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등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교통사고라고는 하지만 목격자도 없고 주위에 CCTV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오빠는 대학생 신분으로 사고 현장을 돌아다니며 증인을 찾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충격으로 엄마는 집에서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래서 민지는 이미 대학에 합격한 지 오래였지만 집안 사정이 이렇게 안 좋은데 대학을 가야 하나 고민했다. 집안 살림이 좋지 않고 평생 주부로 일했던 엄마가 일하러 어디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고 돈을 벌겠다고 했지만, 오빠인 민준이 끝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바라던 대학인데도 즐겁지 않았다.

“안녕, 여기 앉아도 되지?”

고등학교 친구 중 간호과를 온 친구가 없어서 민지는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네. 그러세요.”

옆에 와서 앉은 아이는 하얀 피부에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저기, 우리 인사할래요?”

혼자서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민지에게 옆에 앉은 아이가 말을 걸었다.

“나는 전민지라고 해요.”

조금은 귀찮은 듯 얘기하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윤송연. 내 이름은 윤송연이야.”

송연? 송편도 아니고. 민지는 살짝 손을 잡았다 놨다.

“우리 나이가 같으면 말 놓을까?”

“그래.”

민지는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야 하나 오직 생각이 거기에만 가 있었다. 아니면 오빠 말처럼 장학금을 받아야 하나.

“기숙사에서 다녀, 아니면 집?”

“난 집이 가까워.”

“아, 그렇구나.”

무언가 아쉬워하는 듯했다.

“너는?”

“나는 아직 집을 못 구했어. 기숙사 들어가려고 했는데 자리가 없고 주위에는 너무 비싸더라고. 그래서 고시원으로 들어가야 하나 생각 중이야.”

“고시원도 학교 근처에는 많지 않은 거 같던데. 부모님이 알아보시면 더 낫지 않을까?”

부모님이 방을 구해주시면 되지 않나? 뭐가 고민이 된다는 거지?

“그게…… 부모님이 안 계셔.”

“부모님이 같이 안 오셨어?”

그저 아이가 하는 말에 대답만 하고 있었던 민지는 아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부모님이 안 계셔, 난.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할머니하고 살았어. 그런데 할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나 혼자야.”

송연의 말을 듣는 순간 민지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안.”

“괜찮아. 할머니하고 살았어도 행복했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해도 부모님보다 더 잘해 주셨거든.”

얼굴만 보고 혹시 잘난 척하는 공주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괜히 미안했다.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아직 짐을 다 정리를 못 하고 와서 여인숙 같은 데 가 볼까 해. 거기가 가장 싸기도 하고.”

“겁이 없구나. 어린 여자애가 무슨 여인숙은.”

민지는 엄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송연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요즘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송연이라고?”

치대에 다니는 오빠가 민지 말고 누가 같이 왔다는 말에 아는 척을 했다.

“응. 오늘 잘 데가 없다고 해서 내가 데리고 왔어.”

“안녕하세요.”

송연은 민지에게 억지로 끌려 왔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얘가 글쎄 여인숙에 가서 잔다고 하잖아.”

“아직 시골에 있는 집을 정리를 못 해서요.”

민지는 엄마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다.

“민지 친구가 오랜만에 왔는데 차린 게 별로 없네.”

차린 게 없다는 말은 어떨 때 쓰는 말일까? 앞에 놓인 음식은 명절에나 볼 수 있는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어디서 지내려고?”

식탁에 앉으며 민준이 물었다.

“대학 근처에 고시원에 있을까 해요. 돈도 별로 없고 기숙사도 떨어져서요.”

아직 고시원을 알아보지 않았지만 잠만 자고 다닐 수 있는 곳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밥은 학생 식당에서 먹으면 되고 공부는 주로 도서관에 가서 하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럼 우리 집에서 다니는 건 어때?”

갑자기 무슨 말이지? 민준의 갑작스러운 말에 모두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시원에 낼 돈 우리 집에 주고 여기서 다니라고. 어차피 민지 밥 줄 때 조금 덜어서 송연이 주면 될 거 같고. 짐 쌓아둔 방, 놀리지 말고 송연이한테 하숙비 식으로 받으면 되잖아. 그리고 송연이도 고시원보다는 우리 집이 더 안전하기도 하고.”

가만히 오빠 말을 듣다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빠 말이, 말이 좀 되는 거 같기도 하네.”

“아니에요. 그렇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송연이 안절부절못했다.

“네가 무슨 이것저것 고를 처지가 돼?”

“그래도 너무 밀어붙이는 거 아니니? 송연이 부모님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엄마도 싫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래도 송연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걱정하지 마. 얘, 혼자래.”

민지의 필터 없이 나오는 말에 송연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송연아, 혼자니?”

민지의 엄마가 물었다.

“네? 네.”

“그럼 들어와라. 돈이고 뭐고 그냥 들어와서 살아. 지붕 있겠다, 이불 있겠다. 그냥 우리 먹는 밥에 숟가락 하나 더 놓고 그러고 같이 살자.”

“그래도 제가 같이 살면 불편하실 텐데요.”

“그리고 우리 오빠 얼마 안 있으면 군대 가니까 엄마하고 나밖에 없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여자 두 명이 있는 거보다 한 명 더 있는 게 더 낫겠지.”

그렇게 송연은 민지와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민지의 어머니 말처럼 그냥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민지의 엄마는 그녀가 주는 돈은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기요?”

송연과 민지는 마치 쌍둥이라도 되는 듯 항상 붙어 다녔다. 다른 아이들처럼 미팅하러 다니거나 쇼핑하러 다닐 시간은 없었지만 서로가 있어서 행복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네.”

처음에는 그들을 부르는 소리인지 몰랐다. 하지만 누군가 민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이거요.”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남자가 편지라고 생각되는 종이를 내밀었다. 송연이를 또 소개해 달라는 편지인 게 분명했다. 긴 머리와 하얀 피부. 그리고 매일 웃고 다니는 송연은 미팅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인기가 많았다.

“송연이 바쁜데.”

내미는 종이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귀찮은 듯 민지가 얘기했다.

“민지 씨한테 주는 건데요.”

“나요?”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기도 하나 보다.

“네. 제가 민지 씨하고 만나보고 싶어서요.”

민지에게 편지를 주면서도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무슨 과예요?”

“의과대 다녀요. 본과 1학년이고요. 간호학과죠, 민지 씨는?”

“네. 그런데 나는 남자를 만날 생각이 없어서요. 죄송해요.”

“다시 생각을 좀.”

“이거 좀 받을래요?”

의대생이라는 남자가 망설이듯 낮게 얘기하는 사이로 갑자기 어떤 이가 종이를 내밀었다.

“아, 이거는 송연이한테. 네가 윤송연이지?”

앞에 남자는 민지에게 만나자고 했던 남자와 달리 서글서글한 웃음에 키도 180cm 이상은 되어 보였다.

“저는 싫은데요.”

송연이 늘 그렇듯 싫다고 대답했다.

“아, 내가 착각하게 했다면 미안. 예약하는 거야. 지금은 말고 나중에 만나자, 우리.”

“네?”

황당한 사람이었다.

“나는 유진서라고 해. 의대 본과 3학년이다.”

송연은 앞에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남자가 더 밝게 웃었다.

#1화

3월이라는 달은 언제나 뒤숭숭한 느낌이다. 무언가의 시작을 의미하는 달이다 보니 새로운 환경에 설레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생기기도 한다.

“확실히 봄은 봄이다. 날이 많이 좋아졌어.”

아직은 쌀쌀한 날이긴 하지만 한동안 하얀 눈이 있었던 세상만 보았던 이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어느 레지던트가 올라나 모르겠네.”

“아무도 안 온 건 아니길 바라야죠.”

“설마. 그런 불길한 얘기랑은 하지도 마. 작년에도 겨우 한 명 들어와서 그나마 유지됐지 아니면 얼마나 힘들 뻔했니? 나이 많은 부장님이 인기 없는 과목이라고 매번 한탄하시고.”

“그러고 보니 부장님도 그만두신다는 데 정말일까요?”

“언제 그만두시려나. 아이고, 또 분위기 뒤숭숭하겠네. 안 그러니, 민지야?”

“네? 죄송해요. 뭐라고 그러셨어요?”

간호사들도 다들 서로의 얘기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민지는 그들의 얘기에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남들의 얘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민지는 대학을 다니면서 오직 공부만 했다. 그것이라도 해야 하니까. 다른 이들처럼 여유로운 삶이란 그녀에게 있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소문이나 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이 가족들을 매우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오빠와 자기가 일을 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아버지만 바라보고 살던 엄마에게도 청천벽력이었던 일이지만 그녀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던 때였다.

“죄송은 무슨. 우리처럼 이런 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솔깃한 일이지 뭐. 그래도 은근히 재밌다.”

그들의 말에 민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웃지 마.”

“가끔 저도 소문 들을 때 있어요.”

궁색해 보였지만 그나마 대답은 해야 할 거 같았다.

“아이고, 정말?”

피식 웃어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숙녀 여러분.”

그녀가 근무하는 내과에 오늘부터 새로운 레지던트들이 들어오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조금은 들뜬 듯 아니, 걱정하는 이들의 얼굴도 보였다. 이제 이 병동에서 일한 지 삼 년째가 되는 민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는 적응됐지만 누가 레지던트로 오는지에 따라 가끔 병동의 분위기가 달라지니까.

“이제 삼 년 차라 기력이 매우 좋으시네요.”

간호사 중 한 명이 원상을 보고 얘기하자 그도 머쓱한지 웃어버린다.

“하하하, 그런가요? 이제 1년만 지나면 공부만 하면 되니까 부담이 적어서 그런가 봐요?”

“너무 좋은 티 내지 말아요. 다른 레지던트들은 죽을상이니까요.”

옆에 서 있던 레지던트 이 년 차인 동진이 삼 년 차인 원상을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번에 오신 과장님이 좀 깐깐하다는데 걱정이네요.”

이미 동진은 새로운 과장과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젊어서 놀라기도 했지만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 더 걱정되었다.

“어디 깐깐한 분들이 한둘이냐? 그러려니 하고 지나다 보면 다 지나갈 것이다.”

“저번에 뵀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얼굴에 표정이라고는 없는 분처럼 우리를 보더라니까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나이가 젊으니까 좀 더 의견이 우리하고 잘 맞을 수도 있지.”

원상은 걱정스러워하는 동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한마디 했지만 그다지 도움은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원상의 말에도 동진의 이마는 여전히 찌푸려진 상태였다.

“그래도 이 년 차가 제일 많이 배우는 시기니까 열심히 해.”

“원래 이 년 차가 제일 힘든 거 아닙니까?”

“그런 이 년 차를 이제 막 벗어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줄래.”

민지는 서로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면서 회진 준비를 했다.

“전 간호사?”

“네?”

원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민지는 스테이션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순간 얼어버렸다. 정말? 이거 꿈 아니고? 그다. 그녀의 인생에서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가 그녀의 눈에 나타났다. 말도 안 돼. 민지는 그가 걸어오는 복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늘이 인생 최악의 날이 아니길 빌었다.

“우리 회진 따라와 줘요, 알았죠?”

그녀의 얼굴이 굳어진 걸 알지 못하는 원상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하지만 민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굳어진 인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자신을 향해 진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그도 보았으리라. 하지만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은 그는 사뿐히 그녀를 무시했다.

“안녕하십니까?”

그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레지던트들이 인사를 건네자 이번에는 간호사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네, 처음 뵙네요. 유한서라고 합니다.”

유한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를 다시 여기서 만났다. 만나고 싶지 않아서 병원까지 이직했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고.

“어머, 새로운 과장님이시라고?”

“말도 안 돼. 나는 여태까지 우리 조원상 선생님이 최고의 미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오늘 바뀌네.”

간호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과장으로 온 한서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처럼 생겼다. 거기다 키는 180cm라는 원상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한서는 민지가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다.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서는 처음 도는 회진인데도 레지던트들이 설명하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회진을 같이 돌고 있는 그녀가 거슬렸다. 예상치 않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다. 전민지라는 여자가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병동에서 일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 병원을 택한 이유도 그녀가 여기에서 일한다는 걸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감염내과 부장으로 있는 교수가 얼마 후 그만두게 되면서 올 수 있게 되었다.

오전 외래 진료가 끝난 후 한서는 다시 병동으로 올라와 다시 환자들을 일일이 만나 봤다. 물론 아침 회진 시간에 한눈을 팔아서 정확히 환자들을 파악 못 한 것도 있었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회진 시간에는 많은 걸 물어볼 수가 없어 정확한 환자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레지던트 불러들일까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병실에 혼자 와 있는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혼자 보고 가겠습니다.”

“네.”

아직은 담당 환자가 많지 않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고 있었다.

“우리 선상님은 이렇게 얌전하셔서 어찌 과장이시란가.”

“이제부터는 어디 불편하신 데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해요. 참으시면 안 되고요. 그러면 돈 더 많이 든다고 저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어서 진통제를 먹으면서 통증을 참았다는 광주에서 올라온 할머니였다.

“아이고, 알았당게요.”

이빨이 두 개가 빠져서 창피하다며 항상 말하고 웃을 때 얼굴을 가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한서는 잘 웃지 않는 자신을 반성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