괜찮겠어?”

“왜 이래? 하루 이틀 다니는 길도 아니고.”

택시에서 내려 주희와 헤어지고 십 년 넘게 다닌 익숙한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는 길.

매일 보는 익숙한 그 길에 낯선 간판 하나가 예리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당신의 미래를 알려드립니다.>

‘당신의 미래를 알려드립니다? 뭐야? 우리 동네에 저런 곳이 있었나?’

알 수 없는 분위기.

‘저기 세탁소였던 것 같은데? 술 취하긴 많이 취한 건가….’

5월 초 밤, 봄과 여름의 중간 지점 어디쯤. 아직은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다소 쌀쌀한 날씨 속 예리는 술이 깨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술기운이 더욱 진하게 번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무언가에 이끌리듯 처음 본 낯선 그곳을 향해 발걸음이 옮겨졌다.

‘에라, 모르겠다!’

자연스레 끌리듯 한 걸음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어서 와! 아휴! 저 저, 술 냄새! 그러게 먹지도 못하는 술은 뭐 하러 마시고 다녀?”

은은한 보랏빛 야릇한 조명 아래 코끝을 스치는 알 수 없는 꽃들의 향기.

그 속에서 예리를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는 중년의 여자, 너무나도 익숙한 말투에 예리는 순간 처음 본 사람이 아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조차 들 정도였다.

“천장 안 무너져! 들어왔으면 앉아!”

“…….”

“그래, 찾아온 용건은?”

“네? 용건이요?”

“놀란 토끼 눈을 해서는! 들어왔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여기가 휴게소도 아니고, 뭐가 궁금해? 연애? 결혼? 돈? 직장?”

“연애? 결혼이요? 후후훗.”

“왜 실실거리고 웃어?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제 사전에 없는 단어 딱 두 가지가 연애 그리고 결혼입니다.”

“그건 아가씨 생각이고, 하긴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 돌아보면 그런 마음 가질 만도 하지.”

“지금까지 남자들? 그게 무슨….”

“아가씨 얼굴 보니 딱 바람둥이에 사기꾼 유부남에 그동안 만나는 놈들마다 줄줄이 엮여서 몹쓸 놈들만 만났으니 그런 생각 할 만도 하단 말이야.”

“헐, 이모님 대박!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예끼! 이모님이라니! 아직도 식당인 줄 알아!”

“저 모르게 제 뒷조사라도 하신 줄.”

“뒷조사는 무슨! 그럴 돈 있으면 여기 안 나오지.”

“제 얼굴 보면 그런 게 막 떠오르면서 다 보이시나 봐요?”

동그란 두 눈이 더욱 커진 예리를 보며 중년의 여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놀라기는, 그래도 부모도 없이 세상천지 혼자 던져져서 아등바등 노력해 여기까지 열심히 잘 살았어.”

자신의 기억 속,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시절.

어느 작은 교회 앞 탯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갓난아기였던 예리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에게서 차갑게 버려졌다. 그것도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할 것만 같은 크리스마스에, 예리에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그렇게 버려진 후 보육원에서 독립하기 전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라왔다. 자신의 지난날을 거울 보듯 훤히 들여다보는 여자의 말에 예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럼 정말로 사람들 미래를 알 수 있으신 건가요?”

“입 아프게 자꾸! 들어오면서 써진 거 못 봤어?”

“하지만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 일도 모르는 세상인데….”

오늘따라 왠지 자꾸만 여자의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건 취한 술과 분위기 탓 일 꺼라 마음속으로 잠시 우겨보던 예리는 여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물었다.

“그럼 혹시 제 미래도 알 수 있을까요?”

“후후후, 궁금하긴 한 모양이네? 믿거나 말거나 그건 아가씨 마음이지만 물어보니 알려주지. 어디 보자.”

예리의 얼굴 생김 하나하나, 두 눈까지 뚫어질 듯 들여다보는 중년의 여자.

잠시 후 입가에 미소와 함께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 타고난 팔자는 가엾고 살아온 길은 온통… 쯧쯧.”

예리는 여자의 말에 온 정신과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 촉으로 보아 머지않아 곧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될 운세야.”

“네? 운명의 남자?”

여자의 말을 듣던 예리의 입에선 피식 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요? 사실 저 이런 거 잘 믿지도 않지만, 운명의 남자, 내 인생의 반쪽 뭐 그런 거 더더욱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오늘 하루 행복하면 되는 거죠.”

“저, 저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또!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운명의 남자라는 여자의 말에 그저 헛헛한 웃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모든 걸 다 잃은 것처럼 세상 끝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 아가씨 인생 마지막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될 테니까 과거의 나쁜 기억들 때문에 그 인연을 놓치고 후회하는 일 따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야.”

‘마지막 운명의 남자….’

“사람 연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지. 어쩌면 그 인연이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고.”

“뭐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그럼 됐어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돈은 무슨 됐어! 있을 때 한 푼이라도 아껴, 곧 한 푼이 새로워질 텐데 나도 슬슬 들어가 봐야겠네, 용건 끝났으면 얼른 가봐! 나도 바빠!”

발길을 돌려 그곳을 나온 후 집으로 돌아온 예리. 앉은 채로 잠시 눈을 감아보는 예리의 머릿속, 낯선 여자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가씨 인생 마지막 운명의 남자야.’

말로는 계속 아니라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여자의 말이 귀에 거슬리듯 떠오르며 신경이 쓰였다.

‘푸후후, 운명의 남자는 무슨! 됐고! 드디어 이틀 남았다!’

집에 도착해 털썩 그대로 누워 바라본 벽에 걸린 달력. 이번 주말 이틀 앞으로 다가온 백진 건설 아파트 입주일, 이 순간만을 위해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미친 듯 앞만 보고 달려왔다.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계약한 아파트에 입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가득 행복 그 자체. 물론 대출의 큰 힘을 더하긴 했지만. 진정한 사랑 따위 자신의 인생에 절대 없다고 생각하던 예리는 피곤했던 탓인지 스르르 절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곤했는지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잠시 후.

“끼이잉.”

시계 초침 소리만 조금씩 들려오는 모두가 잠든 조용한 새벽 어디선가 누군가를 부르며 찾는 듯한, 작고 가느다란 알 수 없는 소리가 예리의 귓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앙앙! 끼이응.”

‘이게 무… 무슨 소리지?’

꿈인지 현실인지 계속해 반복되는 소리에 예리는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 방에 불을 켜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비몽사몽 알 수 없는 작은 소리를 따라 걸어간 곳. 낡은 현관문을 열자 하얗고 조그만 강아지가 발을 모으고 앉은 채로 예리를 바라보며 까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앙앙.”

***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늦은 시각 불 켜진 백진 그룹 본부장실. 휴대폰 너머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준석의 얼굴도 차츰 굳어지기 시작했다.

“본부장님, 죄… 죄송합니다. 잠깐 차를 세워두고 트렁크 좀 정리하는 사이에 그만, 문이 열린 줄 모르고… 언제 나갔는지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그래도 칩도 있고 동물등록증도 있으니까 아마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대체 왜 지금 말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금방 찾을 거라, 생각하고 도착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괜히 본부장님 신경 쓰이게 해드릴까 봐… 죄송합니다.”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밤을 새워서라도 찾으세요! 당장!”

휴대폰을 쥔 채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는 준석의 손, 그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잔뜩 붉어져 일어섰다. 준석에게 있어 반려견 루이스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집에 도착해 있을 루이스가 온데간데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준석은 멍하니 멈춰 선 채로 신경이 온통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