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하자, 우리

그에게는 시트러스 향이 풍겼다. 아니다. 그건 머스크 향에 살짝 우디 향을 곁들인? 모르겠다. 무슨 향일까……. 독특한 체취가 섞인 시크하면서 세련된 향이었다.

난 그 향기라도 기억해두려는 듯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속삭였다.

“원, 투……, 쓰리!”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핸들을 움켜잡은 내가 미친 듯 액셀을 밟았다.

-끼이이이익.

차가 튕겨나갔고, 눈처럼 새하얀 내 웨딩드레스가 사각거렸다. 차가 날았다.

조수석의 그 남자가 뒤로 누우며 양손에 총을 꺼내 들었다.

-탕, 탕, 탕탕탕.

총알이 발사되었다. 무성영화의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장면이 플레이되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짠 바다 내음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사거리였다. 샛노란 스쿨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난 스쿨버스 앞을 가까스로 스쳐 지나가며 빠르게 핸들을 꺾었다.

-끼이이이익.

차가 360도 회전하며 드리프트를 했다. 그러면……, 뒤에 따라붙은 꼬리를 떼버릴 줄 알았다. 진짜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뒤에 붙은 차가 스쿨버스 유리창을 박살내며 따라붙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총알이 날아들었다. 탕, 탕, 탕 탕 탕, 남자가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윽! 총알 하나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그의 심장을 뚫었다.

그가 내 웨딩드레스 위로 푹 쓰러졌다. 심장에서 뿜어내는 그의 검붉은 피가 천천히 웨딩드레스를 적셨다.

“안 돼에에에에!”

내가 울부짖으며 쓰러진 그를 품에 안았다. 총알이 누구의 심장을 뚫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이 내 온몸을 휩쓸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의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사랑했나 보다. 내가 그를.

“아아아아아!”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내 목소리가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지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꿈, 꿈이었구나…….

지연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유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자고 있었어?]

“응. 넌 퇴근?”

지연이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지금 병원 나와서 지하철 타러 가.]

“으응. 근데 유리야, 나……, 또 그 꿈 꿨어.”

[또오? 진짜 별일이다. 벌써 몇 번째야?]

“일곱 번째.”

지연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에도 그 남자 얼굴은 못 보고?]

“응. 향기만 맡고.”

답답한 듯 지연은 휴우, 깊은 숨을 핸드폰에 쏟아냈다.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봤어야지. 어떻게 매번 킁킁대고 냄새만 맡니? 개도 아니고. 그 남자……. 혹시 계상태는 아니지?]

유리가 지연의 남친 계상태를 들먹였다.

“상태면 내가 모를 리 없지. 그리고 그거 상태 쓰는 향수는 분명 아니야.”

[너 영화 너무 많이 봐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무슨 그런 요상한 꿈을 그렇게 반복해서 꿀 리가 없잖아. 웨딩드레스를 입고 360도 운전에, 뭐? 얼굴도 안 보여주는 남자가 총을 맞고 드레스가 피로 물들어?]

흥분한 유리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우리 병원 정신과 백 선생님 진짜 잘하시는데, 예약 잡을까?]

“아니!”

[그럼 쌍악동 애기동자는? 거기도 한 달 대기 타야 겨우 얼굴 볼 수 있다는데, 우리 병원 정 쌤이 찔러 줄 수 있대.]

“싫어!”

[지연아, 너 정말 이렇게 손 놓고 있다 나중에 작두 탈래? 그러지 말고 내일 같이 가자!]

협박과 애원을 넘나드는 유리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나, 내일 런치박스 배달해야 해.”

400개 런치박스. 초보 푸드스타일리스트 천지연에겐 감지덕지한 주문이었다. 변변한 작업실도 없이 좁은 옥탑방에서 혼자 치루는 전쟁이 되겠지만 말이다.

[아, 맞다. 근데 어떡하지? 나 내일부터 데이 출근인데……. 새벽에라도 도와주러 갈까?]

“아니야. 괜찮아.”

[그래. 그럼 천지연 파이팅이다. 내일 다시 연락할게. 나, 지하철 왔다!]

지하철 안내 방송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그래. 바이.”

전화를 끊은 지연은 좁은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급히 얼굴을 적셨다. 미친 꿈을 얼른 떨쳐내고 현실을 살아내려는 움직임이었다.

***

서초동 도매 쇼핑센터.

까만 비닐봉지를 가득 손에 든 지연의 발걸음이 향수 가게 앞에 멈췄다.

혹시 여기 있으려나?

지연이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섰다.

“특별히 찾는 향이라도 있으세요?”

조향사가 작은 병이 잔뜩 놓인 테이블에서 일어서며 말을 건넸다.

지연은 꿈속의 향기를 기억 속에서 추출해내려는 듯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시트러스 향인 것 같은데 딱 그건 아니고, 머스크 향과 우디 향에 독특한 살냄새가 섞인…….”

“독특한 살냄새요?”

잔뜩 미간이 좁아진 조향사가 말꼬리를 올렸다.

결국 지연은 하는 둥 마는 중 시향을 하고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등 뒤에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없다! 어디에도……. 세상엔 없는 향기는 아닐까? 머릿속에 가득 물음표만 채운 채, 지연은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다음 날 오후. 서울의 허름한 6층 빌라 앞.

차에 올라탄 지연의 입에서 휴우,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이마엔 식은땀이 나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미쳤지! 이걸 혼자 다 하겠다고 달려들었으니……. 알바라도 쓸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혼자 새벽시장 다녀와서 400개 런치박스 만들고, 6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걸 모두 차에 실었다.

지연의 차가 한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지이잉, 그때 조수석에 던져둔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지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유리야. 나 지금 배달 가는데?”

[지연아. 요즘 계상태……. 걔 어때?]

“뜬금없이 상태는 왜? 요즘 걔 진짜 바빠. 저번 주말에는 회사에서 단체등산 가더니, 오늘은 체육대회 한다고 포천 갔어.”

[포천……?]

아무래도 유리의 말끝이 이상했다.

“왜?”

[걔 포천 아니고 여기 카페에 있는데……?]

“뭐? 카페? 상태 맞아?”

[응. 근데 웬 여자애랑 같이 있어.]

“여자애?”

불안한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둘이 여기서 체육대회 하는데……? 조금 있으면 서로 올라타겠다.]

지연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지연아! 너 듣고 있어?]

“……응.”

[정신 차리고 들어! 네 남친 계상태! 그렇게 너 좋다고 쫓아다녔던 그놈, 지금 바람났다고. 안되겠다! 사진 보낼게. 그냥 눈으로 봐라. 충격이겠지만.]

지연은 골목에 주차하고, 유리가 보내온 사진을 클릭했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사진을 보는 순간 다시는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의심이 확신이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순간이었다.

상태였다. 그 옆에 꼭 붙어 웃고 있는 여자애는……. 정미진? 빨간 아우디 끌고 다니며 조수석 남자 갈아치우기가 전공이었던 지연의 대학 후배였다.

지연은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버튼을 눌렀다.

“유리야! 여기 어디야?”

[지연아! 배달 먼저 갔다 와. 갔다 온 다음에-.]

말허리를 중간에서 뚝 자르며 지연이 한 옥타브 목소리를 높였다.

“나, 아직 여유 있어. 여기 어디냐고?”

유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지연은 액셀을 밟았다.

어딘가 과속 단속 카메라가 여러 번 삑삑거렸을 것이다.

***

oo동 oo카페 건물 지하 주차장.

시동을 끈 차에 적막이 흘렀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지연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만나면 뭐라 하지? 잤니? 이렇게 물을까, 아니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지연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심장도 덩달아 멈춘 듯 했다.

빨간 아우디였다. 불안이 구름처럼 일었다. 지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차 가까이 다가갔다.

“하아……. 미, 미진아. 오빠……. 안 되겠어. 우리 그냥 모텔 가자!”

어두운 창 너머로 들려오는 신음 섞인 목소리는 분명 계상태였다.

잔인하다. 이 시나리오는……. 너무 잔인하다. 이렇게 두 사람 신음 소리까지 들으며 눈으로 확인 사살까지 해야 하다니.

조수석 문을 여는 지연의 손이 떨렸다. 벌컥 문이 열렸다. 흥분과 욕정이 뿜어낸 텁텁한 공기가 훅 밀려왔다.

계상태가 파묻고 있던 얼굴을 돌려 지연을 봤다.

“하아…….”

입에는 다 뱉지 못한 신음 소리를 삼키며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 채. 대낮에 귀신 본 표정으로 그가 겨우 입을 뗐다.

“지, 지연아……?”

지연은 아랫입술을 질근 피나도록 씹으며 뒤돌아섰다.

나쁜 새끼!

그가 엉거주춤 옷을 추스르며 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 부스스한 머리, 흐트러진 와이셔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셔츠에 묻은 빨간 립스틱 자국.

“너……. 지금 여기서 뭐 해?”

지연이 겨우 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을 뱉었다.

“나, 나 여기서…….”

말꼬리를 흐리던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희번덕거렸다. 자살 폭탄 테러라도 결심한 듯 비장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나 여기서 미진이랑 그거 해. 너랑 5년 동안 못한 거.”

“뭐, 뭐를 해?”

황당한 지연이 더듬거렸다.

“진도 쭉쭉 뽑는다고. 씨x, 네가 무슨 천연기념물이냐, 멸종위기 1급 보호종이냐? 손도 못 대게 하고. 솔직히 5년 동안 너랑 한 게 뭐 있냐? 너 취했을 때 네 입술 몇 번 빤 거 말고 우리가 뭐 했냐고? 남들 진도 쭉쭉 뽑으면서 5일 만에 할 짓을.”

기가 막힌 지연이 할 말을 잃은 사이 계상태가 말을 이었다.

“나도 안 죽으려고 이러는 거야. 거기 곰팡이 슬어 영원히 못 쓰게 될까 봐.”

“거기 곰팡이 슬까봐 바람을 피운 거다?”

이런 미친 x새끼를 봤나?

지연의 입이 욕을 고르는 사이, 정미진이 치마를 털며 다가왔다.

“그니까 선배 왜 그랬어요? 손끝만 대도 톡 터지는 이런 능력남을, 왜 그동안 고자 취급을 하고. 그것도 무려 5년이나. 혹시 선배, 무성애자 뭐 그런 거 아니에요?”

작은 체구에 새초롬한 눈매, 밝은 금발이 어깨에 넘실댔다. 화사한 원피스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렸다.

“가자. 오빠!”

지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정미진이 상태의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잘하라 했다! 이걸로 우리 관계 깨끗이 쫑 났으니까 뭐 나중에 찾아와 울고불고 매달리면 곤란하다. 알았지?”

계상태가 정리 멘트를 날리고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탄 빨간 아우디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털썩.

지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양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이런, 바보 같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책없이 눈물이 삐질 묻어났다.

그때 주차장 정적을 찢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익.

급한 코너링으로 인한 타이어 마찰음이 지하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탁, 주차하는 소리 뒤에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차 다가오더니 쭈그리고 앉아있던 지연이 앞에 멈췄다. 그 움직임이 바람을 가르고 공기가 일렁였다.

이, 이건……?

흡, 그 향기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꿈속의 향기! 그 향기 맞다!

지연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원, 투, 쓰리를 내 귀에 속삭였던 남자, 웨딩드레스 위에 검붉은 피를 뿜으며 죽어갔던 그 남자, 심장이 찢기는 고통을 내게 안겨주었던, 그래서 짐작할 수 있었던, 내가 많이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게 될 남자!

지연의 시선에 점차 그가 차올랐다.

“Any help?”

바람을 일으키고 공기를 가르며 그 남자가 물었다.

뭐? 애니 헬프?

꿈속의 향기에 뱉어진 영어까지, 지연의 정신이 혼돈의 강을 헤맸다. 말을 뱉은 공기는 더 강한 향기를 몰고 왔다.

지연은 그 남자의 숨결이라도 훔치려는 듯, 호흡을 깊게 삼키며 서서히 눈을 떴다.

시야를 가로막는 껑충한 큰 키, 긴 팔다리를 훑고 그녀의 시선이 한참을 위로 올라갔다. 탄탄한 가슴, 떡 벌어진 어깨, 그 위에 매끈한 입술과 쭉 뻗은 콧날.

그가 한쪽 무릎을 접고 지연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내뿜는 짙은 향기와 치명적인 눈빛에 숨이 탁 멎었다. 잘 생겼다!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그 말을 지연은 가까스로 주워 담았다.

“괜찮아요?”

나지막한 중저음의 듣기 좋은 음색, 이번엔 다행히 한국말이다.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병원 갈래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

그가 몸을 일으키고 발걸음을 뗐다. 또 공기가 일렁였다. 꿈속의 그 향기가 확 퍼졌다.

이대로 헤어질 순 없어. 뭐라도 물어봐야 해!

“저, 저기요.”

지연은 일어나 그 남자를 불러 세웠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향수, 향수 뭐 써요?”

지연의 다급한 물음에 큭, 남자가 실소를 허공에 터뜨렸다.

“설마 지금 제 향기에 그쪽이 어지럽다는 얘기는 아니죠?”

“……?”

“처음 본 남자에게 첫 질문이 향수라……. 병원 가보는 게 좋겠네요.”

까칠하게 말을 뱉은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쾅, 육중한 회색 철문 안으로 남자가 사라졌다.

왜 그렇게 그 향기를 품고 내 꿈속에 자주 나타나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때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미쳤어, 미쳤어!