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는 한나와 키스를 하다가 속삭였다.

“한나 씨, 쫓겨나야할 것 같은데요.”

“싫어요. 함께 있고 싶어요.”

“한나 씨가 생각하는 ‘함께 있는다’는 말이 우리 둘한테는 서로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만.”

“전에는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그냥 재워주기도 했으면서.”

한나가 불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참기가 힘듭니다.”

도훈이 한나를 다시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 이제 밖에서 데이트할까요?”

한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도훈 씨 집에서 함께 있는 거 너무 즐거워요. 집에서도 데이트해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만 집에 가요.”

“가기 싫어요.”

“그럼 뭐하자는 거예요?”

“같이 티브이 보고 쉬어요.”

“난 샤워하고 그만 자고 싶어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도훈이 한나를 품에서 떼어내고 일어났다. 한나는 고집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더 있다가 갈 거예요.”

“고집을 부려요. 난 쉬고 싶단 말이에요.”

“나랑 같이 쉬어요.”

“뭐하고 쉬는데요.”

“예능 보고 아니면 영화 보고…… 그냥 껴안고 있거나…….”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가라는 거잖아요.”

도훈은 짜증이 나는지 셔츠 단추를 풀면서 욕실로 걸어갔다.

“나 나올 때까지 안 가면 허락의 의미로 알 겁니다.”

도훈은 옷을 다 벗고 샤워부스에 서서 뜨거운 물을 틀었다. 쏴아아 하고 뜨거운 물줄기가 머리를 강타하고 얼굴과 몸을 흠뻑 적시고 흘러내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도훈은 웃으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베스 가운을 입고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욕실을 나왔다.

“왁!”

소파 뒤에 숨어있던 한나가 소리를 내며 튀어나와 도훈을 놀래 켰다. 도훈은 깜짝 놀라 기절할 뻔 했다. 그럼 아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는…….

한나가 도훈을 속인 거였다.

“진짜 놀라는 것 봐. 기절할 뻔 했죠?”

그녀가 물방울이 톡 터지는 것처럼 상큼하게 웃었다. 초겨울에 찾아온 따듯한 봄의 요정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위로 꽃가루가 내리는 것 같았다. 특수효과를 준 것처럼 꽃가루가 빛이 나면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도훈의 마음에 바람이 훅 불었다.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인내심은 이제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한나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한나는 꺅, 소리를 내며 떨어질까 봐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키스가 시작되었다.

“분명 경고했어요.”

입술을 떼고 도훈이 속삭였다. 그는 한나를 품에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1

맛있는 가게로 소문난 베이커리 카페에 갓 구운 빵들이 고소한 빵 냄새를 풍기며 푸짐하게 진열돼 있었다. 각종 향신료를 넣고 양념한 쇠고기를 파이지와 같이 구운 미니 미트파이에 [미니 미트파이는 조기 매진될 수 있습니다.]라고 손 글씨로 적은 작은 안내 표지판이 트레이 앞에 꽂혀있었다.

한나는 빵 집게로 하나 남은 미트파이를 집으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의 빵 집게가 한나의 집게에 부딪쳤다. 아마도 같은 파이를 집으려고 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집게를 손에 들고 있는 키 큰 남자를 올려다봤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스러운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연예인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주 수려하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윤기 어리고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올리고, 매끈한 피부는 티끌 한 점 없었다. 짙은 눈썹은 남자다운 느낌이 났고, 오뚝한 코가 보기 좋게 뻗어있었다. 거기에다 깊은 눈매까지 더해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치 판타지 소설의 사연 많은 아름다운 왕자를 보는 것 같았다. 늘씬하고 훤칠한 체구는 185cm도 훌쩍 넘을 만큼 장신이었고, 탄탄하게 잘 짜여진 근육질 몸매가 슈트 밖으로도 느껴졌다.

남자는 얼음장같이 차갑고 냉랭한 눈빛으로 한나의 눈을 찌르듯이 쳐다봤다. 자기에게 파이를 양보하라는 무언의 협박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어떡하지. 이거 먹으려고 점심도 조금 먹었는데…….’

“그걸 마지막으로 오늘 미트파이는 전량 소진되었습니다.”

하나 남은 미트파이를 사이에 두고 남자와 집게로 대치전을 벌이고 있는데 직원이 갓 구운 크루아상을 트레이에 담아 나오면서 말했다.

“아, 저…….”

한나가 미트파이를 양보하려고 입을 뗐는데 남자는 파이 옆의 블루베리 타르트를 집어 트레이에 놓고 휙 하고 가버렸다.

“휴.”

다행히 내가 먹게 됐네. 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트파이를 집었다.

그녀는 계산을 하고 밀크티와 미트파이를 놓은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앉아, 빨대로 밀크티를 한 모금 쪽 빨아마셨다. 그리고 카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매만졌다.

160cm의 아담한 체구의 이한나는 투명할 정도의 하얀 피부에 깔끔한 갈색 단발 머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소녀 같은 여자였다. 예쁘고 호감이 가는 인상에 남자들한테 대시도 심심치 않게 받아왔지만 현재 28살의 외로운 솔로였다.

앙. 하고 미트파이를 베어 무는데 흠칫,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서 자신의 뒤쪽에 앉아있는 아까 그 조각같이 잘생긴 미남자를 티 안 나게 흘겨봤다. 남자가 자신이 먹으려고 했던 미트파이를 빼앗겨서 째려보는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남자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딱딱한 얼굴로 책을 읽으며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다. 한나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무감한 태도였다.

‘왜 자꾸 째려보는 느낌이 들지? 유치하게 이거 뺏겼다고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거 아니야?’

미트파이를 우물거리며 숄더백에서 미니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어디 보자…….”

인터넷에 접속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앨리스의 연애 상담소>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요즘 의뢰가 뜸하네.”

관리자 페이지를 클릭하면서 한나가 중얼거렸다. 이 사이트는 회사원인 그녀가 개인 취미로 운영하는 연애 상담 홈페이지로 짝사랑을 하거나 연애 관계에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을 1:1 코치를 해주며 사랑을 이루기까지 무료로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홈페이지는 알음알음 소문이 나, 많지는 않지만 한 명, 두 명 정도로 꾸준히 의뢰가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민이 있어서 상담 신청합니다.]

오전에는 없던 글이 새로 올라와 있었다. 한나는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닉네임 <폴>이라는 남자의 의뢰였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고 있지만 그녀가 너무 좋아요. 좋아하는 마음을 참기 힘들어 그녀를 보면 안아버리고 싶습니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워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짜고짜 이러면 안 되지.”

한나는 얼른 답글을 달았다.

[그 여자분과 서서히 친해지는 방법으로 행동하세요. 처음부터 무리하게 들이대면 여자는 거부감 느껴서 도망갈 수 있습니다. 제가 조언해주는 대로 하세요. 제가 책임지고 여자분과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새로 받은 의뢰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파이를 음미했다. 파이를 다 먹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스페어 노트북을 덮어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반납하는 곳에 트레이를 밀어놓고 카페를 나오려고 유리문의 자동 버튼을 눌렀다. 그때, 누군가가 한나와 동시에 나오려고 하다가 몸을 부딪쳤다. 그 남자였다.

“실례.”

남자는 한나를 내려다보며 한기가 불 정도로 싸늘하게 말했다.

남자는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한나는 카페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회사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부웅하고 마이바흐 한 대가 한나의 옆으로 지나갔다. 운전석에 방금 그 남자가 타고 있었다.

한나는 남자의 차를 따라 숨이 차게 뛰었다. 칼같이 깔끔하게 드라이한 단발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 날렸다.

“걸어서 가라고, 쫌!”

마이바흐는 카페와 가까운 20층 빌딩 앞에서 멈췄다. 운전석을 열고 나온 남자가 차 키를 허공에 달랑달랑 흔들었다.

“주차 부탁합니다.”

“네! 대표님!”

한나가 쌩하고 남자 앞에 달려가서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차 키를 받았다. 바람을 맞으며 뛰어오느라 정성스럽게 드라이한 머리가 산발이 됐다.

“다음 주에 있는 경제방송 스케줄 잘 확인했습니까?”

남자가 손목에 차고 있는 명품 시계를 들여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차 한 대 가격의 명품시계의 각도가 기울어져 번쩍하고 빛이 났다.

“넵! 그쪽 피디님이 같은 계열 다른 방송으로 발령받아서 새 피디가 오신다고 합니다. 여의도에 있는 한정식 집에서 미리 미팅을…….”

말하는 도중에 남자는 획하고 등을 돌려 회전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한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으르렁댔다.

남자는 32세로 HKO 식품 대기업의 계열사 J&J의 대표 권도훈이었다. J&J는 전국의 베이커리 카페 수만 여 곳을 운영하고 있는 큰 규모의 회사였다. 베이커리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는 케이크와 빵들은 모두 J&J 자체 생산 상품이었고, 여러 가지 디저트 상품도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한나는 그의 수행 비서로 운전과 스케줄 관리 등 권도훈의 보좌 업무를 혼자 단독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세단을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도훈이 올라탔다. 아마도 한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한나는 도훈이 들어오도록 뒤로 물러났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지 않고 양복바지에 손을 넣고 거만하게 서 있었다.

‘자기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이거 하나 누르는 것도 시켜.’

한나는 몰래 도훈을 째려보면서 대표실이 있는 20층을 눌렀다.

“19층도 눌러요. 경영기획팀에서 보고서 받아서 가져오세요. 그리고 따로 또 할 얘기가 있으니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스산히 으름장을 놓는 말에 한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뭘 잘못했나? 고작 미트파이 하나 가지고 쪼잔하게 혼내려고 그러는 건가?’

그녀는 도훈의 옆얼굴을 슬쩍 올려다봤다. 단정하게 잘생긴 도훈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속내를 어림짐작할 수 없었다.

“맛있었어요?”

“네?”

“미트파이 맛있었냐고요.”

거봐, 쪼잔하게 그거 말하는 것 봐. 한나는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 비서는 융통성이 너무 없는 거 같습니다. 어떻게 매번…….”

도훈의 음성에 화난 기색이 묻어났다. 어떻게 매번 미트파이를 가로채서 먹느냐는 말을 하려다가 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한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하다면서 양보는 한 번도 안 하고, 하여간 고집이 쇠심줄이라니까.”

“내일은 꼭…….”

“어제도 오늘 양보하겠다고 그래놓고 쏙 집어먹었지 않습니까? 정말 사람 치사하게 만드는데 뭐가 있는 것 같군요.”

한나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쩔쩔매다가 엘리베이터가 19층에 멈춰 서자 얼른 내렸다.

“그럼 들렀다가 올라가겠습니다!”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얼른 자동 유리문을 지나 기획 경영 팀으로 들어갔다.

“내일도 내가 먹을 거지롱.”

닫힌 엘리베이터를 돌아보며 혀를 날름 내밀며 혼잣말을 했다.

“뭐를 혼자 먹어요?”

책상에 앉아 업무 준비를 하고 있던 빨간 안경태의 주근깨가 귀엽게 난 마른체구의 한나와 동갑내기 서민영 대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물어봤다. 서민영 대리와는 업무는 다르지만 동갑내기라 입사하자마자 금세 친해져서 친구같이 지내고 있었다.

“직원 휴게실에 같이 가지니까 볼일 있다고 나가더니 혼자서 맛있는 거 먹고 왔어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부녀 강현영 대리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물어봤다. 강현영 대리는 33살의 유부녀로 통통한 몸매에 둥글둥글하고 선한 인상의 여자였다.

“혼자서 생각할 게 있어서 카페 좀 갔다 왔어요.”

사실 미트파이 품절되기 전에 먹으러 간 건데, 경쟁자를 둘이나 데려갈 순 없잖아. 한나는 진짜 속마음을 날름 숨겼다.

“한 달 전에 회사 앞에 생긴 카페 말하는 거지? 오늘도 대표님 거기 갔어요? 대표님은 식품 회사하면서 왜 다른 빵집에서 빵 사 먹는데? 시장조사하는 건가?”

현영 대리의 말을 민영 대리가 이었다.

“시장조사는요, 대표님 빵 덕후라 그러시는 거죠. 빵 만드는 회사 운영하면서 빵 질릴 만도 한데 빵 좋아하는 거 신기해요. 저렇게 간식을 좋아하는데 근육질 몸매는 어떻게 유지하는 건지 몰라.”

“먹고 빼자는 주의예요. 집에 헬스 기구 잔뜩 사놓고 운동하신대요. 저녁에도 운동하고 오전 5시 반에도 운동하고.”

두 사람의 궁금증을 한나가 풀어줬다. 현영 대리와 민영 대리는 진저리를 치는 표정을 했다.

“오전 5시 반……. 아휴 난 상상도 못하겠다. 독하다, 독해.”

한나는 웃으면서 또 보자고 하고, 사무실 끝에 있는 팀장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낮고 차분한 음성에 한나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목소리다. 얼굴은 또 얼마나 잘 생겼는지……. 한나는 설레는 마음을 숨기고 팀장실 문을 열었다.

“왔어요?”

세련된 정장 차림에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안경 낀 미남자가 팀장실로 들어오는 한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경영기획부 팀장 유정진으로 대표 도훈보다 한 살이 어린 31세였다.

“이 실장님, 맛집 탐방은 잘하고 왔어요?”

한나의 취미생활을 잘 아는 듯 친절한 어조였다.

“오늘도 미트파이?”

“네, 요새 꽂혀서 매일 먹고 있어요. 정말 맛있거든요. 포슬포슬한 감자에 짭짤한 쇠고기, 바삭한 파이지가 환상이에요.”

꿈결에 잠긴 듯 한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소녀같이 말했다.

“그렇게 맛있으면 내 것도 사 와 봐요. 무슨 맛인지 궁금하네요.”

“드시고 싶으세요? 품절되기 전에 꼭 쟁탈해올게요.”

“쟁탈? 하하, 이 실장님 귀여워요. 아, 미안해요. 사적인 감정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이 한 말을 후회라도 하듯 그의 입가에서 자상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적인 감정으로 말해도 되는데……. 한나는 냉정하게 선을 긋는 정진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한 달 전 새로 부임한 정진을 첫눈에 봤을 때부터 짝사랑에 빠졌다. 좋아한다는 티는 절대 내지 않았지만 그만 보면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눈치 챌 법도 한데 그는 철벽을 치는 건지 온기 없는 태도로 사무적으로만 그녀를 대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