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운명의 장난.

2020년 뉴스 메인에는 ‘태오 그룹 이사 유태오 사망 소식’이라는 큰 타이틀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 동승 하였던 태오의 비서도 즉사. 같이 동승한 50대 여자만, 중태. 그리고, 태오 그룹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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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이슬의 생일날 네 식구가 단란하게 식탁에 모여 앉았다. ‘사랑하는 딸, 생일 축하해.’ 환하게 웃는 이슬의 부모님.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박수를 치는 이한. 그리고, 피 범벅이 된 시트 위 팔을 축 늘어트린 부모님.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구박. 꿈임에도 불구하고, 이슬은 눈물을 터트리며 발악했다. ‘다시 다 돌려달라고.’ 자신에게서 앗아간 모든 것들을 다 돌려놓으라고 외쳤다.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시계를 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꿈으로 꾼 이슬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하, 작게 한숨을 쉬는 이슬이다. 전전긍긍, 되지도 않은 취업에 목을 맨 탓에 오늘도 잠을 설쳤다. 묵직한 머리와 목을 몇 번 주무르고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피곤해. 작게 말을 뱉고는 화장실 거울에 보인 얼굴은 잠을 못 잔 탓인지 퉁퉁 부은 것으로도 부족한지 찌르면 터질 것만 같았다.

“아. 오늘 면접인데 진짜!”

후다닥 씻고 나오니 이제 일어난 듯한 동생이 이슬을 쳐다봤다. ‘누나 오늘 얼굴 터지겠다? 잠 안 잤어?’ 이슬을 놀리듯 말하는 이한의 표정이 한층 더 신나 보였다.

“콱, 학교 갈 준비나 해.”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기 전에 이한의 밥부터 차리는 이슬이다. 이슬은 ‘가장’이다. 이슬이 17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작은 엄마의 집에서 거의 가정부 취급을 받으며 자랐고, 20살이 되자마자 이한을 데리고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런 작은 엄마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도 검정고시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슬은 이한을 데리고 집을 나오기 위해서 공장이며, 편의점, 주방 보조 하루에 2시간 남짓한 시간을 자며 돈을 모았었다.

“설이한! 밥 먹고 가!”

정작 본인은 한 숟가락도 뜨지 않고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단정하게 머리를 올리고 하늘색 블라우스에 검정 H라인 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몇 번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엉망진창이다. 망친 화장을 지우고는 베이스와 마스카라 립스틱만 바르고는 옷과 서류를 챙겨 집을 나섰다.

일주일 전 뜬 공고 때문에 며칠을 밤새며 면접 준비를 했었다. 이번에는 꼭 레스토랑을 탈출하고 편한 일, 돈 많이 주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양궁을 하겠다며 꿈을 키우는 동생을 서포트하려면 무수히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교통비라도 아껴야 한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기 위해 7시에 집을 나선다. 높은 굽에 발목이 휘어질 듯 아픈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네 정거장 걸으면 8시 정도 될 거고, 45분 정도 버스를 타면 적어도 9시 안에는 면접실에 도착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이슬을 다리가 부러지도록 걸었다. 새 구두는 자꾸 뒤꿈치를 씹는 느낌이고,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다.

“하. 정말.”

편의점에서 밴드라도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서는 이슬이다. 편의점 안에는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버스를 기다리는지 앉아 커피를 마시며 노래를 듣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바쁘게 산다. 이슬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제일 싼 밴드와 바나나우유 하나를 골랐다. 3,500원입니다. 라고 말하는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고는 빨대도 야무지게 챙긴 이슬이다. 의자에 앉아 까진 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는 빨대를 꽂았다. 입으로 넘어가는 바나나우유는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도 달고 맛있었다. 오늘 면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이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 이번에도 떨어지면 이한이 고등학교는 어쩌고 활 교체 비용은 어쩌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바나나우유를 먹고 있는데 툭- 하며 손에 있던 바나나우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하며 일어서는 이슬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남자가 보였다. ‘아니 사과를 해야지?’ 이슬은 하얀 얼굴에 잔뜩 주름을 지며 남자를 쫓아 나섰다.

“저기요!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죠!”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남자의 팔을 잡은 이슬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뒤돌아 이슬을 쳐다봤다. 이슬을 훑어보던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이슬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왜? 어이가 없어서.

“누가 그렇게 의자를 뒤로 빼고 앉아 있으랬나.”

“지금 그렇게 말 하실 입장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이슬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는 남자의 시선에 불쾌함을 느끼는 이슬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옷도 멀쩡하고, 불편해 보이는 곳은 없어 보이는데. 바나나우유?”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다 툭- 담배를 떨어트리는 남자다. ‘기본도 안 됐네. 생긴 건 멀쩡해서는’ 속으로 생각하던 이슬은 돈을 내미는 남자의 팔을 쳤다. 그리고, 이슬의 시야로 들어온 담배를 구두로 짓밟았다.

“바나나우유는 이걸로 퉁 쳐요. 그리고, 사과가 먼저라고 생각 안 하세요?”

사과도 할 줄 모르는 남자를 쳐다보던 이슬은 혀를 내두르며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였다. ‘오늘 일진 망했네. 재수가 없어.’ 속으로 생각하며 일명 ‘어깨빵’도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30분이다. 앞에 있는 정류장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면접 서류에 빠진 게 있나 꼼꼼하게 확인을 하였다. 그만큼 이번 면접은 이슬에게 중요하다.

‘곧 1005번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라는 방송이 정류장을 가득 채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서 오는 버스를 보며 이슬의 심장도 쿵쾅- 요동쳤다. ‘이한이는 밥 먹고 갔나?’ 짧게 생각하다 작년 생일 이한이 용돈을 모아 사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앞에 서는 버스에 올라타며 이한에 전화를 거는 이슬이다.

-어, 누나.

“밥 먹었어?”

-응 먹고 지금 훈련하러 가려고 버스 탔지. 누나 면접 잘 봐. 나 먹여 살려야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이한이다. ‘걱정 좀 하지 마. 누나가 언제 너 굶기는 거 봤어?’라고 속삭이며 말했다.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농담이지. 끝나면 전화해. 나 훈련 일찍 끝나니까 데리러 갈게. 상금으로 밥 먹자.

이한이 기특해서 웃는 이슬이다. ‘알겠어, 오늘도 훈련 잘하고.’ 말을 하며 통화를 끝냈다. 부족하지만 이한은 이슬의 품에서 너무나도 잘 컸다. 그만큼 이슬은 이한을 끔찍하게 챙겼고 죽어라 일해서 이한을 뒤를 받쳐야 했다.

귀에 울리는 잔잔한 노래에 이슬은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부터 재수는 없었지만, 액땜했다고 치고 면접은 제발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멀리 돌아가는 버스에 잠깐 잠을 청했고 종점 전에 내리니 8시 50분이다. 면접까지 40분, 지금 들어가서 접수하면 빠른 번호표는 받겠지? 생각하며 설레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회사 안으로 들어서는 이슬의 뒷모습은 어딘가 밝았다. 화장실에 먼저 들려 얼굴을 확인하고, 접수처로 가 서류를 내미니 5번이라는 번호표가 주어졌다.

부지런한 이슬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은 존재했다. 대기실로 가니 네 명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류에서 간추렸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40명이 넘는 사람이 이 서류전형에 합격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슬은 의문이 들었다. 검정고시 출신에 볼품없는 학력과 이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1차에 합격을 했다는 부분에.

빠르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면접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화장실이 가고 싶은 마음에 이슬은 면접 대기실을 나와 휴대폰을 보며 걸었고,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드니 얼굴도 하얗고 키까지 큰 남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와….”

‘연예인인가? 잘생겼다.’ 뒷말을 속으로 생각하던 이슬을 쳐다보며 괜찮냐고 묻는 남자에게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앞을 잘 봤어야 했는데, 괜찮으세요?”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면접 잘 보세요.”

말을 하며 웃는 남자의 보조개가 이슬의 눈을 끌었다. 넋을 놓고 자신을 지나쳐 가는 남자를 한참 쳐다보다 돌아서려는데 남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발을 멈춰 서게 했다.

“부회장님! 이사님이 아직도 출근을 안 하셔서….”

“전화해볼게요. 김 비서는 가서 일 봐요.”

‘부회장? 부회장이라고?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데’ 생각하던 이슬은 얼른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대기실에 앉았다. 아까 부회장님하고 부르던 ‘김 비서’라는 여자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부터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2분씩 들어가겠습니다. 1번, 2번 들어가세요.”

이슬은 다리를 떨고, 손을 만지작거리며 본인 순서를 기다렸다. 대기업이라서 그런가? 다들 예쁘고 좋은 옷을 입고 왔다. 이슬은 자신의 옷차림을 훑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은 또 왜 그렇게 빨리 지나는지, 이슬의 번호가 호명되었고 면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인사를 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 아까 부회장님이라고 불리던 남자 옆에 바나나우유, 바나나우유가 있었다. 이슬의 표정은 면접자들을 당황 시켰고, 불편한 것이 있냐고 묻는 부회장에 겨우 시선을 거두었다. ‘이사 유태하’라고 적혀 있는 명패, 그 바나나우유가 이사다. 일하게 되면 모셔야 할.

‘유태하’와 ‘설이슬’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강렬하고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이슬은 면접에 임했다. ‘싸가지 좀 없는 놈이면 어때, 구면에다가 돈까지 많이 준다는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렇게 면접은 끝났고,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남동생의 품에 안겼다.

“고생했네. 뭐 먹을까? 어?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나? 나 떡볶이. 5인분!”

“면접 결과는 언제 나온대?”

“이사 바뀌면서 급하게 뽑는 거라, 내일 나온다는데? 그리고 바로 출근이래. 근데, 떨어질 것 같아.”

“왜? 떨었어?”

“아니. 그 재수 없는 새끼가 나를 뽑았을 리가 없지.”

어? 뭔데? 아 뭔데, 끈질기게 묻는 이한에 떡볶이 5인분 사주면 풀겠다고 호탕하게 말하는 이슬이다. 그런 이슬과 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태하가 있었다.

“남자친구가 운동하는 놈인가 보네.”

아까 자신의 담배를 밟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태하다. ‘예의는 본인이 더 없으면서 어딜 예의를 따져?’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 태하의 뒤에 아까 이슬이 보고 잘생겼다고 감탄했던 남자가 섰다.

“넌 면접 보는 날까지도 지각하면 어쩌자는 거야.”

“신경 좀 꺼.”

“급하게 뽑는 거니까, 오늘 안으로 정해서 연락 취해. 일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선호의 말에 태하는 손가락을 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이한과 다정하게 걸어가는 이슬이 보였다.

“나? 쟤.”

이 세상에 모든 운명을 이어내고, 끊어내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그렇게 질기고도 질긴 셋의 운명은 시작되었다. 아니, 운명이라기보단 악연에 가까운 그런.

띠딕- 띠디딕- 띠디딕- 오늘도 새벽 5시 반, 눈을 떴다. 일을 시작 한지, 6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건 여전히 힘든 이슬이었다. 겨우 눈을 비비고 일어나 가볍게 샤워를 마친 후 준비를 했다. 준비하며, 오늘은 또 태하가 어떤 일들로 자신을 괴롭힐까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사님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 번은 제일 좋아하는 메뉴를 시켜 드렸더니, 안 좋아한다고 변덕을 부리지를 않나. 그것도 아주 냉정한 얼굴을 하고선, 그리고 간식거리를 사다 달라고 해서 매일 드시던 것을 사다 드리면 어느 날은 먹고, 어느 날은 맛이 없다고 난리를 쳤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고개를 한 번 흔든 이슬이 이한에게 소리쳤다.

“설이한, 일어나!”

아직 침대에서 자는 이한을 깨우니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장학금은 어떻게 됐어?’ 물으니 아직 모른다고 답을 한다. 6개월 동안 일을 꾸준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모이지 않는 돈에 이한에 미안하지만, 장학금을 알아보라고 한 이슬이었다.

서진 그룹 재단에 속한 학교에 다니는 이한 덕분에 돈이 엄청나게 깨지기도 했지만, 사립이고 특성화라 앞으로 미래를 생각하면 가는 게 맞다 생각을 했었다. 이번에 대학 진학까지의 장학금을 제공한다는 안내서를 들고 온 이한에 신청하라고 독촉했었다.

“연락 오면, 누나한테 꼭 말해. 밥 먹고 가고, 누나 출근한다!”

“으응, 누나 다녀와.”

타닥- 타닥- 빠르게 뛰었다. 한 손에는 쇼핑백 하나가 들렸다. 매일 들고 다니는 이 쇼핑백에는 구두가 들었다. 출근 시간이 촉박해 운동화를 신고 열심히 뛴 후에 회사에 가서 갈아 신는다. 성격 급한 이사님 덕분에.

“아니, 설 비서는 아직 출근 전이야?”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사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숨을 한 번 고른 후에 옆으로 섰다. 이슬의 숨소리를 들은 것인지 뒤를 돈 태하가 오늘도 재수 없이 잘생겼다고 생각한 이슬이었다.

“왜 이렇게 늦어.”

“안 늦었어요. 20분이나 빨리 왔는데 ”

이슬의 대꾸에 손목시계를 확인하고서는 이사실로 자취를 감추는 태하였다. ‘확, 내가 이사였으면 아주 완벽히 잡아먹었다.’ 생각한 이슬은 자리에 앉아 신발을 갈아 신고는 거울을 보며 땀을 닦았다. 돈만 있으면 차라도 한 대 사는 건데, 오늘도 생각으로만 차를 그리는 이슬이 입맛을 다셨다.

일정 확인을 위해 수첩을 확인하니 수두룩 빽빽이다. 낮은 구두를 신고 올 걸 생각하고 있는데 책상을 똑-똑 치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슬이었다.

“아,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미안하게.”

태오 그룹의 장남이자, 부회장님이다. 언제 봐도 참, 잘생겼단 말이야. 둘이 형제인데 왜 이렇게 달라? 라는 생각으로 멍하니 서 있던 이슬은 선호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놀라 정신이 들었다.

“안에 태하 있죠?”

“아, 네. 잠시만요.”

이사실 문을 두드리는 이슬에게 ‘뭘 노크야. 들어와.’라고 말하는 태하다. 어오, 저 재수. 차분하게 표정을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다.

“왜.”

“부회장님 오셨습니다.”

“아, 또 왜.”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쓴 태하와 눈이 마주친 이슬은 얼른 몸을 선호 방향으로 돌렸다. ‘내가 알아서 들어갈게요.’ 작게 말하는 선호는 이슬에게 힘내라는 듯 어깨를 한 번 툭 쳤고 이슬은 잽싸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일정 정리를 하고는 프린트를 했다. 앉아만 있는 것도 아니라,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아주 온몸이 난리다. 아직 첫 일정까지 1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출출함에 서랍을 여니 간식이 가득했다. 다, 선호가 챙겨준 것들. 부회장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털털하고 소탈한 선호에 이슬은 가슴이 설레었다. 아마, 첫 직장에서의 첫사랑이랄까? 는 좀 오버고, 그냥. 우상이랄까?

“오늘 미팅 잘하고, 저녁에 가족 모임 참석해.”

문이 열리고 입에 초콜릿을 문 채로 부회장인 선호를 마주했다. 당황한 이슬은 얼른 티슈에 초콜릿을 뱉었고, 선호의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설이슬 씨, 군것질 그만 하세요.”

“아, 배가 너무 고파서. 죄송합니다.”

“아침을 먹고 다니든가.”

문을 닫고 들어가는 태하를 빤히 보던 이슬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유태하 성격을 받아 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이슬을 안쓰럽게 보던 선호는 이슬의 책상 위로 몸을 기댔다.

“아침 못 먹고 다녀요?”

“네, 거리가 좀 있어서 시간도 걸리고. 5시 반에 일어나도 부족해요.”

잔뜩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이슬을 보며 웃던 선호는 ‘점심 혼자 먹어요?’ 묻는다. 이슬은 늘 태하와 함께 했었다. 둘이 먹는 것도 불편한데, 혼자 먹기는 싫다고 굳이 이슬까지 앉혀둔 태하였다.

“아뇨, 이사랑. 아니 이사님이랑 같이 먹어요.”

“그럼 나중에 같이 밥 한번 먹어요. 어째 입사 처음 했을 때 보다 말라서.”

“아 뭐, 비서는 몸매라고 다들.”

“누가 회사에서 그런 말을 해요?”

“그냥 뭐, 이래저래 들어서요.”

이슬의 말에 좁혀졌던 미간에 더욱더 주름이 졌다. ‘나중에 회식 때 한번 말 좀 해야겠네요.’ 다정하다. 선호의 비서는 그래서 맨날 웃고 다니는 건가, 본인은 맨날 죽상인데 짧게 생각하던 이슬에게 인사를 하는 선호다.

“다음에 또 봐요. 이슬 씨.”

“네. 조심히 가세요.”

그런 선호의 뒷모습을 한참 보던 이슬은 엄지를 척 올렸다. 진짜, 이 사막 같은 회사에 오아시스 같은 존재랄까? 그런 이슬을 이사실 문에 기대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태하가 헛기침을 한번 해주니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돈 이슬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사님. 일정표입니다.”

일정표를 내미는 이슬을 쳐다보며 일정표를 채간다.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확- 채간다. ‘싸가지.’ 속으로 욕을 뱉은 이슬은 입을 그저 꾹 다물고 말았다.

“앞으로 일정은 하루 전날 올려 두세요.”

“네?”

“못 알아들어요? 하루 전에 지류로 뽑아서 두라고요.”

“네….”

잔뜩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슬에 태하가 당황한 눈이다. 자신의 태블릿에도 일정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굳이 지류로 뽑으라고 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이슬은 달싹이는 태하의 입술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10분 뒤에 나가야 하니 차 대기 시키세요.”

“아직 50분 남았는데 벌써요?”

‘진짜 말 많네.’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태하에 이슬은 바로 수화기를 들어 기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기사님, 화영 그룹 일정으로 10분 후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차량 대기 부탁드려요.”

전화기 너머로 호탕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는 최 기사님이다. 항상 뒤에서 이슬을 챙기고 적당히 태하의 분위기를 맞춰 이슬을 편하게 해주는, 이슬도 마찬가지로 최 기사를 위해서 일정표도 미리 드리는 타입이다. ‘세상에 이런 비서가 어딨어.’라며 늘 이슬을 칭찬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