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험하다니까, 네 곁은 항상

강혁과 지연이 박재희를 따라 2604호로 들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강혁의 눈이 꼼꼼히 주위를 스캔했다. 밖에 나와 있는 신발을 보니 박재희 와이프와 아들은 아직 미국에 남아있는 듯,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쌓여있는 박스가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보였다.

박재희가 지연이 건넨 이사 떡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지연과 강혁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며 박재희가 입을 열었다.

“저, 기러기 아빠예요. 미국에서 근무할 때 함께 옮겨갔는데, 귀국하면서 와이프와 아이는 그곳에 남았어요. 금방 오게 될 줄 알았는데…….”

“아, 그러시구나. 아이가 몇 살이에요?”

친화력 좋은 지연이 박재희에게 물었다.

“여섯 살이요.”

“보고 싶으시겠어요.”

“보고 싶지요. 가끔 만날 때마다 어찌나 쑥쑥 커있는지…….”

“애들이 빨리 크긴 해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강혁은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

이래서 제임스 부국장이 위장 와이프가 필요하다 했구나. 아무 알맹이도 없는 말을 저렇게 주고받다니……. 놀라운 재능이었다.

지연과 강혁은 박재희가 건네는 머그잔을 받아 들었다.

지연이 박재희와 또 그 알맹이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이, 강혁은 홀랑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뻘쭘하게 앉아있었다. 강혁이 지연에게 이제 일어나자는 눈짓을 줬다.

-우당탕탕탕.

그때 현관 입구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연과 강혁이 현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재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뱉었다.

“저와 동거하는 여자분이…….”

“……?”

동거하는 여자분? 와이프도 아이도 있다며?

놀란 지연이 눈을 크게 떴다. 세 사람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쏟아진 흙, 쓰러진 녹색 식물, 깨진 화분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냐아옹, 냐아옹.

노란 치즈냥이 한 마리가 높은 신발장 위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아……, 이 동거녀!

“파이.”

재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는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듯 다가오지 않고 스윽 쳐다보더니 냉큼 다른 선반으로 옮겨갔다.

“제가 비 오는 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것 데려왔어요. 처음엔 상처투성이에 뼈만 앙상해서 살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강혁과 지연은 박재희의 동거녀 파이 얘기를 듣고 서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한다는 걸 알아들은 것처럼 파이가 훌쩍 재희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직도 코에 아물고 있는 상처가 보였다.

“등 쓰다듬기까지 일주일 걸렸어요. 그래도 자기 구해준 줄은 아는지, 하악질 한 번 안 해요. 사람에게 상처받고 고양이에게서 위로받는다는 말, 전 백 퍼센트 공감해요.”

박재희는 파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파이가 이제야 편안한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소리를 내뱉었다.

지연이 신발을 신으며 박재희에게 물었다.

“냥줍 해서 집사 되기 쉽지 않은데……. 좋은 일 하셨네요. 이름이 파이? 예쁘네요. 원주율 3.14159 그 파이?”

“아뇨.”

“그럼 애플파이, 호박파이? 아! 알았다. 와이파이구나.”

“아뇨.”

“그럼……?”

강혁이 먼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박재희가 지연에게 답한 말에 강혁의 뒷덜미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스파이예요.”

스, 스……파이? 고양이 이름이? 허걱! 저, 저 미친……. 내가 그렇게 숨기려고 발버둥 치는 CIA 블랙 요원 정체를 고양이 이름으로 쓰고, 매일 불러대고 있다고?

강혁이 서둘러 2604호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알맹이 없는 말도 아주 잘하는 지연이 마무리를 쳤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떡 잘 먹겠습니다.”

지연이 강혁을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오면서 말했다.

“스파이래요. 치즈냥이 이름이. 호호호호. 정말 재밌지 않아요. 스파이라니.”

지연이 실실거리며 계속 웃었다.

하나도 안 웃기네요. 천지연 씨!

집에 돌아온 지연이 남은 시루떡을 봉지에 나눠 담으며 말했다.

“좋으신 분 같아요. 윗집 스파이 아빠. 층간 소음으로 칼부림, 총질 안 해도 될 것 같고.”

“글쎄…….”

강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접시 위에 놓인 시루떡을 계속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물컹거려 식감 이상하다고, 떡 안 드신다며? 먹어보니 진짜 맛있나 보네?

지연은 빈 접시에 계속 시루떡을 찢어 올려놓으며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었다.

***

지연의 옥탑 방 근처 카페.

“어구……. 이거 이렇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구 비서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오유리 앞에 털썩 앉았다.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쓰고 허우적거리며 약속까지 늦었다.

“괜찮아요.”

짧은 커트 머리에 운동복, 화이트 스니커즈를 신은 유리가 쿨하게 답했다.

“구태연입니다.”

구태……의연?

구 비서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유리에게 건넸다.

[구태연, NTC 닷컴 코리아 사장.]

이름은 가벼운데, 직함은……. 조금 무겁네. 지연의 남편이 대표로 있는 그 NTC 닷컴?

“제가 서둘러 나오긴 했는데, 서울 교통이 차암……. 다들 어디를 그렇게 가는지? 유리 씨 기다리시는 것 제가 빤히 아는데, 뭐 꼼짝 못 하고 갇혀있었습니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실례를 범하게 되어-.”

역시 내뱉는 대사가 차암……. 구태의연하다.

유리는 짧은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뒤로 넘기며 구 비서의 장황한 말허리를 뚝 잘랐다.

“누가 들으면 선이라도 보는 줄 알겠어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또 볼 사이도 아니고.”

구 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뱉었다.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전생에 천만번 옷깃을 스쳐야 이생에서 한 번 만난다는데, 또 볼 사이가 아니라니요? 이 인연이 제가 강 대표 만나고, 제수씨가 유리 씨 만나고, 또 강 대표가 제수씨 만나…….”

유리가 말허리를 또 뚝 자르며 들어왔다.

“아직 안 끝났어요?”

“네에?”

“저희 목적 달성하고 일어나죠.”

쿨하게 말을 뱉은 유리가 한쪽에 세워두었던 캐리어를 구 비서 쪽으로 쭈욱 밀었다.

구 비서가 갑자기 굴러오는 캐리어를 손으로 엉겁결에 탁 막았다.

머리카락만큼 말이 짧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한 마리가 들판을 마구 휘젓고 뛰어다니는……. 이 신선한 느낌은 뭐지?

“에이.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하지요. 제수씨 베프신데, 커피 한 잔 대접 안 하고 보냈다가는 강 대표 공중 발차기에 얻어터집니다. 보셨지요? SNS 도배한 강 대표 발차기?”

“네. 봤어요. 아주 씨원하던데요.”

유리는 강 대표가 계상태를 공중 발차기로 날려버리고 강냉이 터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그러죠 뭐. 어려운 일 아니니까요.”

유리가 쿨하게 커피 한 잔을 허락했다. 구 비서의 동그란 안경 속의 눈이 반짝거렸다.

“뭐 드시겠어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라테, 마끼아또…….”

“다방커피요.”

“넷?”

구 비서는 유리의 입에서 나온 ‘다방커피’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셋! 이 야생마가 커피계 마성의 레시피, 다방커피 맛을 안다고? 이 여자, 진짜 물건이네…….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간 구 비서가 다방커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돌아왔다.

“뭘 좀 물어봐도 돼요?”

유리가 궁금한 듯 눈을 반짝였다.

“네. 뭐든지.”

“지연이 혹시 강 대표에게 무슨 약점 잡혔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결혼을 그렇게 베프도 모르게 할 수가 있어요?”

구 비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쭈욱 한 모금 들이키더니 말을 뱉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강 대표가 제수씨에게 무슨 약점 잡혔나……. 세상이 완전 헤까닥 뒤집어져도 절대 결혼할 놈이 아니거든요. 제수씨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지연이도 자꾸 말을 돌리고 얘기를 안 해줘요.”

유리는 지연이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참, 지연이 차는 이 앞에 세워두었어요. 차 키 드릴게요.”

유리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 속 짐들이 삐죽거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감췄다. 투명한 수영가방이 테이블 위로 나왔다 다시 들어갔다.

“앗, 찾았다.”

유리가 가방 안쪽에서 차 키를 건져 올려 구 비서 쪽으로 밀었다.

“수영하시나 봐요.”

“네.”

“저도 수영 좀 하는데……. 주로 뭐 해요?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구 비서가 궁금한 듯 유리에게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오늘은 독수요.”

이 여자는 내가 내민 선택지를 고른 적이 없다. 구 비서는 유리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짤랑거리는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독수요? 그게 뭔데요?”

유리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마구 마구 거칠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하는 독한 수영이요.”

멋있다, 이 여자!

“그래서 오늘 유리 씨는 50미터 열 번 거칠게 왔다 갔다 했어요?”

큭, 웃음을 뱉은 유리가 태연하게 답했다.

“100번이요. 1분 페이스 접영으로.”

허걱! 구 비서의 벌어진 입이 한참 동안 다물어지지 못했다. 꼴깍, 구 비서가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 100분 동안 쉬지 않고 5,000미터 접영을 하고 왔다는 얘기예요?”

“네.”

“혹시……. 선수?”

“취미로 해요.”

취미로 5천 미터 접영을 한다고?

“요즘 사람들은 혼수, 즐수, 함수, 애수도 해요.”

유리가 내뱉은 이게 외국어냐, 외계어냐?

“혼수는 혼자 하는 수영, 즐수는 즐거운 수영일 테고, 함수와 애수는 뭐예요?”

“함수는 함께 모여서 하는 떼 수영, 일종의 민폐 수영이고.”

유리는 다방커피를 한 번 홀짝 마시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애수는요?”

“사랑하는 이와 달콤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 둘이 하는 수영이요.”

“으흐흐흐. 전, 그게 제일 마음에 드네요.”

남자는 실없는 웃음 날리며 애수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정말 NTC 닷컴 코리아 사장 맞나?

“수영 말고 다른 운동 또 하는 거 있어요?”

구 비서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왜 이리 줄어들지 않는 거야?

유리는 하품 끝에 말을 뱉었다.

“철인 3종이요. 트라이애슬론. 다음 주에 청양 대회 나가요.”

“철, 철인이요……?”

놀란 구 비서가 더 이상 확대되기 힘들 만큼 안경 뒤의 눈을 크게 떴다.

다방커피 마시고 독수 즐기고 철인 3종 뛰는 이……무서운 여자. 그런데 난 왜……. 왜 이리 끌리지?

둥둥둥둥, 구 비서의 심장에서 큰 북소리가 났다. 그의 눈동자가 하트 모양으로 반짝거렸다.

짧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는 유리의 얼굴이 쨍하고 빛났다.

***

청담동 NTC 닷컴 L 빌딩 사장실.

구 비서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던 강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오, 강 대표!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웬일로 회사에 다 나왔어? 우리 직원들 또 다 두들겨 패고 들어온 건 아니지?”

“나 누군지 말 안 해도 다 아는 눈치던데?”

강혁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너 유명 인사 됐잖아. 공중 발차기! 하룻밤에 조회 수, 천만 찍었으니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서 직원들 표정이……?”

“표정이 뭐?”

궁금한 듯 구 비서가 둥근 안경 속의 눈을 반짝거렸다.

“존경보다 공포……?”

“야! 그러니까 좀 대강해라. 네가 파티에서 강냉이 터는 바람에 내가 기자들 입막음하려고 뿌린 콩고물이 얼만데……. 다 네 월급에서 깔 테니 그리 알아.”

“월급도 주나 보네?”

“걱정 마! 네가 찾아 쓸 일은 없을 거다. 요즘 어찌나 일을 많이 저지르는지 쌓일 틈이 없다, 틈이. 쌓인 월급 다 쓰면 알바해서 채워 넣어.”

“공중 발차기 같은 알바 어디 있나 알아봐야겠다. 흐흐흐.”

편안한 미소가 강혁의 입가에 떠올랐다.

“참, 나 오늘 유리 씨 만나서 제수씨 짐이랑 차 가져왔어.”

“네가 직접?”

“고오롬.”

구 비서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졌다.

“왜, 비서들 시키지 그랬어? 사장한테 그런 일 시킨다고 너 싫어했잖아.”

“싫어했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하하하하.”

갑자기 구 비서가 사방에 호탕한 웃음을 날렸다. 무슨 일인가 싶은 강혁의 눈빛이 질문을 던졌다.

“넌 운명을 믿냐? 데스티니? 나 오늘, 정말 운명의 짝을 만났어.”

“그 대사, 네가 열여덟에 라일리 만났을 때 쳤던 거다.”

“야, 넌 그런 쓸데없는 걸 다 기억하고 그러냐? 하여간 머리 좋은 놈들 뇌 해부해보면 별의별 거 다 들어있을 거야. 아마 10년 전에 쓰다 버린 그래픽카드 풀네임도 기억하고 있을 걸? 좀 잊어버려라, 잊어버려. 난 이젠 라일리 얼굴도 가물거린다.”

“그래, 그 운명의 짝이 누군데?”

구 비서가 눈동자에 하트를 달고 말했다.

“당연히 반짝반짝 이름도 빛나는 우리 유리 씨지. 야생마 갈기 휘날리며 바람 가르고 질주해오는데 내 심장에서 북 소리가 둥둥둥둥 울리고, 독수한다며 다방커피 홀짝거리는데 심장 터질라하고 거기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구 비서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거기다 뭐?”

“철인이래.”

“뭐? 유리 씨가 철인이라고?”

아이언맨? 하늘 날아다니는 그 하이테크 철갑 슈트……. 철인?

다행히 강혁이 유리 씨 몸에 철갑 슈트 다 붙이기 전에 구 비서가 말을 뱉었다.

“철인 3종 경기 뛴대. 청양에서. 아, 가보고 싶다. 나, 청양으로 출장 좀 보내주라. 청양! 청양! 청양! 이참에 아예 청양에 게임 회사 하나 차려주면 안 될까? 유리 씨 내려갈 때마다 나도 따라 내려가게.”

눈은 하트, 이성은 마비. 큰일 났다! 구 비서 한 번 꽂히면 끝장 보는데……. 라일리와 만나자마자 결혼부터 한 놈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