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2)

일전에 필리스는 하나의 서신을 받았다.

“미친 건가. 뭔 낯짝으로 나한테 서신을….”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너도 알잖아. 거짓은 오델리 영애가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발신자는 에런이었다. 에런은 오델리에게 거절을 당하였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어서 말하지 않으면 나갈….”

“내가 푸른 바다 창조자야…! 그리고 처음 만난 날 내가 그 아이들의 형이라고 했잖아. 그것도 다… 거짓말이야.”

“…아, 그거 말하려고….”

그제야 뜸을 들인 이유를 안 오델리지만 반응이 이상했다. 놀라지도 않고, 납득을 한 것이라니.

“뭐야…? 너 반응이 왜 이래. 설마 알고 있었어?”

“음… 대충? 알고 있었어.”

한창 푸른 바다에 대해 조사할 때. 쥬아나에게서 숨기는 것이 있다고 느낀 오델리가 직접 물었고. 창조자가 필리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필리스를 사랑하는 일에 그가 푸른 바다의 창조자였던 사실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을 뿐더러 언젠가 진실을 말해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난 그것도 모르고. …언젠가 말해야지 했는데.”

“그래. 언젠가 말해줄 거라 여겼어. 그리고 네가 창조자였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단 거 알고 있으면 좋겠다.”

게다가 필리스가 외동인 사실은 모두가 아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 사이에 신뢰가 존재하는 거 알지. 나 또한 네게 독에 대한 거짓을 말했었으니 서로 미안해하지 말자. 난 지금이라도 말해준 것에 감사해.”

“오델리….”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다면 서운한 감정이 생겼을 지도.’

미안해하는 필리스를 달래며 둘이 함께 온실을 나섰다.

**

“잠깐. 저 사람 지금 우리 아가씨와 손을 잡고 있는 건가?”

“…설마. 말도 안 돼. 그 사교계의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이곳에 오던 도중 기사들은 영애들의 얘기를 들었다. 퍼질 대로 퍼진 후였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

파티가 끝나고. 오델리는 뒷정리를 맡긴 후에 침실로 향했다.

“…힘들다.”

“고생했어. 기사들 한 명, 한 명한테 인사를 할 줄은.”

“내게 맹세를 한 자들이니 한 번씩은 해야 하지 않겠어? 얼굴도 외워야 하고.”

털썩-

필리스는 소파에 다리가 풀리듯이 주저앉은 오델리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왜 내 옆에 앉아. 가야지 어서.”

“…. 나 그만 보내라 좀.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그 말에 어이가 없던 오델리는 필리스가 입은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며 말했다.

“네가 참아? 대체 뭘 참았어 네가.”

움찔-

차가운 오델리의 손이 제 가슴팍 쪽에 닿자 필리스는 몸이 절로 움찔했다.

‘이거 좀… 위험한데.’

“오…델리. 잠까….”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그리 덮칠 때는 언제고 왜 피하려고 하는데.”

“그걸 그리… 담아두고 있었구나?”

솔직히 오델리에게 격한 입맞춤을 한 후에 그녀가 어찌 행동할까 걱정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내심 실망스럽기도 한 자신이니 오델리의 지금 행동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잘 된 것일 지도. 다른 영애들이 너를 넘보지는 않을 것 아니야.”

“…나 또한 그런 생각으로 벌인 일인데.”

“나도 그래. 헌데… 퍼렌도 공작님께선 나를 그리 탐탁지 않아 하실 지도 몰라.”

오델리는 필리스의 가슴팍에 올렸던 제 손을 치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에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였던 나야. 아들인 네게 파혼 당한 여인을 붙여주고 싶겠니. 나 같아도 반대 해. 게다가 내가 퍼렌도 공작님께 조금 무례한 것도 같고.”

**

그날 집으로 돌아간 필리스는 도착하자마자 퍼렌도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 들어가도 됩니까?”

“네가 웬일이냐.”

탁-

“아버지, 오델리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소파에 앉자마자 신나게 떠드는 필리스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퍼렌도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필리스의 말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께서 어찌하셨길래 그 오델리가 걱정을 해요? 귀여워서 진짜….”

“이 아비는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냐 대체.”

“그러니까. 오델리가 아버지께서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아신다고요. 무례했던 적도 있고, 파혼 당한 입장인데 좋아하시겠냐고.”

“오델리 영애가… 그런 걱정을 하였다고?”

“네, 진짜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

오델리가 말한 무례함은 자신이 한 발언이었다.

“공작님, 아직 필리스에게 그 정도의 감정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는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법. 필리스가 물어봐 달라 청하였습니까?”

필리스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답변으로 저런 말을 하였으니 후회가 막심했다.

‘과거의 나를… 때려도 모자라다. 어찌 그런 말을. 내가 평판을 이용해 파혼을 한 것도 아시는 분인데.’

살면서 이렇게까지 후회해본 것이 처음인지라 오델리는 신경이 쓰인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챙챙-

검을 맞대는 소리에 소름이 돋아 눈을 뜬 오델리는 몸을 일으켰다.

“…!”

“너 왜 그래? 겁을 지레 먹고.”

“아….”

‘…검 소리만 나도 소름이 돋는 군. 회귀 전에 쫓겼던 것 때문이 아닌가. 하여간 예민해선.’

침대에 몸을 기댄 채 묻는 타이튠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락-

“그냥. 갑작스럽게 놀라서요. 헌데 왜 여기에 계십니까?”

“음. 그냥?”

“이젠 침실까지 막 들어오는 군요. 전에도 한 번 그러더니. 아버지께서 보시면 경을 치실 겁니다.”

“안 들키면 그만이지.”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온 오델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야야! 자세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단장님이 얼마나 말씀하셨냐?”

아네스에게 달려가 누가 더 잘했냐 묻는 기사들을 보며 오델리는 피식 웃었다.

“아네스가 새삼 단장 같아 보이기는 하네. 어찌 그 어렸던 아네스가 저런… 그보다 쥬아나는 어디에 있지?”

“밖에 있겠지. 갑자기 걔는 왜 찾아?”

“…타이튠이 들어왔는데도 말리지 않았단 말입니까? 쥬아나가?”

“응. 근데 있잖아. 너 쥬아나랑 아네스인가 뭔가 하는 애랑 둘 중에 결정하라고 하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무슨 질문이 그렇죠? 제가 왜 쥬아나랑 아네스 중에 골라야 합니까.”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그때 마침 창문을 보고 있던 아네스와 눈이 마주쳤고, 침실 문을 두드리는 쥬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윌리 양이 왔습니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들어와도 된다.”

끼익-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나요?? 아침은 간단한 토스트로 가지고 왔는데 괜찮으시… 아가씨?”

타이튠의 질문에도 답을 찾지 못했던 오델리는 왜 그런 질문을 받게 되었는지 알았다.

‘쥬아나가 혹… 서운하였나? 그런 것을 잘 말하지 않는 아이니….’

“?”

쥬아나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오델리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왜 저렇게 쳐다보시지…?’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달칵-

‘어제부터 말이 없더라니. 아네스 때문이었군. 소홀했다 이건가.’

한숨을 쉬는 오델리를 본 타이튠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너네 기사단 있지? 푸른 기사단. 저 인간들 다 실력 좋네.”

그에 다시 창문 쪽을 바라보니 대련을 하고 있었다.

‘타이튠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푸른 기사단이 뛰어나긴 한가 보군.’

그럴 만도 한 것이. 프로마쥬가 공작령으로 간 이유가 오델리의 기사단에 걸맞은 기사들을 찾기 위해서였으니. 직접 한 명씩 골라서 뽑은 다음에는 아주 혹독하게 훈련까지 시켰다. 그 중에서도 중도 포기하는 자가 있다면 공작령에 다시는 발을 못 들이게 할 정도. 기사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라베플레르 황궁. 예시엘 19세.

“공녀님, 이제는 정말 완벽한 단계시군요.”

예법 교사는 박수를 치며 예시엘에게 찬사를 보냈다.

“다 선생님 덕분이죠. 제게 가르침이라는 것을 주셨으니 저 또한 ‘같은 선물’을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예? 송구합니다. 공녀님께서 어찌….”

“그럼 받으시는 걸로 알고. 오늘 자정에 내 침실로 오길 바라요. 선물을 준비해놓았으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싱긋 웃어 보이는 예시엘을 보며 예법 교사는 고개를 숙였다.

**

달칵-

‘내가 초반에 저 공녀님께 심했어. 그렇게 끝난 것만 해도 어디였을까. 그 악덕한 오델리 공녀한테 걸렸다면… 소름이 돋을 정도야. 예시엘 공녀님께선 크게 되실 거다. 어쩌면… 황후의 재목이 맞았을 지도.’

첫인상으로 예시엘을 판단한 자신에 대해 반성하며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께 칭찬을 들을 거야. …아, 행복해라. 이제는 서작도 받을 수 있을는지. 후작 부인이 될 수도 있어!’

**

황실 교사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보며 예시엘은 입을 열었다.

“단테, 그보다 매독스 공작님이 오셨다지.”

“예. 어제 밀서를 받았습니다.”

“그래. 잘 지내고 계신다니? 아, 그리고 시에르 가에서 나가게 된 하녀들하고 하인들. 다 찾아내서 죽여야겠다.”

“알겠습니다.”

또각-

소파에서 일어난 예시엘은 화장대로 향했다.

“나를… 이리 만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였으면 좋겠네.”

“그 시녀를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너도 알지 않니. 그 애가 내게 예의 없게 굴었다는 것을.”

“잘 알지요.”

드르륵-

“자, 데지레에게도 말을 전하도록 해.”

작은 병을 건네며 단테에게 말했다.

“난 전하께 가보아야겠다.”

복도를 걸으며 시녀들과 시종들 그 모두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어쩜. 노력이 결실을 맺는 구나.’

“예시엘 공녀님, 오셨습니까.”

“경, 오랜만이네요. 매번 보초를 서느라 고생이 많아요.”

“오늘은 전하께서 그리 많은 업무가 있지는 않으시니 들어가셔도 될 겁니다.”

“고마워요.”

똑똑-

“예시엘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달칵-

“라베플레르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예시엘 영애, 황실 교사가 그리 칭찬을 해대던데. 잘 해내었나 보군.”

“황후 폐하께서 그리 좋은 분을 소개해주셨으니…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지요. 제가 뭐라도 도울 것이 있을는지.”

“영애가 말인가…?”

“물론 저희 언니나 알덴처럼은 못 할 겁니다. 허나 저 또한 의견은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후 수업을 받기 전 예행연습이라 치고 몇 번을 들여다보았었다.

“그런가? 허면 한 번 봐보지. 이것은 이번 황실 정벌군이 향한 곳에서….”

“정벌군이 왜 이곳으로… 향하는 것이지요?”

정벌군이 향한 곳은 소니아실리. 푸른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푸른 바다에 의뢰한 귀족들의 명부를 찾았다.”

“…네?”

그토록 찾던 명부가 황궁을 향하고 있다니. 예시엘은 힘겹게 표정 관리를 하였다.

“왜 그리 놀라지?”

“아, 전하께서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시다니. 푸른 바다는 황제 폐하께서도 골칫덩어리라 했던 이들이 아닌가요. 폐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그래. 그 밖에 암살 길드도 다 찾을 생각이다.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귀족들이나… 평판을 내리기 위해 큰돈을 주고 소문을 낸 이들이나. 비슷하지 않은가. 해서 영애는 어찌 생각하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에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평판을 내리려 푸른 바다에게 의뢰한 귀족들의 명부가 이리 오고 있는데. 귀족들에게는 어떠한 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나.”

“그것은 제가 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심사숙고하시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렇군. 잘 알았다.”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면 에런과의 친분에 문제가 생길 것이 염려가 된 예시엘은 자리에 앉는 에런을 향해 말했다.

“전하, 뱃놀이를 해보셨는지요.”

“뱃놀이? 황궁에 살며 그것을 안 해보았겠나. 허나… 시간이 꽤 지났군. 아주 예전에 했었으니.”

멜리사가 있을 당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했었던 것이었다.

“전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여쭤보았답니다. 혹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가끔 티타임을 가지던 둘이다. 예시엘이 매번 찾아와 함께 하자 했으니.

“뱃놀이라…. 알겠다.”

“정말이세요? 전 정말 기쁩니다.”

방긋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에런은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그리 밀어내는데도 뭐가 저리 좋은지.’

“추후에 날을 잡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달칵- 탁-

예시엘이 나가고 에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하?”

“알덴, 잠시 아이리스 정원에 다녀와야겠다.”

“…전하.”

“그냥 아이리스 정원일 뿐인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냐.”

그리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뻔히 알기에. 알덴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뚜벅-

‘마지막으로 오델리와 왔던 장소. 내게는 이곳이 참으로 소중할 뿐인데.’

또륵-

“너… 너무나. 이 마음이 아프다. 찢어져버릴 것 같단 말이다.”

“전하….”

오델리에게 마음을 전한 그지만 그 마음은 오델리에게 닿지 않았다.

“전하께선 필리스 공자에게까지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일은 하신 건데요.”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헌데 오델리가 슬퍼할 일을 생각하니 그건 또 싫어서.”

갑자기 사라진 푸른 바다에 대해 집요하게 조사한 결과. 필리스가 창조자였단 것을 알았다. 다른 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니 벌은 면할 수 있지만 그것을 훗날 오델리가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것을 염려한 에런이었다.

“거울을 보면 나의 이 머리칼… 오델리를 떠오르게 한다. 마음을 도려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델리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칼을 가진 에런은 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더 다가가서 보고 싶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벗이라는 관계마저 없애버린다면 명분이 없지 않냔 말이다.’

“하… 오늘따라 더 오델리가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